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묵상연구/모세오경

[창 26:12-14a] 거부(巨富) 이짜크 (이짜크의 삶의 도전과 번영 3)



바탕본문: 창세기 26'12-14a



이짜크(이삭)는 흉년/가뭄을 피하여 가서 살던 이국 땅에서 농사를 하여 대 풍작을 했고, 이윽고는 거부가 됐습니다.
목축업도 잘 되어 가축이 큰 떼를 이뤘습니다.
수하에 일꾼들도 심히 많았습니다. 

게라르(그랄)/펠레쉩(불레셋) 족의 땅에서 말입니다.
이짜크는 흉년/가뭄을 피하여 가서 살던 이국 땅에서 이런 성공과 번영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이짜크가 농업에 종사했다는 말이 전에는 없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을 따라 주로 양떼를 기르는 목축업을 했었지요.
그러니까 농사는 이곳 게라르 땅에 와서 처음 시도했음이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도 첫 해 농작물이 심은 것의 백 배나 걷혔습니다.
수입이 투자의 100배, 곧 10,000%의 소출이라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아마도 당시 게라르의 토양이 퍽 비옥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게라르-펠레쉩 족은 이짜크가 순전히 자기네 덕분에 잘 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은덕이었다고 창세기 기자는 밝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복 주시기로 미리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오, 신실하신 주님께 찬양, 영광을~!

이짜크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부가 됐습니다. 


티엘티에서 늘 해 온 말이지만, 신자의 번영과 형통은 하나님의 뜻입니다(마침표).
그래서 저는 티엘티 독자들 누구나 번영하고 형통하길 진심으로 빕니다. 

번영과 형통을 바라기 또는 번영/형통 자체를 마치 큰 범죄인 양 죄악시 하는 시각이 교계엔 흔합니다만..짧은 생각이고 획일주의적인, 잘못된 발상입니다.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 다수는, 알고 보면, 가난과, '만사 잘 안 되기'가 곧 하나님의 뜻인 양 몰아간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크리스천들은 풍요로우면 안 되고 가난해야 하며, 범사가 잘 되면 안 되고, 되도록 일이 잘 안 풀리고 잘 안 되어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따라서 정상이라는 주장이죠.
소위 금욕적 청빈론이지요. 중세 카톨맄 수도원에서 온 사상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뜻을 우린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자신이 잘 몰라서거나 게을러서 가난해 지는 것을 고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가난에 찌들려 "지지리도" 못 사는 것을 고난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의 가난과 물적 빈곤을 구분해야 하며, 가난과 검소도 구분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번영과 형통을 하나님보다 더 추구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이용하여 번영/형통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짜크의 경우를 이용하기가 쉽지요. 이짜크가 거부가 됐으니 우리도 거부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느니, 거부가 돼도 좋다는 주장입니다.

크리스천 거부가 없을 순 없겠지요. 초기교회 교인들 가운데도 부자들이 있었으니까요(신약성경 요한A서=요일 3'17, 티모테A=딤전 6'17 야코보 5'1).
한국이나 미국에 크리스천 부자들이 많다는 사실,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수많은 기업주들이 대형교회 장로/집사들이지요.
심지어 '목회자'라는 사람들 가운데도 몇 백 만 달러 짜리 호화 저택에서 살고 호화 자동차를 굴리며 사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 크리스천이라면, 덜 가졌거나 가난한 이웃(성도)과 나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가진 것을 나눌 줄 모르고 마냥 끼고만 있다가 죽는 크리스천 거부의 내세는..상급이 기다리긴커녕 불안하고 위험하기만 합니다.
과연 그가, (낙타 같은 몸집의 부자들에게) 바늘귀 같은, 천국문을 제대로 통과했을지요?


하나님은 왜 이짜크를 거부가 되게 하셨을까요?

