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별과 검증/현대영성비평

모래 교회 짓기

 


모래는 좋은 것입니다. 천연 재료입니다. 콘크리트 중심인 현대 건축에도 반드시 모래가 들어 갑니다.

그러나 좋다고 해서 늘/곧 진리는 아닙니다. 모래가 좋다고 해서, 모래성이 좋은 집, 훌륭한 건축물입니까? 모래성은 모래성일 뿐입니다. 아무리 잘 지어도, 모래성이 페트라 같은 바위성이 되어 주진 않습니다. 근사하게 잘 지은 모래집은..장난 같은 사진 모델은 몰라도, 건축협회나 상공회의소의 시상감은 아닙니다. 

아무리 모래가 정답고 좋기로서니 모래바닥 위에 그대로 집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모래를 섞은 콘크리트 집이 진짜 돌집일 수는 없습니다.

모래성은 바닷가에서 아이들이 놀며 장난 칠 때 쌓기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엄마가 부르면 쌓던 성도 놔 두고 자리를 떠야 합니다. 또는 모래성 쌓기 대회 때 기분 내고 상도 타니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뿐입니다. 사진으로만 "영구히" 남을 뿐입니다.
 

자, 모래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가 혹..모래 위에 세운 모래성 교회는 아닌지요? "우리 교회는 돌로 된 교회야. 아주 단단해! 모래교회가 아냐!"라고 단언하는 목회자들이 없지 않아 있겠지요. 아니 꽤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무 때고 그렇게 자신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과연 우리 교회가 정말, 바위처럼 단단한 진리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까? 한 번 여러분 교회 교우들에게 그렇게 물어 보십시오. "우리 교회는 모래 교회야. 금방 무너질지 몰라.." 하기 보다는..대개는, "글쎄요..잘 모르겠는데요." 하기가 더 쉽지 않을까요? 혹 겸손해 뵈느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겸손 찾다간 위험하지요.

    "천만에! 우리 교회는 바위 교회야. 암! 단단해."

오, 그래요? 우와! 그런데, 글쎄요..정말 그런가요? 아니면 짐짓 사역자에게 다소나마 힘이 되라고, 또는 눈치껏 잘 보이느라고 그 손을 들어 주는 겁니까?

정녕 저렇게 대답할 수 있다면, 그 교회의 교우들과 사역자들, 차세대까지도 정말 복됩니다!..마는..과연 그 정도로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제가 지금..말장난 하자는 겁니까?

바위 교회냐, 모래 교회냐-이거 아주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미래의 상급과 심판에 관한 문제니까요!
그 교회가 모래 교회인지 바위 교회인지는 설교 시간에 자리에 앉아 잠시 들어 보면, 대개는 느낌이 올 수 있습니다. 제대로 영적으로 깨인 사람이 들으면 더구나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모래 위에 세운 집과 바위(딴 표기: 반석) 위에 세운 집을 말씀하실 때, 모래와 바위는..뭘까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바위는 곧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뜻합니다. 성경 도처에 하나님은 바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비유적/상징적 성호(거룩한 호칭)의 하나가 바위라는 것입니다.

예호바님-예수 크리스토, 주님 자신이 곧 바위입니다! 그 분이 오직 진리이시기 때문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자임하셨지요.

그럼, 모래는 뭘까요? 진리가 아닌 모든 딴 것들이지요. 성경 아닌 딴 것..딴 자료, 딴 소재, 딴 불..다른 향불..진리 자체나 진리에 근거한 것이 아닌 경우..가령 헨리 나웬 등 '명사'들의 어록을 긍정적으로 인용하는 것, 교우들을 잘못되게 호도하는 기타 이상한 예화들 등이 '딴 것'일 수 있습니다. 

나웬과 그의 어록이 진리이던가요? 천만에.. 진리 비슷해 뵈지만, 실상은..아니지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그 분이 지시하시지 않은 어떤 재료도 쓰지 못하게 엄격히 규제하셨습니다. 비슷한 것도 쓰지 못하게.

아득한 고대의 제사법도 그랬고, 노아의 방주도 그랬고, 회막(성막)의 소재도 그렇고, 성막 안의 모든 도구나 재료도 그랬습니다.  사제들이 실행하는 제사법도 그랬지요. 심지어 향단 위 향재를 태울 향불도 아무 불이나 갖다 쓸 수 없었습니다. 딴 불을 쓰다가 저주 받아 즉사한 사제들-나답과 아비후- 기억나시죠? 우리가 나답/아비후의 전철을 밟아선 안 되겠지요.

