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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캪튼's 코너

사랑의 은사?






사랑의 은사?


김삼


[ 이 글은 부분으로든 전체로든 출처와 필자명을 밝히지 않고는 인용이 불가합니다. ]




"더욱이 여러분은 더 나은 은사들을 갈망하시오. 하지만 가장 좋은 길을 제가 보여 드리지요." (코린토A서 12'31. 사역)



수많은 신자들, 특히 한국 교회 신자들은 '사랑의 은사'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런 이들은 으레 저 유명한 코린토A서(고전) 제 13장을 '사랑의 은사'를 말한 장으로 이해하고들 있다. 아울러 사도 파울이 바로 그 앞 구절인 코A 12'31에서 사랑의 은사를 말하려 했다고들 풀이하곤 한다. '더 좋은 길'이라는 것도 곧 사랑의 은사라고들 이해한다. 


알고 보면, 이것은 문맥 상 중대한 오해이다. 많은 신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그런 오해를 해 왔다. 


심지어 '사랑의 은사'라는 것을 노래한 찬송가나 성가도 있다[각주:1]

하지만 사랑은 영적인 열매 또는 성령의 열매이지, 성령의 은사들의 하나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 참, 거 되게 따져쌓네! 그냥 최고인 사랑의 은사를 받으면 될 일이지, 무슨 잔말이 많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말씀을 바로 구분하고 잘 해석해야 하지 않나? 그것이 사도들의 바람 아니었던가?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진 사도들의 말씀을 당연히 올바로 해석하고 바로 전달해야 옳은 것이다. 



파울이 12'31에서 말한 바 '더 나은 은사'[각주:2]란, 사랑의 은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파울은 단수 '더 나은 은사'가 아닌 '더 나은 은사들'이라고 복수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3] 한글 성경은 이 점이 반영되지 않고 단수처럼 표기돼 있지만, 영어 성경만 봐도 모두 'gifts'로 통일돼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은사들'이란, 제 13장의 앞뒤 곧 12, 14장에 나타난 영적 은사들 가운데 더 차원 높은 것들을 의미한다. 사랑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추구해야 할 대상들, 곧 더 높은 차원의 성령의 은사들을 가리킨다. 

바꿔 말하면, 지금 파울 기자는 제 12장의 아홉 가지(플러스 12장 후반부의 기타 직능적 은사들) 은사들을 13장에서 사랑이란 은사로 대체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 진실을 오해해선 안 된다. 더 큰 은사가 아닌, 더 큰 은사들이라고 복수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울은 제 12장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골고루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그 분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각 사람에게 따로 따로 지정하여 나눠 주시는―분여해 주시는 은사들을 말하고 있다. 


그 반면, 사랑은 특정인에게 따로 주시는 은사일 수가 없다. 누구나 맺어야 할 영적인 첫 열매, 성령의 첫 열매일 뿐이다.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렸던 손양원 목사도 '사랑의 은사'를 따로 받았던 분이 아니라, 성령의 첫 열매가 유난히 강하게 나타났던 한 분이다―이렇게 말해야 올바른 것이다. `

그러므로 우스갯소리로 "짜장 싫어~. 난 짬뽕~!" 하듯이, "영언은 싫어...난 사랑의 은사 받을 테야!"라는 말도 우스갯소리에 가까운, 자기본위적인 얘기다.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단수이지, 복수일 수가 없다. '사랑들'은 말이 안 된다. 어떤 이들은 사랑에도 육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 또는 아가페와 스톨게, 필리아와 에로스 등이 있으니 복수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파울이 말한 사랑은 아가페일 뿐이다.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사랑을 비교하며 말한 게 아니다. 


독자는 아직도 긴가민가한가? 물론 이해한다. 지금까지 흔히 그렇게 들어 왔고, 그렇게 가르쳐 왔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못이다. 잘못은 고쳐서 바루어야 한다. 



그렇다면 후반절에서 파울이 말한 '더 좋은 길'은 뭘까?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길"이다. 

이것을 "더 나은 은사들도, 더 좋은 길도 사랑의 은사이다."―이렇게 풀이하면 모순이다. 

지금 파울은 12~14장에서 "사랑 하나면 다 됩니다.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것으로 충분하오!"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13장만 쓸 일이지, 왜 성령의 은사들에 관한 12장과 14장을 앞뒤로 더 썼겠는가? 


왜 파울은 12 -> 13 -> 14장의 3 단계를 거쳤는가? 우리는 이 12-13-14 길목을 잘 건너야 한다[각주:4].  


파울이 여기서 성령으로 말하고 있는 대로 풀이해 본다면..

  "여러분은 각자 더 (차원) 높은 은사들을 갈망하시오. 제가 보여 드릴 가장 좋은 길은, 바로 사랑 안에서 그런 은사들을 추구하는 것이랍니다." 