우리는 왜 아브라함/이짜크/야콥 등 초기 족장들(族長, patriarchs)이 한결 같이 거부였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족장들은 모두 대가족을 거느린, 당대의 소도시국가의 왕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수 백 명의 시종들과 일꾼들을 데리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풍요와 부는 필수적이었습니다. 일꾼들 다수는 족장들이 직접 기르기도 했고, 따라서 살림살이, 무기 쓰기 등 생존술을 익혀 배운, 오늘날의 전문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족장들의 가난은 상상하기 어려운 위기상황이고 수치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 풍요는 필수적이었습니다.
족장들이 자기 가족은 물론 일꾼들까지도 자기 사람으로 사랑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가진 것을 고루 나눠 준 것은 물론입니다.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니까.
게다가 그들은 수많은 가축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일꾼들은 족장들을 왕처럼 섬기며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래서..아브라함/이짜크/야콥 등의 가족들이 대대로, 흉년/가뭄을 만날 때마다 으레 살기 좋고 비옥한 타향으로의 이주를 고려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가족들, 일꾼들을 비롯한 모든 집안 사람들과 수많은 가축들이 다 함께 굶주리다 죽어야 하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과 가축들이 서로 나눠 먹고 생존하기 위해 풍요는 필수적이었지요!


카나안 자체가 본디 그들에겐 타향이고 낯선 땅이었습니다. 
그랬기에 족장들은 땅에서 모두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온 가족이 이국 땅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요와 복을 바탕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였고, 그러기에 더욱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존해야 했습니다.


우리 믿는 한국인/한인들 그리고 기타 나라 출신들은 유대인들이 볼 때 이방인들이고, 비록 혈통으로 아브라함과 아무 상관이 없더라도..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크리스토 안에서!

벤야민족 후손으로 '유대인들 가운데도 유대인'이었던 사도 파울은..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예들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신약 갈라티아서 3장 참조).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누렸던 모든 복을 우리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크리스토 안에서!

이 말은 우리 누구나 아브라함, 이짜크..처럼 거부가 된다거나 거부여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 가운데 풍요하다 못해 혹 거부가 되는 예가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모두가 거부가 될 수도 없고,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믿는 누구나 풍요로워야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기교회는 가난하고 핍절한 사람들, 찌들려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풍요를 누리는 사람들이 덜 가진 사람들과 서로 나눠 가졌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부를 나누고 통용하는, 빈부간 배분의 법칙을 지키며 유지했습니다(행전 2'43-47). 밭과 집이 있는 사람들은 팔아서 교회에 바쳤고 사도들은 그것을 늘 고루 분배했습니다(행 4'32-37).

"이건 내 것" 하고 내세우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빈민/고아/과부들이 교회에서 혜택을 입었습니다.
행전 기자(루카)는 이 사역을 '섬김 사역'(봉사)이라고 명시했습니다.  
훗날엔 사도들이 말씀 전달과 가르침에 집중하고, 집사들이 대신 이 직무와 역할을 맡았지요.

그러면서 그들은 서로 기뻐했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은 신자들을 더욱 배가시켜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합니까?
전체 교회가 잘 부흥되지 않는 원인과 특징들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단언합니다:
크리스천 거부/부자들이 가난한 성도와 기꺼이 나눌 마음이 없다면, 그는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 한 푼 주기가 아까워 걸인들에게 눈쌀을 찡그리거나 찌푸리는 장로들, 집사들은 장로/집사 딱지를 떼야 합니다. 
빈민과 걸인들, 창녀들과 술주정뱅이, 중독자들이라고 해서 예배 참석도 못하게 내쫓는 '성역'화된 교회는 가증스러우니, 교회 딱지를 떼야 합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는 곳 아니던가요? 교회가 '의인들의 성전'은 아닙니다.
사도 야코보는 교인들을 겉차림과 겉모습, 출신성분 등으로 차별하는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지요. 

스스로 배를 불리면서 가난한 교우들 돌보지 않는 목회자들은 삯꾼이지 목자가 아니지요.
그런 사람들은 지도자는커녕 크리스천 딱지도 떼고, 신자이길 포기해야 합니다!

자신이 "경건하다"고 주장하면서 어려움 속의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는, 교회의 부자들,
자신의 돈 힘만 믿고 떵떵거리고 돈 자랑하고 다니며 세속에 물들어 사는 부자들은
매머니스트(맘몬주의자)이지, 크리스천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사회주의자는 결코 아닙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이상향'을 추구하다 실패한 예를 역사가 입증해 주지 않습니까.


이짜크는 믿음의 사람, 의인이었고 동시에 거부였습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풍요로워야 합니다.



티엘티 성도는 누구나 풍요롭고
나누기를 즐기는 사람들이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