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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

우리는 바른 예배자인가?


우리는 바른 예배자인가?




김삼 

(글쓴이의 허락 없는 부분 인용이나, 일방적인 모작/개작 등을 허용치 않음)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입니다 

내가 서 있는 곳 어디서나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략)



요즘 부쩍 많이 불리는 '나는 예배자입니다'라는 노래의 앞부분이다. 어린아기로부터 어른들까지, 교회에서든 또는 (이 노래 가사처럼) "어디서나"(!) 아주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부르는 노래다. 노래를 들으며, 과연 우리는 이 노래를 늘 부담 없이 가볍게 부를 수 있을 만큼 올바르고 바람직한 예배자들인가?..라는 생각을 해 본다. 


[ 먼저..나는 한국 기독교에 고착돼온 '예배'라는 용어가 원어와는 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온 한 명이다. '예배'란 말은 "예절을 갖추어 절하다", 또는 "예를 올리고 절을 올리다" 정도의 뜻이다. 듣건대, '예배(禮拜)'라는 용어는 조선시대 초기 문헌에서부터 발견되는 말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중국 등 아시아 불교권에서 더 오래 쓰여온 '예불'(禮佛)이란 말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하나님께 경배할 때, 단순히 웃사람에 대한 예절이나 예의, 예를 갖추거나 예를 올리는 수준/정도로 해선 안 된다. 원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ὲω)가 시사하는 "경배하다"의 의미는 신이나 군주 앞에 완전히 엎드려, 그 발에 입맞추며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하며 절한다는 뜻이다. 


우리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과 의식은 성경이 말한 '경배'라는 낱말이 원문에 더 가깝고 한결 더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필자는 자연히 '경배(敬拜)'와 '경배자'를 '예배'나 '예배자'보다 선호하게 된다. 우리는 왜 출처도 분명치 않은 '예배'라는 용어보다 성경에 더 흔한 '경배'를 더 선호하지 않는가? 

번역어에 처음부터 길들여진 습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현대 교인들에게 정말 고대 성도들처럼 무릎을 꿇고 완전히 엎드려 큰 절을 올리는 경배의 기회가 좀체 없어서일까? 높은 군주들 앞에서의 세상 경배와 구분하기 위해서인가? 그래서 기도원이나 재래식 교회당 또는 자기 골방에서 무릎 꿇고 새벽기도를 하는 성도가 그나마 경배의 개념을 더 잘 느끼리라고 본다. ]



그건 그렇고 다시 묻지만, 우리는 과연 저 노래를 대수롭지 않게 대뜸 부를 정도로 바른 경배자인가? 

원론적인 얘기를 좀 해 보자.


요한복음 4장에서 우리 주님은 앞으로 신약인들이 드릴 경배는 구약인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는, 매우 강력한 암시를 주셨다.[각주:1] 그것도 동네에서 아주 천대 받던 한 쇼므론(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이다! 


주님께서 여인과 '조우'(遭遇)한 이 장면은 여러 모로 우리의 큰 놀라움과 충격을 자아낸다. 알고 보면, 이 이름 모를 쇼므론 여인은 당대 사회에서는 정말 천민 중 천민이었기 때문이다. 쇼므론 자체가 유대인들은 에움길이 멀지언정 일부러 피하여 가던 곳 아닌가. 고대 북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였던 화려한 도시였지만, 우상 숭배 탓에 아슈르(앗수르/아씨리아) 군대에게 정복 당한 뒤, 종주국의 정책에 따라 멀리서 온 이방인들과 잔류민들이 섞여 사는 통에 그 시민들은 '잡동사니' 혼혈족이 되어버렸다. 

표면상 실로 저주받은 듯한 민족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수 백 년간 대대로 이방인 내지 그 이하로, '개돼지' 취급 받던 대상 아니던가. 


더구나 여인은 쇼므론에서도 쉐켐[각주:2] 곁 작은 마을인 쉬카르[각주:3]에 살면서 남편을 다섯이나 거쳤던/둔 사람이어서 자신의 얼굴조차 드러내기 불편했던지, 주민들이 다들 잠든 한낮에 물 길러 나왔다. 유대인들은 물론,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까지 온갖 천대를 받아온 여인은 정말 가슴 속 깊이 수치감과 한이 쌓일 대로 쌓여 있었음직하다. 


