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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파울의 기도 묵상

파울의 기도(8)

신약성경 필리포서 1'9-11 

  그리고, 이것을 내가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 가운데서 점점 더 넘쳐 가기를!
    그래서 여러분이 차원 높은 것들을 가려 내어 크리스토의 날까지 신실하고 흠이 없기를!
    예수 크리스토님으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들이 가득해져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돌려지기를! 

    (사역)



그동안 시리즈로 살펴 봐 온 사도 파울(바울)의 기도..
지난 회까지 에페소서의 기도를 끝내고, 이제 필리포(빌립보)서로 넘어갑니다.

금주엔, 위의 바탕본문에서 우선 다음 첫 절만을 다루렵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 가운데서 점점 더 넘쳐 가기를!


서론적으로 잠시 말씀드린다면..필리포서는 알다시피 파울이 당대의 필리포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필리포 교우들은 파울에게 특히 기쁨이 되는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파울이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고, 기도할 때마다 늘 기쁨으로 간구하게 된다고 고백합니다(1'3,4). 필리포서에는 그래선지 기쁨이라는 말이 자주 나타납니다.
놀랍게도 파울은 본서 끝 부분에서 그들을,

    '내 기쁨! 나의 금관(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4'1).

그 정도로 그는 필리포 교우들을 기뻐하고, 아끼고, 사랑했지요.
까닭은, 필리포 성도들이 처음부터 꾸준히 파울의 복음 사역에 참여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에게 기쁨이 된다는 것..참 흐뭇하고 좋은 현상이지요^^. 더욱이 누구를 생각할 때마다, 찾을 때마다, 볼 때마다 기쁨이 다가오고 넘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누군가를 향하여 '오, 나의 기쁨이여!', '나의 금관이여!'라고 외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것도 늘, 언제나 말입니다.

아마도 세상 친구, 내 식구/친척, 아니 나의 단짝, 연인이나 배우자라도 그러기가 쉽지 않을 터입니다. 이 변화무쌍하고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그런 경우는 정말 흔치 않습니다. 조개석변 한다는 말도 있듯, 처음엔 서로 정답던 사람들이 나중엔 "꼴 보기"도 싫어지는 예가 땅 위에 흔합니다. 그래선..안 되는데 말이지요.
서로 기쁨이긴커녕 상대방에게 누가 되고 폐가 되고 걱정과 근심거리가 되어, 심지어 만나기가 겁 나거나 지겨워서 진저리라도 쳐지는 사이라면, 얼마나 안타깝고 불행스런 상황입니까. 


그런데 그와는 정반대로, 필리포 성도들은 파울에게 늘 기쁨이 되는 대상이었다니..
참으로, 복음만이 우리에게 참 기쁨을 갖다 주는 매개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티엘티 독자들도 복음과 진리 안에 이 블로그에서 서로 "만날" 때마다 필리포 교우들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고 즐거움이길 희구합니다.


각설하고요..
그런 필리포 교우들을 위하여, 파울은 위 바탕본문과 같은 기도를 주님께 올렸다는 겁니다.
그가 무엇을 간구했습니까?


먼저 필리포 교우들의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구합니다.
원문에 따르면, 사랑이 점점 더 증강되고 뜨거워지길 바라고 있습니다.
뭔가 좋은 것이 나날이 더 늘어난다는 것은 성숙과 발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주최고의 미덕인 아가페 사랑이 그러길 빈다는 것은 더 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소망이 아닐 수 없지요!

사랑은 점점 줄어들기보다 늘어가야 하는데, 그러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언제나 더 많으니까요.
주님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불법이 성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내다 보셨습니다(마태복음서 24'9-12 참조). 사도들도 비슷한 말세 현상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12 제자들 가운데 가장 막내로서, 가장 오래 살았던 사도 요한이 죽기까지 사랑을 가장 강조했던 사실은 더욱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 요한의 교훈을 포함한 성경을 믿는 사람이 숫자상으로 점점 늘어 간다는데도..
지구 온난화 현상이 무색하게, 거기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사랑은 냉각화돼 간다는 사실은 역설이 아닐 수 없지요.

