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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영언(방언)론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방언?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방언?

―S교회 송x근 목사 설교 고찰





서론적인 얘기를 먼저 좀 한다. 

중대형교회 목회자로서 다수 교인들을 청중으로 두고 지내다 보면, 아무래도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자기 말에 무게를 두기가 쉽게 된다. 그러나 크리스천 리더의 말의 무게는 그 무엇보다 성경에 두어야지, 자칫 자기 생각에 더 비중을 두다간 언젠가 벨샤자르(벨사살) 왕처럼 '메네메네 테켈 우퐈르신'이라는 단죄를 받을 수도 있다(구약성경 다니엘서 5'25 참조). 바꿔 말하면, 겸손 쪽보다는 교만 쪽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굵직한 미디어를 통해 세상과 교계에 자신의 설교를 널리 뿌리는 목회자나 교계 인사들은 그만큼 언변과 내용에 자신이 있고, 또 "관록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또한 자신이 이끄는 교회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을 터이다. 물론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감에서 그렇게 한다지만, 설교자/목회자라고 해서 누구나 쉽게 그럴 수 있는 형편은 되지 못한다. 

정기적으로 자주 "미디어를 타는" 설교가들에겐 그만큼 자기 말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성경과 교리와는 다른 종류의 말을 했다간, 금방 문제가 되기 십상이다. 이단성 인사나 발언들도 흔한 요즘이기 때문이다. 또 '유튜브' 따위의 대외 미디어가 활발한 요사이는 자기 교인들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도 상당한 신경을 써야 하게 됐다. 안 그래도 청중은 나날이 더 기독교에 관해 알아가고, 성경이나 기독교 진리는 잘 몰라도 기독교에 관해 보편적인 생각 또는 자기 나름의 인식을 갖고 있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중대형 교회 목회자들은 남들보다 자기 처신을 잘 해야 한다. 무엇보다 언행에서 말이다. 

복음을 전하되, 성경대로 민감하게 바로 전달해야 하는 사명이 나날이 더 중시돼 간다. 

더구나 성경은 경전이기 때문에 해석상의 차이라는 게 존재한다. 본래 성령의 영감을 받아 쓰인 것이긴 하나, 그 초기적 진의를 밝히려는 노력, 또는 반대로 자의적 해석을 하려는 과정 때문이겠다. 



송 목사의 Openness


수많은 교회 목회자들처럼 삼x교회의 송x근 목사도 미디어를 통해 다양한 주제의 설교를 내 놓는다. 유튜브에는 수 년 전 송 목사가 행한 '성령과 방언'이라는 설교가 떠 있다[각주:1].


영언 이슈는 오래 전부터 교계에서 '신발 속 뜨거운 감자' 노릇을 해 왔다. 그런데 송 목사는 용케도 이 뜨거운 감자를 피하지 않고 도전하되, 영언에 반대하지 않는다. 청중에게 영언을 "열심히 하라"고까지 한다. 심지어는 필히 청교도적 개혁주의 입장까지 포함한 (영언이 역사 속에서 중단됐다고 주장하는) 소위 '중지론(Cessationism)'을 "악마적 속임수"라고 대담하게 극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즉 그에 따르면, 청교도 사상과 개혁주의적 입장의 일부인 중지론은 "악마적"인 셈이라는 논리인 것이다. 하기야 사도 페트로(베드로)까지도 때로는 악마적일 수가 있지 않았는가. 



이 정도면, 송 목사는 개혁주의권 설교가로서는[각주:2] 상당히 열려 있는 분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송 목사는 우선, 이 설교에서 개혁주의권에 흔한 이른 바 '중지론(필자는 종식론이란 용어를 선호한다)'을 강력 반대하는 입장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특히 코린토A서(고전) 12'7을 인용하면서, 원문상 "유익하게 하려 함이라"는 '공동의 유익'이라고 번역했어야 한다면서, 공동의 유익은 곧 교회의 유익을 가리키니 그 시대에만 국한된 은사였다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고 변증한다. 

