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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기타

그 무덤 덕분에?







그 무덤 덕분에? 

-앤드류 머리의 조각글 분석



김삼



최근 TLT 애독자의 언질로, 인터넽 상의 한 토막 글을 읽게 됐습니다. 

여기저기 전재되어 있는, '그 무덤 덕분에'라는 제목의 글입니다[각주:1]. 큐티를 위한 단상 또는 예화 같은 느낌이 드는 이 글은, 내용은 똑 같은데 제목만 다른 버전도 있습니다. 어느 제목이 원래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네요. 필자나 출처도 분명치 않아 여러 사이트를 뒤져 보니, 한 곳에는 앤드류 머리[각주:2]의 책에 실린 글로 되어 있었습니다. 책의 원제는 '주님(Master)의 내주(內住)에 관한 신자의 비밀'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글이 머리의 것이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네요. 그러고도 이 글에서는, 비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당 한글번역을 인용하게 됩니다. 



이 글은 핵심 내용이야 어떻든, 일견하여 흡사 죽음 예찬론 내지 '사(死)의 찬미' 같이 느껴집니다. 


19세기 남아프리카 출신의 영성가로 알려진 앤드류 머리는 일부 복음주의적인 점도 없지 않은 사역자였지만, 동시에 신비가(mystic)적인 요소도 있고, 스코틀런드의 '케짘(Keswick)' 사경회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머리는 수백 권의 책을 썼고, 그 다수가 널리 읽혀 왔습니다. 그런데 이 글로 인해 머리에 관한 비평적 연구를 해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머리의 생애를 살펴 보니, 굉장히 문제가 많았던 사람이라는 느낌도 들었고요. 그의 생애에 관한 상세한 것은 다음 기회에 다루렵니다. 



이 글도 우선, '그 무덤 덕분에'라는 제목부터가 약간 어폐가 없지 않네요. 원제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내용과 비교하건대 무덤을 찬양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이 글의 다음 문장도 과연 오리지널인지 번역 때문인지는 잘 모르지만, 역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버리라는 명령을 받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단도직입적입니다. 원문이 어떻게 돼 있는지 글쓴이의 본의라면, 거부감이 들 정도로 단정적이고 직설적이네요. 생명을 버리라는 명령을 아버지께 받았다..? 어쩌면 성경으로부터 이런 논리적 귀결을 얻을 수도 있을 지 모르지만[각주:3],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직접 이런 명령을 시달받았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아드님을 극진히 사랑하신 성부님께서 과연 불쑥 "가서 네 생명을 버려라!"고 표현하셨을까요? 머리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 이상 단언할 수는 없지요. 겥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기도를 연상하면, 어쩌면 (머리의 주장처럼) "네 생명을 버려라!"고 했다는 아버지의 명령에 역행하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소서". 또 나중 재론할 테지만, 죽음이 그 잔의 전부는 아닙니다.  


머리의 직설은 워치먼 니처럼 신비적이고 부활보다 수난 위주적이고 완전주의적인 느낌이 듭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시려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시고 바치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목숨을 버리라는 명령이 아니라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한 것이었지요. 성부께서는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화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시겠다는 아들의 의사를 존중하셨고요. 아버님과 아드님이 서로를 아시는 사이는 마치 목자와 양의 사이 같았기 때문이죠(요한복음서 10'14,15).


주님이 그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은 겥세마네에서의 기도나 요한복음서 17장에 있는 주님의 기도에서 명백하게 잘 나타납니다. 진정한 주님의 기도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모범으로 주신 소위 '주기도문'보다는 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에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약속하신 영광에 관한 내용으로 더 차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땅에 내려가서 죽어라"가 아니라, 수난 이후에 올 화해와 하나됨과 궁극적인 영광도 위한 것입니다. 부활과 승천, 곧 회복될 성자님의 보좌의 영광까지 다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하신 명령을 단지 죽음과 '무덤'에 국한시키는 것은 협소한 시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과 화목하시기 위해 필요불가결했던 하나의 방편이었을 뿐입니다. 죽음과 무덤을 찬양하는 듯한 요소는 없어야 합니다. 


크리스토(그리스도)님께서 온 생애에 걸쳐 죽음-이 한 가지 생각만 품고 사셨다는 머리의 상상도 역시 무리입니다. 글쓴이가 영지주의 서적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입니다[각주:4]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이 서른 살 무렵 이후에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이래 본격적인 사역과 아버지의 말씀에 기초한 사상 전개와 가르치기를 하셨고, 그 전에 어떤 생각이 있으셨는지는 별로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서 평생 하나님께 순종하셨기에 메시아가 어떻게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아셨을지 추정은 해 보지만, 이 서른 살 이전에 주님의 생각을 "읽을" 길이 없습니다. 즉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시기 전후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이시기에 성령의 기름부음 받기 전에도 완전한 권능을 지니고 계셨다면, 그 전에도 사역하시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 


과연 어릴 때부터 평생 오직 죽음이라는 것-한 가지만 생각하셨을까요? 발상의 무리입니다. 복음서를 두루 훑어 봐도 주님이 심지어 서른 살 이전에도 오직 죽음에 관해서만 생각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메시아로서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주님의 한결같으신 생각은 최소한 그 분이 사역하신 3년 어간 또는 그 일부에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는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큰 번민을 하셨습니다."


이 부분도 다소 무리입니다. 주님은 단지 죽음 자체를 받아들이느라 큰 번민을 하셨다기보다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온 세상의 죄를 그 한 몸에 한꺼번에 짊어지고 죽어야 하는 엄청난 대속(代贖) 과업의 무게에 짓눌리다시피 하시어 단장(斷腸)의 애끓음 같은 호소를 하신 것입니다. 

