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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리뷰

재조명해 보는 링컨의 삶과 신앙 (1)




재조명해 보는 링컨의 삶과 신앙 (1)
- 링컨은 참 신자였나? 



머릿글


미국인들에게 2월은 흔히 '대통령의 달'이다. 특히 애국적인 미국인들에겐 그렇다.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그들이 가장 존중하는 1대 조지 워싱턴과 16대 에이브러햄 링컨의 생일이 나란히 2월에 있기 때문이다. 2월 12일이 링컨의 생일이다. 지난 해는 링컨의 탄생 200돌이기도 했다.

2월 11일도 링컨의 삶에서 의미 있는 날이었다. 1861년 그 날 대통령직을 수행하려고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의 친지들을 두고 워싱턴DC로 떠났기 때문에.
그 얼마 후..뉴욬주 오번시, 카유가 카운티의 포트 바이런에 살던 농부 에이머스(아모스) 스캍 킹 씨가 링컨의 고별 연설에 감동을 받고 성경책 한 권을 증정했다.
가죽 장정에다 안에 삽화도 있는 이 케임브리지 성경책은 오는 2월 4일, 149년만에 처음 포트 바이런 고등학교에서 전시된다고 한다. 지난 세월 버몬트 주 맨체스터에 있는 링컨 패밀리 홈 '힐딘'의 영구 콜렠션으로 소장돼 있다가 잠시 '나들이' 온 것이다.
맨체스터의 저택은 링컨과 메리 타드 사이의 아들인 라벝 타드 링컨이 1903년 여름 별장으로 건립해 그후 링컨 가문이 3대에 걸쳐 살던 집. 링컨의 직계 가족은 몇해 전 대가 끊겼다고 한다. 

버랔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해 취임식 때 쓴 성경책은 1821년 링컨이 자신의 취임식 때 썼던 또 다른 성경책으로, 좀 더 작은 휴대형이다. 이 역시 링컨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당시 대법원장이 누군가를 시켜 갖고 오게 한 것이다.


흥미로운 아이러니 하나는..링컨은 성경을 거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아마도 독자는 "엉? 헑~! 아니, 무슨 그런 망언을..? 링컨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할 것이다. 필자도 그런 신념을 지닌 독자를 일순에 실망시키고 싶진 않다. 나 자신도 과거 링컨이 성경적 신자였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진실은 진실되게 해야 하는 법. 내가 그렇게 믿고 싶다고 해서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잖나.

한 가지 필자로서 미리 밝혀 두는 것은, 링컨을 폄하하거나 비하할 목적으로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링컨을 명사로서 특히나 기독교계 명사로서 떠받들어 오다 보니 그를 무조건 참 신자로 보는 관점이 분명 잘못됐기에, 이를 시정하고, 단지 링컨을 역사적인 한 인간으로서 보자는 것이다. 

링컨이 참 신자였냐 아니냐는 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문제다. 까닭은 워낙 링컨의 종교생활 기복이 심했는 데다 링컨의 기독교관이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복음주의 기독교 역사학자 마크 놀 박사의 '링컨의 헷갈리는 신앙'이라는 글 제목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놀은 아무런 "딱 부러진" 답변을 해 주질 않는다. 그래서 독자의 헷갈림만 더 불어나 버린다. "독자가 알아서 판단해라"로 끝낸 글이기에.

"그럼 그가 통나무 집에서 어머니의 무릎에서 듣던 성경 이야기는 뭐냐??"고 물을 수 있겠다. 링컨은 물론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는 성경학도였다. 그런데 단지 인류의 문학적 소산이라고 믿고 평생 자주 읽은 것이다. 링컨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국민들의 신앙을 존중한다고 말했지만 자신은 그렇게 믿지를 않았다.

링컨의 친구들 가운데 특히 자슈아 스피드는 링컨이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에 관해 많은 말을 했지만, 결코 신앙고백을 한 적은 없다고 후대에 전해 준다. 20댓적의 한 친구도 링컨은 늘 예수님이 기독교계가 이해하는 대로의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했고, 신구약 성경을 공격하거나 조롱했다고 밝혔다.


