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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굳델의 르네상스






데니스 굳델의 르네상스




1980년대는 미주 한인교계의, 일종의 '영적 르네상스'였다고 할 만한 시기였다. 

로스앤젤레스에 이어 뉴욕시나 기타 지역에서도 '성령운동'이 일고 있었다. 한국과 서부의 기라성 같은 여러 강사들이 초청받아 "화끈한" 부흥집회가 연신 열리면서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성령을 받아모시거나, 방언(이하 영언/灵言)[각주:1]을 하거나, 은사와 권능을 받아 충만해지곤 했다. 영적 분별로는 어땠는지 모르나, 적어도 당시의 열정만은 자못 순수했던 것으로 회고된다. 


당대에 활약했던 주요 강사들 가운데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솥뚜껑 같이 투박한 손바닥으로 대상자의 머리를 한 방씩 탁 탁 치면 뚜르르 혀가 말리거나 구르면서 으레 영언이 터져나오곤 하던,  강력한 어노인팅으로 유명했던 한국 모 기도원의 L 목사도 있었다. 


L 목사의 '천한 자와 귀한 자'라는 간증서를 보면, 그는 심지어 당대 최고의 미인 배우였다는 일리저벹 테일러의 호화 저택을 방문하여 '축복 안수'를 해 주고, 내친 김에 그녀의 화려한 욕실까지 구경했단다! 

참 드물고도 절묘한(?) 일화인 거 같다. 테일러는 생애에 무려 7번(!) 결혼했고, L 목사에게 안수 받을 무렵도 이미 몇 차례 결혼을 거듭한 후였다. 주변 스캔들이 잠들 새 없었고 결혼과 이혼을 밥 먹듯 떡 먹듯 하는 테일러의 행태를 보다 보다 못한 일부 정치인들과 바티칸 교황청까지도 이젠 좀 그만, 작작하라고 쌍수를 들고 나서서 그녀를 말리던 상황이었다.  



그린 듯 짙은 눈썹에다 연보라빛 눈동자의 남다른 미모 때문에 너무나 일찍 출세해 버린 일리저벹 테일러는 성인이 되던 18세에 힐튼 호텔 업주인 힐튼 가문의 칸랟 힐튼과 첫 결혼을 했다. 당일 식장과 교회당을 채운 하객들만 무려 3,600명! 그렇게 해서 둘은 1950년대에 베벌리 힐즈가 내려다 뵈는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살았다. 


첫 남편에게 물려받은 베벌리 힐즈 저택을 판 한참 후, 버지니아 주의 농장과 조지타운 타운하우스에선 (6번째 남편인) 좐 워너 상원의원과 함께 살았다. 그러던 1980년대초는 캘리포니아 벨 에어의 한적한 숲속에 있는 4-베드룸 저택을 장만해, 친구인 디자이너 월드 퍼난데즈를 초청해 실내 장식을 새로 했을 당시였다. 아마도 테일러는 L 목사를 초청해 새 집을 축복해 주길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바탕이 유대인인 테일러는 결코 기독교로 개종한 적은 없다. 

남편을 다섯이나 두고도 참 남편이 없다며 예수님께 고백하여, 마침내 참 메시아로부터 구원의 복음을 들은 사마리아 쉬카르 우물가의 여인이 되어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테일러는― 복(??)인지 저주(!!)인지―그렇게 많은 멋진(?) 남편들을 두고도, 아뿔싸~, 정작 현대의 우물가 여인이 될 복은 못 받았다. 


퍼난데즈가 꾸민 벨에어의 새 집 벽엔 아트 딜러이자 미술관장이었던 테일러의 아버지가 구입한 인상파 화가들의 명작을 즐비하게 걸어 두고, 정원에는 온갖 장미꽃을 심었다. 이런 배경이 훗날인 1987년, 테일러가 자기 라인의 향수를 제작 판매하게 된 동기와 영감이 되기도 했단다. 

이 모두가, L 목사가 축복 안수를 해 준 덕일까? 아니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니만큼 기본적으로 전수한 복 때문일까? 참고로, 1980년대는 하늘을 찌를 듯하던 그녀의 인기가 갓 시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래서 더구나 안타까워 유대인의 분복을 넘어 기독교계의 복까지 더 간구했는지도 모른다. 축복기도를 해 준 L 목사가 그 두꺼운 손바닥으로 테일러에게 어떤 두터운 후사(厚謝)를 받았는지는 필자도 알 길이 없다.  



