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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막 11:12-24]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에 대한 고찰 (들풀)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마태복음 21장과 마가복음 11장에 기록된 사건으로, 예수님께서 아침에 시장하셨을 때에 무언가 얻을 것이 있나 하여 무화과 나무를 찾으셨으나, 아무 것도 얻을 게 없으시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고 이에 그 나무가 뿌리까지 말라서 죽어버린 사건입니다.


막 11:12~24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중략) 매양 저물매 저희가 성밖으로 나가더라. 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사건에 대한 성경 기록을 해석함에 있어서 대부분의 경우에는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는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인 이스라엘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였음을 의미하고 그런 나무를 예수님께서 저주하셨음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동안 성경말씀 중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의문을 가졌고, 상기한 해석이 딱히 완전한 해석이라고 하기엔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도 이외의 대안이 없었기에 상기한 바와 같이 대강 이해하였습니다.

제가 상기한 해석에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이 사건에 대한 성경 기록 자체에 상기한 해석을 지지하는 어떠한 힌트나 심지어 뉘앙스조차 없다는 것이 그 첫째 이유이고, 또 한편으로는 제자들이 이 사건에 대해서 예수님께 여쭈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믿음과 연관시켜서 설명하셨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는 전혀 연관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이 그 둘째 이유입니다.

물론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했던 유월절 직전에 일어났기에 이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던 것과 연관시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의 이러한 불신앙의 결과를 예수님께서 상징적으로 무화과 나무를 통해서 보여주셨다고 볼 수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제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이 사건을 믿음의 문제로 설명하셨기에 이 점에 초점을 두고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먼저 무화과 나무가 제 때가 아님에도 예수님께서 그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음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 하는 것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평균 수령이 수십년 이상 되고 100년 이상 살기도 하며 수십 미터까지 자라기도 합니다. 페르시아 지역이 원산지이며 척박한 땅에서도 비교적 잘 자라는 나무인데, 신기하게도 열매를 두 번 맺습니다. 처음 맺는 열매는 잎이 나기 전에 열리는 것으로 작고 먹기에 그리 좋지 않으나,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대체로 3월에 열리며 대개 소작농들이 이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두번째 맺는 열매는 잎이 무성해지고 처음 열매들이 모두 떨어지고 난 후 6월쯤에 열리는데 크고 맛이 좋으며 일반적으로 이 열매가 매매되는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침에 시장하셔서 무언가를 얻을까 하여 무화과 나무에게 가셨을 때는 유월절 직전이니, 3월이므로 시기 상으로 그 나무는 처음 열리는 열매, 즉 작고 먹기엔 그리 좋진 않지만 먹을 수는 있는 열매를 맺어야 정상이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 나무는 이미 잎이 나 있었다는 말씀으로도 알 수 있는데, 무화과 나무는 처음 열매 후에야 잎이 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엔 아무런 열매도 없었으니 - 이것은 그 나무가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았음을 필연적으로 증거한다기 보다는 그 순간에 그 나무에는 아무런 열매도 없었다는 것으로 이미 누군가가 열매들을 모두 땄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 그 나무를 저주하셨고 그 나무는 뿌리째 말라서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셨던 만큼 그 나무의 열매를 기대하셨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하셨으므로 예수님의 관점에서 그 나무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나무였기에 예수님께서 그 나무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신 일을 행하셨던 것은 정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사건의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사건의 가장 큰 의미는 사망/죽음과 믿음, 이 두 요소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 마지막에 유월절날 돌아가시기 전까지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든 이적과 기적들은 생명의 권능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를 풀어주시며 배고픈 자를 먹이셨던 이 모든 기적들은 생명을 주고 살리기 위한 것으로 생명의 권능이 예수님께 있음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딱 한번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능을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 무화과 나무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생명의 권능 뿐만 아니라 사망의 권능 또한 가지고 계셨음을 보여주셨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결정적인 증거이기도 합니다 (신 32:39, 삼상 2:6).


이 사건을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국한시켜서 비유적으로 이해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마태복음 21:21 말씀으로 보면 ‘너희가 무화과 나무에게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하고 말씀하셨는데, 무화과 나무 사건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면 제자들도 무화과 나무 사건처럼 이스라엘을 심판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것이 타당한가요?

그리고 이보다 더한 일 ‘산더러 ...’는 과연 무엇을 의미해야 할까요? 또한 비유적/상징적으로 해석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한 것이라면 무화과 나무는 말라 죽었는데 이스라엘은 아직까지 전 세계적으로 수 천만명이 살아 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사건 자체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겠으나  – 사실 어떤 사건이라도 비유적으로 해석하려면 불가능할 게 뭐가 있을까요만... – 그 사건을 토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신 말씀을 보면 비유적인 해석이 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여기서  ‘이런 일’의 의미는 분명히 실제적으로 무화과 나무가 말라 죽은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산더러 ... 던지우라’ 하는 부분도 실제로 큰 산이라도 통째로 바다에 던지우는 기적으로, 즉 실제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서 베풀었던 기적을 모두 다 그대로 베풀 수 있음이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망의 권능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제자들이 시행했습니다. 바로 사도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음으로 치리한 사건 (행 5:1~11)과 사도 바울이 알렉산더와 후메네오를 사탄에게 넘겨준 사건 (딤전 1:20)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던 사건의 의미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훨씬 크고 깊은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사망을 다스리는 권능도 가지고 계시는 분 바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이며 제자들이 예수님의 믿음을 통해 그와 같은 권능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라고 결론내리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