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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물음과 답(Q.A)

두 베들레헴? (물음과 답)


두 베틀레헴?



물음:

 


예수님이 나신 진짜 베들레헴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요? 

(2012년 12월 25일자) 경향신문에 보니, 이스라엘의 고고학자인 아비람 오시리는 “예수가 탄생한 곳은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팔레스타인에 있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베들레헴이 아니라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갈릴리의 베들레헴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습니다. 

아니, 베들레헴이 원래 두 곳이었고, 그 중 하나가 진짜란 이야기인가요?



답:



결론부터 밝히자면, 아비람 오시리 박사의 주장은 어불성설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전혀 그럴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선, 성경이 두 군데의 베틀레헴을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1. 하나는 물론, 예수님의 탄생지로 유명한 곳이죠(마태복음서 2'1). 


2. 다른 하나는 예슈아(여호수아)서 19'15에 나오는 대로, 제불룬(스불론) 지족의 기업인 땅에 있던 베틀레헴입니다. 현재의 '베이틀람'이라는 곳이죠. 이 둘째 베틀레헴은 (공교롭게도 예수님이 자라나신) 나자렡에서 서북쪽 10km 지점에 있었으며, 신약 시대 이전에 폐허화됐던 곳이며, 길레아드(길르앗) 미즈파(미스바)의 예프타(입다) 다음으로 판관(사사)이었던 입산의 고향 '베틀레헴'으로 추정됩니다(판관기=삿 12'8~10). 입산의 후계자는 역시 제불룬 사람인 엘론이었죠. 

 

그러나 전자(1.)는 후자(2.)와 구분하기 위해 '유다 베틀레헴'(마태복음서 2'1,5,6 참고: 구약 미카서 5'2), 또는 베틀레헴 에프라타(=에프랕)로 불리던 곳으로,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이었던 유다 지족 출신의 첫 왕, 다뷔드의 고향으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베틀레헴은 훗날 '다뷔드의 동네'라고 불리지요. 


학자인 아비람 오시리가 두 베틀레헴을 착각(?)한 이유는 둘째 베틀레헴이 예수님이 자라나신 제불룬 땅 갈릴리 부근의 나자렡에서 더 가깝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이 유다 베틀레헴에서 나실 것과 (이스라엘 땅) 나자렡에서 자라나실 것을 둘 다 예언했습니다. 오시리가 왜 또 혼동했는지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요셒의 고향과 주거지 때문임이 나중 아래서 드러납니다. 



오, 베틀레헴 에프라타!


성경에서 (유다)베틀레헴이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은 창세기 35'19. 야콥의 아내 라헬이 막내아들 빈야민(베냐민)을 난산하다가 숨진 대목에서지요. 창세기 기자(모쉐)는 라헬이 빈야민을 낳고 산고로 죽은 뒤, 에프랕(Ephrath, 일명 에프라타/Ephratha)로 가는 길목 곧 베틀레헴에 묻고 묘비를 세웠다고 기록했습니다. 야콥의 말에 따르면, 라헬이 묻힌 정확한 지점은 고대에는 에프라타로부터 상당거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참고: 창 48'7). 


훗날 마태복음서의 기자는 동방의 현인(박사)들이 유대인들의 왕을 찾았을 때, 갈릴리의 분봉왕으로서 예루샬렘 왕궁에 있던 헤로드가 아기 왕을 죽이기 위해 베틀레헴과 부근의 2살 이하 사내아기들을 다 죽였는데, 이때 "(옛)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해 애곡한 소리가 들렸다"고 한 고대 대언자 이르미야(예레미야)의 예언(이르=예렘 31'15)이 성취됐다고 기록했습니다(마태 2'17'18). 이르미야의 예언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갈 당시 한 것으로, 그 옛날 자식과의 사별을 안타깝게 슬퍼하면서 베틀레헴에서 죽어 그곳에 묻힌 라헬의 이름을 고대로부터 모든 베틀레헴 여성들을 대표하여 비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르미야 예언 속의 라헬은 비록 언니 레아와 달리 야콥의 총애를 받았지만, 계속 자녀가 없어 늘 애통하며 아쉬워하다가 자신의 시녀 빌하를 통해서나마 간신히 단과 낲탈리(위 지도 참조)를 얻었고, 훗날 하나님이 그녀의 태를 여셔서 친 아들 요셒과 빈야민(베냐민)을 얻었지만, 자식들과 오래 살아보지도 못하고 조기 사별해야 했던 슬픔의 여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숨이 넘어가는 순간, 아기 이름을 '베노니'(내 슬픔의 아들)라고 지었지만, 남편인 야콥은 '빈야민'(오른손의 아들)으로 고친 것입니다.   

