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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디제잉 예배?

디제잉 예배 캪처(from Youtube)


 

디제잉 예배?



최근 'DJ 진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한진호 씨(이하 진호DJ)가 '디제잉 예배'(>)라는 것을 한다고 합니다. 시작한 지는 꽤 됐나 본데, 저도 몰랐다가 애독자의 제보로 관련 동영상 및 '청어람' 뉴스(>)를 보고야 알았습니다.

진호DJ. 그는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하고 사역하다가 사업을 하면서 이것을 한답니다. 디제잉 워슆이라..디제잉 경배라.. 도대체 어떤 음악을 어떻게 '디제잉 '하면서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인지요? 경배 맞습니까?



우선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오픈할 것은 오픈하고 봐야 합니다. 기존 세대가 너무 닫혀 있어서만은 일이 되지 않습니다.

 

일렠 기타(electric guitar)를 일례로 들어보죠. 흔히 '일렠'이라고 약칭되며, 때로는 고도로 즉흥적인 애들립 연주를 하면서 시쳇말로 "야한"(?), "섹시"(?)하기까지 한 소리를 내는, '기타'라고 불리는 악기군 중에서도 유별난 악기이죠. 겉모습도 좀 기이하고 날렵하게 생겼지요. 옛날에는 그걸 매고 있는 연주자마다 흡사 '날나리' 같이 보이곤 했습니다. 실제로 세상에 '날나리' 일렠 연주자가 많은 탓이기도 하고요.


맨 처음, 이런 일렠 기타가 교회에 들어설 곳이 있다고 생각한 교인들은 아마 거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다니던 미국인 교회만 해도 문자 그대로 성령충만한 교회였지만 1980년대 이전에 이미 일렠 기타가 경배찬양에 쓰이고 있었고요.. 지금은 아마 찬양경배 밴드에 일렠 기타가 없는 한국 교회가 거의 없을 터입니다.

처음엔 소리를 듣기만 해도 몸이 배배 꼬이려 하던(?), 정말 요상(?)하고 "니글니글"했던 이 악기가 이젠 찬양경배 밴드의 총아가 돼버렸고, 기성세대가 이제 교회에서 일렠 기타를 반대하고 배척하기엔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젊은 세대가 이끄는 경배찬양 밴드에서 일렠 기타를 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거듭나서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연주하는 일렠 기타리스트들도 많습니다. 제 친구들도 있고요. 그들을 "야한 악기로 야한 소리를 낸다"고 교회에서 내쫓겠습니까? 그들을 교회에서 내쫓으면, 자칫 세상 밤거리 뮤지션이 되겠지요. 교회가 그 뒷 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아예 안 하려고? 결국 기성교회가 일렠 같은 것을 경배찬양에서 빼려 하다가는 우리 젊은이들이 다 도망가 버릴지 모릅니다.
중장년 세대들이 즐기는 관악기인 색서폰도 대동소이할 겁니다.



자, 그런데 '디제잉 예배'라굽쇼..? 디제이를 하면서 경배를 이끈다-이걸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합니까? 디제잉은 뭐고, 예배는 뭡니까? 진호DJ가 정의한 것이 곧 예배이고 경배일 수 있습니까? 본인은 이미 많은 비판을 들어왔다며 이젠 그 비판들이 귀에 익은 듯, 몸에 밴 듯 말하는데, 그 동영상을 보고 들은 제가 한 가지 느끼는 것은 왠지 이 디제잉이 젊은 한국 교회에 유행할 거 같다는 불안한(?) 느낌입니다.   


자..이거, 우리 잘 판단해야 합니다. 옛날엔 교회에 없었고, 없어도 괜찮았던, 아니 대다수 선배 기성교인들이 보기에 "없어야" 했던 일렠 연주는 이미 '유행' 정도가 아니라 경배찬양 속에 자리매김해 버린 이젠 "없어선 안 될", '몸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보십니까..이 진화과정을? 

없었다 -> 없어야 했다(!) -> 없어도 괜찮았다 -> 없어선 아니돼(!).

그 땐 그랬던 일렠이 이젠 이렇게 돼 버린 겁니다. 


