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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성경역사-고고학

"산 위의 동네"는 지포리?

지포리(세포리스)의 현대 유적


예수님께서는 그 분의 '산상수훈(산상설교/산상보훈)' 가운데서 다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대들은 세상의 빛! 언덕 위의 도시가 숨겨지지 못할 터이요.." (마태복음서 5'14 사역)


언덕 위의 도시(또는 동네/마을. 원어: 폴리스).. 
어느 언덕 위의 어느 도시인지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으셨기에 불특정 동네이지만, 주님의 안중이나 의중에 있는, 잘 알려진 당대의 한 동네였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우리가 세상의 빛이란 게 중요하지 언덕 위 동네야 뭐 "그닥" 중요할까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언덕 위 마을이 '숨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의미심장합니다! 바꿔 말하면, 마치 산 동네를 햇빛이 훤히 비추듯 비록 높은 산이더라도 복음의 빛이 거기에도 비춰져서, 그곳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맘문을 열지 안 열지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기에 결단의 챈스를 피할 길이 없다는 말씀과도 같기 때문이죠.

미국 건국선조였던, (초기 상륙자들인 필그림이 아닌 이후의) 청교도들 중 한 명인 잔 윈트롶은 1630년, 미래의 매서추세츠 베이 식민단인 청교도들에게 행한 '기독교 박애의 모델'이라는 설교에서 그들의 새 지역사회가 온 세상이 지켜 볼 '언덕 위 도시'가 되리라고 격려한 바 있습니다. 그후로부터 미국을 '언덕 위의 빛난 도시'로 은근히 몰고 가는 전례가 있어 왔지만, 그럴 만 한 성경적인 근거를 찾을 순 없습니다. 복음적인 말이라기보다는 뭔가 숨은 정치적 목적이나 어젠다가 있는 말 같이 들립니다.


이스라엘의 갈릴리 지방엔 '지포리'(Tzippori)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현재는 지포리 국립공원으로 조성된 곳입니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세포리스'(Sepphoris)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지포리(작은새)라는 이름은 원래 '지포르'(새)에서 왔습니다. [ 성경엔 어원이 같은 비슷한 이름으로 모쉐의 아내 지포라, 모아브 왕 발랔의 아버지 지포르가 있습니다. ]  


옆 사진: 지포리의 고대 도로와 기둥 

이 도시에 이 이름이 붙은 이유는 본래 언덕 위의 새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고 유대 외전 탈무드에 기록돼 있습니다.   

지포리의 역사는 매우 오랩니다. 예슈아(여호수아) 장군 휘하의 카나안 정복 당시 이 도시의 이름은 '캍탙'(한글성경표기: '갓닷'. 예슈아=수 19'15)이었고, 좀 훗날인 판관(사사)들 시대엔 '키트론'('기드론'. 판관기=삿 1'30)이었습니다. 이곳은 예슈아에 의해 12지족(지파)들 중 제불룬(스불론) 지족 몫으로 할당됐지만, 단단한 돌벽의 성으로 둘러 싸여, 제불룬 지족은 오랫동안 이곳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주전(主前/B.C.) 2-1세기경 하슈모님(하스모네아 왕조[각주:1])의 알렉산데르 얀나이(얀네우스) 왕이 통치하면서 이 지역도 발전했습니다. 그러다 로마제국이 갈릴리를 정복한 주전 63년으로부터 8년 뒤인 55년, 당시 쉬리아 주재 로마 총독 가비니우스가 이곳에 최초로 시네드리아(쉬네드리온/산헤드린=종교의회. 당시 예루살렘을 비롯, 5개의 산헤드린이 있었음)를 설치했습니다. 이 무렵 처음으로 갈릴리의 수도로 지정됐습니다. 

47년엔 헤로드 대왕이 이 도시를 정복해 자신의 본부인 수도로 삼았습니다. 주전 4년 헤로드가 죽은 뒤엔, 유다 벤 헤제키야가 이끄는 유대인들이 이 도시를 차지했다가 훗날 시리아의 로마 총독 봐루스 장군이 다시 재빨리 정복해 불태우고, 유대 반군들을 포로로 잡아 노예로 팔았습니다.  