정도의 내용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본다면.. 

  "이처럼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같은 은사들을 지닐 순 없지요. 그러니 각자 더 나은 은사들을 갈구하시오. 자, 그리고 가장 좋은 길은 사랑 안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미덕들 가운데 으뜸이기 때문이지요. 사랑 안에서 성령의 은사들을 추구하시오." 

라는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한글 성경 번역자들은 여기 31절 전반절의 '카리스마타'를 원어 그대로 복수 '은사들'로 옮기지 않고 여전히 표면상 단수 '은사'로 표기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모든 한글 성경이 한결같이 '은사'로 옮겨놓고 있다. '은사들'이라고 정확하게 옮긴 성경은 하나도 없다[각주:5]


모두 학자들인 번역자들이 원어를 몰라서 그럴 리는 없을 테고, 그냥 무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 


첫째로, 한글의 성격상 복수를 굳이 밝히지 않고 적당히 생략하는 예가 잦아, 여기서도 그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글개역에서 단수였던 낱말들을 개정역에서는 복수로 고친 수많은 예를 보면, 좀 모순된 느낌을 갖게 된다. 왜 여기선 고치지 않고 굳이 단수로 놔 둔 걸까? 의문이다. 


둘째로, 원문이 그렇게 돼 있는 것을 일부러 간과함일 수 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기존 통념을 그냥 유지하려는 뜻에서다. 말하자면 사랑의 은사 개념이 듣기도 좋고 개념도 좋으니 "걍 냅두라"는 식이다. 혹여라도 그렇다면, 과연 양심적인 학자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셋째로, 위 둘째와 직결되지만, 초자연적인 영적 은사들, 특히 영언(방언)에 대한 거부감을 사랑의 은사 개념으로 상쇄하려는 잠재의식 때문은 아닐까? 

사실 이 의식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왜냐하면 수많은 성도들이 "영언은 거북살스럽다. 꺼려진다. 다른 은사가 더 낫다. 난 사랑의 은사를 받아야..."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께선 왜 굳이 사도 파울을 통해 9개도 더 되는 다양한 은사들에 관하여 말씀하셨을까? 

일부 종식론(cessationism) 주장대로 그런 은사들이 이젠 다 지나가고 없을까? 교회시대가 끝나지도 않았는데도? 그런 은사들도 다 사도시대에만 있던 기록계시에 포함됐다는 말인가?


해괴한 논리다. 그리고 성경에 역행하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페트로는 성령께서 지상에 내리신 오순절 당일에 한 설교에서 분명히 (영언을 포함한) 이 선물들은 앞으로 얼마든지 올 세대에게 (주님의 재림 때까지는) 항구적으로 교회에 머물 것이라고 강조했기 때문이다(행전 2'39). 


성령의 은사들을 과거의 것으로만 돌리는 발상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은사들은 현존하시는 성령님의 현재적인 나타나심이기 때문이다(코A 12'7)! 그런 발상은 어제나 오늘, 내일 늘 한결 같으신 성령님을 과거의 성령으로 못 박아두려는 것과 다름 없는 소치다.  

그런 잘못된 발상은 오순절 그날 오셔서 오늘날까지 지상에도 현존하시는 성령님과 그 거대한 발전소 같은 권능의 시스템을 몰각(沒覺)해도 한참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오로지 이 진리를 알고 믿음으로 추구하고 열심히 활용하는 사람에게만 성령님은 그 분을 나타내신다. 



사랑은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9 열매' 가운데 첫 열매이다(갈라티아서 5'22,23). 

특정 신자들에게만 따로 따로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 모신 모든 이들이 맺어야 할 열매라는 것이다. 반면 은사는 성령님이 그 분 뜻대로 각 사람에게 따로 따로 주시는 선물이 맞다. 


영언을 비롯한 성령의 은사들은 우리가 따로 추구해야 할 대상이다. 

사랑 안에서. 



  1. 미국 작곡가 핼 햎슨이 쓴 찬송가가 그것이다. 참고 링크 http://www.hymntime.com/tch/htm/g/i/f/giftlove.htm [본문으로]
  2. 더 높은, 더 큰, 더 뛰어난 등의 해석이 가능하다. [본문으로]
  3. 여기 원문이 그렇다. ζηλοῦτε δὲ τὰ χαρίσματα τὰ μείζονα. 분명히 단수 '카리스마'가 아닌, 복수 '카리스마타'를 쓰고 있다. [본문으로]
  4. 물론 애당초 파울이 12,13,14라는 숫자를 썼던 것은 아니다. 장절 구분은 편의를 위해 후대에 생겼다. [본문으로]
  5. 일부 이단성 있는 종파의 나름 번역 성경은 있다. 이 점에서만은 그들이 더 나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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