아무튼 예샤야후는 마치 그런 그녀가 되살아나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후손들을 바라보며 슬퍼하고 또한 헤로드의 학살로 죽어간 어린 후손들을 슬퍼하는 모습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아울러 실제로, 라헬의 둘째 아들(야콥 막내아들)의 후손인 빈야민 지족의 후예 다수가 베틀레헴 부근에 거주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빈야민 지족의 땅은 이스라엘 남부로, 유다 땅과 접경하여 가까이 위치했고, 빈야민 지족이 유다 왕국의 파트너로 결국 유다 왕국에 속하여 사이좋게 지냈기 때문입니다. 수도 예루샬렘도 일부는 빈야민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헤로드의 칼에 스러진 어린아기들 가운데는 라헬의 먼 실제 후예가 다수 포함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베틀레헴이라는 지명은 '집'이라는 뜻의 흔한 명칭인 베트(Beth)와 '빵/떡'이라는 뜻의 을레헴(Lehem)의 합성어로, 빵집이라는 뜻이죠. 예루샬렘의 남서쪽 약 10km 지점인, 고대 유다 광야의 기슭에 있는 베틀레헴은 해발 777m의 산악 지대의 벌집 같은 동굴이 흩어진 석회암 언덕의 비탈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예루샬렘에서 에귚트(이집트)를 향해 내려가는 지름길이 있어, 왕래가 편리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베틀레헴은 또 석회암 채석장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바로 부근의 '베이트 잘라'도 장미석으로 유명하여, 성탄교회 내부 기둥은 이 장미석을 원석으로 하여 조각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곳은 4세기에 첫 성탄 기념교회가 세워진 이래, 현재까지 그 전통을 잇는 역사적인 성당이 서 있고, 이 성당의 지하에 아기 예수의 탄생 지점으로 알려진 소위 '탄생 동굴'이 있으며, 성당 곁에는 '구유 광장'도 있습니다. 


이 지역은 아랍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오래 살고 있다가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곳인데, 199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에 체결된 오슬로 평화협정에 의해 95년 12월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에 되어, 현재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아래 속해 있습니다. 베틀레헴 인구의 약 80%는 무슬림, 나머지 약 20%는 구교/정교회 계열의 크리스천들입니다. 



이곳은 또 메시아 계보상의 중요한 이방 여인들의 한 명인 뤁(룻)이 유다 사람인 말론에게 시집을 왔다가 남편이 죽자, 역시 남편(킬리온)을 여읜 동서인 오르파와는 달리, 자신의 고국인 모압을 떠나 어머니를 따라와서 여생을 살게 된 유다 땅이기도 합니다. 

즉 뤁의 시어머니 나오미의 가족이 본래 선대부터 대대로 살던 고향입니다(뤁 서=룻기 1'1,2,19,22). 뤁은 훗날 같은 가문 출신으로 이 집안의 상속자('고엘' 곧 '기업 무를 사람' 곧 대를 이을 후계자)가 된 보아즈와 재혼하여, 왕 다뷔드의 증조모가 됩니다(본 블로그의 '메시아계보대장정' 시리즈 제 9~11회 참조).  


이처럼 메시아 계보상 매우 중요한 뤁 서에는 베틀레헴이란 이름이 모두 7회,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 에프랕이 2회 나타납니다. 



이렇게 하여 유다의 후예 가운데서 (다뷔드) 왕손인 메시아가 나리라는 고대의 예언을 따라(창 49'8-12), 먼 훗날 보아즈와 뤁의 증손자 다뷔드의 후손인 예수님이 오시게 됩니다. 이에 따라 다뷔드의 고향 역시 선조들과 같은 베틀레헴 에프라타입니다(슈무엘A서=삼상 17'12 참고: 16'1).바로 그래서 이곳은 훗날 '다뷔드의 동네'로 불린 것입니다(루카복음서=눅 2'4,11). 