그런가 하면, 북한군 출신으로 한국전 당시 전쟁 포로였다가 나중 목사가 되고, 마침내 "구수한 달변"의 유능한 부흥강사가 된 C 목사의 집회도 대단한 열기를 내뿜곤 했다. 그는 청년 시절 기도원에서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 바위 위에서 홀로 기도했으나 "비 한 방울 맞지 않은 채" 기도원 숙소로 돌아왔다(?)는 기적의 일화로 유명했다. 과거 걸인들을 위한 교회도 세운 그는 성실성과 친근감 때문에 최근까지 반평생 미주 한인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그밖에도, 동부의 영적 르네상스에 기여한 강사들 가운데 한국과 서부의 K 목사 3인방이 있었다. 

돌아보면, 본디 미국 개척사는 미 대륙 도처에 사과씨를 심었던 '좐 애플시드'처럼[각주:2] 동부 사람들이 서부로 옮겨 가며 훑은 스토리였고 조너턴 에드워즈의 초기 각성운동도 그랬으나, 미주 한인계 영적 르네상스 바람은 반대로 서부에서 동부로 와서 훑다시피 한 것 같다. 미주 한인계의 또 다른 자체 강사로, 장풍 같은 손바람(?)으로 늘어선 청중을 태풍 아래 벼 이삭처럼 쓰러뜨리던 Y 목사도 있었다. 그 역시 본래 서부 출신으로 나중 동부로 이주해 왔다. 


그런 가운데 세 K 목사들은 모두 '베뢰아' 계열로 불렸으나, 훗날 교계에 베뢰아 이단설이 나돌면서 물의를 빚자, 서부의 2명은 서바이블 차원(?)에서 베뢰아 대표인 K 목사와의 묵은 관계를 단절하기도 했다. '장풍 쓰러뜨림' 은사의 Y 목사도 훗날 '이단' 단죄론이 일어 옥신각신 했으나 어찌저찌해 간신히 무마된 듯 했고, 초기 국내 신사도운동가의 주요 인사로 꼽히던 친형 Y 박사가 적극 변호에 나서기도 했다. 



그럴 즈음 한 명의 미국인 집회 강사도 동부 한인 교계에 데뷔하여 나섰다. 

데니스 굳델(Dennis L. Goodell 다른 표기: 데니스 굿델). 역시 서부 출신인 그도 역시 미주 한인교계의 초청으로 동부를 찾아와 북적거리는 집회로 휩쓸고 다녔다. 그 역시 강력한 어노인팅(?)으로 뭇 누리를 누비면서 진한 인상을 심곤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이 낫거나 성령을 받고 영언을 하거나 했다. 굳델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도 그랬으니까, 미국 강사로서 한인 교계와의 연줄로는 퍽 장수한 셈이라 하겠다. 


필자도 어느 해 어느 날, 소문에 따라 뉴욕시 퀸즈 구의 서니사이드에 있던 모 중형 교회에서 열린 굳델 집회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한 적이 있다. 유학 간 지 얼마 후의 일로, 타국에서 심경이 좀 "답답하고 컬컬하던" 시기였다. 역시 신유와 성령 받기가 중심인 집회였다. 그 곳은 한인들의 호응이 대단하여 후끈한 열기가 감돌았다. 


필자가 참석한 둘째 날 집회 전이었다. 주최측 인사중 한 명인 J 목사가 강사를 모시러 굳델의 호텔 룸을 찾았다가 "안수도 안 했는데 당신 혼자 방바닥에 쓰러져 영언(방언)을 시작하시더라"며 자신이 외려 놀랐다고 굳델 목사가 설교 때 드러내어 밝히는 통에, 온 청중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J 목사의 얼굴이 붉어졌을 법하다. 강력한 보수주의자로 유명한 J 목사가 그 후 영언을 지속했는지 어쩐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랬던 굳델 목사는 2006년 12월 4일, 불과 62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죽은 곳은 오클라호마 주 털사. 장례는 나흘 후인 12월 8일 헤리티지 연합감리교회에서 치러졌다. 묻힌 곳은 오클라호마 포트 깁슨 국립묘지. 어떻게 왜 죽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열정적으로 사역하던 그로서는 퍽 아까운 나이가 아닐 수 없다! 왜 그가 그렇게 일찍 가야 했을까? 

교회 묘원도 아니고, 하필 왜 국립묘지에 묻혔을까? 더군다나 그의 묘비도, 그의 사진도 자그마하고 초라하다. 왜..? 명 부흥강사의 화려한 생애 끝에, 겸손과 겸비의 화신이기라도 해야 했다는 말일까?



알고 보면, 굳델은 베트남 전쟁 베러런(=베터런, 퇴역장병)이었다. 국립묘지에다 단출한 묘비 아래 묻힌 이유가 그것이다. 그는 베트남 전에 해병대 일병으로 참전했다가, 전쟁 통에 목숨이 위급한 상황 속에서 향후 '사제' 내지 '사도'가 되기로 결심하고 살아남았다고 한다. 


