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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미술

화가 뭉크의 종교적 모순



예술적 창의성은 인생의 강력한 불행감 또는 행복감에서 동시에 '발산'된다.
삶의 모순이 독특한 '나름 세계'를 낳는다. 그래서 세상이 즐겨 인정하는 이른 바 '천재성'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배경의 행복보다는 비정상적/모순적인 도전과 불행 속에서 더 발휘될 경우가 많다. E.A. 포우, 차이콮스키, 달리와 피카소 등에게서 특히 그런 점을 느낀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들의 세상 자체가 본디 비정상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 안에서 정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 가운데는 세상이 인정하기 좋아하는 명사나 천재적 예술인이 거의 없다. 주님 말씀에 따르면, 이것은 본질적인 진리의 일부다. 
 

쇼팽의 음악엔 조국을 앗긴 슬픔과 조국애, 강아지의 재롱을 지켜보는 한 때의 즐거움, 떨어지는 줄기찬 낙숫물과 끝 없는 한탄 같은 프렐루드, 결핵과의 투병, 이성과의 미완성 사랑 등이 교차된 애상(哀傷)이 두드러진다.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사랑의 슬픔과 기쁨을 각각 바이올린 소품으로 표현했다.

예술가들의 혼전/혼외 정사 등 비뚤어진 애정 행각들도 중요한 '창작 동기'로서 창작열을 북돋곤 한다. 그런가 하면, 바흐의 전례음악 일부에서 보듯, 기본적 필요에 따른 작품은 단조롭기 마련이고, 그만큼 강한 창의력이 결여된다. 
뭘 말하는가? 세상 예술인들은 성경적인 의미의 불법과 죄악의 "짜릿한" 자극을 통해 창작열을 북돋우지만, 그것이 결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거나 영광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직 진리의 바탕 위에서 성령님의 영감을 통한 예술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이다.
그러나 카톨맄교는 바탕이나 배경이야 어떻든 웬만한 예술인들의 작품은 그들의 하느님께 영광이 된다고 믿는다. 낙태나 동성애, 신성모독 등 두드러진 부도덕이 아니라면.


    뭉크의 종교적 우울

인상주의를 뒤이은 서구 상징주의/표현주의(Expressionism)의 선구자인, 화가/판화가 에드바르드 뭉크(1863-1944)의 명작이라는 '마돈나'의 제목이나 '골고타''병실에서의 죽음'의 음울한 분위기 등은 구교적 영향이 지대하다. 그런가 하면, 손수 새긴 목각 부조 액자로 장식한 대형화 '메타볼리즘'(원명 '아담과 이브')은 인류의 타락 '신화'와 사랑에 대한 염세철학을 표현했다. '빈 십자가'와 '골고타' 등의 모티프는 집안의 경건주의 배경과 형이상학적 바탕을 표출했다. 


서구 예술 세계의 배후엔 카톨맄 영향이 지대하다. 대다수의 명 화가나 음악인들은 카톨맄적 배경을 갖고 있다. 다수의 시인들도 그렇다. 신교 쪽은 드물다.
구교는 시인/예술가들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죄 지을 '기회'와 추후 참회의 '기회'를 동시 제공해 주며, 이것은 방만과 가책을 수반하게 된다. 뭉크의 삶에서도 그런 점이 엿뵌다.

구교 성당과 제도, 의식(儀式) 등은 예술가들에게 재능과 예술 정신, 헌신으로써 제도적 교회의 시스템에 '서비스'할 기회와 뒷받침을 준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아베 마리아'로부터 '레퀴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미사 음악에 투신한 까닭이 그것이다. 마리아의 모성애에 대한, 이성애 비슷한 연정이 아름다운 가락을 낳고, 죽은 이들의 영혼까지 챙겨 위안하려는 기여 정신이 모차르트나 베르디의 레퀴엠을 낳았다. 

루터교인이던 바흐의 전례음악도 여전히 카톨맄 미사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루터가 사제 출신이기도 하고, 당대는 일종의 과도기였다. 핸델의 종교적 오라토리오는 자유로운 성경적 배경과 스케일을 갖고는 있으나, 그의 음악 다수는 교회를 "위한" 것이기보다, [오페라와 성경과의 합일]을 통해 교회라는 세계를 탈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교국인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명화가인 에드바르드 뭉크에게서도 그런 영향이 크게 드러난다. 사제적 환경에서 비롯된 단색적(주로 검정색) 경건주의가 그것이다. 또, 유렆을 풍미한 신교 경건주의도 구교적 영향과 율법적 금욕주의의 색채를 면치 못했다. 

뭉크는 자신의 삶과 작품 세계에서 정-반 격인 '양대 세력'을 사제들과 뱃사람들로 상징했다. 뭉크라는 이름 자체가 카톨맄 수사라는 뜻이다. 영어의 'monk'와 같다.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에서 적은 사제들, 흑은 법조계를 상징한 게 연상된다. 뭉크의 세계에도 검정색과 붉은 색조가 두드러진다.
뭉크의 부계는 사제들, 모계는 뱃사람들로 대표돼서다. 어쩌면, 고대 바이킹들을 '신심'으로 정복한 사제들은, 뭉크 당대에도 그 집안의 항해와 지표를 지배한 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훗날 뭉크의 도덕심과 신심은 극히 제한된다. 뭉크가 어릴 때 접한 것은 그냥 종교이지, 진리의 바탕 위에 세워진, 참된 생명의 도가 아니어서다.  