우리 교회가 바위 같은 진리 위에 섰는지 안 섰는지, 아니면 거미줄로 방귀 동이듯 허무맹랑한 모래 바닥 위에 모래로 쌓아 세워졌는지 어쩐지는 설교 시간이나 성경공부 시간을 들어가 보면, 이내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또 그 설교자/교사..아니 그 교회 교우들의 말만 몇 분 내지 몇 십 분간 들어봐도 그럴 수 있지요. 안 그렇던가요?
 
모래는 좋은 것이니까 어느 정도는 쓸 수 있겠지요. 그러나 들어가 살 집으로 모래집을 지을 순 없습니다. 금방 무너져 모래범벅이 되어 도로 기어 나와야 하니까요!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모래교회에 살 순 없는 것입니다. 영혼이 다 죽어버린 시체가 아닌 이상.
 
눈에 모래가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모래 교회에 살아선 안되겠지요.


설교 시간이나 성경공부 시간에 예화가 전혀 없을 순 없겠지요. 그러나 그 예화가 본문보다 더 강조되거나 그 예화 자체가 바위 같은 진리 위에 선 것, 진리를 통해 탄탄한 열매로서 영근 내용이 아닐 때, 모래 섞인 돌-사석(沙石) 같은 것입니다.
모래 사 자 사석은, 겉 보기엔 그럴 듯한 게 돌 같은데, 힘을 주면 파삭파삭 부서져 버리는 와해성 바위입니다. 모래집이나 사석집이나 본질상 대동소이합니다.

우리 교회가 모래 교회나 사석 교회라면, 곤란하지요. 불행한 일입니다.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해서는 물인지 술인지 분간이 안 갑니다.

자, 눈 뜨고 우리 교회 실상과 현실을 바로 봅시다! 직시합시다. 과연 우리 교회가 늘 단단하고 든든하고 탄탄한 바위 교회인지..아니면, 늘 퍼석퍼석해서 언젠가 여차하면 이내 팍삭 무너질 모래 교회인지.

진리에 적당히 비진리를 가미한 건 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잡동사니 콘크리트나 사석일 뿐 바위가 아니지요.

성경 본문에다 교계 명사의 어록 등 영 아닌 예화들을 적절한 검증과 비평 없이 마구잡이로 갖다 섞어 가며, 진리 비슷하게 포장하느라 애쓰는 설교자/목회자/교사/사역자/지도자는 모래 교회 내지 사석교회를 짓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강단에 수시로 초청 받아 사자후하는 명사들도 마찬가지. 책 쓰고 이름 내고 얼굴 내다 말발 좋아 뽑혀 와서 '사례비', 강의료나 챙기는 모래성/사석성 강사이기가 더 쉽습니다. 이름도 내고 얼굴과 허우대도 내고 돈도 왕창 벌고..그러면서 바위 위에 바윗돌로 단단히 집 짓고 탄탄하게 진리 말씀으로 무장한 명사/능변가가 얼마나 될까요? 그런 명사, 손 들어 보라고 하세요. 누군지 보여 주세요. 보나마나, 아주 드물 겁니다. 거의 없거나 아주 없을 겁니다.

성경의 초기 교회에 그런 명사가 있던가요? 우리가 가장 잘 아는 페트로와 요한, 파울.., 그들의 자기 어록이나 전기 따위의 명저를 내고, 돈 벌고, 이름 냈나요..? 상상은 자유지만, 착각은 금물이지요. 
 
오늘날 교계에 흔해 빠진 명사 명사 명사들..이름만 번드르르~하고 거품만 가득하기 쉬울 터입니다. 진리의 '폼'만 낼 뿐 진리의 알맹이가 없이 '속 빈 강정'이기가 십상이죠.