굳델은 감리교 소속 목사였으나 초교단성이 강해 다양한 교파와 교단을 넘나들며 연합 집회를 이끌곤 했다. 1982년 5월 17-21일에는 세계복음화대회 서울 집회가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열렸는데, 당시 굳델과 조용목, 이만식, 오관석, 피종진, 최춘호 목사 등이 주강사였다. 

듬직한 체구에 느릿한 동작의 그는 흡사 한국의 L 목사를 연상시켜, 나름으로 부르건대 '미국의 L 목사'라고 할 만 했다. 



굳델은 본디 서부 로스앤젤레스 근교 출신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동부를 휩쓸고 다니다 오클라호마까지 왔을까? 간추린 그의 생애 여정을 더듬어 보는 사람들은 한 가지 의아스런 점을 발견할 것이다. 

그가 오클라호마로 이사오기 전, 캐나다에 거주했었다는 사실이다. 캐나다?... 어쩐 일로? 그의 삶에 왜 그런 의문의 시공간이..? 


궁금해져 좀 더 추적해 보면, 문득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https://www.sandiegoreader.com/news/1979/dec/20/scoops/


눈이 의심스러워 이 굳델이 그 굳델이 맞는가 살펴 봐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기사 내용인즉, 지난 1978년 3월 당시 캘리포니아 엘 카혼에 거주하고 있던 '텔리밴젤리스트 겸 신앙치유사', '브라더 데니' 데니스 굳델은 자신에게 상담을 바라고 나아온 열일곱살의 정서불안증 소녀를 '상담'해 주다, 그만 불법 성관계를 맺은 일이 있었다. 이 때는 그가 마르타 매기네스와 결혼한 지 약 10년째 되던 해로[각주:3], 둘 사이엔 모두 6 자녀가 있으니까, 아내가 임신했던 "민감한" 시기가 아닌가 추측된다.  


굳델은 이 혐의로 그 해 5월 체포돼, 이듬해인 1979년 카운티 교도소에서의 90일 구류형과 함께 5년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뒤, 뉴멕시코에 거주했다. 현지 언론 샌디에이고 리더의 기사로 밝혀진 사실이다. 

굳델은 석방 후 여기자 브레타 로스에 의한 (3부 구성!) 인터뷰에 응하여, 자신의 여정과, 현 심경과, 교회 상황 등에 대하여 밝힌 바 있다. 아마도 회개의 심경이었겠지. 그의 나이 35세 때였으니 젊은 한 때 피가 들끓다가 저지른 일대 실수였을 법하다. 

이래서 캘리포니아에서 뉴멕시코에 옮겨 거주하던 굳델은 일시 캐나다로 사역차 피신(?)을 갔다가, 나중 오클라호마로 오게 된 것으로 헤아려진다. 


바로 이 굳델이 불과 얼마 후 동부 한인 교계와 한국 교계에까지 손을 뻗어 거창한 집회를 이끌곤 했던 것인가! 젊은 시절 소녀와의 '섬띵'으로 형사 처벌까지 받은 그가, 부흥강사가 되어 세계 곳곳에서 활약했던 것이다. "아니, 그 분이 그랬을 리가? 그런 억측은 하지 마라!"고 하고픈 사람들은 그의 세 누이, 형제가 아직도 (당시의 범죄 현장에 가깝던) 샌디에이고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기 바란다.  



아무튼 아마도 이 범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그의 영적 저력이 된 모양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회복을 위한 아내 마르타의 정성이 대단했던 것 같다. 이 때문인지 복을 받아 둘의 손자손녀들도 11명이나 된다.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다. 

중세로부터 르네상스기에 이르던 시기에 사회와 종교계에서 온갖 희한빠끔한 일들이 벌어지곤 하여, 당대 작가들이 앞다퉈 기막힌 글들로 엮어 남겼는데, 이런 현대의 '영적 르네상스'기에도 별의별 희한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었을 테니, 아마 이것도 그중 한 대표적(?)인 일화였다고 할 수 있을지? 


아니, 데니스 굳델 자신의 역사가 가히 하나의 작은-아니, 큰(!)-영적 르네상스를 통과한 것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의 묘비엔 다음 성구의 숫자가 새겨져 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 어찌 그의 영적 르네상스에 걸맞지 않으랴!



  1. 왜 방언을 영언으로 칭했는지는 나의 다양한 관련글에서 설명한 바 있다. 검색어: 영언 [본문으로]
  2. 그는 이단종파인 (스베덴보리의) '새 교회' 간판 교도의 한 명이었다. 헬렌 켈러도 그랬다. [본문으로]
  3. 굳델은 1968년 1월 20일 캘리포니아 두아르테에서 결혼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