링컨의 삶은 대체로..


    1. 켄터키, 인디애나에서의 어릴 적 삶
    2. 일리노이에서 가출한 뒤의 청소년/청년기 삶
    3. 변호사/주의원으로서의 삶
    4. 대통령으로서 워싱턴DC 백악관에서의 삶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신자들 대부분과 미국 크리스천들 다수의 생각은..링컨이 대체로 (위의) 1-4 내내,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한 평생 기독교인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역사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그 자신의 어록으로보나 주변 사람들의 증언으로보나 그럴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1-3의 삶은 오히려 대부분 회의론자 내지 이신론자(deist)적 삶을 살았다고 봐야 옳다. 다만 4의 경우, 그가 정기적으로 장로교회 출석을 했고(출석만 했음), 최소한 표면 상으로는 모종의 몇몇 '변화'가 있었기에 충분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링컨의 신앙생활 속에서 몇 가지 분명한 것을 밝혀 둔다.


    첫째로, 링컨은 일반 개념의(conventional) 크리스천과는 사뭇 다른 종류의 크리스천이었다. 성경적인 크리스천이었다고는 더구나 말하기 어렵다. 보다 정확한 의미는 글이 진행되면서 밝혀진다.

    둘째로, 링컨은 온 생애에 걸쳐 '예수님' 또는 '예수 크리스토'라는 말은 거의 써 본 적이 없다. '주'(Lord)는 자주, '크리스토'나 '구(세)주'라는 말은 여러 번 썼고. 'God'이란 말은 매우 자주 썼지만, 아다시피 흔히 영어에서 'God'이란 말은 굳이 기독교의 주/예호봐(야웨)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또 '성령'(Holy Spirit)이란 말을 한 두 번 썼지만 의도는 불분명하다.  

    셋째로, 링컨은 성경과 성경 속의 하나님,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한 적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거의 전무하다. 거듭난 흔적이 거의 전무하다는 뜻이다. ('거의'라는 낱말의 뜻은 나중 밝혀진다.)

    넷째로, 위에서도 비쳤다시피 링컨은 대통령 시절 잠시 외에는 평생 교회에 거의 다니지도 않았을 뿐더러 특정 교파/교단/교회에 소속됐거나 공식 등록한 적이 전혀 없다. 출석만 했을 뿐이다.


크리스천이란, 예수 크리스토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속에 영접함으로써 거듭나 성령님을 모신 사람을 가리킨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또 성경을 읽기만 할 뿐더러 그 말씀대로 믿고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기에 함께 모이기에 힘쓰고 다른 신자들과 친교하는 사람들을 뜻하기도 한다.

링컨 연구학자들 가운데 링컨의 삶을 기독교적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보려는 사람들은 링컨의 생애가 과거 부정적으로 비쳐보인 것이 특히 그의 동업자 윌리엄('빌리') 헌던이 쓴 전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링컨을 가장 많이 알았던 사람"으로 정평이 있던 헌던은 링컨과 함께 변호사 개업을 했기에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30대를 중심/주축으로 삼아 링컨의 삶을 본 전기를 썼다. 자신이 비신자에다 무신론자 또는 이신론자에 가까웠기에, 링컨을 최대한 그렇게 보기를 원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증언을 깡그리 무시할 순 없고, 특히 링컨 사후 그가 각지에서 링컨의 발자취를 더듬어 현장조사를 했던 부분들은 그렇다. 
  