뭉크는 언젠가 자기 삶을 이렇게 종교적으로 집약해서 말했다:

    "인생의 첫 출항을 할 때, 나는 거친 바다로 내보내진 낡고 썩은 재목의 배처럼 느껴졌다. 배의 제작자는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혹시 난파해도 네 탓일 뿐더러 넌 영원히 지옥에서 불탈 것이다.'"

이런 그늘진 운명론 내지 불행한 전조의 싹을 키워 준 것은 초기의 우울하고 불행한 집안 배경과 아버지 크리스티안의 율법주의였다. 무엇보다 카톨맄교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초기 묘목밭의 주 재원이었고, 훗날 아버지가 일찍 죽자, 자신에 대한 종교적 지배세력을 상실한 뭉크는 한동안 허탈감 속에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선지 뭉크는 생애 후기에,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허무주의 철학자 니체 및 가족과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뭉크의 이러한 종교적 우울을 극복할 수 있었던 길은 미술이었고, 그 구원의 여성은 뭉크의 이모, 카렌 비욀스타드였다.


    제약된 공간과 극화

뭉크는 비록 굵은 선 등 후기 인상파들의 기법에 스타일적 영향을 받긴 했으나, 몽롱하고 소프트한 인상주의 이디옴이 자신의 작풍엔 걸맞지 않다고 일찌감치 판단해, 차별화했다. 그는 상황에 따른 감정 표출과 표현적 에너지의 힘을, 긴장된 분위기 효과에 최대한 계산해 넣었다.
그러나 외적인 사실주의이기보다 내용상 상징적이었다. 그래서 표현주의 기법 형성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작품 '절규'에서 입증되는 점이다.
 
뭉크의 1890년대 그림들은 옅은 바탕 채색과는 달리, 제약 받는 비좁고 숨막히는 듯한 공간 속에 제스처가 극화(劇化) 내지 극대화 된다. '병실에서의 죽음'(1895)에 나타난 인물들은 무대 위의 배역처럼 표정과 몸짓으로 무언의 감정을 표출하며, "단일 심리차원을 체현"하고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물론 자신의 가족이다.

그러나 뭉크 작품 속 남녀들은 대체로 사실적이기보다 상징적이다. '멜랑콜리', '절규' 등에서는 또, 상징적 요소인 색채와 함께 자신의 개성적이고 오리지널한 종합주의적 시도를 공식화 했다.     
그는 만년을 제외한 초기부터 중기까지 제약과 불행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그랬기에 많은 작품들 속엔 가족에 대해 사로잡힌(haunted) 듯한 집착감이 두드러진다. 가족 스토리-그것이 뭉크가 쓰려던 주된 얘기였다.

    경건한 엄마 로라는 결핵으로 뭉크가 5세일 때 죽었다.
    뭉크가 가장 사랑했던 누나 소피도 15세로 역시 결핵으로 숨졌다.
    아버지 크리스티안도 젊어서 죽었다.
    한 여동생은 어릴 때부터 정신질환자였다.
    5 남매 중 유일하게 결혼한 남동생 페테르 안드레아스는 그후 몇 달만에 죽었다.
    뭉크 자신 어릴 적부터 한평생 지병을 앓았다.


그래서 뭉크는 "질병, 정신질환, 죽음이 나의 요람을 에워싼 천사들로서 평생 내 뒤를 따라다녔다."고 술회했다. 뭉크 자신, 훗날 신경증상과 정신장애를 겪게 된다. 그의 증상으로 미뤄 학자들은 일부 천재들의 '공통점'으로 제기되는 조울증 또는 양극성장애(bipolar disorder)로 추정하기도 한다.

뭉크는 자신만의 화풍 및 편력을 엮어나아갈 하나의 둥지가 될 첫 주제를 찾다가 '삶의 프리즈'(프리즈: 가로띠 모양으로 장식을 나열한 건축 양식)로 잡았다. 이 주제는 20세기 전환점까지 지속된다. 누나 소피를 그린 '아픈 아이'(1886), 흡혈귀(1893-94), 재(1894), '다리' 등이 모두 이 주제 시리즈의 일부이다.   

뭉크 전반기의 침울한 색채와 제약된 공간은 이런 배경을 시사한다. 왕성한 창작생활에서 '자식들'처럼 태어난 그의 수많은 그림들의 대표작도 충격적인 화면의 '절규'(원명: 절망).

뭉크는 프랑스 파리가 지배한 인상주의 시대 후기를 살면서 자잘한 점묘나 가는 선보다는 부드럽고도 과감하고 굵은 선들을 선호한다. 그는 입체주의 또는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추켜진다. 한 시인은 뭉크의 세계를 '심리적 사실주의'로 정의했다.  
 

뭉크의 예술 세계를 가장 일찍 일깨운 사람은 엄마가 죽고나서 대신 주부역을 감당한 '카렌 이모'였다. 이모는 이끼와 풀잎으로 장식꽃을 만들어 내다 팔아 가계 재정을 크게 도우면서, 아이들에게 모두 종이판 오리기, 그리기 등을 가르쳤고, 아이들은 매우 진지하게 즐겼다. 이모는 아이들의 작품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보관해 두었다. 뭉크가 어릴 때 그린 모든 그림들도 집안 구석구석에 숨어 있어 화가로 대성하고 나서도 그런 그림들을 되찾아 보곤 했다.


   '마돈나'와 뭉크의 비정상적 여성 편력

예술가들의 애정 편력은 당연히 창작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자연계에서도, 식물은 결실 전 화려한 개화기를 갖고, 암수 동물들은 발정기에 최상의 음색/색채/몸짓 등의 표현으로 환상적인 구애를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 
수련의들이 일찍이 인체를 대하듯, 화가/조각가 지망생들은 일찍부터 작품/모델의 나신을 대한다. 성을 채 알기 전 먼저 성을 보고 느끼게 된다.