또 그 분의 '잔'은 단순한 죽음만 아니라 모든 영적/정신적/신체적인 아픔과 슬픔과 근심과 부끄러움 등 모든 수난이었습니다! 죽음뿐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분은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알의 밀이 죽고 썩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없다고 하신 말씀대로, 완성될 희생에 반드시 필요한 죽음을 받아들이느라 주님이 그토록 고심하신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주님은 목숨을 버릴 권세도, 되찾을 권세도 있다고 하셨고 그것이 아버지로부터 명령이 아닌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복 10'11~18 참조).

더 큰 문제는 아담/하와의 범죄 이후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류가 지은 역사 속의 모든 죄악을 한 몸에 걸머지시는 쓰디쓴 잔의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이 극한의 고통과 부담을 주어, 그 분의 땀은 핏방울처럼 되어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는 이런 설명이 없이 주님에게 마치 죽음 자체가 부담이 된 것처럼 단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오직 죽음 속에서만 나오며,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는 복이 이 죽음 속에 숨어 있습니다."


헐~! 이 또한 흡사 '사(死)의 찬미' 같은 표현입니다. 왜,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이 죽음 속에서 나옵니까?!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전능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은 생명 자체이지, 사망에서 나오는 것, 더구나 오직 죽음 속에서만 나오는 것일 수가 없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디 죽음의 신입니까?? 예호봐님이 무슨 '사신(死神)'인가요? 

말과 표현은 가려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을 거머진 사신이라면, 바로 마귀 싸탄 그 자입니다. 예수님을 사망으로 사흘간 죽어 있게 한 자가 그 자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이 아닌 생명의 하나님이십니다.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류 대속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관문이기에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 분은 마다 않고 화목제물로서 기꺼이 대속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신 것입니다.  



다음 부분 역시 무리에 또 무리를 거듭하고 있네요. 어떻게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복이 죽음 속에 숨어 있습니까?!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헛소리입니다. 형용 못할 복이 죽음 자체 속에 숨어있다면 누군들 죽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자칫 자살을 부르는 소리 같이도 들려질 수 있습니다. 


물론 경건한 이들의 죽음이 예호봐님 보시기에 귀중하다는 말씀은 있습니다(시편 116'15). 잠언 14'32에서, 악인은 자신의 악행으로 내던져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피난처가 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들은 죽음 자체가 복스럽다는 말이 아니며, 죽음 속에 복이 숨어있거나 스며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 파울은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을 하기는 했습니다(퓔리포서 1'21b). 그러나 '자살 욕구' 탓이거나 죽음 자체가 유익해서가 아니라 몸을 떠나 크리스토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었습니다(퓔 1'23).  



그 다음, 도토리에서 떡갈나무가 자란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글쓴이의 지식이나 경험을 따라 쓴 것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물론 한 알의 밀을 갖고 비슷한, 더 중요한 표현을 하신 바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썩고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죠. '도토리의 무덤' 운운하는 다소 과장된 표현보다 주님의 이 밀알 비유를 그대로 써도 될 뻔 했습니다. 


떡갈나무의 뿌리를 지탱해 주었던 게 오직 도토리의 그 죽음 덕분이라는 말은 좀 그렇습니다. 사실은 도토리 속에 있는 생명이 이 나무를 뿌리내리게 한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모든 것도 다 그 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덕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예수님의 죽음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과 영생, 복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크리스토님의 희생의 죽음 덕택인 것, 맞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모든 것들이 단지 죽음 덕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 분으로부터 온 엄청난 복과 좋은 것들이 그 분의 탄생과 사역, 가르침/말씀과 희생, 더 나아가 그 분의 부활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죽음 하나에만 귀결시켜 단순화 할 일이 아니죠.


떡갈나무 비유는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매일 예수님의 죽음에 뿌리를 내리며 산다는 표현은 성경에 없습니다. 파울처럼 우리는 날마다 크리스토님 안에 죽고,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그 분 뒤를 따르며 살아야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생명에 뿌리를 내리며 살죠! 



기성교회가 인정해 주지 않는 위트니스 리의 소위 '지방교회'(일명 '주님의회복교회')가 한 창교자로 모셔온 워치먼 니(니 투오쉥)는 사실 앤드류 머리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런 수난지상주의를 매우 강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부활보다 수난에 지나치게 무게를 많이 둔 점이었습니다. 천주교도 이런 성향이 짙습니다만.  


우리는 수난과 부활에 동시적으로 무게를 두어야 합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파울처럼 날마다 육이 죽으며 살아가지만, 내 의지와 지혜, 능력에 대해 죽을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과 육적인 자아, 정욕적인 생각을 크리스토 앞에 쳐 복종시킬 일입니다. 그래야만 주님과 연합하여 더 나은 삶과 생명으로 되살기 때문입니다. 


앤드류 머리의 말들은 성경을 그대로 본 받기보다 스스로 신비주의적으로 조금씩/많이(?) 뒤튼 느낌입니다. 




  1. 예컨대 다음 사이트에 있다: http://scissurl.com/7/4lw [본문으로]
  2. Andrew Murray. Murray라는 이름의 발음은 영/미 식 모두가 '머리'다. '머레이'가 아니다. 즉 '머레이'는 당초 번역가들이 추정한 잘못된 발음이다. [본문으로]
  3. 예를 들면 요복 18'11b에서 그렇다. [본문으로]
  4. 실제로 머리가 기독교사상들의 영향을 받은 여정은 충분히 그랬으리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복잡다단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