그런데 그 날,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멀리 피하여 가는 이 마을을, 점잖아 뵈는 한 유대인 남정네가 모처럼 드물게 거쳐 가면서, 더구나 우물가에 찾아와 기다렸다가 남의 여인네한데 다짜고짜 물을 내놓으라니, '놀랄 놀 자'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왜, 구약적 경배의 완전한 개혁이라는, 굉장하고 엄청나게 중차대한 선언의 말씀을 당대 종교권(宗敎圈) 및 사회를 좌지우지하던 유대 종교정치 지도자들 또는 다름 아닌 바로 사랑하는 열 두 제자들에조차 하시지 않을 망정, 하필이면 한낮에 물길러 온, 남편이 다섯이나 되었다는 "하찮고" "천한" 쇼므론 여인에게 하셨을까?

―그런 의문이 이는 것이다. 그 이름 없는 쇼므론 여인이 주님께는 그토록 소중한 존재였던가? 


아무튼 겉으로야 어쨌든, 내용으로 볼 때 이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일대 선언 사건을 주님은 한낮에 유다에서 멀리 동떨어진 쇼므론의 한 귀퉁이에서, 아주 조용히 단 둘만의 일대일의 대화로 소화해 버리신 것이다. 역시 주님다우신 일이다. 왜 그러셨을까?


본문이 전개되면서, 여기 더 깊고 중요한 뜻이 숨어 있음을 발견한다. 

이 여인을 비롯한 주민들이 살고 있던 쉬카르 마을은 바로 그리짐(Gerizim, 그리심) 산 건너 편 에발(Ebal) 산 기슭에 위치해 있었다. 두 산봉우리 사이에 있는 한 마을이었다. 이 사람들은 고대에 모쉐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둘로 나누어 각각 그리짐과 에발에서 복과 저주를 선포한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여, 저주선언의 산이 아닌 축복선언의 산, 그리짐에서 경배했던 것이다. 

에발 기슭에 살면서 그리짐에서 경배한다..?! 실로 아이러니한 경배 현장이었다. 


그러나 예루샬렘에서든 그리짐에서든 모두 장소 중심의 경배였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여인, 내 말을 믿어요! 그대들이 이 산에서나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고 있소..참된 경배자들이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경배할 때가 오는데 바로 이 때라오. 아버지께서는 그런 경배자들을 찾으신다오. 하나님은 영이시니, 경배하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해야 하오."(4'21,23,24)


들을수록 충격스럽고 신선한 말씀이다. 아니, 어마어마한, 새 경배의 선언이다! 지난 수 백 년간 유다인들의 경배 장소인 예루샬렘이나 이스라엘 유민(留民)들이 경배해온 그리짐 산이 하루 아침에 의미를 잃어버린다고..? 어찌 그런 일이..??


주님께서는 이 쉬카르 여인에게 분명히 앞날에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경배자들 자신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이거,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굉장히 중요하고, 혁신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현대 경배자들은 구약인들처럼 여전히 장소를 중시한다. 교회당 내지 경배방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흔하다. 일생에 교회당을 한 번 이상 짓는 것을 지고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과연 그럴까? 평생 교회당 한 번 못 지어본 목회자나, '성전건축헌금'을 하지 않은 교인들은 복은커녕 저주 받은 것일까? 


그런 발상은 사뭇 구약적이라 생각된다. 왜냐고? 주님께선 저 말씀에서 분명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의 교회당들이 죄다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첫 교인들처럼 성도가 함께 만나, 빵을 나누고 친교할 곳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곳에다 구약의 성전과 같은 의미와 개념을 부여할 수 있을까?


심지어 담임목회자를 대사제(대제사장)나 군주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경우들도 없지 않다. 미사나 예배를 통해 거의 사제 노릇을 하기도 한다. 사도 페트로는 모든 성도가 곧 왕 같은 사제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신학교 나온 목회자가 사제라는 개념은 카톨맄 교회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 본연의 것이 아니다. 


경배는 이젠 더, 구약 성전과 거의 대동소이한 건물인, 어떤 그럴 듯하고 화려한 '성전' 또는 준(準) 성전에서만 드릴 것이 아니다. 그리짐 산에서도 말고, 예루샬렘에서도 말고, 정말 저 노래처럼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이 경배이다. 단, 참 경배자가 영과 진리로 해야 하는 것이 신약적인 경배이다. 함께 모이기에 힘쓰고(행전 2'46; 히브리서 10'25a) 함께 빵과 사랑을 나누며 코이노니아/친교를 할 수 있는 곳에서 말이다.  


