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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교회력과 교회명절

'사순절'은 성경적인가?




지난 2월 17일은 소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었다. 그 날을 기점으로 천주교 교회력의 올해의 이른 바 '사순절(四旬節/Lent)'이 시작됐다. 성금요일까지 40일을 금식/묵상 등을 통해 경건으로 채운다는 기간이다.

요즘 한국 교계를 비롯한 온 세계에 관상(觀想) 영성(contemplative spirituality)이 만연한데, 일년 중 이때 만큼 관상과 관상기도가 강조되는 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계절에 관상가 토머스 머튼과의 '다리 놓기'를 시도한다거나 빅토르 위고의 세속철학적/애욕적인 '관상시편'(Les Contemplations, 1856)의 일부 종교적인 단편을 '재의 수요일' 의식에 비견하기까지
하는 등의 황당한 사례도 있다.


과연 사순절이 성경적일까? 성경적이라면 얼마나 그러하며, 아니라면 얼마나 아닐까?


참회 및 육욕의 날?

사순절 속엔 복잡하고 다양한 "거룩한" 명절/절기가 들어 있다.
우선 '재의 수요일' 전날은 '참회 화요일'(Shrove Tuesday, 불어: 마르디 그라스/Mardi Gras)이다. 참회(penance) 또는 고백/고해(confession)를 하여, '면죄'(absolution) 선언을 받는 날이다. 올해는 2월 16일이 그날이었다.
이날부터 다수의 교회는 강단의 십자가도 보라빛 천으로 덮어 가린다. 이날부터 사순절 기간 동안은 '알렐루야'(alleluia)나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Gloria Deo in excelsis) 등의 찬양도 삼간단다. 너무 화려해서(?)라나..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마저도 간단하지가 않다. 천주교에서는 재의 수요일 직전 일요일을 '참회 일요일'로 삼는다. 영국/아일랜드/캐나다/호주/뉴질랜드/미국(일부) 등의 영국 성공회 계열 교회에서는 단식재(斷食齋) 전의 첫 월요일을, 천주교는 재의 수요일 전 월요일을 '참회 월요일'로 지킨다. 성공회는 '재의 수요일' 전, 일/월/화요일 사흘을 '참회기간'(Shrovetide)으로 지킨다. 동방 정교회 계열은 별도로 그들 나름의 사순절 전 월요일을 소위 '정결월요일'(Clean Monday)로 지킨다.  

학자들은 참회 화요일의 역사를 주후 1000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천주교 국가에서 육식을 삼가기 전날의 가장행렬 축제인 '카르니발' 즉 사육제와도 관련이 있다. 미국에서는 주로 마르디 그라스나 참회화요일(성공회/루터교/감리교)로 지키곤 한다.

사순절엔 대체로 육식/지방식을 삼가기에, 참회 화요일엔 마지막으로 팬케잌을 던지며 자축(?)하는 팬케잌(Pancake Day, Pancake Tuesday) 날이기도 하다. 중세엔, 향후 40일간 팬케잌의 주 성분이기도 한 우유/계란/설탕/기름 등의 섭취를 삼갔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성찬(盛餐) 화요일'(Fat Tuesday)이라고도 부른다. 아우구스티누스인가 누군가는 그런 영양가 많은 음식들은 "정력/생식력을 강화하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니까 40일의 금식/금욕기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한꺼번에 기름진 진수성찬을 왕창 '때려 먹어 치우는" 날이다. 하와이의 '말라사다(튀김반죽) 데이'와도 일치한다. 나라마다 비슷하면서도 이름도 다르고 음식도 조금씩 다르다. 카르니발을 지키는 구교 국가에선 단지 술/음식 등 식욕 뿐 아니라 성욕도 미리 왕창 해소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영국령 국가에선 이날 마지막으로(?) 기를 써서 운동을 하자는 양, '대중(Mob) 축구'를 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카르니발 풍습이 유명한 브라질에서는 아슬아슬한 반라 차림으로 행진하며 삼바춤을 춰 대는 여성들('물라타') 탓에 은근히 섹스관광 등 성문란도 심하여 정부가 고심하곤 한다. 해마다 이맘 때가 "물러 터진" 본국인과 외래인 사이의 성교섭 풍속을 부추긴다. 브라질의 악명 높은 성매매어린이 인구는 약10-50만. 카르니발은 한 마디로 누구든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날"이다. 주정과 마약 밀매/사용도 심하다.

이런 것들은 브라질 뿐 아니라 카르니발 때 중남미나 필리핀 등 카톨맄 국가들 일대에 흔한 풍경이다. 다만 올해초 대지진을 만난 아이티는 마르디그라스 카르니발 대신 조용한 애도의 날로 보냈단다.
이 모두가 천주교 절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게 천주교가 "깨끗하고 청빈한 종교"라고 좋아하여 개종한다는 일부 한국 신교 신자들에 대하여 참 할 말이 없다.


'재의 수요일'은 성경적인가?