그럼, 디제잉 예배라는 건 어떨까요? 이것도 일렠과 같은 운명(?)을 타게 될까요? 그래서 진호DJ는 언젠가 '선구자'로 기려지게 되는 건가요? 진호DJ는 이것을 위해 현란하고 요란하고 소란한 뢐(rock)풍의 EDM(전기댄스음악), 즉흥(?) 뜀뛰기, 무대조명 및 어지러운 동영상까지 동원합니다. 이게 문제가 되자, 급기야 요청이 들어오고 그래서 일부 동영상을 내렸다고 하네요. 


아마도 대다수 독자들이 그 동영상을 본다면 그런 게 "없어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다릅니다. 젊은이들 상당수는 그런 것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걸 '청어람'도 이해하는 모양입니다. 자, 젊은이들이 좋아하니까 늘 차세대를 생각하고 그들을 포용하려는 기존 교회가 디제잉 예배도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그런데 이거 몰랐다가 뒤늦게 알게 되니, 생각 밖에 심각하게 보입니다. 도대체 경배 문화라는 것이 어디까지 가는 것이며 어디서 어디까지가 선(線)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다간 정말 경배찬양이라는 게 "갈 곳까지 가는" 건 아닌지요? 그 '갈 곳'이 어디냐고요? 세상과의 선이 없어지는 선이겠지요.


이미 교회음악 또는 경배찬양의 많은 부분에서 세상과의 선이 무너져 왔습니다. 지금은 악기들 중에서도 그야말로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교회악기'로 다루어지는 파이프 오르간만 해도 미국 교회에 갓 소개되고 도입될 당시엔 보수적인 일부 교회에서 굉장한 거부반응과 통증 신드롬 같은 것을 치렀더랬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오르간이?"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요. 그러다가 대다수 교회에 결국 오르간이 무난히 자리잡았고, 나중엔 소리 면에서 이를 대체하는 전기 오르간도 폭넓게 보급됐습니다.


피아노도 그랬고, 기타도 그랬고, 재즈음악도 그렇고 전자 키보드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갓 화성학을 배우던 즈음인 젊을 때는 재즈화성학을 거의 이단시하기까지 했습니다. 도저히 교회에 못 들일 거 같던 색서폰 같은 악기들도 그랬지요.
악단이나 악기 밴드, 보컬 밴드 등도 그렇습니다. 모두 세상에서 먼저 개발되고 보급됐다가 뒤늦게 교회에도 들어왔습니다. 반대로 교회에서 먼저 시작됐다가 세상으로도 나간 것들도 많지요. 대다수의 악전(music grammar)도 교회에서 먼저 시작됐습니다. 성가대가 세상의 합창단이 된 것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교회로 들어와, 이젠 교회 문화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더 나아가 교회의 전통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세상 문화의 교회내 역수입이라고나 할까요?

 

 

디제잉 워슆 캪처: 이들은 왜 계속 뜀박질을 해야 하나? 좁은 방 안에서 다 함께 뛰면 먼지도 장난이 아닐 텐데.. 조롱하는 게 아니라 정말 의문스러워서다. 뜀박질도 찬양의 형태인가..?


 

디제잉 예배도 마찬가지일까요? 저는 아니길 바랍니다.
왜냐고요..? 우선 너무나 이질적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음악 그것도 방송국이나 엔터테이먼트 장소, 음악감상실 또는 다방, 야간 바 등에서 쓰이던 디제이 개념이 여과 없이 교회 안에-그것도 경배문화 속에 들어온다? 너무 이질적 아닌가요?


우린 사실 경배문화라는 말조차 조심해야 합니다. 경배 속에 문화예술적 요소가 있긴 하지만, 경배와 경배문화와는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문화예술이 경배에 사용되고 있다 해서 그것이 모두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과 진리의 경배만 하나님께 상달(上達)이 될 뿐입니다. 모든 문화예술 포맽이 과연 경배의 미디엄인지도 우리는 조심스레 살펴야 합니다. 가령 강단 플랱폼이나 강대상 위에 펼쳐진 성경 자체가 하나님께 예물이 될 수 없듯 말입니다.


