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삼의 연구묵상/캪튼's 코너

세 가지 '육적인 사람'들


세 가지 '육적인 사람'들



   "육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님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어리석게 보이는 탓이지요. 그는 그것들을 이해하지도 못하니, 그것들은 영적으로라야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코린토A서=고전 2'14. 이하 성구: 필자 사역)  


참고본문: 코린토A 2'10~10



사도 파울은 코린토 교회 교우들에게 보낸 첫 편지의 앞 부분에서 한동안 지혜에 관해 말합니다(1'17~2'8). 그는 이 부분에서, 지혜라는 낱말을 파생 형용사까지 약 20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은밀한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비밀스런 지혜를 말하면서, 오직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를 보이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신비는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2'8~11). 세상의 그 누구도 스스로의 지혜나 힘으로 성령님도, 하나님의 신비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어 성령님을 받아 모심으로써 깨닫기 시작합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본 글 맨 위의 구절을 보면, 파울은 육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것/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육적인 사람'이란(그리스어: 프쉬코스 안트로포스), 거듭나지 못한 세상 사람, 소위 '자연인'(natural)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프쉬코스는 프쉬케에서 파생됐기에 곧 영적이지 못하고, 혼적/심리적이기만 한 사람이라는 뜻도 동시에 지닙니다. 


반면, 일단 거듭난 사람, 곧 말씀과 성령으로써 위로부터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은 성령님을 모셔 그 분의 것들을 깨닫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적인 사람은 성령님의 것/일들이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심리적/심령술적인 것들에 관해 호기심이 있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복음에 접하여 성령님의 감화를 받아 자기 의지로 마음문을 열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영적인 것을 향한 길이 열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놀라운 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받아들여 거듭나 성령님을 모시고도, 여전히 성령님의 것들을 거부하는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도 역시, 자연인처럼, 성령님의 것들이 "어리석어 뵈고..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단적인 예로, 영언(방언)을 들 수 있습니다. 영언은 분명 예수님이 신자들 누구에게나 약속하신 것이고(마르코스복음서=맑 16'17a), 주님의 대명의 일부로서 초기신자와 더불어 우리가 받은 성령의 임하심과 권능의 일부입니다(참고: 행전 1'8). 곧 영언은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코A 14'5a).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은 영언을 거부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영언은 거부하지만, 다른 것은 받겠다는 식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른 것이라뇨? 행전 2'4은 오순절의 패턴이며 성령께서는 이 패턴을 바꾸신 적이 없습니다. 다른 것들 곧 영적인 은사들(코A 12'7~11) 역시 오직 영언을 시작한 사람들만 받게 돼 있습니다[참고: 행전 2'4; 8'18[각주:1] 10'45~46; 19'6). 또는 반드시 영언을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님이 지정하신 패턴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에게는 성령님의 것/일들의 하나인 영언이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이죠. 또 영언의 중요성과 필요성과 의미성 등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비록 믿음으로 거듭났지만, 같은 믿음으로 영언을 말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셈입니다. 어리석어 뵈고 심지어 "추하게" 보인다며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기도 합니다. 더욱이 성령님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알고 보면, 그들은 현대의 영언이 외국어 곧 지상언어가 아니니까 모두 잘못되었다거나, 이미 오래 전 "종식/중단" 되었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성령님의 것/일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약 2000년전 오순절날 초기교회에 내리신 이래 현재까지 거듭난 사람들의 비가시적/무형적인 참 교회에 계시며, 지금도 그 분과 그 분의 것들-권능/은사/신유/영언.. 등을 갈망하는 사람에겐 기꺼이 베풀어 주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아직 모를 뿐더러 쉽사리 잘 알아 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비록 믿음으로 거듭났다고는 하나, 같은 믿음을 폭넓게 활용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마치 에제키엘서(에스겔) 47'1~5의 환상 같은 큰 강의 물가에서, 찰랑대는 물살만 봐도 겁을 내어 더 깊이 들어가 보려고 하지 않고 발목이나 무릎만 적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아쉽고 안타까운 상황이지요. 성도들 다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파울은 더 놀라운 말을 합니다. 

