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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캪튼's 코너

하멜의 표류와 개혁주의 신앙

하멜이 타고 표류했던 스페르웨르 호의 모형



김삼 


헨드맄 하멜의 '하멜 표류기'를 대강 읽어 보았다. 한국의 일부 기독교 사가(史家)들이 하멜의 조선 상륙을 기독교 역사적으로 의미있게 해석하곤 해서다.  


상당수 현대 한국인들은 당시 조선이나 제주가 홀란드(네덜란드)와 교역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놓친 데 대해 유감을 표하고 있다. 외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제주도를 '퀠파르트'라고 불렀다. 그 연유는 다양하게 추정되나 가장 유머스럽고 그럴 듯한 것은 '귤밭'에서 발음이 유래됐다는 설이다. 그러나 필자 나름으로 당대인들이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지는 것은 초기에 네덜란드 사람들의 신교 신앙을 전해 받을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그들이 보유했던 성경책은 입수할 수 있었지 않았겠는가.


왜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 홀란드 사람들을 통하여 고종 때보다 좀 더 일찍, 2세기도 더 전인 효종 왕 때, 복음이 전파되게 하지 않으셨을까? 한 가지 그럴 만 했던(?) 이유라면 이들이 훗날의 구미 선교사들처럼 그렇게 비교적 순수하게 거듭난 신앙인들이 아닌 상공인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 상공인은 순수 신앙인일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신교도였다곤 하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장삿속을 더 지닌 인물들이었다. 당대 유럽에서 항해력이 막강했던 네덜란드는 아시아 제국들과의 교역도 원했지만 어차피 식민지 시대 사람들이었다. 


헨드맄 하멜이나 그의 동료들, 그보다 먼저 한반도에 상륙하여 한국인 '박 연'이 된 얀 얀츠 벨터브레 등은 모두 신교도들이었으나, 우선 너무나 제한된 활동권 때문에 행여 복음 마인드를 갖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려야 거의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기독교 사가들이 어떻게 미사여구로 묘사하든 간에 17세기 개혁교가 활짝 꽃핀 나라였던 네덜란드 출신의 그들의 조선 상륙은 복음으로나 기독교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 단지 신교도로서 희미한 서구 문화적 발자국을 남긴 것 뿐이었다. 


그들이 신앙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나, 선교사가 아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소속 상인들이었기에 복음을 위한 순교적 마인드도 없었다. 목숨 내놓고 복음을 전할 사람들이 전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들은 대체로 조선 생활을 매우 비참한 것으로 여겼고 오로지 탈출할 생각만을 했다. 

그러나 그들이 탈출에 성공하여 잠시 정착하게 된 일본 데지마 섬(본래 중국 사신들을 위해 규슈 앞 히라도 섬에 만든 인공섬. 훗날 네덜란드 VOC사 사람들의 일본내 주거지)의 삶도 갇힌 준노예 생활이긴 마찬가지였다. 대동소이했다. 섬에 갇혀 사람다운 생활을 하지 못했다. 


이 홀란드 사람들은 조선보다 앞서 일본에도 복음을 전할 만한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순수 신앙인들이었다면, 하다 못해 데지마를 수시로 찾아오곤 한 일본 게이샤들에게도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 수십 년간 체류했던 하비 칸 선교사(한국명 '간하배'. 훗날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선교학 교수)는 한국 성매매녀들을 상대로 한 복음 사역을 통하여 실제 열매를 거둔 바 있다. 


그러나 그 대신 게이샤들이 데지마 주민들에게 환락과 성병만 전해 준 뒤, 돈만 받고 떠나곤 했다. 하멜은 그의 표류기에서 술과 가무와 함께 몸을 파는 조선 기생들을 '부끄러운 줄 모르는 창녀들'이라고 했지만, 그가 좀 더 존중한 듯(?) 보이는 일본 땅의 게이샤들도 별 다를 바 없었다.  


만약 이들에게 복음적 마인드가 약간이라도 있었다면, 하멜도 조선에서 '한무열'이나 '한함열' 등의 이름으로 지내면서 기회를 보아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려고 했을지 모른다. 


결국 홀란드 사람들의 코레아 상륙은 바람직한 복음 전파의 바탕이 못되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한국에 강제귀화한 일부 홀란드인들이 거주한 전라도 지방 등에서 자기 신앙을 후손에게 몰래 전했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곤 말하기 어렵겠지만 당대의 정책은 매우 엄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신앙적으로도 표류자였던 셈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네덜란드가 한 가지 한국 복음 전래에 간접적으로나마 한 역할이 전혀 없다곤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멜 일행이 조선에 상륙하기 불과 몇 십년 전인 1620년대에 네덜란드 레이던(Leyden)을 떠난 영국 분리파 신자들의 이야기다. 존 로빈슨 목사를 비롯한 이들은 본래 영국 청교도의 일파인 분리파로 나중 윌리엄 브랟퍼드에 의하여 '필그림'(나그네/순례자)들로 자칭했던 사람들인데, 그들이 피난처로 삼은 신대륙으로 향하기 전, 네덜란드에서 상당기간 머물러 있었다. 즉 아르미니우스주의보다 칼뱅주의 계열의 개혁교회를 활짝 피운 네덜란드는 미국 땅을 밟은 첫 신교도들의 발판을 제공한 셈이었다. 

 

광역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1650년대에 조선땅을 밟은 네덜란드 상공인들이 아니라, 1610년대에 네덜란드 레이덴에 거주하다가 1620년 이후 장기간에 걸쳐 미 대륙 땅을 밟은 영국 신교도들의 후예와, 스코틀란드 개혁가 존 녹스의 후예 격인 19세기 중국선교사 존 로스 목사 등 스코틀란드 장로교인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한국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네덜란드가 한국 선교에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멀게 간접적으로나마 이바지한 점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아울러 후대에 한국의 여러 보수적 신학도들이 네덜란드에서 개혁신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후예들을 가르쳐왔다. 


그러나 개혁신학이 곧 성경 진리는 아니다. 모든 신학도나 사역자들은 개혁신학 이전에 하나님의 진리 말씀 자체인 성경부터 철저히 연구하여, 모든 것에 앞서 올바른 성경관과 오로지 성경에 기초한 신학사상을 가져야 옳다고 강조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