독자들, 교우들은 자기 교회 사역자들을 잘 살펴 보세요. 진리의 질긴 가죽 허리띠를 띠고 있는지, 아니면 마른 풀줄기로 엮은 허리띠를 맸는지. 주일마다 날마다 진리의 나팔을 불고 있는지, 요란한 징, 꽹과리나 울리고 있는지. 겉은 초라해 뵈도 단단한 차돌처럼 성경의 올곧고 바른 말만 하는지..아니면 맨날 시간마다 주로 바람 잡는 세상 예화나 들면서 울리고 웃기기 바쁘거나 걸핏하면 명사 타령과 명저 타령이나 하고 헛소리만 남발하여, 결국 청중이 헛물만 켜고 머리 속에 남는 진리가 도무지 없는지를 유심히 살펴 보세요.

때마다 시간마다 분별하고 검증하세요. 존중하고 말씀 듣는다고 그들의 헛소리까지 다 받아 주진 마세요. 교회가 검증 무풍지대여선 안됩니다.

성경은 '무조건 긍정주의'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무조건 절대 긍정주의는 노먼 빈슨 필 '목사'(프리메이슨 스카티쉬 라잍 33단)가 가르친 뉴에이지 철학일 뿐, 진리가 아닙니다. 그런 절대 긍정주의는 마지막 시대에 최악의 독재자 짐승의 노예들인 그 백성들이나 가질 태도입니다.

성도는 긍정과 부정의 균형을 갖춰야 합니다. 예/아니오가 분명해야 합니다. 아무 데, 아무 때나 아무 강사한데나, 아무 말에나 "아멘!"하고 대답하는 게 참 믿음이 아니지요. 아멘은 "참으로 그렇습니다"라는 뜻인데, 강단에서 마구 쏟아지는 진리의 말씀 아닌 헛소리에 마구 '아멘' 하다간.."참으로 나는 밥통입니다"라는 자인 밖엔 아닐 터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진리 말씀에만 예, 아멘이라고 긍정할 뿐입니다. 강단에서 마구 주절대는 비진리의 헛소리에 무조건 '아멘' 할 순 없습니다. 무조건 긍정, 무조건 아멘을 요구하는 설교자는 독재자입니다! 
만만한 성도, 엉성한 청중이 아님을 설교자에게 딱 부러지게 보여줘야 합니다.
다수가 비진리에 '아멘'으로 따라가도, "그래도 나는 아냐!"라는 되바라진 버팀이 필요할 때입니다. 

오늘날 진리로 허리띠를 띤, 하나님의 완전무장(온몸갑옷/전신갑주)을 갖춘, 정말 제대로 무장한 영적인 전사들은 희소 가치가 있습니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은 적은 수입니다. 다수가 아닙니다.

세상이 다수 중심으로 움직이듯, 요즈음 교계도 다수가 지배합니다.
다수의 '트렌드'가 판 칩니다.
명사들이 좋아 뵈니까 저마다 좋다고 지지하며 한데 뭉쳐 다수가 돼 갑니다. 트렌드의 거대물결을 이룹니다.

그러나 심판의 쓰나미가 다가올 때, 그들의 결과는..탁류 위의 쓰레기 같습니다. 썩어 악취가 날, 폐허더미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진리로써 분별하고 비평하고 검증하자고 하면..다 부정주의/독선주의/근본주의로 몰아 갑니다. 소외시키고 외톨이로 몹니다. 교계의 코너로 닦아 세웁니다. 그러면서 자기네는 소금과 빛 노릇을 제대로 하는 양 큰 소리를 떵떵 치며 삽니다.

진리대로 살자는 사람들은 그래서 자연히 소외되고, 따라서 늘 소수입니다. 그러나 오뚜기 같고, 단단히 박힌 차돌바위 같은 사람들이지요.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고 쓰나미가 덮쳐도 흔들리거나 뽑히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모래 교회를 짓는 사람들..불행합니다.
지금은 모래알이 반짝거리고 좋아 보여도, 나중 두려운 심판이 다가올 날, 맥 없이 팍삭 무너지고 스르르~ 스러지니까요. 그 날 그 앞에 주저앉아 통곡해 봐야 너무 늦습니다. 
만회할 길이 없어요!
모래 교회는 그냥..허망한 모래집일 뿐이니까요.
환멸이죠. 


그러나..
진리의 그 바위 위에 돌집, 바위 교회를 짓는 사람들..복되어라!
심판 날에도 끄떡 없이 남아 굳게 서 있을 그들의 집, 그들의 교회는
주님께 길이 칭찬 받고 영원한 상급 받으리.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