1. 토머스 링컨과 낸시 행ㅋ스의 혼인증명  2. 링컨의 어릴 적 통나무집  3. 2의 내부  4. 낸시 행ㅋ스 (친모. 측근의 증언에 의한 상상화) 5. 낸시의 어릴 적 집  6. 토머스 링컨 (사진의 정격성에 의문의 여지 있음)  7. 새러 부쉬 잔스턴 (계모) 8. 낸시의 침대 (오리지널) 9. 링컨이 어릴 때 쓰던 책의 한 페이지와 필적 (맨 아래) 10. 낸시의 무덤/묘비    



링컨의 부모

한 사람의 생애는 특히 어릴 때 경험에 크게 좌우된다. 그러므로 링컨의 삶도 그랬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부모는 마땅히 어린 자녀의 삶 환경을 행복하게 해 줄 의무가 있다. 링컨은 이 점에서 그다지 행복하진 못했던 것 같다. 어릴 적 가정은 무척 빈곤했고,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목수 겸 농부에다 개척자였지만, 자녀를 위한 교육열과 미래 개척의 꿈이 결여돼 있었다. 그 점은 개척시대의 공통된 아이러니이기도 했다.  

링컨의 삶에 주된 영향을 미친 사람은 9살 때까지 생존했던 친모 Nancy Hanks(이하 '낸시' 또는 '낸시 행ㅋ스'로 표기)와 링컨의 10살 때 그의 가족과 합류한 계모, 새러 부쉬 잔스턴 - 두 어머니다.
링컨은 자신의 외조부가 교양 넘친 버지니아의 농장주였다고 밝힌 적이 있다. 또 이미 세상을 뜬 낸시에 대해 "하나님이 내 어머니를 복 주시길. 나의 현재와 희망이 모두 어머니 덕분이다"고 애정을 고백한 바 있다. 

낸시 행ㅋ스와 토머스 링컨은 1806년 6월 12일 켄터키 주 워싱턴 카운티 일리저벹타운의 리처드 베리의 집에서 제시 헤드 목사(감리교 직위상 '디콘' 즉 목회집사의 주례로 결혼했다. 베리는 낸시의 법적 후견인이었다.
낸시가 토머스를 만난 것은 자신은 주로 수공 봉제사로, 토머스가 이곳 타운에서 목수 겸 농부로 일하던 시절이었고, 둘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 토머스는 1802년 하딘 카운티로 이사를 와서 이듬해 238 에이커의 농장을 구입했다.  

낸시는 본래 어릴 때부터 바느질/뜨개질에 능숙해 훗날 뛰어난 침모(seamstress)가 됐다. 여러 3개 카운티 등의 동네를 거치면서 웨딩 가운부터 장례식 의상까지 두루 맡아 제작했고 노동윤리에 밝은 정신, 단정하고 깔끔함, 명랑함, 지성 등으로 주위에 잘 알려져 있었다. 사촌 잔 행ㅋ스는 그녀를 아는 사람 누구나로부터 총애와 존중을 받았다고 말했다. 검은 머리, 푸른 눈동자에다 섬세한 몸매였던 낸시의 사진은 없고, 다만 측근의 묘사와 링컨의 용모를 참조하여 로이드 오스텐돌프가 그린 상상화가 있다.

결혼한 둘은 일리저벹타운의 한 오두막집에서 살았고 토머스는 장롱/문짝/관 등 목제품을 만들어 살림이 보탰다. 링컨네는 인근 리틀마운트침례교회 교인이었다. 이 교회는 노예 문제로 기존 교단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였다.

둘의 결혼 약 9개월만인 1807년 2월 10일에 첫 아이인 딸 새러가 태어났다. 놀린 크맄의 싱킹스프링팜으로 이사를 가서 1809년 2월12일 일요일 해 뜰 시각에 사내아기가 태어났는데, 그가 에이브였다. '에이브러햄'이라는 이름은 (1786년 원주민에게 살해된) 친조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1811년엔 놉크맄으로 이사를 가서 셋째 아이 '토머스'를 낳았지만 어릴 때 숨졌다.

1816년엔 인디애나주 남부로 이사를 가서 페리카운티(훗날의 스펜서 카운티) 리틀피전크맄들판에 자리잡았다. 이때 낸시의 숙모 부부인 토머스/일리저벹 스패로가 이사를 들어와 잠시 살다 인근에 자신들의 캐빈을 지었다.
낸시는 자식들을 사랑했고 늘 다정했다. 미래의 꿈을 키우면서 자신과 토머스가 갖지 못했던 삶의 좋은 기회들을 아이들이 갖기를 원했다. 그래서 새러와 에이브에게 링컨가족성경을 읽어주곤 했다.