다음으로는, 당대에 천민 중의 천민이던 이 쉬카르 여인에게 주님이 참 경배에 관한 이 일대 선언을 하심으로써, 과거엔 특수층인 사제(제사장)들을 통하여, 훗날엔 귀족스럽고 "고급진" 당대 종교지도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율법적 경배의 관행이 이제 앞으로는 낮고 낮은 사람까지, 누구나 율법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훗날 페트로가 말한 대로 누구나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는 경배자와 왕 같은 사제들이 된 것이다. 이 천한 여인도 그 중의 한 명이 될 터였다.  

언제부터 그랬다는 것일까? 바로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 이후부터였다!

저주 선언의 에발 산 기슭에 살던 이 여인에게 새 경배 선언이 주어진 것이다!



참 경배자란?


구약의 경배는 한 마디로 제사였다. 제사법이 담긴 율법보다 훨씬 이전부터인 초기 선조, 아벨의 때로부터 서기 약 70년 예루샬렘 성전이 완전 파괴될 때까지 그랬다. 대사제와 사제들과 레빝(레위 사람)들이 끝도 없이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가축들의 희생과 레빝 음악사역자들의 제사음악이 따라주어야 했던 경배였다. 


그 모든 제사를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어느 날 하루의 불과 몇 시간만에, 단번에, 영원히 완성하여 끝내 버리셨다! 

이제 신약의 경배는 영과 진리의 제사다. 영적이지, 더 이상 육적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더는, 동물과 외적, 율법적인 요소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이 구약과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요소이다. 


이 신약적 경배의 개념을 좀 더 깊이 이해하여 보자.



첫째로, 우리는 참된 경배자여야 한다. 


그런 경배자들이 곧 하나님이 찾으시는 대상자이기 때문이다.


가장 높으신 분--지고신(至高神) 곧 엘리욘(עֶלְיוֹן / Elyon) 또는 엘 엘리욘(אֵל עֶלְיוֹ / El Elyon)이신 하나님이 몸소 찾고 계시는 대상이라니(!), 인간으로선 극히 '특권'스럽고 듣기에 한없이 황송한, 지고지상의 영예와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라는 말이든 노래든, 참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여기서 참 경배자(οἱ ἀληθινοὶ προσκυνηταὶ[각주:4])라는 말은 진실한, 신실한, 진정한, 올바른, 올곧은, 정직한 등의 의미가 있다. 과거는 경배 대상은 물론, 장소와 의식도 중요했지만, 지금은 대상과 함께 경배자 자신들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주님의 이 말을 바꾼다면, 경배하는 사람이 참 경배자가 아닐 때 경배의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된다. 진실되지 않고 거짓된 사람들이 모여 경배한다면, 그건 경배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여기서 진실되다는 말은 도덕적/율법적 정의의 의미가 아니다. 평소 개인적으로 즐겨온 게 분명한 주초를 이날 하루만 다 말아넣거나 끊고 나와야 제대로 된 경배자라는 뜻도 아니다. 정장을 하고 그럴 듯한 모습과 자세로 나와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참 경배자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를 갖고 숨김 없고 꾸밈 없이 나아온 사람들을 가리킨다. 현재의 모습이야 어떻든, 이 시간부터 오직 말씀과 믿음과 성령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참 경배자는 바로 성전 뒷 구석에서 오금을 저려가며 가슴을 치며 회개하던 세무관처럼, 거듭나고 성령을 받아모신 훗날의 쉬카르 여인처럼, 하나님 앞, 하나님 면전에서 그 분의 얼굴 앞에서 숨김 없이 정직하고 진솔한 사람들을 말한다. 떳떳하고 당당하게 스스로 맨 앞 자리에 나와, 이러쿵저러쿵 자신의 선행을 읊조리고 늘어놓으며 자랑삼던 파리새는 참 경배자가 아니다!



둘째로, 우리는 영으로 경배해야 한다.

 

그러려면 영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이 말은 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외적 제사와 율법 중심의 구약 시대의 경배는 영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신 바 영으로 하는 경배는 구약의 경배와 구분을 지어주는 가장 중요한 면모이다. 