뭉크의 경우, 이성애는 부정적인 영향이 더 컸다. 그는 여성을 연약하고 순수무구한 희생자들, 또는 생명력을 빨아 삼키는 간악한 흡혈귀 등으로 묘사했다. 분석가들은 그의 성적인 초조감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특히 흡혈귀 상은 자신의 괴롭힌 '원수'였던 연인 '툴라'에게서 도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뭉크의 첫사랑은 남의 젊은 아내였다. 그녀에게 미칠 듯 반한 나머지, 만날 기회를 노리다 결국 비밀리에 만나 성애를 즐긴 후, 경건을 중시하는 아버지에게 그녀와의 정사를 들킨 듯 상상하며 깊은 죄의식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죄의식은 그 때뿐 그의 삶과 도덕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 하다.
대조적으로, 두 번째 본격적으로 사귄 여성과는 "부담 없는" 관계이길 원했으나, 상대의 정열이 예술 생활에 거추장스럽게 방해될 정도여서, 역시 단기간의 우여곡절 끝에 헤어진다.   
이처럼 이뤄지지 않은 사랑들이 그의 왜곡된 이성관을 불러 왔다.


뭉크의 주요작의 하나인 '마돈나'에는 뭉크의 여성관/이성애/종교열 등이 고루 내포돼 있다. 뭉크는 1894-95년에 다섯 가지의 다른 버전을 만들 정도로 이 작품에 열의를 쏟았다.
그런데 과거 종교화가들의 경건하고 조신해 뵈는 전형적인 마돈나와는 달리, 그의 획기적인 마돈나는 "혹 에로팈하진 않더라도" 센슈얼하기까지 하다. 마돈나의 얼굴이 비스듬히 위를 향한 것이나 복부가 밝게 두드러진 점은 '수태고지' 사건을 염두에 두었음이 거의 분명하다.

전형적인 마돈나와 우선 다른 점은 젊다 못해 거의 십대 소녀로 보인다는 것.
또 이 마돈나의 약간 기울어진 독특한 제스처는 과거의 마돈나처럼 수동적이기보다는 능동적이며 사뭇 고혹적이기도 하다. 머리털은 거의 산발한 듯 좌우 어깨 위로 늘어졌고, 뒤로 돌려진 완곡한 마름모 형태의 두 팔은 피동형적 능동형이다. 이 마름모 제스처와 배경 네모를 이룬 굵은 선들은 어느 모로나 자궁을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 자세로 상반신 전체가 뒤로 젖혀져 여성다운 주요 신체 부위들이 한결 더 드러난다. 

마돈나의 몸은 밝은 황금빛에 가까운데, 얼핏 프랑스 여인이 쓴 베레모처럼 보이는 머리 위 원광은 핏빛이다. 왜 황금색이 아닌 핏빛일까? 그녀 역시 크리스토의 보혈 아래 있다는 진리의 상징일까? 그보다는 '절규'의 하늘빛처럼 일종의 충격 효과가 아닐까? 실로 뭉크의 마돈나는 충격 자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뭉크의 마돈나 역시 유대계라기엔 백인 여성에 더 가깝다는 점이다. 
뭉크의 '마돈나'는 뭉크가 겪은 모든 여인상들을 종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머니/이모/누나/누이..특히 그의 첫사랑 여인 등이 그러하다.
 

    뭉크의 화려한 후반기와 허탈

대중적 인기를 끄는 뭉크의 작품들은 주로 1890년대의 것이지만, 후기 작품들도 점차 주목받으면서 특히 현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80세 남짓한 생애의 뭉크에게도 후반기의 성공과 세속적 행복감이 찾아온다. 전형적인 대기만성형인 그는 '시행착오', 투혼의 노력 끝에 창작성을 인정 받아 성공하고, 돈과 여유, 영예도 안게 된다.

그러나..스스로 '난파선'으로 자칭한 그에게 그의 종교는 결국, 그를 사제처럼 총각과 홀아비로 생애를 마치게 한 셈이었나? 아버지/어머니에게서 물려 받은 뭉크의 종교는 그를 결국 신앙예술로 승화시켜 주지 못하고, 또 한 명의 세속 예술인으로 그친 셈이었다.  

그래선지 뭉크가 유언처럼 남긴 명언(?)에선 아무런 빛을 발견할 수 없다.

    "나의 썩어 가는 몸에서 꽃들이 자라나면 내가 그들 속에 있을 테니, 그것이 곧 영원이다."
     - 에드바르드 뭉크

 

부록:  뭉크의 생애

[ 뭉크의 종교적 모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생애를 비교적 상세히 소개한다. 4개 이상의 자료를 추리고 종합한 것이다. ]


뭉크는 1863년 12월12일 노르웨이의 수도 크리스탸냐(=훗날의 오슬로)에 가까운 헤드마르크의 뢰텐에 있는 오달스부르크에서 태어나, 크리스탸냐에서 주로 자랐다.

군의관인 아버지 크리스티안은, 당대의 유명한 노르웨이 역사가 페터 안드레아스 뭉크와 친형제 사이였다(그래서 둘째 아들에게 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뭉크 가문엔 또 다른 명 화가-야콥 뭉크도 있었다. 뭉크 가문은 중산층/사제/학자/예술가/시인들로 점철됐다.