그러던 1818년 이 지역에 닥친 독초(white snakeroot)를 먹은 소의 우유를 마신 후유증으로 사람들이 죽어갈 동안 먼저 스패로우 부부가 숨진 몇 주 만에 낸시도 앓기 시작했다. 임종이 가까울 무렵 아이들을 침상머리에 불러 아빠와 서로에게, 세상에 대해 착하고 친절하게 지내라고 타이른 뒤, 10월 5일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스패로우 부부를 위해서도 관을 지었던 토머스는 푸른 소나무로 아내의 관을 제작했고, 어린 링컨은 관에 박을 나무쐐기못을 만드는 것을 도왔다고 훗날 링컨이 회고했다. 링컨은 이미 여덟 살 무렵에 도끼질을 배워 숲나무를 찍어 땅을 트고 장작을 쪼개고 울타리감을 만들었다.
 
토머스는 낸시의 관을 썰매에다 실어 숲 언덕으로 끌고 올라가 아무 장례 절차도 없이 묻었다. 몇 달 후, 데이빗 엘킨스 목사가 무덤에서 기념 설교를 했다.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는 체구가 큰 편에다 탄탄하고 매우 건강한 체질이었다. 음주벽이 있었지만 절제했고 대체로 악의 없는 성품이었다. 자기 할 일을 다하고 때로는 배심, 카운티 죄수 감시 등도 맡아했던 모범시민이었다. 그는 말을 잘했고 이웃에게 인기도 있었다.

토머스는 낸시가 죽은 이듬해인 1819년, 다시 일리저벹타운으로 돌아가 거기 사는 과부 새러 부쉬 잔스턴에게 청혼했고, 그 해 12월 2일 결혼했다. 당시는 개척시대여서 배우자 없이는 잠시도 살기가 힘들었다. 새러 부쉬는 과거 몇 년 간 젊은 시절의 토머스를 알던 사이였으나 처음에 잔스턴과 결혼해 3남매를 두었다. 이 3남매는 링컨네 가족과 무난히 합류했다. 1823년 즈음엔 온 가족이 리틀피전침례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1827년 토머스는 100에이커의 농장주가 됐고 1829년엔 좀 더 나은 집을 짓던 중 처사촌 잔 행ㅋ스로부터 낸시가 죽었던 땅에서 독초병이 물러가고 회복됐다는 말을 듣자 짓던 집을 놔둔 채 땅을 팔아 이듬 해인 1830년 다시 일리노이로 이사를 한다. 1831년엔 다시 한 차례 이사를 해서 여생을 거기서 보낸다.

토머스는 세 군데 농장을 보유했고 구즈네스트 프레리에 큰 방 두 개짜리 집을 지어, 1845년 무렵, 결혼한 의붓자식의 자녀까지 모두 18명이 살았다. 농장에서는 옥수수/귀리/밀 등을 생산했고, 닭/말/돼지/젖소/양/거위 등을 사육했다.
토머스는 1841년 보유했던 120에이커 중 3분의 1은 재정형편 상 훗날 같은 주 스프링필드에서 성공적으로 개업 중이던 아들 에이브러햄에게 팔았다. 1848년엔 강매위기였던 나머지 땅을 링컨에게 받은 돈 20달러로 간신히 지킬 수 있었다.

토머스는 1851년 1월 17일 73세로 별세했다. 아버지와 친근하지 않았던 링컨은 당시 이복 형으로부터 부고를 들었으나 장례식 참석을 거부했다. 링컨의 다른 얘기들을 보면, 토머스는 술을 마신 뒤 아내를 구타하고 자식들을 학대한 일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링컨의 의붓어머니 새러 부쉬 잔스턴은 1788년 일리노이의 부쉬 가문에 태어났다. 새러는 본래 켄터키 하딘 카운티에 있던 집에 살다 일리저벹타운으로 이사를 가서 거기서 자랐다. 당시 젊은 토머스 링컨을 알고 있었으나, 1806년 대니얼 잔스턴과 결혼했다. 토머스가 낸시와 결혼한 것은 그보다 약 석달 후였다. 새러의 전남편 잔스턴은 10년 후 죽었다.   