더 나아가 그는 13장 10절의 온전한 것은 다시 오실 예수 크리스토에 대한 종말론적 관점에서 사도 시대에 국한된 게 아니라 재림의 때까지 연장되는 것이며, 따라서 '국한'설 곧 중지론은 성령의 역사를 제한시키는 결과라고 역설한다. 필자도 물론 거기 동의한다. 



중지론 아닌 '중도론'? 


그런데.. 송 목사는 영언을 선호하거나 호감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초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흐려진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묘하게도 정작 교회에서의 영언 활용에 대해 내적으로 모종의 '브레이크'를 거는 듯한 느낌조차 든다. 그의 논조는 교우들이 방언(필자는 '영언'을 선호한다)을 적극 하게끔 딱히 권장하는 내용이 아니라, "할 테면 해라..그런데 굳이 뭐..?" 이런 식이다. 어정쩡하다. 비영언자들에게 "영언이 꼭 필요한 건 아니로구나~" 하는 안도감(?) 같은 것을 갖게 할 정도로 말이다. 


송 목사의 영언관은 중지론은 전혀 아니나, '중도론(中途論)'이라고 해야 걸맞을 성 싶다. 또 자신이 현재진행형 영언자인지, 아니면 영언을 향한 '구도자'인지도 분명치 않고 아리송하다. 필자는, 과거 어떤 교계 명사가 상당기간동안 '성령집회'라는 것을 주최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영언을 하지 "못하던"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지도자나 설교자는 리더로서 이런 점에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그는 영언에 대한 네 가지 견해-1) 적극 부정하는 견해, 2) 소극적 부정, 3) 지나친 은사주의, 4) 지나친 긍정은 아닌데, 적극 인정하는 견해 등을 나열하기도 한다. 그런데 소위 '영언 연습'이라는 활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은사는 주신 분의 자유에 있다..."라는 말을 한다. 

"은사는 주신 분의 자유에 있다."는 말 자체는 틀리지 않는다. 각종 개인 은사는 성령님의 뜻대로 분여(分與)되기 때문이다. 


그런 송 목사에게 어폐가 있다면 어떤 부분일까? 초기 영언만은 신자 개인 쪽의 자유이지 분여자이신 성령 쪽의 '자유'가 아닌데도, 이 점을 아직 모르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영언을 연습하기보다는) 그냥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평생 가세요!"라고 대뜸 선언해버린다.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평생 가다니, 안 주긴 누가 안 준다는 것일까?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 아니라, 안 주시는 분이라고? 안 주려는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가 부추겨대는 부정적 의식 탓이 아닐까? 

첫 교회의 120 성도 전원에게 예외없이 영언을 말하게 하신 분이 지금은 주실 수도 있고, 안 주실 수도 있는 분으로 바뀐 것인지? 그것이 곧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일까? 여기에 일부 개혁주의 신앙인들의 깊은 오해와 모순이 있는 것이다. 송 목사 자신이 영언의 본질을 곡해한 것이고, 동시에 교인들을 오해시키는 말이다. 



"안 주시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이 자기에겐 영언을 "안 주신다"고 주장한다. 또 자신은 영언을 "못 한다"고도 고백한다. 하지만 오해이고 잘못된 고백이다. 하나님은 약 2000년전 오순절 당일 성령강림과 더불어, 당대의 첫 신자들과 더불어 그때로부터 앞으로 올 모든 세대의 모든 미래 신자들에게 영언을 할 수 있는 언변을 주셨건만, 단지 본인이 믿음으로 안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안 주신다", "못 한다"며 의혹과 불신과 낙심의 고백을 할 게 아니라, "이미 주셨다, 내가 믿음으로 영언을 시작하면 된다"고 고백하고 믿음으로 입을 열고 혀를 움직이되, 모국어로 할 게 아니라, 주어지는 첫 발음으로 어린아기가 옹알이를 시작하듯, "이상한" 발음의 첫 언변을 떼어야 한다. 한사코 모국어로 기도하며 떼를 쓰는데, 어떻게 새 언어가 시작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한사코 권능자 또는 능력자의 안수를 받아야 영언을 할 수 있다는 한결같은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있는데 물론 안수로 영언을 시작할 경우도 없지 않지만, 우리 생각해 보자. 오순절날 120 성도들이 누구에게 안수를 받았는가? 카페르나움(가버나움)의 코넬리우스(고넬료) 가정교회 전원이 영언을 할 때, 페트로에게 안수를 받았는가? 안수를 받든 안 받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혀를 움직여, 모국어가 아닌 새 언어의 첫 발음을 떼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영언