크리스티안은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는데, 노총각으로 나이 40을 훌쩍 넘긴 뒤 엘베룸의 문테 박사 집에서 만난 그 집 하녀 로라 카트린 비욀스타드와 사귀다, 둘의 나이 각 44/23세 때인 1861년결혼했다. 당시 비욀스타드 양은 유전성 결핵환자였다.

뭉크의 외조부는 한 때 "잘 나가던" 선장이자 목재상인이었으나, 가계에 결핵 유전자가 흘러, 훗날 점차 쇠진한다. 엥겔하우크 농장에서 태어난(1862) 첫 아이이자 맏딸인 요한네 소피는 틴에이저로 결핵으로 숨져가(1877), 뭉크의 가슴팍에 큰 한을 남겼다.

뭉크는 날 때부터 아파 보이자, 즉각 신부를 불러 집에서 영세를 한 뒤, 봄에 뢰텐 성당에서 재확인했다. 이듬해 크리스티안이 수도권 아케르스후스 요새에 군의관으로 발탁되면서 가족이 크리스탸냐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의 죽음

어머니 로라는 뭉크가 다섯 살 때 결핵으로 죽었다. 1868년 1월, 엄마는 가족에게 고별사를 쓴 뒤 맏딸 소피 편에 부쳤다. "우리 모두, 하느님이 오죽 잘 배려하셔서 하나로 묶어 주셨으니까, 천국에서 만나 다신 헤어지지 말자."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는 그 뒤로도 가족모임에서 자주 읽혔고, 자녀교육 상 크리스티안에게 하나의 가이드가 된다.

어린 뭉크가 엄마를 마지막으로 본 건 당시 필레스트레데트에 있던 집의 리빙룸에서. 크리스마스추리에 불이 켜졌고, 소파 한 가운데 엄마 로라가 두터운 검정 스커트를 입고 조용히 창백하게 앉아 있었다. 다섯 아이들이 모두 엄마 곁에 섰거나 앉았다. 아버지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로라 곁에 앉자, 그녀의 뺨엔 미소와 동시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매우 극적인 임종이었다. 

    뭉크 집안을 살린 이모 카렌

로라의 사후 그녀의 친동생인 뭉크의 이모, 카렌 비욀스타드가 이사해 들어와 이후 내내 자녀 양육 및 가사를 맡아 헌신적으로 돌보게 된다. 1875년 가족은 시 동부 교외지역인 그뤼네를뢰카로 다시 이사를 갔다. 아버지는 의사이면서도 수입 잡기엔 무능한 편이어서, 산업노동자/기술인/서기/공무원들이 사는 집을 세들어 살았는데, 춥고 적막했다. 더 잘 사는 친척들은 시 서쪽에 살았다. 

이모 카렌은 다정다감한 데다 상상력과 지능이 풍부해, 창의적으로 가족을 이끌어 갔다. 중산층 수준의 생활을 유지하려 애썼고, 의사 집안이라 하인들을 데려다 무료봉사를 시키곤 했다. 카렌은 이끼/이파리로 만든 인기 높은 상품인 콜라주를 만들어 시내 가게에 내다 팔았는데, 집안 재정 유지에 큰 몫을 했다.

뭉크네 아이들도 콜라주 제조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예술적 재능을 일꺠운 동기가 됐다. 종이 실루엩을 오려내기도 하고, 모두 함께 이끼와 짚으로 풍경화를 만들기도 했다. 이모는 아이들의 창작욕을 자극했고 작품을 매우 진지하게 다뤘다.
뭉크가 12살 때 그린 그림도 이미 조직적인 안목을 나타냈다. 창작 모티프는 집안 주변 환경과 가구 등이었다. 문학과 역사 등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가 큰 소리로 읽어준 책 내용도 모티프가 됐다. 아버지의 형 P.A.의 역사책, 탐험과 유령 이야기도 주요 레퍼토리였다. 

1877년엔 누나 소피가 결핵으로 죽었다. 어머니와 누이의 연이은 이 죽음은 뭉크의 만년까지 긴 추억으로 남아 작품 세계를 넘나든다. 뭉크 자신, 만성 천식/기관지염, 류마티즘 열병 등을 자주 앓았다. 그래서 기나긴 겨우내 실내에서만 지내면서 개인 레슨을 받았다. 미술을 포함한 첫 교육환경이 모두 가정이었고, 따라서 그 누구보다 가정적인 배경의 뭉크였기에 작품에도 반평생 가정의 모티프가 따랐다.  

    정식 미술교육을 받다

1879년 가을엔 뭉크가 크리스탸냐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미래 유망직종을 위해선 테크 교육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미술은 그 주 과목이었다. 그간 가족들과 주로 살아온 뭉크는 여기서 처음으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러나 병치레로 자주 결석했고 결국 이듬해 가을, 주로 정착생활을 하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왕립디자인스쿨에 등록, 1881년 봄부터 공부를 시작했으나 제대로 출석한 것은 그 해 가을부터였다. 이곳에서 그는 첫 누드 데생 수업도 받는다.  

뭉크는 조각가 율리우스 미델툰이 가르치는 정물반에도 들어갔으나, 불과 1년 후 학교를 떠나 젊은 친구 그룹과 함께 중심가인 카를 요한 거리에 스튜디오를 임차해 지내며 그림을 그렸다.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던 자연주의 유명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가 학생들에게 무료지도를 자청해 왔으나, 뭉크는 그의 전횡적 교육방식에 질려 버린다.

    화단에 데뷔하다

1883년은 뭉크 데뷔의 해였다. 산업미전에 그림 한 점을 출품한 데 이어 그 해 12월 '가을전시회'에 처음 참여했다.