지포리가 특히 관심을 끄는 이유는 예수님이 자라나신 나자랕에서 북서쪽으로 불과 약 6km 지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도시를 모르셨을 리가 없는데, 신약 성경엔 지포리 또는 세포리스라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호 서남쪽에 위치한 지포리가 당시 갈릴리 지방 최대 도시인 데다 갈릴리의 수도 겸 상업 중심지였기에 목수 요셒-예수 부자가 그곳에 볼 일이 있어 다녀왔을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카톨맄교 전설에 따르면, 마리아의 부모라는 요아킴/안나 부부가 지포리 출신이라는데, 둘의 이름과 출신지 실제 여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지포리 고대 도시 발굴 과정에서 당대의 옥외 극장, 상류층 마을, 정결례 욕탕 등이 건립돼 있었음이 발견됐습니다. 흥미롭게도 1세기 유적에서는 돼지뼈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로마군 연대가 상시 진주한 이후인 2세기 이후 유적에서는 점차 많은 돼지뼈들이 발견됩니다. 따라서 1세기엔 유대인들이 시민의 다수를 차지했다고 추정할 수 있지요.

예수님 당시 갈릴리 주변엔 '데카폴리스'(한글 성경 데가볼리)라는 도시군이 있었습니다. 데카폴리스는 그리스어로 '열(10개) 도시'라는 뜻이죠. 사실 데카폴리스는 단지 10개만은 아니고, 더 많았습니다. 
데카폴리스는 헬라(그리스)계 사람들이 주로 살던 곳으로, 고대 그리스-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이 유렆 일부와 중동, 아시아인 인도까지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여 제국화하면서, 그 후예들이 이스라엘도 지배하면서 생겨난 국제도시들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한 뒤 곳곳에  헬레니즘 문명을 퍼뜨렸는데, 이로 말미암아 '코이네' 그리스어가 당대의 통용어가 됐습니다. 이 언어는 문법이 매우 정확합니다.  

훗날 로마 제국 시대에도 여전히 그리스어는 폭넓게 통용됐기에, 갈릴리의 데카폴리스를 비롯한 주변사회에서 이 언어가 폭넓게 쓰였고, 자연히 헬라계 사람들이 이곳을 자주 출입했습니다. 

물론 당대 유대인들은 주로 아람어를 썼습니다. 또 비록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꺼렸지만, 이들은 코이네 그리스어로 언어가 통하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비교적 용이하게 근접할 수 있었습니다(예: 요한복음 7'35, 12'20).  

신약 성경은 비록 로마제국 시대 때 모두 유대인들에 의해 쓰여졌지만, 이스라엘-유다 고유 언어인 히브리어도, 당대 유대의 통용어였던 아람어도 아니고, 종주국인 로마 제국의 라틴어도 아닌, 바로 국제 통용어였던 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여진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은 데카폴리스에서도 사역하시곤 했습니다. (예: 마르코스복음서=맑 5'1[각주:2]). 

놀랍게도 성경은 수 백년 전에 이미 제불룬 지족의 땅인 갈릴리가 이방의 관문이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바로 이방인들이 들어와 살던 이 갈릴리가 복음의 전진기지가 될 것을 대언자 예샤야후(이사야)가 성령으로 미리 내다봤다는 것이죠(예샤=사 9'1,2).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끝에 이 복음전진시대를 위해 또 하나의 준비물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어 성경입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정복한 뒤 일찌감치 세상을 뜨자, 광대했던 그리스 제국은 성경 다니엘서의 예언대로 4개 왕국으로 나뉩니다. 그중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왕은 아이귚투스(에짚트) 일대를 중심한 북 아프리카를 다스리면서 알렉산드로스가 주전 331년 자기 이름을 따 건립한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화려한 국제도시로 조성합니다.

그는 훗날 국내의 유대인 학자들을 대거 동원하여 그들의 경전인 구약 토라(모쉐 5경)를 비롯한 구약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도록 명령합니다. 당대 최대급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주전 3세기 경 번역에 착수하여 구약 성경 전체와 일부 구약 외경 등을 (주전)약132년 이전에 완성하게 됩니다. 

바로 이 그리스어 성경을 '70인경'(Septuagint, 라틴어 수 'LXX')이라고 부르며, 이 성경은 예수님 당대에 유대에서도 널리 통용됐을 뿐더러 신약성경의 기초가 됩니다. 즉 훗날 성령강림 후 신약 기자들이 참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구약 예언들을 70인경에서 고루 인용한 것이죠.  

당대의 수많은 유대 본토인들이 이 성경을 통해 감화를 받고, 그 일부가 예수님을 통한 구약 성경의 성취를 믿은 나머지 오순절 성령강림 때 초기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아울러 타국에 흩어져 살던 국제 유대계 사람들도 페트로 등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교회에 참여하게 됩니다. 