영언은 은사이기 이전에 모든 신자들이 마땅히 하도록 된 기초적 선물이다. 은사로서의 영언은 따로 있다. 파울은 코A 14장에서 분명히 성격이 또렷이 구분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영언을 말하고 있다. 서로 많이 다르다. 독자는 반신반의하는가? 


영언에 대한 다음 두 분류 그뤂을 서로 대조해 보기 바란다(클맄하면 더 잘 보임). 



두 가지의 차이를 알겠는가?

위의 왼쪽 칸을 좀 더 설명하자면.. 


-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 대명 가운데 믿는 이라면 누구에게나(!)[각주:3] 따르는 다섯 가지 표지를 나열하시면서 그 하나로 새(!) 언어로서의 영언을 들어 예언하셨다(맑 16'17b). 

- 과연 그 예언대로 첫 교회 120성도 전원이 영언을 말했다(행전 2'4). 

- 사실상의 첫 이방인 교회인 코르넬리우스(고넬료) 가정교회 전원이 영언을 했다(행 10'44~46).

- 쇼므론(사마리아) 교우들도 전원 영언을 말했음이 확실하다(참고 행전 8'17~19).

- 파울이 안수한 에페소 교우들도 전원 영언을 말했다(행 19'6,7).

- 또한 파울은 코린토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모두(전원) 영언을 말하기를 바랍니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14'5 원문의 뜻)

  "나는 여러분 모두들(전원)보다 더 영언을 말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입니다."(고전 14'18)



위 성구는 신자라면 누구에게나 응당 예외 없이 적용되는 말씀들이다.   

그래도 독자는 이 성구들의 진리를 부정하려는가? 성경상으로 명약관화한데도, 자꾸만 요리조리 부정해서 도대체 독자에게 유익할 게 무엇인지?? 오히려 긍정하여 믿으면, 얻을 게 더 있지/많지 않은가. 이왕이면 긍정 쪽을 택하지, 부정 쪽을 선호할 이유가 뭔가?



하나님만큼 각양각색?


송 목사는 또 말한다. 간추려 보면: 

"방언을 안 해도 말씀을 읽다가 깊은 하나님의 부요를 깨달을 경우도 있고, 설교를 듣다가 쾅~! 깊은 영적인 문이 열리는 수도 있고,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의 깊은 영적인 세계에 몰입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는 방식은 절대 획일적이거나 원리적이지가 않다. 하나님만큼이나 다양한 스펙을 갖고 있다. (...) 하나님은 이 사람에겐 네모꼴 은혜를, 저 사람에겐 세모꼴 은혜를 주실 수가 얼마든지 있다. 은사는 하나님만큼 다양하고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다. 방언도 그런 차원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한다."



자, 송 목사의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영언을 반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진정 권장하지도 않는 중도적 입장의 극치(?)에 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논리적 흐름은 (궁극적으로) 거의 영언무용론과도 맞물리는 듯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는 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사가 획일적이지도 원리적이지도 않다면, 코A 12장 속의 은사들도 그러한가..과연 비원리적인가? 12장 속의 9개 영적 은사들이 그 정도로 체계도, 질서도 없는 내용이라는 것인지? 

'하나님만큼'이나 다양하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일까? 12장의 아홉 가지 은사에 묶이지 않고, 무한히 다양한 은사를 더 주신다는 말일까? 독자는 그의 그런 주장에서 왠지 질서보다는 카오스와 무한한 복잡성과 혼돈스러움이 느껴지진 않는가? 