사순절의 첫날인 '재의 수요일'은 참 묘한 날이다. 천주교/성공회 사제들과 일부 신교 교파/교단 목회자들이 자기네 교인들의 이마에다 검은 재를 십자가 모양으로 발라 주는 날이다. 이 재는 지난 해 '종려주일(일명 성지주일)'에 썼던 종려나무를 태워 만든 잿가루이다. 


재의 수요일을 지키는 교파/교단은 다음과 같다.

    로마 카톨맄교 (일부는 '재의 월요일')
    성공회 (시드니 대교구 제외)
    정교회 (일부)
    루터교회
    연합감리교, 웨즐리언(웨슬레) 교회
    개혁교회
    일부 장로교회
    크리스토연합교회(일명 회중교회), 기독교회=기독제자교회
    아프리칸감리감독교회(AMEC), 아프리칸감리감독시온교회(AMEZC)
    일부 독립 침례교회
    하나님의교회(앤더슨총회)
    남/북 인도교회, 인도성공회
    나자렡성결교
    크리스토커뮤니티교회
    자유교회(일부)
    자유카톨맄교회
    모라비아교회

    '정결 월요일(Clean Monday. 일명 Pure Monday, Ash Monday, Monday of Lent 또는 녹색 월요일=Green Monday)':
다수의 정교회들(그리스/러시아/북미주/몬테네그라/이탈리아/마케도니아/아르메니아/시리아/콮팈/마론/터키/우크라이나/불가리아/루마니아/벨라루스..)과 동방카톨맄교회는 재의 수요일 대신 정결월요일을 지킨다.


왜일까? 왜 이래야 하나?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아마도 일부 독자는 과거 구약인들이 회개할 때 머리와 몸에 재를 얹지 않았냐고 할 것이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신약인들도 그랬다는 기록이 있는가? 없다! 전혀 없다. 독자는 구약인인가? 옛 계명에 살고 있나? 그리고 설령 구약인들이 그랬기로서니 검은 십자가와 무슨 상관인가? 천주교가 만들어낸 발명품일 뿐이다.

매년 이 맘때 검은 십자가 모습을 한 그들 신도들의 이마를 보면, 경건감은커녕 섬찟한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은 필자만인가. 왠지 이마에다 흑인(黑印)을 친 것 같은, 그들이 이른 바 '성호'라는 것에 의해 어디엔가 종속돼 있고 사로잡힌 듯한 느낌이다. 검은 십자가 인을 쳐서 어떻다는 것인가? 사제에게 그걸 받아서 기분상 더 경건감이 발동하여 더 거룩해진다는 말인가? 생활이 더 조신하게 된다는 뜻인가? 설령 그렇더라도 일종의 자/타 심리조작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검은 십자가 인'은 속죄와도 전혀 무관하다. 영적으로 아무 권능도 없다. 결국 십자가를 그어 주는 사제나 대상자의 심리만족일 뿐이다.


흙에서 흙, 재에서 재로?

성공회나 천주교의 '재의 수요일' 미사 예식사란게 있다. 그 중 하나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갈지어다"이다. 

    "전능하신 하느님, 주께서는 진실로 통회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나이다. 비오니 이 재를 (십자성호) 축복하시어 재를 받는 이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주님의 용서를 얻게 하시며,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운 선물임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아멘. (출처: 대한성공회)

사제는 먼저 이마에 재를 바르고, 교우들의 이마에도 바른다.
사제는 이때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선언하고, 교인들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이 선언은 창세기 3'19에서 딴 것이다(욥서 34'15, 전도서 3'20 참조). 

자..그런데 재가 흙이랑 무슨 상관인가? [흙=재]이고 [재=흙]이라면, 인생이 재에서 났으니 재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인가? [흙=재]라는 사상은 오히려 힌두교에 가깝다. 그네들은 장례도 화장으로 하니까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힌두교 사람들은 이마에다 뭘 찍기를 잘 한다. 관상이 원래, 고대 광야수사들이 동양종교의 영향을 받았을지 모른다는 추정적 인식과 마찬가지로, 천주교의 이마에 재 찍기도 혹시 동양종교에서 오지 않았을까? 일말의 의혹이 가는 대목이다.

필자는 아둔해선지 흙과 재와의 '상관관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두 번째로는, [인간=흙]이라는 다분히 물질 중심의 인간관은 구약의 인간관이고, 아직 거듭나지 못한 죄인들을 위한 인생관이다. 
단적으로 다음 성구를 보자.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되어 있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습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과 같이, 흙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고,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우리가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형상을 입은 것과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코린토A/고전 15'47-49 표준새번역)


인간의 본질은 흙이 아니다. 몸만 흙일 뿐이다. 영은 흙이 되려도 될 수가 없다. 사람의 본질 즉 속사람은 영이므로, 영이 살아 있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도 살아 있다. 문제는 영이 정말 살았냐, 죽었냐이다. 하나님과의 친교가 끊겨 영이 죽은 사람들은 그냥 흙덩이 내지 흙가루와 다름 없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흙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 된다. 소돔/고모라 사람들이 아닌 이상, 불탄 재로 사라질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다.