당시 수도권 화단의 중심 인물은 프리츠 타울로. "잘 나가는" 국제 아티스트로 가난한 젊은 후배들을 간접지원하기도 했던 그는 뭉크의 재능을 발견, 아버지 크리스티안에게 뭉크를 파리 '살롱 구경'을 보내자며 여비도 돕겠다고 제안해 오기도 했다. 뭉크는 훗날 타울로 가문과 '딴 인연'으로 얽히게 된다.

아무튼 1885년 4월, 당시 22세였던 뭉크는 첫 해외 여행을 떠나, 우선 세계박람회가 열리고 있던 네덜란드 안트워프로 가서 작품 하나를 전시한 뒤, 파리로 향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3주 연구체류기간 동안 작품 감상/연구를 했고, 연례 현대 미술 평가전이 열리곤 하던 파리의 '살롱'도 참관했다.

    유부녀와의 첫 사랑

그 해 여름. 해외 나들이로 한껏 마음이 부푼 뭉크가 유부녀 밀리 타울로와 사랑에 빠진다. 뭉크가 글 속에서 '하이베르그 부인'으로 지칭한 밀리는 화가 프리츠 타울로의 형제인 군의관 카를 타울로의 젊은 아내였다. 그녀를 한 번 본 뒤 정염에 빠져 만날 기회를 노리며, 카를 요한 거리를 무작정 헤매 다니곤 하다, 결국 둘이 뭉크의 스튜디오에서 밀회를 하는 사이가 됐다. 

그러나 뭉크는 이내, 아버지가 "녀석이 간음을 했어. 그런 끔직한 데(늪에다) 자신을 던지다니.."라고 생각하리라는 상상에 사로잡혀 지독한 죄책감을 느낀다. 크리스티안은 자녀들에게 죄를 지으면 결코 용서 받을 기회가 없이 벌을 받는다는 의식을 강제 주입하곤 했다는 일설이 있다.

훗날 이 불장난의 기억이 퇴색된 뒤 뭉크는 밀리에 대한 감정을 좀 더 "정신 차린" 차원에서 자가 분석했다. "다른 또래와는 달리, 수도원 같은 집에서 갓 나온, (이성의) '신비'라곤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리고 무경험한 소년이 수도권 살롱가의 '여성이라는 미스터리' 앞에 서서 미지의 세계를 들여다 봤다"고.

말하자면, 크리스티안은 뭉크의 하느님이었고, 뭉크의 어릴 적, 하느님에 대한 첫 인상과 후기 인상도 아버지로 대표되어 다가왔던 셈이다. 밀리의 남편이 뭉크의 아버지처럼 군의관이었던 사실 또한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이런 박약한 양심 체험은 훗날에도 뭉크의 도덕의식을 더 높은 차원으로 지탱해 주지 못한다. 진리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해서다. 이것은 뭉크의 중요한 종교적 모순의 실체였다.

    심적인 보히미언과 국비 연수

1886년 미술제에서 뭉크는, 압수된 명저-'크리스탸냐 보헤미아로부터'로 악명 높던 저자, 한스 예거를 본격적으로 만난다. 이 미술제엔 밀리 타울로 부부도 참석했다. 뭉크는 전부터 예거를 알고는 있었으나 이 때를 계기로 예거의 보헤미안 서클에 동조하기 시작했고, 뭉크는 예거의 자전적(自傳的) 집필 아이디어도 배워, 어릴 때의 영적 경험, 사랑과 죽음 등에 연계된 추억들을 일기나 글로 옮겨 놓곤 했고, 훗날 그림에까지 반영한다.

1889년 봄. 뭉크는 수도 크리스탸냐에서 첫 개인전을 연 끝에, 정부로부터 파리 정물화 연구여행을 위한 여비/장학금을 받았다. 그 해 여름 그의 가족은 수도에 가까운 피오르드(灣)의 오스고르드스트란드 마을에 작은 집을 임차했다. 뭉크의 작품생활 '포컬 포인트'들의 하나가 된 이곳을 이후 20년간 여름마다 찾게 된다.

그 해 가을, 국비로 파리를 방문한 뭉크는 앞서 여러 노르웨이 화가들이 거쳐간 거장 레옹 보나의 문하생으로 4개월 사사를 한다. 11월엔 아버지가 죽었지만 장례식 참석을 위해 귀국할 수 없었다. 이듬해 1월, 그는 세느 강변 교외지역 생 클루드에 아담한 방을 하나 마련했다.
보나에게서 자의로 "의례적" 수업을 받고 끝낸 뭉크는 그후 주로 자기 방에 처박혀 아버지 사후의 깊은 멜랑콜리에 빠졌다. 
위안거리를 찾던 그는 유흥가인 불레바르 드 카푸신 선상, 몽타뉴 루스의 현대적 분위기에 이내 젖어 들게 된다. 그곳의 몽롱한 담배연기 속 음악과 빛, 칼러는 그에게 큰 '영감'으로 다가왔다. 서로 얼싸안은 한 남녀의 모습은 그의 혼 속에 불도장을 찍다시피 했다.

몽타뉴 루스는 뭉크에게 가히 하나의 '성소' 같은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 속의 무엇이 성스런지를 이해하고 성당에서처럼 모자를 벗을 것이다. 나는 그런 그림들을 많이 그릴 테다. 이제 더는 실내에다, 독서하는 사람이나 뜨개질을 하는 여인을 그리지 않겠다. 살아 숨쉬고 느끼고 고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련다."

