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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잠언.전도서

[잠 3:1-10] 약속 딸린 계명들


        by Christina Floy 
 

내 아들아. 나의 가르침을 잊지 마라. 도리어 내 명령들을 네 마음 속에 간직하거라.
그러면 길고 오랜 삶과 행복을 그것들이 네게 더해 줄 것이다.
사랑과 진리를 저버리지 마라! 그것들을 네 목둘레에 매고, 너의 마음판에 새기거라.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총애와 선히 여김을 받게 된단다.
네 온 맘으로 주/야웨님을 믿지, 네 나름의 지성에 기대지 마라.
네 모든 길에서 그 분을 인정해라. 그럼 그 분께서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실 것이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지 마라. 주/야웨님을 두렵게 섬기고 악을 멀리 해라.
이것이 네 몸에는 건강, 네 뼈에는 자양분이 될 테니.
너의 재물과, 또 네 수확의 첫 열매로 주/야웨님을 받들어 섬겨라.
그러면 너의 곳간이 가득 차고 네 포도주통들이 새 포도주로 넘쳐 나리!     

(구약 잠언 3:1-10. 사역)


위 말씀은, 비록 일차적으로는 슐로모[각주:1] 왕이 외아들 레호보암[각주:2]에게 준 교훈이긴 합니다만..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 자녀인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 들이자는 말이지요.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잠언들의 특징은..선/후 상관 관계가 많다는 것입니다. 인과(因果) 관계 즉 전제조건과 그 결과와의 연계가 매우 또렷하다는 뜻이지요. 
본문엔, "..해라..그러면.."이란 전제/명령/조건과 결과/약속/보상이 서로 얽힌 어구가 자주 나옵니다. 논리학/문법에선 '조건문'이라고 불리는 것이죠.

부모가 자녀를 훈계할 때, 이런 조건문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만한 바탕과 영적 권위가 있어야 되겠지요. 부모가 전혀 또는 거의 전혀 지키지도 않는 조건이나 명제를 자녀에게 전제한다는 건 우스운 노릇일 테니까요.
가령..부모도 실천하면서 확신 속에서, "얘야, 네가 말이다..매일 성경 한 장씩만이라도 꼬박꼬박 읽고 음미하고, 중요한 말씀들은 골라서 고백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네가 원하는 슬기를 부어 주실 거다!" -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자랑이 될까 봐 두렵지만..모처럼 간증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렵니다.
저는 약10년 전 주님 앞에서 제 자식들에게 그런 다짐을 두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야베즈의 믿음의 기도(연대기A[각주:3] 4:10)를 하면, 분명히 신실한 주님께서 그 말씀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야베즈와 같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그리곤 매일 아침기도에 야베즈의 기도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랬더니 한 가지 분명한 결과는..둘 다 각각 전교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것입니다. 둘 다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했습니다. 물론 부러워 하던 좋은 학교에 진학도 했고요.
저는 눈을 감고 흐뭇이 그 연설을 들으며..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녀를 통해 말씀을 이루시는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분의 말씀과 약속에 신실하십니다.

우리는 조건부가 달린 그 분의 약속들에 눈과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슐로모 왕은 스스로 이 교훈들을 자주 깨 버림으로써 비록 아들에게 결과적으로 헛소리를 한 거나 거의 다름 없이 됐지만..우리는 이것을 성령님의 영감을 받은 하나님 말씀으로 여길 때 우리 삶에 좋은 결과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주님의 계명들을 잊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12 제자/사도들에게 "내 말들이 그대들 속에 머물면.."이라고 조건부 다짐과 약속을 하셨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꼭, 하나님 앞에 신실한 말씀과 약속을 상기시켜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 속에 성경 말씀을 너절하게(?) 나열할 필요가 없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 응답의 깊은 맛을 모르는 결과일 수도 있지요.
물론, 단순히 자신의 성경지식을 나열하고 낱말과 문장을 수식/장식하여 자랑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기도는 하나마나이겠지요.