한 단계 나아가 영언을 말하는 교인들도 육적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3'1~4)! 비록 코린토 교우들 다수는 영언을 말하지만, 파당과 분쟁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파울파입네, 아폴로(아볼로)파입네, 케파(게바=베드로)파입네 하,며 서로 나뉘어 '3파전'을 치르고 있었습니다(3'4). 그래서 파울은 그들이 비록 거듭났지만 크리스토(그리스도)님 안에서 젖먹이들 곧 육적인 사람을 대하듯 그들을 대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3'1a).


파울은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들이라오!"라고 꾸짖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 가운데 시기와 다툼이 있으니, 육적인 사람들로서 (보통)사람들처럼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묻습니다. 이어서 4절에서도 재차 (육적인 성향의) 사람들(안트로포이/ἄνθρωποί)로 묘사했습니다.   

 

그렇다면, 파울이 영언을 시작하든, 하지 않든 다 똑 같은 자연인이라고 하는 말일까요? 그렇지는 않지요. 여기서 '육적'이라는 말은 '사르키코이(σαρκικοί)'라고 되어 있어, 앞의 자연인(프쉬코스)과는 구분되어 있습니다. 즉 거듭났지만, 육적인 성향의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코린토 교우들은 아직 모두가 영언자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참고: 코A 14'5). 그러나 설령 다 영언자였더라도, 영언의 목적과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였을 수 있습니다(14장 참조). 이것은 그들이 영언에 관한 충분한 계시(곧 코A 14장)를 파울에게서 미처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이지, 영언을 시작하지도 않은 현대교인들이 손가락질하고 비웃으며 코린토 교우들을 비난할 성격이나 상황은 아닙니다. 


분명 코린토 교우들 상당수가 영언을 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영언을 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현대교인들보다는 한 단계 앞서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들이 영언을 했기에 더 뒤떨어진 것입니까? 그런 발상은 성령님의 것들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죠.  



그러나 그런 코린토 교우들조차도 파울에게 '육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을 보니, 우리라고 그런 평가를 피하기가 어려움을 느낍니다. 즉 육적일 가능성은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코린토 교우들보다 더 육적이기 싫어서 영언을 좌시하고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실로 육적이고 짧은 생각이며, 결국은 자기 손해의 요인이 되고 말죠.



우리는 파울의 말처럼 세상 사람처럼 육적(프쉬코스)이어서 성령님의 것을 받아들이지도, 이해하지도 못해선 안 됩니다. 거듭나고도 여전히 성령님의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역시 육적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영언을 하면서도 파당과 시기와 싸움으로 천해져서 육적(싸르키코스)일 수 있습니다.  



이런 3단계의 육적인 사람들 신세를 우리는 면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영언 생활을 열심히 하고 성경 말씀을 묵상/고백/선포/실천함으로써 언어생활이 정화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더욱 영적이 되어('신령해지고'), 파당과 시기, 다툼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영언이나 영언자들에 대한 반감 탓에 "코린토 교우들, 꼴도 보기 싫다"며 영언을 하지 않는 것이 곧 육적 자연인 상태를 탈피할 수 있는 길이 아니죠. 


아울러, 영언을 한다고 해서 곧 늘 육적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파당을 지어 분쟁을 하거나 영언을 적절히 질서 있고 품위 있게 사용하지 않고 남용할 때, 우리는 여전히 육적일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우리 모두 육적이 되지 말고, 영적이 됩시다! 

성령님의 것/일들을 희구하고 열망하며, 온유하신 그 분을 근심하시게 해 드리지 맙시다! 

그 분의 것들/일들을 어리석게 보지 맙시다!




  1. (전 마술사 쉬몬이) 다른 신자들이 "성령 받아 모심을) '보고'- 곧 그는 영언 광경을 목도했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