어린 에이브 링컨은 새 엄마에게 금방 적응했다. 새러가 가져온 책들 중엔 '웹스터 스펠러', '로빈슨 크루소' 등이 있어 링컨의 애독서가 됐다. 새러는 남편처럼 문맹이었지만 토머스의 자녀들에게 한결 새로운 분위기와 환경을 제공했고, 특히 에이브의 학구열을 칭찬하고 적극 격려했다. 또 남편에게 에이브의 독서열을 긍정적으로 보도록 타이르곤 했다. 새러는 훗날 전기를 쓰러 온 윌리엄(빌리) 헌던에게 어릴 적 에이브는 "내가 본 가장 뛰어난 소년"이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새러와 링컨은 자연스럽게 애정을 나누게 됐다.

키가 크고 자세가 곧았던 새러는 매우 바지런했고 동네 사람들에게 늘 다정했다. 링컨은 1831년 출세를 위해 집을 떠난 후에도 수시로 계모를 방문했고, 아버지 별세 후 자신의 명의로 된 40에이커 땅을 어머니 생시에 쓸 수 있게 배려했다. [ 이 점에서 링컨은 부모를 편애했다고 할 수 있겠다. ] 새러 자신의(전남편과의 사이의) 자녀들은 모두 최소 7명의 자녀를 낳아 1850년대에 20여 손자손녀들을 두었다. 새러는 죽기까지 활기찬 삶을 살다 1869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토머스 곁에 묻혔다.

   
링컨 가문의 숨은 내력

링컨을 깊이 아는 데는 표면상의 생애보다는 링컨 가문의 "숨은 내력"이 더 도움된다고 생각한다. 수박 겉 핥기 식 명사추종주의는 사람을 바로 아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 링컨에 관한 최신 한글 도서를 일부 참조해 보고 하는 소리다. 한결 같은 명사추종적 결론은 한심하다는 게 필자의 소감이다. 

낸시는 백인/흑인/원주민 3인종 혼혈족인 멜런전(Melungeons)계 혈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생아였다. 그녀의 어머니 루시는 이 집안을 찾은 버지니아 정착촌의 한 남성과 잠시 사랑에 빠졌다가 낸시를 배어 낳은 뒤, 숙모 부부에게 맡기고 다른 남성과 결혼했다고 한다. 당시 법 관련 기록에 따르면, 루시는 '통간' 혐의를 받은 바 있으나 재판까지 간 적은 없다. 훗날 정치무대에 나선 링컨이 가족의 이런 배경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던 것이 틀림 없다.
링컨의 다소 검은 피부와 굵고 거친 검은 머리털, 회색 눈동자 등은 전형적인 멜런전 형과 일치한다. 링컨은 아버지 토머스보다는 어머니를 빼 닮았으며, 어머니처럼 색맹이었다. 

일리저벹 헐쉬먼과 다널드 팬터 예이츠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한편 링컨은 유대계 선조를 두었다는 일설이 가능하다고 한다. 토머스와 낸시가 결혼한 장소였던 (교회가 아닌) '베리'네의 집안은 DNA 조사결과 유대계인 것으로 나타났다. 베리는 토머스-낸시의 결혼 당시 낸시의 혼인증명에 후견인으로 서명했다(중간 사진 1. 참조). 북미주로 초기 이주한 영국인 다수가 유대계 혈통을 지녔다.


링컨의 선대는 퀘이커(일명 Friends/'형제회') 배경을 갖고 있었다[각주:1]. 그래서 링컨은 대통령이 된 이후까지 평생 퀘이커 교도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표시하곤 했다. 링컨은 한 친척에 보낸 서신에서, 자신의 선조 혈통에 관한 희미한 기억을 더듬은 바 있다.