다행히도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라고 지칭하셨으니, 설령 온 세상의 사랑이 식더라도 우리 크리스천들만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겠습니다.
신자들의 사랑까지 모두 식어간다면, 세상과 다를 바 없으니까.

그런데도 솔직히, 믿는 사람인 나 자신의 사랑이 현재 뜨겁다거나 더 강화돼 간다고 자신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형제를 향한 사랑이 과거보다 지금, 어제보다 오늘 더 늘었다고 말하기가 의혹스럽고 주저되기가 더 쉽습니다.


단적인 예로, 에페소 교회 성도는 훗날 주님께 "첫 사랑을 버렸다"는 선언과 회개하여 되찾으라는 경고 처분을 받기도 했지요(요한계시록 2'4,5).
그러므로 사랑 증강을 위해서는, 주님과 성도들, 이웃을 향해 마냥 뜨겁던 우리의 첫 사랑을 놓치거나 버리지 말아야 하고, 버렸다면 되찾아야 합니다.   
뭔가 점점 더 늘어난다는 것은 이왕 있던 것에 보태어진다는 것인데, 아주 잃은 상태에서는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것이니, 더욱 힘들죠.


그런데 파울은 사랑 증강을 희구하되, 지식과 모든 분별 가운데서 그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떤 지식 말일까요?
성경 말씀과 하나님에 관한, 성령이 주시는 모든 참된 영적 지식이지요. 

모든 통찰/분별이란 말은..영적 대상을 비롯한 주변을 골고루 분별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를 전제로 합니다.
불균형적이거나 대상에 대한 차별이 없는 고른 분별..중요하지요.
우리의 영적 필터링은 그물망에 막힘이 없어야 합니다.    


파울은 이 기도에서 매우 중요한 낱말을 쓰고 있습니다.
바로 '통찰'에 해당하는 원어 '아이스테시스'인데..
신약성경 전체에 걸쳐 이곳 필 1'9에서 단 한 번 쓰인 낱말입니다!
동사 '아이스테노마이'에서 비롯된 이 낱말은, 지각(知覺)/인식/인지(認知)/분별/통찰 등의 뜻을 지닙니다.
감각만의 인지뿐만은 아니고 지적/도덕적인 통찰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지식과 통찰 가운데서 풍성해지다니, 약간 의아스러운 표현일지도 모릅니다만..
아가페 사랑은 영적인 지식과 모든 종류의 통찰을 늘 동반한다는 의미로 보면 쉽습니다. 

여기서의 '지식'과 '통찰'이란, 세상의 것과는 다릅니다.
세상 지식과 인식/통찰은 사랑을 가져오기보다 메마르고 "따갈따갈한" 관계를 조성하기 쉽지요.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닌, 철학과 공론을 낳기가 더 쉽습니다.
또 설령 성경적인 지식과 통찰이라고 하더라도 아가페 사랑을 동반하지 않을 경우 요란한 징과 울리는 꽹과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랑은 맹목적이 아닙니다.
바꿔 말하면, 아가페 사랑은 맹목적 사랑이 아닙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을 닮아, 우리 신자들 가운데도 "사랑이면 다"라는 생각을 갖기가 쉽습니다.
사랑만 있다면, 다른 건 다 여과시켜도 오케이라는 식의 필터링을 할 때가 잦습니다.


예를 든다면, 교계 명사들을 존중하는 나머지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전적으로 아무 비평 없이 사랑으로 선하게 봐 주는 예가 그렇지요. 하지만 그릇된 생각입니다. 비판과 판단, 분별과 검증, 책망과 경고 등은 서로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대원칙 아래 비판과 비평이 무조건 금물이라면, 파울은 대선배 사도 페트로를 책망하지 않았겠지요. 당대에도 교계에 깊숙이 스며든 이단들도 비판과 검증을 벗어나 면죄부 같은 것을 받았겠지요.  

