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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리뷰

독도가 독도일 자유 (김삼)


삼일절(3.1절)의 의미를 잘 모른다는 한국 초등학생들이 40%나 된다니 놀랍다.
텔레비전의 고대 사극과 사극 영화는 매우 즐긴다는 한국인들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다 부모들과 교사들의 책임이다.
웹에서도 불과 몇 글자, 몇 클맄만으로도 많은 자료들을 얻을 수 있건만, 우리가 관심 없고 게을러서 모른다고 봐야 옳을 거 같다. 온 나라가 요즘 연예계 중심으로 돌아가는 탓이기도 할 법 하다. 이 역시 인터넽에 얽매인 우리 사회의 모순이다. 

나라 잃은 서러움은 선조들만의 것이지, 현재의 우리 것은 아니란 생각은 곤란하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의 시편 137편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바벨론(바빌로니아)의 강들 곁에 주저앉아
    우린 울었다네
    찌온을 추억하며.

    우린 우리의 킨노르(수금: 뜯는 현악기)들을
    거기 버드나무 가지에다 (그냥) 걸쳐 두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온 그들이
    우리에게 노랫가락들을 청하고,
    우리를 괴롭힌 사람들이 기운 내라며 부추겼네:
      "찌온 노래나 하나 불러 보게."

    우리가 어찌
    주/예호봐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
    낯선 땅에서?

    만일 내가 너를 잊는다면, 오 예루샬렘!
    나의 오른손도 (그 재주를) 잊을진저!

    내가 널 기억치 못한다면,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어버릴진저!
    내가 예루샬렘을 내 지고의 기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기억하소서 예호봐님, 에돔 족의 언행을. 예루샬렘의 그 날, 소리친 그들-
    "헐어버려요, 다 헐어버려! 밑바닥까지."

    오, 망해 버릴 딸 바빌론, 네가 우리에게 저지른 대로 네게 되갚는 사람, 복되리!
    네 어린아이들을 잡아 바위에다 내던지는 사람, 행복하리!
 (시 137편 원문에서 필자 옮김)
 

대학교 시절 스승 한 분은 "역사는 지난 역사일 뿐 오늘날은 별 깊은 의미가 없다"고 강조하시던 걸 기억하지만, 과거가 있기에 현재와 미래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과거에만 얽매어 사는 것은 물론 싫다. 그러나 과거를 기억하고 추억한다고 해서 반드시 얽매임은 아니다. 


하나님은 왜 일본에게 36년간 대한제국을 억누르게 허락하셨는지 그 깊으신 뜻은 잘 모른다. 그러나 이스라엘/유다도 그 2배인 70여년간 겪은 일이고, 그 앞서 에집트출국-광야 시대 이전에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약 400년간이나 겪었던 상황이다.
대한민국이 혹, 하나님이 금세를 위해 택하신 특별한 총애 국가여서는 혹 아닐지.


일본은 꼭 이스라엘과 혈통을 나눈 고대의 에돔이나 모아브/암몬 같기도 하다. 
싫든 좋든, 일본은 우리와 본래 뿌리가 같다. 땅도 가장 가까운 나라다. 본래는 형제/자매 나라들이어야 하건만 둘 사이가 가장 안 좋다. 일본어의 구조나 발음을 보면,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우리와 가장 가깝다. 그러나 한반도에 가려져 섬나라로 고립되다 보니, 대륙을 탐하고 남의 땅을 넘보게 됐다.


문제는 바로, 일본의 야욕과 침략 근성이다. 이것은 이미 임진왜란 이전의 옛 왜구 세력부터 2차 대전 때까지 계속 입증돼 왔다. 일본은 독도를 자꾸만 '다케시마'(竹島)라고 우기는데 그네들이 '다케시마'라고 불러 온 곳은 한 둘이 아니다.