    "나의 조부는 버지니아 라킹엄 카운티에서 1782년 경 켄터키로 이주했다가 2년 뒤 원주민들에게 암살됐다...나의 증조부는 펜실베이니아에서 버지니아로 왔다. 그는 퀘이커 교도였다." (펜실베이니아라는 주 이름 자체가 건국 선조의 한 명인 초기 퀘이커 교도 윌리엄 펜-William Penn에서 왔다.) 

한편, 링컨의 첫 선조는 1640년 이전에 신대륙으로 온 '새뮤얼 링컨'으로, 청교도로 추정된다.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는 자신이 여섯 살 때 아버지 에이브러햄이 피살했기에 일찍이 고아가 되어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 이 점에서 동정의 여지가 있으나 에이브러햄은 아버지에 대해 대체로 차가웠다. 그가 아버지를 경제적으로 도우면서도 장례식까지 외면했던 사실은 그가 아버지를 내심 깊이 혐오했거나 경원했음이 입증된다. 링컨에겐 적어도 이 당시 크리스토의 사랑이 없었다.  

링컨 가문의 배경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고, 엇갈리는 다양한 학설들이 제기돼 왔다. 링컨 가문 배경을 아예 뒤집을 만한 설도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사생아'였다는 설. 물론 낸시와 토머스의 결혼을 알려진 역사대로 아는 사람들에겐 어처구니 없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무시 못할 증언들과 그럴 듯한 주장들이 있다.
링컨의 사생아 설엔 크게- 잔 캘훈(John C. Calhoun)의 아들 설, 엔로(Enroe)의 아들 설, 두 가지가 있다. 양측 다 강하게 내세우는 많은 '증거'들이 있으니 혼동스럽다. 그러나 여전히 링컨은 사생아가 아닐 가능성, 사생아일 가능성이 각각 50%씩이라고 보는 게 안전선이다. 만약 그가 사생아였다면, 그의 생애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링컨을 국부로, 명사로, 크리스천으로 열광하는 사람들은 그럴 가능성조차 부정하거나 조직적/논리적으로 반박한다. 당연한 행동이요 향방일 것이다.


부모의 신앙적 영향


링컨은 부모로부터 과연 어떤 신앙적 영향을 얼마나 받았을까?
우선, 링컨이 평생 간직한 성경 애독 습관은 어린 에이브가 일찍 떠난 어머니 낸시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 거의 틀림 없다. 링컨은 성경을 부분적으로 자주 인용할 수 있을 만큼 밝았다. 그러나 링컨이 성경을 진리로서 100% 다 받아 들이지 않은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오히려 신관과 '동정녀 탄생' 등 성경의 주요 교리를 불신했고, 다수가 '조작'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30대엔 본격적으로, 내심 기독교를 "황당하고 우스꽝스런 종교" 정도로 여기게 된다. 이것은 링컨이 독서로 접한 바, 당대에 발달한 소위 '계몽'(enlightenment) 정신의 영향이기도 했다. 특히 젊은 시절의 링컨에게 이성주의/이신론 등은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링컨은 성경을 주관적으로 믿고 받아들이기보다 객관적으로 하나의 철학적/문학적 진리로 받아 들인 거 같다. 이것은 다음 셐션에서 소개할 그의 십대 시절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즉 링컨은 퍽 일찍부터 성경에 대한 애정과 동시에 뿌리 깊은 회의를 가졌다. 이것은 일종의 양극적 모순이며 특히 훗날 그의 정치 생에 속에서 위선과 다름 없는 이중성으로 나타난다. 

링컨은 자신의 출신배경에 관련된 비밀에 관해 입이 무거운 편이었으나, 빌리 헌던 등에게 '사생아' 얘기를 몇 번 했다. 어머니 낸시가 분명히 사생아였고, 헌던에 따르면, 자신 역시 '사생아'임 또는 그럴 가능성을 한 두 번 비친 적이 있다. 그래선지는 몰라도 그는 예수님 역시 '사생아'였다고 일찌감치 결론 짓는다. 이것은 정치 초년병 시절 그를 '무신론자'로 몰아, 위경에 빠트릴 뻔하기도 했다.