[ 그래선지 수 년 후인 1893년부터 그는 '삶의 프리즈-삶, 사랑 그리고 죽음에 관한 시'를 작품 시리즈로 "읊기" 시작한다. ]
 
파리 살롱 가의 인상이 하도 강력하다 보니, 5월에 귀국해 본가로 돌아왔을 때 가족의 앞날에 대한 우려와 함께 맘이 다소 껄끄러웠다. 여름 한 때는 오스개르드스트란드에서, 한 때는 크리스탸냐에서 보낸 그는 10월에 다시 파리 해외연수에 들어갔다. 여행은 '르 아브르'를 이용했지만 선상에서 발병해 여행 도중 입원해야 했다.

파리에서도 며칠 '시베리아 감기'를 앓자, 지중해변의 휴양지로 떠나 겨우내 니스에서 지냈다. 그러나 생활비가 염려된 나머지 궁여지책으로 몬테 카를로에서 도박을 시도했다. 특히 룰렡 게임의 맛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이듬해 5월엔 다시 파리 '살롱'을 보러 왔고, 여름엔 다시 사랑하는 가족 곁으로 돌아왔다. 

뭉크가 자주 앓는 바람에 국비장학기간이 3년째 연장되자 파리로 돌아온 그는 겨울은 다시 니스에서, 노르웨이 화가 스크레스빅과 함께 지내면서 다양한 기법을 '실험'했다. 잠시동안의 인상파 기법 실험을 거쳐 일종의 상징주의/종합주의 접합기법을 개발했다. 자신의 유년기의 영적 체험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실험에 잇댄 것이 '삶의 프리즈'로 알려진 일련의 작품 사이클이었다.      

   '뭉크 추문'과 제2의 조국

3년째 국비 장학금이 지급되는 바람에, 일각에서 그가 프랑스 남부에다 겨울휴가로 돈을 "퍼붓는다"는 불평이 일자, 결국 유학연구의 결실을 보여주기로 맘 먹고 1892년 9월 수도 크리스탸냐에서 다시 1인전을 열었다. 당시 독일 화가연합 회원으로 베를린에 체류 중이던 국내의 저명화가 아델스틴 노르만도 이 전시회 관람 후 크게 매료돼 뭉크를 베를린 화가연합전에 초청했다.

그러나 11월 8일 열린 뭉크의 베를린 전시회는 '예술에 대한 모독'으로 낙인 찍혔다. 주제가 아닌 화풍에 대한 비난이 고조된 끝에 화가연합은 투표로 전시회를 전격 중단했다. 현지 언론은 '뭉크 추문'으로 떠들석했지만, 정작 뭉크 본인은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을 뛸 듯이 기뻐했다.   

그는 가족에게 쓴 편지에서, "이처럼 신나는 때가 진작에 없었걸랑. 그림이라는 순수매체가 이런 소란을 피울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네!" 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뭉크 추문'의 즉각적인 광고 효과를 발견해, 잇달아 쾰른과 뒤셀도르프 전시회를 열기로 딜러와 계약을 맺었다. 12월엔 주머니를 털어 베를린 에퀴타블레 팔라스트에다 임시 화랑을 열고 입장료도 받았다. 그러나 기대만큼의 떼돈이 굴러 들어오진 않았다.

하지만 이 추문 덕분에 그는 단박에 베를린 문예서클의 유명인사가 돼, 그들의 대화의 장인 '흑돼지'(춤 슈바르첸 페르켈) 바를 출입하기 시작한다. 본국의 보헤미안 서클을 연상시키는 이곳에서 그는 리햐르트 데멜, 홀거 드라흐만, 율리우스 마이어-그래페 등 시인/작가/철학자들을 사귀었고, 특히 스베덴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친근해졌다.

이 그뤂의 분위기는 '성과 연애의 자유'에 충실한 폴란드 시인 스타니슬라프 프르지비젶스키가 주도하면서 다양한 아이디어와 모티프의 용광로 역할을 했다. 한편 뭉크는 근방에다 개인 스튜디오를 임차해 '삶의 프레즈' 모티프를 이어나갔다. 훗날 1893년 '사랑'이란 주제 아래 베를린 '운터 덴 린덴'에 전시된 일련의 작품들은 이 무렵 그린 것들이었다.

    파리의 정상을 향하여

독일 체류시 그는 첫 에칭과 석판화 작품을 제작했고, 그후 자신의 이 전통을 지켜나아간다. 베를린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도취된 그는 4년 연속 겨울을 거기서 지냈지만 그곳 화가들과는 별 접촉이 없었다. "베를린은 여하한 경우에도 화가들의 도시는 못 돼."라고 그는 가족에게 썼다.
그러나 '흑돼지' 그룹 인사들의 사이가 조금씩 트는 기미가 나자 그도 작별을 고하고, 1895년 가을, 크리스탸냐에서 귀국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회엔 노르웨이의 국보인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참석, 특히 작품 '세 무대의 여인'을 눈여겨 봤다. 뭉크에 따르면, 입센의 희곡-'우리가 죽다 깰 때'의 주제는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단다.

이듬해 2월, 뭉크는 파리로 되돌아왔다. 그는 이 코스모폴리탄 도시에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기로 작심하고 '살롱 드 앙데펭당'에다 작품 전시를 하는 한편, 자신의 사설 화랑 '살롱 들라르트 누보'에도 사랑 모티프의 그림들과 그래핔 작품을 내놓았다.

