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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 코너/샬롬의 평화칼럼

[벧전 2:22-24]자아의 죽음인가? 죄에 대한 죽음인가?(샬롬)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22~24)


샬롬

요즘 우리 주위에서 자주 듣는 단어 하나가 자아(自我/Ego/self))부인 또는 자기부정이라는 말입니다.
열에 아홉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되곤 합니다.
(이하에, 자아로 통일하여 씁니다)

언제부터인지 교회 내에서 아무런 거부감 없이 “자아”라는 용어가 사용되어져 왔습니다.
저 또한, 한때 자아부인을 외치며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자아를 부인함이 나의 욕심과 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을, 성령님을 인정함이라 배·웠·기 때문이지요.

그 당시 제가 알고 있는 자아의 개념은 하나님보다 앞서는 나의 생각, 의지, 사상등을 가르키는 총체적인 말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의 원인이 바로 이 "죽일 놈의(?) 자아"였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많은 일들은 아직도!!! 죽지 못한, 포기하지 못한, 생생하게 살아있는 자아가 하고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많은 분들도 저처럼 그리 여기시고, 이러한 유의 말들을 지금도 사용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자아는 대상의 세계와 구별된 인식·행위의 주체이며, 체험 내용이 변화해도 지속하여 작용·반응·체험·사고·의욕의 작용을 하는 의식의 통일체입니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우리가 생각(의식)하면서 행동하는 모든 것이 자아의 작용이라는 의미입니다.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그의 저서 <자아와 그것>(1923)에서 이른 바 에고(자아) - 이드(그것) - 슈퍼에고(초자아)의 3박자 도식을 제안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자아(ego)란 현실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성격의 의사결정 요소로, 자아는 사회규범, 규칙, 관습과 같은 사회적 현실을 고려해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성적 사고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드(id) 요것이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3박자 도식 중 가장 최하위 부분입니다.
이것은 본능적 에너지, 리비도(libido)의 저장고이며, 쾌락을 추구하고 불쾌함을 피하는 쾌감원리(快感原理)만을 따른다고 합니다.
본능에 충실하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선을 택하지 아니하고 악을 따르는 데 신속함은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자아보다는 이 쾌감원리를 따르는 이드의 작용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속칭 “자아”에 대하여 비움과 부인과 죽음 등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한다면, 아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 교회내에서 오용·남용되는 자아부인의 개념은 하나님, 예수님, 주, 성령이라는 단어가 첨가 되어있을 뿐, 불교, 요가, 뉴에이지에서 사용하는 의미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말하고, 계획하고, 유익을 고려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누구도 자아를 위해 그 무엇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며 하나님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지각을 사용치 않는 영적인 수동상태를 유도합니다.
성령의 깊은 임재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 고요한 상태(무념무상)를 유도하기도 합니다.
성령님을 만나기 위해 관상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히려 신앙에 장성한 자들은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히5:14)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지각을 사용하여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요1 5:20)
주께서 허락하신 소중한 지각을 포기하고 그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기도만 하고 있는 영적 수동상태는 결코!! 성령충만한 모습이 아닙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요1 5:20)

요즘은, 성경에 나타난 용어들을 차용해 가여, 때로는 뉴에이지적인 사상도 여과 없이, 서슴 없이 받아들입니다.
뉴에이지의 특성은 포괄적이며 상대적입니다.
자신의 영적 리더가 누구이든 무엇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 대상이 비롯 “예수”라 칭해질지라도 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는 성경대로의 그리스도가 아닌 깨달은 자(覺者) 중 하나일 뿐입니다.
슬금슬금 들어오는 뉴에이지의 물결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그런 개념은 자아부인의 근거가 되는 마16:24 자아의 부인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먼저 앞 부분을 살펴보면,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베드로가 항변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23절부터 24절에 이르기까지 베드로에게 답변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16:23)

23절과 24절을 연장선에 놓고 보면, 자기 부인=사람의 일을 생각하여 주의 일을 가로막지 않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본 절에서의 자기 부인은 자기의 모든 일을 부인/포기하고 주의 일!!! 이라 하며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니, 간혹 오용되는 의미와는 사뭇 그 뜻이 다릅니다.


세째, 자아죽임의 근거가 되는 고전 15:31 또한 자아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본 절의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앞 부분에서 부활의 소망을 말하면서 부활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죽음의 연속인 위협을 무릅쓰고(고전 15:30) 주의 복음을 전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34절)는 사도 바울의 권면은 자기의 의지사용을 주저하게 만드는 자아의 죽음과는 상반되는 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깨어서!!!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의를 행하면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과도 연결이 됩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성령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기에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이 말은 회개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서든 교회사적으로든 성령충만은 회개를 반드시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성령충만을 핑계로 자기를 비우고, 버린다는 것은 성경적인 순서와도 맞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네째, 자아죽임의 근거가 되는 갈 2:20도 자아의 죽음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고백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이미(already)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존재들입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내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는 도대체 우리의 무엇이 못 박힌 것일까요?
무엇인가는 죽고 무엇인가는 살았을 터인데 그게 무엇일까요?
나의 육신은 암만 봐도 못 박힌 사실이 없으며, 육체 가운데 내가 호흡하며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 육신이 못 박힌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육신이 아닌 나의 자아가 못 박힌 것일까요? 십자가에...??
그래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나의 지각과 감정과 의지는 아직 못 못박힌 대상일까요?
그래서 철저하게 (아직도 못 죽은) 자아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일부 자아의 죽음과 일부 죽지 못한 자아를 지닌 불완전한 사건일까요?
이것이 과연 옳은 관점일까요...

성경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았다"고 말합니다.(벧전2:24)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하셨습니다.(벧전 2:23)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난!!! 존재입니다.
자아가 죽고 사는 그런 존재들이 아닌 것이지요.

또한, 우리가 거듭난 부분은 육신도, 정신의 영역도 아닌 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날 밤에 홀로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 알려주셨습니다(요 3:6)

자아의 죽음인가? 죄에 대한 죽음인가?에 대한 답변은 명백합니다.
익숙함이 곧 진리는 아닙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서 아무 거부감 없이 사용되고 있는 비움, 버림, 자아부인, 자아의 죽음 이러한 용어의 사용에 얼마나 많은 비기독적인 요소가 들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자아를 죽이고 부인하기 위하여 죽자 살자 사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기에 담대하게 의를 위하여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저... 성령님! 뜻대로 한 번 해 보시지요.. 하면서 내가 무언가를 하기를 포기한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진 지각을 활발히 사용하여 진리에 거하기를 기뻐하는 존재입니다.
이를 위하여 말씀과 기도 가운데 끊임없이 성령충만을 구하는 존재입니다.
나의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어메이징한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