법궤를 성막으로 나를 때, 다뷔드가 있는 힘껏 열정을 다해 예호봐(여호와) 님 앞에서 춤춘 것을 갖고 사람들은 "영적"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건 (사역적인 기름부음 밖에 지니지 못한) 한 구약인이 마음과 몸을 다하여 한, 육적인 경배였다.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을 비롯한 세계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 정신을 갖고 회당에서 경배하지만, 짐승 제사는 드리지 못하고들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앞으로 조만간 지으려는 소위 '제 3 성전'에서 동물 제사를 재개할 것이라고 벼르고 있다. 준비도 다 된 상태이다. 그들 대다수는 예수 크리스토를 메시아로 절대 받아들이지 않기에, 메시아가 모든 희생제사를 완성했다는 신약 교리도 믿지를 않는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드리려는, 구약 때와 같은 끝 없는 짐승 제사를 드리다가는 혹 환경보존주의자들이나 동물보호주의자들의 반대와 태클에 부딪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장차 다가올 세계 '종교통합' 시대에는 소를 절대로 먹거나 죽이지 않는 힌두교인들과 다툼이 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아직도 육적 세계인 오리무중을 헤매고 있으며, 무슨 뻑적지근한 제사를 드리든 결코 영적인 경배와 경배자들이 못 된다. 그들의 제사는 다 헛 제사이다! 이미 세계사는 신약시대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신약시대의 경배는 신약적이어야 한다.  


아무튼, 그럼 어떤 것이 영으로 하는 경배인가? 주님께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전제를 다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인 참 경배자이려면, 하나님의 실존, 곧 존재와 본질을 바로 알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이신 성령을 통해 일하신다. 

예수님을 통해 일하시던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성자님으로만 일하시던 구약 때와 직접 화육/성육신하셔서 지상사역을 하시던 복음전파 시대까지였다. 앞으로 주님의 재림 후엔 또 다시 그 분이 하실 몫이 있을 터이다.  

영으로 하는 경배는 바로 성령으로 채워진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성령의 힘으로 하는 경배이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순절 당일 이후 교회에 무슨 일이 있었나와, 사도 파울의 서신들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날 오순절에 모든 신자들은 성령을 받아모시고 즉각 영언(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무슨 뜻일까? 영적인 경배는 영언을 필수적으로 수반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노~!"라고 말하지 말라! 


분명히 사도 파울은 초기 교회의 영적 경배 모습을 예시(例示)해 놓았다. 바로 코린토A서 14'26 그대로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형제님들? 여러분이 모일 때 각 사람에게 찬양시도 있고, 가르칠 말씀도 있고, 계시도 있고, 영언도 있으며, 통언[각주:5]도 있을 터입니다. 그 모두를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하시오."

[ 개정역: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


이것을 경배가 아니라고 말하지 마라! 코린토교회에만 있었던 일이라고 주장하지 마라! 분명히 파울은 성도가 주일날 또는 평일에 모일 때 하는 일을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학적으로 세뇌된 사람들, 특히 이적과 기사, 은사와 신유와 영언 등이 이미 옛날에 다 '끝났다'고 주장하는 소위 종식론자/중단론자(Cessationists)들은 위에서 찬송시와 가르치는 말씀을 빼곤 나머지가 오늘날 교회에 '없다'고 주장들을 한다. 물론 성경엔 없는 '나름 주장'이다. 


왜 대다수의 현대교회의 경배/예배엔, 파울이 명시한 그런 영적인 모습들이 없을까? 신학에 세뇌된 나머지, 오순절에 임하신 그대로의 성령이 아니라 그들이 신학적으로 잘 "다듬은"(=절감되고 '할인'된) 성령 사역만을 바라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오순절 그대로의 성령님은 반기거나 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네 보기에 현대의 영언은 모두 지저분하게 보이고 다 '가짜'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교인들의 오해 및 착각과는 달리, 온유하신 성령님은 강압적/'절대주권적'으로 역사하시지 않는다. 그 분을 옛 오순절 사역 그대로 반기고 환영하는 교회에서만 그렇게 일하신다. 나머지 교회엔 그냥 단순히, 꼭 필요한 감동만 주실 뿐이다. 대다수 현대교회가 그것 밖엔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겉 보기에 깨끗하고, 깔끔하고, 말끔하고, 아무 문제가 없어야만 받아들이겠다고 뻗대기 때문이다. 지저분하고 추해 뵈는 영언이나 통언 따위는 한사코 무질서하게 뵈는 탓에 아예 바라지를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현대교회의 경배/예배 시간엔 목회자가 신학교에서 '예배학'을 배운 그대로 계획된 '예배요소'들과 '예배순서'에 따라, 깨끗하게 주보에 인쇄되고 나열된 그대로, 하나 하나, 차근차근, 깔끔하고 반듯하게 해 나아가는 것을 '예배'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정해 놓은 계획과 인간이 진행해 나아가는 예배순서대로 맡은 이들에게, 뒤늦게 성령께서 임하시고 복을 주시길 바라곤 한다. 