다시 지포리 얘기로 돌아와서..데카폴리스 뿐 아니라 이 지포리/세포리스도 당대의 그레코-로만 형 복합문화도시의 하나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종속국으로서 갈릴리 분봉왕이었던 헤로드 대왕의 아들 헤로드 안티파스는 1세기 초 이곳을 다시 갈릴리 수도로 재건합니다. 헤로드는 '헤로드 성전'을 비롯한 다양하고 웅장한 건물을 세워 국제 명성을 떨쳤던 것처럼 아들도 건축 재능을 물려 받은 모양입니다. 
옆 사진: 지포리 고대 주택촌 발굴 현장


재건된 지포리의 모습에 찬탄한 당대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장군은 '온 갈릴리의 장식품'이라고 부르며, 군사 요새임을 의식해 "갈릴리 최강의 도시"라고 지칭했습니다. 이 도시는 당대에 그리스어로 '아우토크라토리스'(자치도시)라고 불리기도 했다네요. 

지포리의 도로는 네모로 다듬은 석회암 돌판을 비스듬히 격자형으로 깔아 포장했고, 길 주위엔 회랑처럼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어 상가로 조성했으며, 도시 한 가운데 2개의 시장(아고라)도 있어 생필품을 비롯한 당대의 최신 상품들을 팔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포리엔 무기고, 당대의 금융기관인 환전상, 공회당 등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곳 시민들은 부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건물주/무역상인/세무관/법관들이 이곳에 상주했습니다. 그밖에도 여기엔 다양한 상공인들, 서기관/교사(라삐)들, 농장주, 어물상인들 등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는 갈릴리 사람들이 왜 지포리 시민들을 경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지포리 시민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가난한 데다, 지포리의 사치하고 화려한 생활에서 어떤 환멸감을 느꼈을 수 있지요. 
당대에 로마군을 도와 유대반군을 다스렸던 유대인 장군 요세푸스에 따르면, 지포리는 시리아의 로마 특사 케스티우스 갈루스와의 평화조약으로, 로마 제국과 친근했기에, 지포리 시민들은 로마에 저항하지 않으면서 갈릴리 주민들을 두려워 했습니다. 

요세푸스 장군은 동족인 유대 반군과의 전쟁으로 지포리를 두 번 장악하기도 했습니다. 훗날(주후 66년경) 로마의 베스파시안 장군은 이곳 시민들과 요세푸스를 갈릴리 반군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플라키디우스 장군이 이끄는 7,000명의 군대를 파견한 바 있습니다. 
지포리 시는 자체를 '평화의 도시'(에이레노폴리스)로 부르기도 했습니다만, 2세기 로마인들은 그곳을 제우스(=유티페르)신과 황제를 동시에 기리는 이름-'디오케사리아'로 불렀습니다.    

1990년대 고고학 발굴에 의하여, 이곳 아크로폴리스의 서쪽에서는 하슈모님-헤로드 당대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의 주택가가 발견됐습니다. 개인 주택엔 각각 유대식 정결례 욕조(미크봐옽)도 딸려 있었습니다. 

지포리는 서기 363년 지진에 의해 파괴되지만, 후에 또 다시 재건됩니다. 후에 비잔틴 시대엔 이곳에 기독교가 크게 융성하여 전성기를 이룹니다. 


그건 그렇고..초기 교회 초창기를 장식한 사람들 대다수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예샤야후의 예언 그대로니까요. 

이 갈릴리 사람들은 과연 예수님의 예언을 성취했습니다. 이들은 "온 유대와"라는 말에 따라 지포리에도 복음을 전했을 터입니다. 편안한 삶을 살던 지포리 시민들이 복음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대들은 세상의 빛! 산 위 도시가 숨겨지지 못할 터이요.." 

 
 
  1. 유대 마타티야후(마타티아스) 가문의 '쇠망치' 유다 마카비가 주전 165년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알렉산드로스 왕의 후예인) 그리스-마케도니아 계 셀류키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군대를 궤멸시킨 15년 뒤 동생 쉬몬 마카비가 세운 왕조. 쉬몬과 차기 왕인 안티고누스에 의해 103년간 이어지다 37년 헤로드 왕조에게 자리를 물려 주고 만다. 간악한 헤로드 대왕은 하스모네아 공주 마리암네와 결혼한 뒤, 음모를 꾸며 예리코(여리고) 궁에서 하스모네아 최후의 왕손을 익사시켜 후환을 끊어 버린다. [본문으로]
  2. 마태 8'28엔 '가다라'로 돼 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게라사와 가다라를 서로 다른 곳으로 보기도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