하지만..하나님 앞에서 그 분의 말씀을 존귀히 여겨 그 약속들을 상기시켜 드리는 것은 믿음의 행동입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은 우리가 써 먹으면 써 먹을수록, 고백하면 고백할수록, 간직하고 잊지 않게 됨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잊지 않고 간직하면 어떤 결과가 온다고요?
우리가 장수하고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박식한(?) 요즘 교인들은 대뜸 기복주의/번영주의/형통주의 발상이라고 비난부터 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나는 단연코 말합니다. 그런 말 자체가 율법주의이고 단죄 정신이라고. 

약속 없는 하나님의 계명을 본 적이 있으세요?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 약속된 그대로 평안과 복과 형통을 구하고 장수를 구하는 것이 기복주의라면, 야콥과 야베즈도 기복주의자일 뿐더러 어린이를 안수하고 축복하신 주님도 기복주의자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그런 기복주의 킬러들은 평소 교회에서 축도를 하지도 받지도, 남에게 복을 빌지도 말아야지요. 그렇지 않다면 위선자에 불과할 터입니다. 


걔중엔..이런 약속들이 구약인들에게만 적용된다는 무식한 주장들도 있지요. 그건 고상한(?) 이원론입니다.
그럼,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와 구원도 구약인들에게만 적용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메시아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메시아였나요..아니면 이방인들에게도 적용되는 메시아였나요?

"복과 장수, 평안과 형통은 다 빼 놓고 구원만 이방인들에게 적용돼..이만 끝!" 하고 선언하는 신학자(神學者) 아닌 신학자(新學自)들도 있지요. 누구 맘대로 그런가요..엿장수 맘대로? 그럼, 신학 따라 "니 맘대로" 하세요! 저는 하나님 맘대로, 그 분 말씀대로 할 테니까요.
잘못된 신념으로 잘못된 대상에게 오로지 복만 구하는 잘못된 구복(求福) 사상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성경이 분명히 밝혀 주고 있는 복들도 우리가 마땅히 구해선 안 된다는 식의 발상은 한낱 불신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또 사랑(헤쎄드)과 진리(에메트)를 목걸이처럼 우리 삶과 마음판에 머물게 해야 합니다. 사랑과 진리라는 두 글자의 두 낱말이 우리 마음 글판에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오직 유일한 사랑과 참의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아프로디테(베누스), 에로스(쿠피드) 따위가 사랑의 신이 아니라..참 사랑의 신은 주/야웨님이십니다. 바로 온 세상 영혼들을 사랑하셔서 아드님을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니까요.
그러나 그 아들을 진정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함께 진리를 우리 삶의 좌표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사랑 없는 진리, 진리가 빠진 사랑은 적어도 하나님 앞에 있을 수 없습니다.
둘은 늘 함께 갑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진리는 사랑 안에서 기뻐합니다.

참되지 않은 것, 그 분의 말씀에 어긋난 것은 참 사랑일 수가 없습니다. 테레사 수녀나 헨리 나웬이나 헬렌 켈러나 알버트 슈바이처 등의 사랑이 참 아가페일 수가 없는 까닭이 여기 있지요.

이렇게 할 때-사랑과 진리를 함께 지닐 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총애를 받고 인정을 받게 됩니다.
바로 예수 크리스토님이 어릴 적부터 그런 분이셨지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총애를 받던 분이셨습니다(루카복음서 2:52). 왜 그런가요..? 주님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 안에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동시에 인정 받고 싶습니까? 늘 진리와 사랑 안에 머무세요.


자, 잠언 기자는 계속 말합니다:

온 맘으로 주/야웨님을 믿지, 자신의 지성을 의존하지 말라고.

하지만 요즘 교계 명사들은 대체로 반대 현상을 보입니다. 자신의 지성을 하나님보다 더 믿습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거기 따라 갑니다.

교계 명사들은 자신의 지성과 통찰력을 더 믿고,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교계 명사들의 그럴 듯한 해석과 달변/달필을 더 의존합니다. 교인들이 온갖 외래 영성들을 쉽사리 받아 들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꾀에 속는 길이지요.