그러므로 거기 성령님이 끼여드실 자리가 적다. 

그런 의식은 어디까지나 몸과 정신으로 하는 것이지, 주님과 파울이 말한 바 영적인 차원의 경배가 아니다. 오순절 그대로의 성령님을 맘 열어 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현대 교회들이 그렇다. 


이런 얘기를 듣는 지도자는 나를 으레 "교회를 허무는 사람"이라고 비난하곤 한다. 왜 성경적인 얘기를 해 주는데도 그렇게 밖에 반응하지 못할까? 신학과 예배학과 의식(儀式)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자, 그런데 오늘날도 그런 경배가 가능하냐고? 나는 오랫동안 한국교회에서 지내면서 그런 교회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가 외국에 살아왔던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지시해 주셔서 발견했고, 거기 수 년간 머물며 누리고 즐겼다.  

거기엔 코A 14'26의 요소가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었다. 성령님을 진정 환영하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진리로써 경배해야 한다. 


진리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선 긴 말을 하지 않겠다. 다양한 글에서 이미 많은 말을 해 왔기 때문이다. 



참 경배자가 된 쉬카르 여인


끝으로, 그럼 과연 그 쇼므론 쉬카르의 여인은 정말 주님의 예언대로 참 경배자로서 영과 진리의 경배를 할 기회를 가졌을까? 나는 그녀가 분명히 그랬다고 믿는다! 그녀가 언제 그랬냐고?


예루샬렘 첫 교회의 7 집사의 한 명인 필맆(빌립)이 쇼므론(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러 왔을 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거나 좀 덜 믿던 쇼므론의 모든 신자들이 이적을 보고 확신을 가진 데 이어, 다시 페트로와 요한이 와서 안수하면서, 성령침례(성령세례)와 함께 영언을 시작하도록 돕자, 쉬카르 온 마을 신자들과 함께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 여인도 거기 끼었으리라는 것이다(행 8'1~15).[각주:6] 

주님의 그 참 경배 선언과 예언을 맘 속에 간직한 채 오래 고대해온 쉬카르 여인은 성령을 받아모시고나자 "아, 이게 바로 메시아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참 경배로 가는 길목이구나. 나도 이젠 참 경배자의 하나이구나~!" 했을 터이다.


그랬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고? 분명히 갓 믿은 쇼므론의 마술사, 쉬몬 마구스조차도 예수님을 믿고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초자연적 역사(영언)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자, "나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하고 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못 들었으면 어떻게 그런 요구를 했겠는가?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그제야 주님이 하신 대명(지상명령)이 자기 눈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성령이 그대들에게 임하면, 그대들이 권능을 받아, 그대들이 예루샬렘과 유다와 쇼므론, 마침내 땅의 끝까지 내 증인이 될 것이오."(행전 1'8)


그런 성령사역이 그 후 코르넬리우스(고넬료)의 가정교회에서도, 후기 사도 파울에게도, 에페소 교회에도 이어졌다. 


과연 우리는 바른 경배자일까? 각자가 성경 말씀을 보고 곰곰이 판단을 해 볼 수 있길 바란다. 오늘날도 성령님은 오순절에 나타나신 방식 그대로 그 분을 환영하는 참 경배자들이 있는 곳에서 일하신다! 




  1. 신약인들이란, 4복음서 속 사람들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오늘날까지의 모든 세계 신자들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2. 또는 쉬켐. 고대의 세겜. [본문으로]
  3. Sychar. 한글 성경의 '수가'. 오늘날의 아인-아스카르로 추정된다. 일부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발음이 비슷한 쉐켐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마을이다. 야콥이 요셒에게 땅뙈기로, 야콥의 우물이 인근에 있다. [본문으로]
  4. 호이 알레티노이 프로스퀴네타이 [본문으로]
  5. 영언의 해석 [본문으로]
  6. 이 쇼므론 전도 사건은 예루샬렘 교회에 모진 박해가 없었다면, 일어나기 어려웠던 사건이다. 그때까지도 유대인 성도들은 율법적, 준 율법적으로 쇼므론 사람들을 멀리해 왔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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