우리는 성도를 함부로 비판해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분별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은 아니지요.

그리고 대상이 과연 참 성도 즉 정말 거듭난 사람인지도 살펴야 합니다. 진정 거듭난 사람이라면, 교계와 세상에서 아울러 '명사'가 될 생각도 않거니와, 또한 그들을 명사로 만들어 주는 주된 힘인 소위 '영성'그룹이나 비밀집단 등과 어울릴 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교계와 세상에 '양다리 걸치기'를 한 사람은 참 거듭난 사람일 리가 없으니까요. 하늘 아닌 세상 시스템에 뿌리 박은 '크리스천'은 참 신자가 아닐 뿐더러 장차 뿌리 뽑힐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들은 속여도, 하나님을 속일 순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만홀히 여기심을 받지 않으십니다!
 

눈 먼 말이 워낭 소리 듣고 따라간다는 격으로, 크리스천의 사랑은 맹목적이어선 안됩니다.
아가페가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해서 맹목적 사랑을 뜻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소위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많은 명사들이 그런 엉뚱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사람들이 한껏 존중하고 경애하는 알버트 슈바이처, 테레사 수녀, 헨리 나웬, 헬렌 켈러 등 소위 명사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인류애' 내지 박애정신은 크리스토의 사랑 같은 참 인류애(!), 곧 하늘 사랑인 아가페도 아닙니다.

교계에도 그런 사람들이 매우 많고, 점점 더 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소위 에큐메니즘 정신으로 '포용적'/'관용적' 기독교를 믿는 그들은, 타종교인들은 예수님을 몰라도 구원 받을 순 있다고 주장해 왔고..불못이라는 지옥도 믿지 않으니까요. 그들의 '복음' 메시지와 언론 대담 내용은 서로 상반될 만큼 이중 플레이를 하기도 합니다.


또한 크리스천의 참 사랑은 무지한 사랑이 아니지요.
영적 지식과 분별을 꼭 필요하며, 따라서 동반/병행돼야 합니다.
구약 성경때부터 신약까지 맥맥히 이어진 두 굵은 흐름이 있는데..바로 진리와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양대 속성입니다. 구약 용어로는 '에메트'와 '헤쎄드', 신약에서는 '알레테이아'(=아멘)와 아가페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서로 분리시켜 전자는 "잔인한 폭군", 후자는 "사랑의 신"으로 흔히 이해합니다. 그런 오착된 생각을 했던 대표적인 인사가 (스베덴보리의 정신적 추종자였던) 헬렌 켈러였지요.
미안하지만..그런 생각의 뿌리는 성경이나 선한 생각이 아니라, 본래 악마적 발상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나 켈러는 사실상 루키페르를 섬기는 신지학/메이슨리 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그런 그릇된 사람들에게 참 사랑에 대한 인식이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티엘티에서 늘 강조해온 말이지만, 사랑은 진리와 나란히 함께 갑니다.
헤쎄드/아가페는 본질상 에메트/알레테이아를 동반합니다.

그러므로, 파울이 여기서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 가운데 풍성하기를 빎은 곧 우리의 사랑이 진리와 병행되기를 간구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흔히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우는 요한은 사랑하는 이방인 제자 가이우스가 늘 진리 안에서 행동한다는 소식에 너무나 기쁘다면서 "나는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 걸어 간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소!"라고 고백합니다(요한C서=요삼 3,4절).   

무슨 뜻인가요..?
사랑은 진리와 늘 함께 하고 함께 간다는 말이지요!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코린토A=고전 13'6).
성경과 기독교의 이 절대원칙을 우리는 결코결코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파울의 기도를 따라, 우리의 사랑도 맹목적이거나 무지하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가 섬기는 진리의 앎에도 사랑이 결여되길 원치 않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진리 안에서 우리의 사랑이 나날이 성숙하고 증강되기를! 

티엘티 성도들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 가운데서 점점 더 넘쳐가기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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