독자들에게 묻자. 독자는, 오히려 모든 신자를 위한 영언(!)을 약속한 위의 여러 성구에서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영언을 허락하시는 하나님만큼(!)의 공평과 공정, 하나님만큼(!)의 너그러움과 넉넉함을 느끼진 못하는가? 코A 12장의 9가지 영적 은사의 체계에서 독자는 하나님만큼(!)의 질서정연함을 느끼진 않는가?? 신자에게마다 각각 고르게 분여해 주시는 9가지 영적 은사에서 하나님만큼(!)의 섬세한 주권적 배려를 느끼진 않는가? 



은사는 몽땅 주관적? 


송 목사는 영언에 대해 일부 긍정적인 언질 못지 않게, 바탕엔 상당한 또는 강한 부정적 얼개를 갖고 있다. 그는 특히 영언을 비롯한 은혜나 은사는 "결국은 주관적인 경험이다"고 강조한다. 알고 보면 부정적이고 모순된 말이다. 

우리가 남의 체험을 '주관적'이라고 규정할 때, 흔히 부정적인 의도이기가 쉽다. 그만큼 객관성이 떨어진다는 의미로 하기 때문이다. 그 반면, 자신의 체험을 최대한 객관적인 양 포장할 때도 주관성이 극대화돼 버린다. 주관성이 꼭 나쁜 의미일 순 없으나, 객관성을 덧입혀 포장하려 할 때 위험요소가 발생한다.

크리스천이 주관성을 줄이고 보다 더 객관적이려면, 모름지기 성경 진리에 기초해야 한다! 그런데 남의 경험을 갖고 '주관적'이라고 말할 때도 똑같은 객관적 바탕 위에서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지금 사도 파울은 코린토 12~14장에서 은사를 말하면서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가 아니던가? 그래서 믿음으로 거기 순종하여 하는 행위가 절대 객관적일 순 없고 모두 주관적이기만 하다면, 객관적 계시가 늘 주관적 반응을 낳기만 하는 것인가?


주님은 코르넬리우스의 믿음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아직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칭찬하셨는데, 송 목사의 논리대로라면 그것은 코르넬리우스의 주관적 믿음일 뿐, 하등 객관적으로 칭찬할 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겠는가? 


코린토 교우들의 은사가 모두 주관적 체험일 뿐이라면, 사도인 파울이 한 영언(코A 14'18)만 오직 객관적이라는 얘긴가? 나머지 성도들의 영언은 모두 주관적일 뿐인가? 개인이 한다고 해서 다 주관적인가? 사도와 비사도의 체험이 서로 정반대로 객관성과 주관성으로 맞부딪는가? 아니면 파울의 영언조차도 주관적일 뿐 객관성이 전혀 없다는 얘긴지?


송 목사에 따르면, 또 첫 교회 120 성도가 한 영언도 모두 주관적인 체험일 뿐이었던가? 성령께서 오로지 각자의 주관적 체험을 위해 그렇게 거대하고 신적인, 객관적 권능을 내리셨던 것인지?

아니면 초기 교회는 그랬더라도 후대와 현대까지의 모든 영언만은 주관적 체험이라는 것인지? 

그렇다면 초기 교회와 그 이후 어느 교회부터 객-주 또는 주-객의 불연속성으로 잇대어 왔는가? 


이에 대해 송 목사가 밝혀 주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모호하다. 송 목사의 주관적 정의만 남을 뿐이다. 



자기 덕만 세움?


송 목사는 스스로 영언을 인정하면서 오늘날 영언이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코린토A서 14'4을 인용하여) "자기 덕을 위해서만 필요하다"는 식이다. 영언이 궁극적으로는 개인만 아니라 교회에 주는 유익이 있고, 교회를 돕고 유익되게 하는 은사인데도 말이다.  