예수님을 '사생아'로 본 일종의 동일화/동질화 의식은 예수님에 대한 동료감/친근감으로 발전하진 않았다. 그가 사생아 뿌리 탓에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동시에 자주 자살충동을 느낀 점도 과거의 혼외적 배경에 대한 도덕적 수치감 등 강한 부정적 의식이 더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그는 20대 시절 정욕에 불타 혼외정사를 여러 번 갖는다.  

링컨네는 특히 아버지 토머스를 따라 다닌 개척자 가정의 고달픈 생활이라, 이사를 퍽 자주 했고, 따라서 한 교회나 특정 교파 교리에 대한 신앙이 깊이 자리 잡힐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릴 때 주로 침례교회 배경이었으나 선대의 퀘이커 신앙에 더 깊은 동경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어릴 적 침례교회에서 칼뱅주의 예정론에 기초한 소위 '숙명론'(fatalism)을 배웠지만, 숙명론이 링컨의 삶 속에서 한 역할에 대해선 긍정론/적극론, 부정론/소극론의 양극적인 논란이 있다. 즉 한 쪽에서는 숙명론이 그의 삶을 좌우했다는 설, 한 쪽에서는 숙명론에 거부감을 가졌다는 설 등이다.
어린 링컨이 숙명론을 진리로 받아 들였다면, 그것은 자신의 출신 배경 탓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며, 내심 부정했다면 역설적인 거부감 탓이기가 쉽다. 아무튼 숙명론이 그의 삶에 끼친 영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보다 상세히 논할 기회를 가져 보련다. 

결국 링컨은 친어머니 낸시로부터는 평생 그의 삶을 지배한 독경벽(讀經癖)을, 계모인 새러 부쉬로부터는 애독 습관과 자기교육열을 전수받은 것 외에 신앙적으로 별 강한 영향을 받지 못한 거 같다. 즉 성경을 사회에서 인용할 만한 그리스적인 철학적 보편 진리로 받아들인 반면, 히브리적 절대진리로 받을 동기와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링컨이 절대진리로서의 성경에 그나마 부분적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훨씬 훗날인 대통령 재임 당시 아들의 죽음 때문이었다.   

링컨이 애초에 위그당(Whiggers, 공화당의 전신)에 가입했던 주된 이유는 개척시대 특징인 열정주의와 방관적인 비 교육열에 대한 강한 반발의식 때문이다. 링컨은 자기 부모들이 모두 문맹이었고 따라서 자녀들에게 교육적으로 해 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고 개탄하고, 자기의지에 의한 자립과 교육을 강력히 부르짖은 것이 위그당의 개혁의지나 분위기와 맞물려 주효했다. (참고 http://www.historycooperative.org/journals/jala/16.1/howe.html)

링컨의 위그당은 열정보다는 지성과 냉철, 막연한 개척보다는 안정적인 교육, 과격한 노예철폐나 노예유지보다는 중도주의를 지향했다. 

젊은 정치인 시절, 하나님이 아닌 자기의지에 대한 이러한 링컨의 강한 의존감과 확신은 뉴에이지 핵심사상의 하나인 자조(self-help)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 어린 시절 하나님과 부모에 대한 회의 감정과 의식이 젊은 시절의 이성주의, 자기의존, 자기성취주의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건 링컨의 실제 삶으로 입증되는 역사적 사실이니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링컨을 명사로 추정하기에 그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만 보려는 "무작정 오케이" 내지 검증불요(不要)주의는 위험하다. 바람직한 인생관과 가치관이 아니다.

시리즈 다음 회에서는 링컨의 청소년 시절을 조명해 보련다. 



  1. 퀘이커교는 다소 모순된 무교회주의에다 보편구원론적이며, 침묵을 중시하는 일종의 명상종교이다. 참고로, 현대 관상영성에 기여한 리처드 포스터나 한국의 고 함석헌은 퀘이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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