이 인간본질론을 카톨맄 사람들이 아는지들 모르겠다.

창세기 3'19은 도무지 재의 수요일에 어울리지 않는 성구다. 그냥 아무 성구나 되는 대로-억지로 끼여 맞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재=흙], [흙=재]의 등식이 생긴 것이고.

신도들의 이마에 재 십자가를 발라 주면서 사제는 신도에게 회개를 강요(?)하고, 신도는 사제에게 회개를 위한 중재를 은근히 호소한다. 사제는 이 통회기도에서 하나님께 진노를 거둬 달라며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말(라틴어: '미제레레 노비스')을 의식적(儀式的)으로 거듭 되뇐다.
지금이 과연 구약 시대인지 신약 시대인지 혼동감이 온다. 신약 시대에 사제제도가 어디 있는가?

자..신자라면 성경 말씀대로 평소 죄를 회개하지 않는가? 우리가 죄 회개에서 왜 현대 '사제'들의 도움과 중재를 받아야 하는가? 페트로에 따르면, 신자 각 사람이 왕 같은 사제이다(페트로A=벧전 2'9). 아이러닠하게도 페트로는 카톨맄교가 '초대 교황'으로 받드는 사도이다. 그런데 초기교회에도 없던 사제제도가 왜 갑자기 천주교회에서 도둑처럼 나타났는가?

우리는 평소 날마다 또는 순간마다 기도할 때 자신의 죄를 직접 믿음과 진정으로 예수님의 보혈과 그 이름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해 주신다. 그것이 영과 진리(한글성경-신령과 진정)의 경배다. 주님이 12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모범도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을 탕감해 주듯, 우리 죄빚을 탕감해 주소서"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사제'들 앞에 나와 그 앞에서 참회/고백을 해야 하고, 번거롭게 이마에다 검은 십자가 재를 발려야 하고, 사제들이 빌어 주는 통회 기도에 동참해야 하는가?

이건, 소위 '평신도'들을 '사제' 계급 아래 종속시키기 위한 일환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그런 제도와 의식에 종속감/소속감을 느껴야 일종의 안정감(?)과 만족을 얻는다. 남에 대한 의존도가 종속감으로까지 치닫는 것이다. 여기 참되고 유일하신 중보가 끼여들 자리가 적다. 아니, 없다.
그들은 심지어 일종의 중재자로 자처하는 사제로도 모자라, 마리아를 포함한 죽은 '성인'들과 천사들까지 중보로 동원해다가 "(대신) 빌어 주소서"라고 빌지 않는가? "(오직 주님만이 아닌) 남을 빌어 빌기"인 것이다. 빌(借)지 않으면 빌(祈)지 못하는 것인가?

이 재가, 정작 거듭나 직접 하나님 아버지께 통회/간구하지 못하고, 맨날 남의 도움만 빌다가 언젠가 재처럼 타 버릴 표상이 아니길 바란다.
신약인인 우리에겐 재 대신 화관이 필요하다. 이 말은, 우리에게 회개나 통회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님을 독자는 알 것이다. 회개나 금식은 참회화요일이나 재의 수요일이나 사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수시로 필요할 때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다.

어느 보수계 사람의 글을 보니, 사순절에 앞서 "뭔가를 포기해야 하는" 날이 재의 수요일이라고 한다. 푸석푸석~ 하니 재 되어 사라질 무엇처럼 뭔가 포기를 해야 한다는 것. 그러고 보니 뭔가 관상 내지 불교 냄새 같은 것이 나려 한다.
 
우리가 자기부인을 해야 함은 사실이다.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자기부인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포기가 아니다. 뭔가의 포기가 아니란 것이다.

자기부인을 하려면, 때에 따라 육욕과 육정도 저만큼 물려 놓아야 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는 동안 육욕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인가? 육욕을 버리려면 음식은 왜 먹는 것이며..가정의 기본인 부부와의 사랑과 아기 출산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우리가 다들 사도 파울처럼 숫총각, 숫처녀들인가? 수사/수녀나 스님/비구니인 것인가? 그래서 숫총각인 교황과 사제들의 수하에 들어야 하는 건가?

혼동을 말아야 한다! 잘 분간하고 잘 분별하는 것이 신자가 해야 할 일과 본분의 하나다. 자칫 혼동하다간 엉뚱한 길로 빠져 들기 쉬운 게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태 신교에서 신앙생활 잘(?) 하다가 갑자기 천주교로 '개종'한다는 사람이 그런 엉뚱한 사람들이다. 

의식(儀式, rites)은 주로 구약의 것이며..영과 진리의 경배가 신약의 것이다. 
구약의 재의 의식이나 사제 제도나 무용(춤)의 전례 따위는 지키면서, 찬양대의 4성부 합창이나 신약에도 명기된 십일조 등은 '구약적'이라며 반대하는 자체모순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