하나님을 믿되, 온 맘으로 전심으로 의존하라고 기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살피시며 전심으로 그 분을 의지할 자를 찾으십니다.
처음도 마지막도 하나님께 신뢰를 두는 그런 한결같은 사람 말입니다.
어느 때는 하나님을 의지하다 어느 때는 자기 꾀를 더 의존하다-그런 사람 말고 말입니다. 자신도 알게 모르게 그럴 때가 혹간 있어도..그 함정에서 얼른 빠져 나와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모든 길에서 그 분을 인정하면 됩니다. 내 삶 속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말과도 같지요.
"성령님, 나를 다스려 주소서"라고 노래하고 외치는데..그 분을 모든 길에서, 범사에 인정하는 것이 곧 성령님의 온전한 지배와 통치를 받는 지름길입니다. 

목자의 뒤를 고분고분히 따르는 착한 양떼처럼 우리가 걷는 길마다 우리 목자이신 그 분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분은 유능한 목자로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 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올곧은 길로 이끄시네"[각주:4]라는 다빋의 고백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고대 팔레스타인 목양촌에서 잘 알려진 유능한 목동/목자들의 명성은 올곧은 길을 잘 안다는 데 있었습니다. 양들은 천천히 걷기에 되도록 빠른 시간 내로 한꺼번에 한 장소를 단번에 통과해야 하겠기에, 그런 길을 많이 알고 잘 아는 것이 유능한 목자의 장기이자 특징이었습니다. 다빋 자신 그런 이름 있는 목동이었습니다.

우리가 양으로서 올바른 길을 빨리 잘 통과하는 길은 범사에 목자이신 그 분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자는 말합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지 마라.
계속 양 얘기를 하자면, 양들은 잘 따르다가도 자칫 제 길을 벗어나 딴 길로 갑니다. 그러면 목자는 고리처럼 끝이 휜 긴 지팡이로 그 양의 다리를 걸어 잡아 당깁니다. "메헤헤" 하고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나 자꾸만 제 길을 벗어날 때, 목자는 그만, 막대기로 아예 그 다리를 부러 뜨리기도 합니다. 그 양이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죠.

내가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길 때 나는 이내 딴 길로 벗어나기 쉽습니다.
그럴 때 으레 악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제 꾀에 속는 셈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 섬길 때, 그 말씀을 존귀하게 받들 때, 비로소 우리는 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겁이 아니라 참된 두려움..이것이 우리를 죄악의 어둔 길에서 지켜주고 방지해 주는 길이 됩니다.
피가 끓고 힘이 넘치는 청년이 어떻게 죄와 악을 피할 수 있겠나요? 시편 119:9이 그 해답을 주고 있지요.

자..이렇게 할 때, 우리에게 어떤 혜택이 옵니까?
몸과 뼈에 건강이 찾아오고 새 힘이 온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진리입니다. 시103:3-5 등 모든 관련 말씀들이 입 모아 증언해 주는 말씀이지요. 우리가 건강하지 못한 이유는 대체로 말씀을 귀담아 듣지 못하고, 믿지 못하거나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개인의 건강에다 "교회의 건강"까지 함부로 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대체로 이상(異常) 영성에 빠진 명사들이 그런 소리를 곧 잘 합니다. 남의 교회의 건강을 논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이상 영성에 빠진 비건강 내지 불건전한 사람일 때가 더 잦다는 말이지요. 그들의 주변과 배후, 열매를 잘 살펴 보십시오- 제 말이 맞나 틀리나..

교회의 건강의 비결은 그들의 주장과 '영성', 뉴에이지적인 방법론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에 있습니다! 소아시아의 7 교회에 말씀하신 주님의 칭찬과 경고가 곧 교회건강의 바로미터입니다! 할렐루야.


잠언 기자는 또 말합니다:

우리의 재물과 또 수확의 첫 열매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이것도 율법입니까? 아니지요! 복음이고 복입니다. 왜냐..약속이 달려있기 때문이지요.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무슨 약속입니까?
우리의 곳간(=곡식창고)이 가득 차고 포도주통이 아주 터질 듯(원문이 뜻이 그러함) 넘친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안 믿고는..나 자신에게 달린 것이겠지요.
내 믿음과 행동이 결정해 준다는 말입니다.


티엘티 모든 분들에게
이 말씀의 약속이 성취되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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