송 목사는 교회에서 영언이 허용된다는 선분에서 말하는 거 같은데, 결국 개인에게만 필요하다는 식으로 그친다. 그는 "방언의 가장 큰 덕목은 교회 공동체의 덕과 유익을 위해 스스로 삼가고 절제해야 할 영역이라고 말한다." 상당히 부정적인 결론이며, 결국 교회서는 되도록 영언을 하지 말라는 얘기다. 물론 영언은 삼가고 절제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사실 거의 모든 것들이 그렇지 않은가? 삼가고 절제하지 않을 만한 요소들이 교회에 얼마나 있었던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가운데 하나가 절제 아니던가?


이런 주장은 파울의 교훈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파울은 교회에서 영언을 금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교회 모임 때 예배의 구성 요소의 하나로서 분명히/필히 영언이 있으며, 특히 통역은사자가 있을 때 유익된다고 명시한다(코A 14'26~28,39). 더욱이 영의 노래(영언송/'방언노래')로써 서로 화답하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면, 파울 자신이 그 어느 교인보다 영언을 더 즐길 이유가 없을 뿐더러(14'18), 교회에 유익된 영언은사와 통역은사가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12'10,28,30). 


의도했든 않았든, 송 목사는 교우들의 영언을 지지하는 듯 하면서도 동시에 은근히 비영언자들을 두둔하는 듯한, 그래서 양쪽의 비위를 동시에 맞춰 주려는 듯한 임프레션을 던져준다. 필자의 착각이길 바라지만. 사도 파울도 코린토 교우들의 비위를 맞춰 가며 쓴 것이 코린토서였던가? 

과연 S 교회 교인들이 송 목사의 이 설교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위로? 영언자와 비영언자들 간의 타협 정신? 균형 있는 입장 설정? 나는 송 목사 자신이 파울처럼 영언을 즐겨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럼 생각이 현저히 달라질 테니. 까짓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는가?


송 목사는 교회내 비영언자들이 더 의식되는가, 그래서 이미 영언을 하고 있는 영언자들에게 자중 자제하고 혼자서만 하라고 은근히 밀쳐 두는가? 그러면 그러는 만큼, 비영언자들은 영언을 할 기회와 자극이 줄어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목회자/설교가는 청중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기 전,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고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옳다. 


송 목사가 이대로 나름 '균형'을 맞추며 중도론을 유지하고 나아가는 게 궁극적으로 옳겠는가, 아니면 온 교우들이 다 영언을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 옳겠는가? 전자보다 후자 쪽을 한다면, 영언자들이 나중 천국에서까지 송 목사에게 영원히 고마워할 것이다. 그러나 끝끝내 하나님은 내게 영언을 안 주신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이 다음에 하늘나라에서 송 목사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참고로, 영언의 유익을 몇 가지 더 말해 본다: 


영언은 몸에서 가장 권세로운 활동, 또는 더러운 활동을 하여 삶을 좌지우지하는 혀와 입술(야코보서 3장 참조)을 상당량 제어한다(얔 3'2,3).

영언은 다른 모든 은사와 마찬가지로 (자기 덕 쌓기와 더불어) 하나님의 집 세우기에 기여한다! 사실 여기 코린토A서 14'4에서 한글 "덕을 세우다"로 번역된 해당 원어 '오이코도메오(οἰκοδομέω)' 자체가 그림처럼 구체적이면서도, 역설적으로 모호하다. 덕(virtue) 또는 덕성, 미덕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레테'(αρετή, 복수 αρετές)라는 낱말이 별도로 붙어 있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냥 "세우다, 건축하다, 쌓아올리다"라는 개념뿐이다. 따라서 딱히 덕 세우기라는 뜻만 아니다. 그 무엇보다 자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집을 세우다에 해당하는 포괄적인 낱말인 것이다. 

이 낱말의 해석으로는 덕육(德育)은 물론, 믿음 쌓기, 발전, 향상, 교화, 계발 중 어떤 뜻도 가능하다. 심지어 근육 기르기에도 이 낱말이 쓰인다. 즉 영언은 개인의 언어생활에서 덕을 세우게 만들고, 개인의 믿음의 근육을 길러주며, 전체 하나님의 집, 곧 교회 공동체 정립에도 이바지하는 것이다. 