[ 참고로, 성경엔 '칼레브(갈렙) 에프라타'라는 이름도 나오는데(연대기A서=역대상 2'24), 같은 유다 땅의 이름이기는 하나, 베틀레헴과는 다른 곳으로 사려됩니다. 에프라타와 베틀레헴은 각각 유다 족 남녀 선조들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연A 2'19,50; 4'4). 베틀레헴은 또 역시 유다 족의 명문가인 칼레브(갈렙)/후르 집안 후예 중 한 명의 이름이기도 합니다(연A 2'51).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다뷔드 왕통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이상으로 보아, 베틀레헴/에프랕이라는 이름이 인명/지명으로서 선호도가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베틀레헴 에프라타라는 그후 소(小) 대언서의 하나인 미카(미가)서 5'2에 등장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장차 메시아가 나실 것이라는 예언을 한 것이죠. 이 예언은 분명히 메시아가 다뷔드의 정통 왕손으로 나실 것을 예고해 준 셈입니다. 

이 예언이 바로 거기서 태어난 예수 크리스토에 의하여 그대로 성취됐음을 마태가 명시하여 기록했지요(마 2'5,6)! 



신약 속의 베틀레헴


이상은 구약 성경의 이야기였고, 그후 신약성경에서 베틀레헴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탄생지로 크게 부각됩니다. 마태, 루카 두 복음서의 탄생 기록을 종합해 보면, 나자렡에서 살던 유다 지족 출신의 청년 요셒이 역시 그곳에 사는 친척인 마리아와 약혼을 했는데, 둘 다 본래 다뷔드 왕의 직계 후손인 유다 왕가 사람으로 가문의 본 고장이 베틀레헴이었으나, 70년 바벨론 포로기 후 (마 1'11,12,17 참조) 선조들의 귀환 시 아마도 옛 이스라엘에 속한 나자렡으로 와서 거주한 듯 합니다. 

이들에게 인근의 고대 마을인 제2의 베틀레헴은 이름만으로도 그들의 선조와 왕통, 고향의 추억을 일깨워주곤 했을 터입니다.  



나자렡 사람


왜 마리아네와 요셒네가 출생지인 다뷔드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아닌, 먼 북쪽의 제불룬 땅인 나자렡에서 살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는 성경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서입니다! (마태 2'23). 


우리가 마태복음 2'23b를 보면서 갖게 되는 한 가지 의문은 실제로는 그런 예언이 없었는데 마태가 왜 그렇게 기록했느냐..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문맥상으로 충분히 입증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고대에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가장 많은 예언을 한 예샤야후(이사야)는 미래의 메시아를 '순(筍)의 사람', 곧 싹(네쩨르: 또는 여린 가지)의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예샤 11'1,10, 참고: 53'2). 여기서 '네쩨르'가 싹이지만, 한편으로는 나지르 인(한글성경: '나실인')처럼 성결하다는 뜻과 같은 어원으로도 풀이됩니다. 즉 네쩨르/나지르/나자렡이 고대에는 모두 한 어원이었거나 연계됐을 것입니다. 메시아의 이런 배경을 마태 등의 일부 당대인들이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순은 연한 싹, 여린 가지입니다. 메시아는 그처럼 겉 보기에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약해 뵈는 그릇으로 태어날 것이라 예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나자렡이란 동네만큼 적절한 곳도 없을 것입니다! 그곳은 갈릴리 남부 언덕바지에, 그나마도 이스라엘 12지족 가운데 가장 작은 땅을 차지한 제불룬 지족(위 지도 참조)에 속한,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마을이었습니다. 주민도 얼마 없었고, 거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동네였지요. 

게다가 이 지역과 부근은 아람(쉬리아) 등 이방인의 침입과 출입이 잦은 곳이었습니다. 갈릴리 부근 특히 데카폴리스에는 예수님 당시에도 헬라(그리스)인들을 비롯한 이방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참고: 마 5'15,16). 


그래선지 훗날의 제자, 나타나엘(바르톨로메오)을 비롯한 사람들은 나자렡을 보통 이하의 곳으로 천시하고 얕잡아 봤습니다. "나자렡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나?"라고 했더랬습니다(요복 1'46). 