또한 유수 출판업자, 오귀스트 클로와의 파트너슆으로 역시 '삶의 프레즈' 주제 아래 색판화와 목판화 등을 제작/발행했고, 극장 테아트르 들뢰브르의 입센 연극 공연을 위한 관객용 책자를 맡아 디자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단한 결실은 못되었다. 특히 뭉크는 룰렡 게임에 빠져 돈을 잃는 바람에 쪼들리는 삶이었다.

퇴폐주의 '연옥 위기'에서 전전긍긍하던 그는 재차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버그와 재회했고, 시인 시그뵈른 옵스트펠더, 스테판 말라르메와 교제했다. 또 작곡가 프레데맄 델리우스를 통해, 베르셍제토리에다 화가들의 포럼을 마련해 놓은 몰라르 가족과 조우하게 된다.

     미래 '원수'와의 3년 만남

정작 애타게 기다리던 '대박'의 돌파구는 고국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1897년 가을 그는 크리스탸냐에서 전시회를 가지면서 그제야 대중의 환영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에 고무된 그는 우니버시테츠가텐에서 알프레드 하우게와 공동으로 스튜디오를 임차해 살면서 냄새나는 파라핀 스토브 곁에 매트레스만 깔고도 행복한 잠에 들곤 했다.

호사다마랬던가..그는 여기서 재차 여복인지 여화에 부대끼게 된다. 수도 최대 포도주상의 딸인 마틸드 라르센과 사귀기 시작한 것. '툴라'라는 애칭의 라르센은 서른살의 '노티 나는 아가씨'로 뭉크보다는 네 살 아래였는데, 당초 그녀의 정열 수위가 별 거 아닌 줄로 가볍게 어림짐작했던 뭉크가 큰 코를 다치게 된다. 이미 초기에 조정 불가 경지에 다다랐다.

둘 사이는 오래 가지 못했다. 1898년 봄, 둘이서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 르네상스기의 기념비적 작품들을 연구하고 있던 차, 수시로 매달리는 그녀를 번거롭게 여겨 파리로 먼저 보내 기다리게 했다. 그것으로 둘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훗날 이따금 재회하긴 했으나, 새 세기로 돌입한 1902년, 결정적인 '화해' 만남이 영구 작별이 됐다.

뭉크의 집인 오스고르드스트란드에서 만난 자리에서 방에 있던 리볼버 권총이 오발돼 뭉크의 왼손 손가락 한 개가 망가져버렸다. 뭉크는 사고 원인을 툴라에게 돌려, 그녀와 일단의 친구들을 포함한 모든 관계를 완전 단절했다. 뭉크의 뭉크러진 손가락은 여생동안 '여인과 허송한 3년'을 상기하는 지표가 됐다. 이후 그에게선 여성과의 츠러블 같은 것이 종적을 감춘다.

   황금시대와 정신장애 

툴라와 결정적 결별을 한 1902년은..베를린에서 결정적인 대박이 터진 해였다. 악명 높던 베를린 '뭉크 추문' 10년 후, '삶의 프리즈' 전시회가 쌍끌이가 되어 명성과 돈줄이 동시에 따라줬다. 독일 아트 딜러와 그림/그래핔 독점계약을 체결한 데다 뤼벸 굴지의 안과의사 막스 린데 박사가 그의 첫 파트론이 돼줬다. 베를린의 주요 후원자들 가운데는 훗날 독일 외무장관이 된 발터 라테나우 박사도 있었다.

이어진 1903, 1904년 파리 살롱 전시회에서도 그는 현저히 여세를 탔지만, 이 시기 최대의 성공은 1905년 프라하 전시회 때였다. 그는 이모 카렌에게 "이 전시회가 영예 뿐 아니라 황금도 가져오리라 기대해요."라고 썼다. 황금이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는 당대 문화 중심지의 하나였던 이곳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아, 프라하 전시기간을 '아름다운 꿈'으로 길이 간직했다.

한편 툴라와의 교제 및 결별은 그에게 신경질환을 갖다 주어, 계속되는 여행과 다량의 알코올 음용으로 악화됐다. 금융재벌 바르부르크 가의 딸 초상화 주문을 받아 함부르크로 왔으나 몇 차례 환각증세를 보였다. 바이마르에서도 초상화 주문이 겹쳐 파티와 리셒션을 오가면서도, 증세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신경증상이 거세지면서 그는 모국과 '적(툴라)의 마을'에 대한 적개심도 덩달아 증가됐다. 그는 어떤 경우라도 잠깐의 가족 방문을 제외한 귀국은 피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는 독일 친구들의 권유로 튀링거발트, 밭 엘거스부르크, 밭 쾨젠 등의 스파에서 휴양을 해 봤으나 별 효험이 없었다. 1906년 막스 라인하르트와의 제휴로 베를린 도이체스 극장의 새 막후 무대 위에 펼쳐질 '유령들'의 공연 세트를 제작할 무렵엔 중증으로 발전했다.

1907, 1908년 여름은 뭉크 자신이 '독일의 오스고르드스트란드'로 부른, 발팈 해 연안의 바르네뮌데 휴양지에서 보냈다. 해변 나체촌에다 대형 캔버스를 설치하고 구조원들을 모델로 삼아 '목욕하는 남자들'을 그리며 신선한 해풍을 들이켰다.

그러나 망상과 몽환이 심해져 자신이 늘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주변의 모두를 스파이로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친구인 시인 에마누엘 골드스타인의 도움으로 덴마크 코펜하겐의 유명한 야콥슨 클리닠에 입원해, '전기충격 요법'을 비롯한 다양한 진료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그는 평온을 찾게 된다.