 

영언은 장소를 불문하고 기도할 수 있게 해 준다. 차 속이나 침실, 화장실도 가리지 않는다.

합심기도 때 영언만큼 편리한 것도 없다. 개인의 은밀한 기도내용을 밝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공개자백' 내지 '공개회개'의 필요성을 주장하나, 모두의 것은 아니다. 

모국어로는 이루 표현이 안 되는 기도를 가능하게 하며, 말로는 안 되는 신음으로 성령께서 기도를 도우신다. 

영언은 꿈 속에서도 할 경우가 있다.  

영언은 때때로 복음전도의 기능을 한다. 여객기 안에서 외국인에게 (해당 외국어가 불가능하여) 믿음과 영언으로 말하니, 상대방이 자기네 말로 알아듣는 경우가 퍽 잦다(바로 행전 2'8,12절의 비밀이다!). 

영언은 통역이 곁들여질 때, 효과적인 감사와 축복의 수단이 될 수 있다(코A14'16,17).

영언은, 영언송(방언찬양)을 개인의 경건 또는 또는 모임 때 화답용으로 부를 수 있게 한다(코A 14'15). 사실 영적인('신령한') 노래야말로 영언송을 가리킨다(에페소서 5'19; 콜로세서 3'16)![각주:4] 

영언은 하나님께 타전하는 비밀통신신호 즉 모르스 부호와 같아서 하늘로 직접 내 영의 비밀을 아뢰게 된다. 그래서 영언은 때때로 다가올 위험을 예측하게 한다(예: 대형 사고를 사전에 영언기도가 알려 주고, 결과적으로 미리 피하거나 막은 일들이 있음). 또 나도 모르는 지구촌 저 편의 한 성도를 위해 기도하게 한다. 


그렇다고 영언이 만능이란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믿음의 기도가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 또 전능하신 성령님과 그 분의 천사들이 우리를 돕는다는 얘기다. 


모든 독자들과, 특히 송 목사를 비롯한 S 교회 교우들이 천국 가기까지 적극 영언 생활을 즐길 수 있길 진심 바란다. 성경이 뻔히 명시해 놓고 있는 것을 지상에서 하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천국에서야 비로소 후회하며 통탄하는 일이 없기를 희구한다. 





  1. 이하에 방언을 영언/靈言으로 쓰겠다. '방언'이라는 번역어는 초기 번역자들이 잘못 낀 '첫 단추'였다. 하늘에서 내린 영적인 언어인 이것은 지상의 외국어가 아니며, 지방 사투리와도 전혀 무관하다. 독자는 경상도 사투리가 하늘에서 떨어진 방언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런데 실제로 "그렇다"는 영남 출신 선교사를 오래 전 만나봤다. 나는 내 친구인 그의 말에 지금도 크게 웃는다. [본문으로]
  2. 송 목사는 장로회 합동측에 속해 있다. [본문으로]
  3. 한때 본 블로그의 독자였던 어느 사역자는 마르코스복음서(맑) 17~18에 나타난 5가지 신자의 표지가 모두의 것이 아닌 은사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독자는 믿음으로 악령이나 독극물, 독사, 질병 등을 물리치지 않는가, 은사가 아니라서 못하는가? 독자여, 그건 은사가 아닌 믿음의 문제다! [본문으로]
  4. 신학과 함께 교회음악을 전공한 나는 대학시절부터 영적인 노래('신령한 노래'/ᾠδαῖς πνευματικαῖς)의 정체에 대해 수십년간 고심 끝에, 영언에 이어 터져나온 우렁찬 영언송으로 해답을 얻었다. 반면 비슷한 작업을 해온 나의 사랑하는 은사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먼저 떠나셨다. 그분은 흑인영가 등이 성경이 말하는 '영적 노래'라고 주장하시며 훗날의 내 주장을 부정하셨는데, 하늘나라에선 모든 것을 깨달으시리라 믿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