이처럼 자기네 것과 자기네가 갖고 싶은 것을 구분 못하는 답답한 속성이 일본인들에겐 있다. 이번 밴쿠버 겨울 올림핔 피겨 스케이팅 경기 결과에도 깨끗한 미소로 승복하지 않고 억울하고 원통하고 분하여 울고불고 하는 까닭은..동정심도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으레 그 금메달이 자기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저기 웹 댓글들을 읽어 보면, 그 금메달은 본래 분명히 자기네 것인데, 한국에서 가로챘따는 정도의 생각을 그들은 내심 갖고 있다. 그들 본연의 근성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겠다.

그보다는 깨끗한 승복이 훨씬 더 현대적이고 국제적이고 신사적/숙녀적일 터이다. 금메달을 못 딴 것은, 그냥 자기네가 대범성과 우아미와 테크닠이 부족해서-한 마디로 역부족이어서-였다고 시인하면 족했을 것이다. "아시아의 자매국인 늬네가 가졌으니 그나마 기쁘다"라곤 못할 망정.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명실공히 선진대국-큰나라감은 아니다.
 

독도-다케시마 분쟁은 다분히 말씨름이라는 생각도 든다. 서로들 가장 말이 비슷하니까 생긴 변수라고나 할까.

1530년에 펴낸 (조선) 팔도총도에 따르면, 분명히 울릉도/독도/대마도가 모두 한반도의 것으로 표시돼 있다.
그런데..
최장학 전 월간 '말' 발행인의 유추에 따르면, 독도는 원래 '돌섬'이었다. '독'은 돌의 전라/경상 지방의 사투리이고, 따라서 일본식 '다께시마'는 [독섬> 도꾸+서무> 다께시마]로 와음돼 진화됐단다. 결국 일본인들이 독섬을 자기네 편한대로 표기한다는 게 '다께시마'로 변했고, 이것을 그냥 한자로 표기한다는 게 죽도(대섬)가 됐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대나무 한 그루 안 자라는 섬이 '죽도'(竹島)라니..결국 다케시마 설은 일본의 어거지 근성의 노출인 셈이다. 아니면, 남의 것을 못 먹어 죽고 싶을 정도인데, 죽을 쑤어가며 죽도록 애써도 자기 것이 못 되니 한스러워..죽(어)도가 된 것인지. 그러나 독도는 죽어도 일본 것은 아니다!


일본은 탈취 야욕적인 군국주의 정신을 지난 세기로 마무리해 두는 게 앞날과 후대를 위해서도 좋다. 젊은 세대에도 낡고 늙은 정신을 심어 준다면, 전근대적이고 퇴보적이다.
다만, 남의 나라를 엿보는 게 얼마나, 두고두고 죄스럽고 죄받을 짓인지를 알려줘야 한다. 
반면,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나라 잃은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 신자들과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시 137편을 새삼 묵상해 보길 권한다.

자유는 누구나 누리게 돼 있으나, 남의 것도 챙기겠다는 생각은 이미 참 자유가 아니다. 그건 자유의 선을 넘었다. 
남의 자유를 뺏고 내 자유를 뺏기는 게 속박이다.
남의 나라를 뺏는 것도 그렇다. 지금도 지도 도처에 남아 있는 서구 식민정책의 흔적도 그렇지만, 아직도 독도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겨대는 일본 등의 침략 근성은 남의 자유를 뺏는 것이다.
아울러, 남의 처녀성과 정절을 '내 것'으로 삼겠다는 아동성추행이나 강간 따위도 이런 자유 탈취 정신과 다름 아니다.
 
일본과 중국의 교과서는 대조영의 발해를 '속국'이라고 표기했다니, 남의 나라는 모두 자기네 것으로 보는 기본발상에서 온 것 같다. 


우리는 늘 자유를 희구한다.
그런데 현대의 바벨론은 우리의 자유를 다시 넘보고 있다. 성경이 예언한
큰 비밀의 바벨론이다.
시 137편 기자가 절규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참 자유를 이 '뉴' 바벨론에게 앗기지 말아야 한다.
비록 상황에 따라 몸은 자유롭지 못할 한이 있더라도, 영적인 자유만은 결코 그래선 안 된다.

정신 차리고, 영적 바벨론을 말씀의 바위에다 메어치는 사람 복될진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