8개월간 클리닠에 있을 동안에도 창작생활은 지속했고, 다양한 표창을 받았다. 예술활동을 통한 공로로 왕립 성 올라프 기사 작위가 수여됐고, 1909년 크리스탸냐의 성공적인 전시 후 국립미술관에서 그의 작품 다수를 구입하기도 했다.

   조국 정착과 만년

그 해 5월 퇴원한 그는 노르웨이에서 살 결심을 했지만, 아직도 '원수'가 사는 크리스탸냐는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친척과 함께 바다로 가족 집을 찾았고 새로 정착할 곳을 부단히 뒤져봤다. 배가 크라게뢰를 지날 때, 그곳 해안 풍경에 감탄한 그는 거기 새 집을 장만하기로 결심했다.

인근의 만이 내다보이는 정원이 딸린 저택을 임차해 오픈 옥외 스튜디오를 설치해, 크리스탸냐 대학의 신축 홀 '아울라' 장식 벽화 제작 경연에 응모할 생각이었다. 그는 마을 정경과 마을 사람들에게서도 영감을 얻었다. 대학 벽화 메인 패널을 위한 '역사', 센터피스 '태양'의 모티프는 크라게뢰에서 얻은 것이었다. 뭉크의 사환인 뱃사람, 뵈레 에맄센이 '역사' 속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뭉크는 커다란 창작의 만족감을 맛보았다.

유감스럽게도 크라게뢰에서 집을 구입할 순 없어, 이듬해 크리스탸나 만의 다른 쪽인 네드레 람메에서 적당한 주택을 장만했다. 그곳의 풍경으로부터 '아울라'의 대형벽화 '알마 마테르'의 배경 모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이곳은 여태 살아본 곳들 중 가장 만족스러워, 비둘기/칠면조/오리/닭 등을 사육하며 풀밭엔 애마 '루소'를 뛰놀게 하면서 살았다. 그러던 1913년 이후엔 크리스탸냐에 대한 적개심이 다소 줄어들어 그는 이따금 수도를 방문해 어린 시절을 더듬곤 했다.

1912년 독일 쾰른에서의 '존더분트' 전시회에서는 인상파 거장 반 고흐, 고갱, 세잔 등과 공동출품할 영예를, 이듬해 베를린 가을 전시회에서는 피카소와 단 둘이 외국 화가로 참가, 개인 별실을 배정받는 특혜를 누렸다.

1916년, 그는 아울러 대학교 기념식에 참석하는 한편, 여생을 보낼 저택을 스쾨옌 에켈리의 새 저택을 구입했다. 이 저택의 넓은 중앙관은 스위스 형으로 유리 베란다로 남쪽의 사과밭과 체리 과수원이 좍 펼쳐져 있고, 옥외 베란다에서는 수 마일 밖까지 마을과 피오르드, 서쪽의 먼 산들까지 고루 내다보였다. 구입 당시 매물엔 곁에 딸린 오랜 곳간과 말/젖소/돼지/닭/개 등 가축도 포함됐다.

주로 도회지 생활을 즐기던 뭉크는 이떄쯤 여유만만한 농장주 내지 지주처럼 보이길 좋아했다. 그는 이곳에 옥외 스튜디오를 여럿 설치했고, 1919년엔 친구이자 친척인 설계사 헨맄 불이 특별히 겨울 스튜디오를 디자인, 건립해 주었다.

에켈리에 자리잡은 뒤로 친구나 가족들과의 만남도 뜸해졌고 여행도 삼갔다. 그러던 1920-22년, 베를린/파리/취리히를, 26-27년엔 재차 주요 유렆 도시들을 순방했다. 친구 야페 닐센에 따르면, 이 유럽 순회 전시는 추종을 불허하는 승리의 대행진이었다. 27년엔 베를린/오슬로에서 재차 추회전을 가졌다.

1930년엔 그의 오른눈의 혈관이 파열돼 거의 실명할 뻔 했다가 3년 후 도지기도 했다.

1933년 70회 생일을 맞아 그는 성 올라프 기사단 대십자훈장을 수여받았다(이 기사단은 아키히토 일왕 등과 유렆 왕족을 중심한 세계 주요인사들이 가입됐다). 그러나 1930-40년대에 독일 민족사회주의 당원들이 그의 작품들을 '퇴폐예술'이라며 독일 미술관에서 철거할 때, 독일을 제2의 조국으로 생각했던 뭉크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어서 1940년 나치가 노르웨이로 침공했을 때, 그는 나치와의 접촉을 전면 거부했다.

뭉크는 1943년 겨울, 폐렴에 걸려 이듬해 1월 23일 사망했다.

죽음을 앞두고 오슬로 시에 남긴 유언을 통해 작품 다수를 국가에 기부했다. 그가 남긴 작품은 1,000점의 유화, 15,400점의 판화, 4,500점의 데생/필화, 수채화, 오슬로 시 곳곳에 설치된 6개의 조각상 등이며, 작품 다수는 오슬로 토옌의 뭉크미술관, 오슬로 국립미술관, 베르겐 아트 갤러리, 기타 국내외 미술관/화랑 등에 소장돼 있다.
 
죽은 뒤에도 그의 작품은 큰 인기를 누려, 2006년 10월, 유색 목판화 '두 명의 외로운 사람들'이 810만 노르웨이크로너(미화 127만 달러)에 팔리기도 했다. 노르웨이의 1,000크로너 짜리 지폐엔 그의 초상이 작품 배경화와 함께 실려 있다. 그의 주요 작품 카피는 최근 일시 도난 당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