그러나 그 '선한 것'은 정녕 나자렡 출신이셨고, 동시에 다뷔드의 동네, 베틀레헴 태생의 왕손이셨지요! 따라서 예수님은 그야말로 역설적인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마리아/요셒/예수님 가족의 공통점은 모두 베틀레헴에서 태어나 나자렡에서 오래 살았다는 것입니다. 출생지 베틀레헴에서 잠시 살았지만 다시 그곳을 피하여 다닌 것은 워낙 다뷔드의 동네로 유명했기 때문에 어릴 때는 물론, 성장하고 나서까지도 목숨이 위태로웠기 때문입니다(예: 요복 7'1). 

 

안타깝게도, 당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쉽게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분이 초라한 나자렡 출신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그분이 설마 진짜 베틀레헴 출신의 왕손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심지어는 나자렡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박대했습니다(마 13'57, 요복 4'44). 이 악한 동향인들은 급기야 주님을 천애의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고 달려들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다 같은 나자렡 출신인 마리아와 주님의 동생들도 한 때는 주님을 불신하고 경원했기에(요복 7'3-5), 주님은 결국 고향 나자렡에서 철저히 배척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메시아이신 이러한 주님의 출신과 존재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아리까리한 수수께끼였고 하나의 논쟁거리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크리스토(메시아)님이 어떻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면서 묻고, "성경에 따르면, 크리스토는 당연히 다뷔드의 후예로 다뷔드가 살던 베틀레헴에서 나와야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요복 7'40-43). 

그들의 말은 맞지만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고 믿을 마음도 없었기에 눈귀가 가려져, 주님이 정녕 베틀레헴 출신의 정통 다뷔드 왕손임을 몰랐습니다! 당대 종교 지도자들의 생각도 한결같이 짧았지요(요복 7'52).  

이러한 주님이 참된 왕과 메시아로 자신을 드러내시자 유대인 평민들과 지도자들은 그를 한사코 죽이려고 했습니다.  "초라한 네 까짓 게 뭐야? 갈릴리에서는 대언자(선지자/예언자)가 나올 수 없어"라는 생각 때문이었죠.



역시 유대인 학자인 오시리 박사의 생각도 대동소이함을 느낍니다. 그가 예수는 유다 베틀레헴 에프라타 출신이 아닌, 제불룬의 베틀레헴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대계 전체가 예수님을 다뷔드 왕손인 참 메시아로 믿지 않기 때문이기가 쉽습니다. 


또 한 가지 숨은 이유는 좀 정치적인 것으로, 최근 베틀레헴을 포함한 지역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의 자치정부가 유엔에서 옵저버 국가로 승인받았기에, 팔레스타인에 속한 베틀레헴 대신 북쪽의 베틀레헴으로 귀추를 불러 모으기 위한 작전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관광부는 근래 돈벌이 차원에서 갈릴리 나자렡을 잇는 긴 트레일(trail)을 세계 크리스천들을 위한 관광코스로 개발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나자렡에서 가까운 북쪽 베틀레헴을 "크리스천들의 메시아"의 탄생지로 삼는다면, 차라리 (팔레스타인에 속한) 진짜 베틀레헴보다 더 낫지 않을까라는 계산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분명히, 나자렡에 살던 마리아와 요셒 부부가 로마 황제의 명령을 따라 센서스(호적 등록)를 하러 가면서 가문의 고장인 베틀레헴으로 내려간 틈에 거기서 아기로 태어나셨고, 그곳에서 약 2년간 사시다가 헤로드의 살해 위험 탓에 에귑트(이짚트)로 온 가족이 피신을 내려갔다가 다시 나자렡으로 올라오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태어나신 베틀레헴은 분명히 다뷔드 동네 베틀레헴이지, 결코 북쪽 이스라엘 제불룬 땅의 베틀레헴일 리가 없습니다!


오시리 박사는 학자답지 않게 성경지식이 부족하여 비슷한 이름을 갖고 착각/오인했거나, 또는 결국 [예슈아=마시앟] 등식을 믿지 않는 유대인이기에 진솔하고 정직하지 못하다는 인상이 들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