정규 예배 때 수십 명의 성가대가 나서서 찬양을 했더라도, 그 찬양이 온전한 찬양예물 또는 찬미의 제사로서 하나님께 드려졌는지 여부는 인간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믿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해야 하고, 사역자 내지 사역기능으로서 기름부음을 받기 위해 믿음과 정성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클래싴 음악이라고 해서, 경배찬양음악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다 받아들여진다는 법은 없습니다. 무엇이나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문턱도 안 가 본 할머니가 되지도 않는 가락에 찬송가 가사를 맞춘 노래를 흥을 돋우며 강단에서 불렀더라도, 하나님이 그 찬양을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늘 영과 진리의 경배를 드리도록 하나님 앞에 긴장해야 할 터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올바로 상달되는 경배와 찬양을 할 수 있을까라는 긴장의 연속 말입니다.



그런데 디제잉 예배라..이것이 과연 영과 진리의 경배에 합당한 것일까요? 마냥 현란하고 어지러운 조명과 에어로빜을 방불하는 뜀뛰기 춤, 플래쉬..등등 속에 하나님을 위하기보다 젊은 대중의 기호를 맞추기 위한 엔터테인먼트처럼 터뜨려지는 듯한 이 음악 상황이 과연 진정한 경배일 수 있을까요?
진호DJ는 그렇게 믿는다고 합니다.

 

사실 이보다 덜하긴 하지만, 꽤 비슷한 포맽의 상황이 이미 오래 전부터 미주의 일부 한인교회에도 있긴 했습니다만.. 1970년대 '예수운동(JM)' 당시 히피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히피의 모든 것들이 교회를 점거했나요? 아니면 여과됐나요? 엘비스나 비틀즈 등이 발달시킨 뢐(rock)이 결국 교회를 침투했다고 해서 뢐의 모든 것이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있었나요? 아니죠. 여과됐지요.

여과..이게 중요합니다. 거름과 검증..이게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문화의 표준을 돌이켜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필리포서 기자인 사도 파울은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또 이것을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모든 통찰 속에서 점점 더 넉넉하게 되기를! 그래서 여러분이 탁월한 것들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크리스토님의 날까지 이르기를!.."(필리포서 1'9,10)


차제에, 진호DJ에게 묻고 싶습니다:
젊은이에 대한 사랑으로 이 디제잉 경배를 하려는 님이 모든 지식과 통찰을 거친 것인가 하고요. 그들의 영혼을 뜨겁게 사랑한 결과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들의 젊은 기호와 취향에 맞추기 위한 실험과 시도에 불과한 것인지. 또 그것을 시작하기 전, 정말 탁월한 것, 가장 선한 것이라는 분별을 거친 것인지요?
진호DJ님은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하여 정말 순결하여, 아무런 허물 없이 크리스토님의 날까지 이를 수 있겠는지요? 천국 문간에까지 이 디제잉 워싶을 합당한 경배물이었다고 제시할 수 있겠는지요?
 
경배란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지요. 문화나 시대 상황을 전혀 배격할 순 없어도 되도록 우리가 아닌 하나님의 텀(term)에서 경배 개념을 생각해 봐야 할 터입니다.

 

'시스터 앸트'(행동파 수녀님)는 우피 골드버그의 주연으로 유명했던 영화인데, 올해 제 3편이 제작된다네요. 이 영화는 과거에 비교적 조용했던 천주교 음악을 활발하고도 요란 시끌벅적(?)하게, 한 차원 진화시켰다는 개념으로 인기를 끌었죠. 이 영화가 하느님(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부르고 마리아를 찾고 '할렐루야'를 외친다고 해서 그게 하늘에 상달될까요? 우피 골드버그가 거룩한 여성이던가요?
God을 'Guy'라고도 부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수녀들의 마리아 찬가가 성경 진리 앞에 합당한가요?



교회 강단은 무대가 아니며, 찬양경배는 그것 자체로 예배와 제사와 예물이어야지 무슨 특이한 문화의 실험 무대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능했다고 해서 모든 문화예술적 실험을 교회 강단에서 그것도 경배 때 해 보겠다는 발상은 교회나 신도들뿐 아니라 하나님을 실험 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인간 성도 대중이, 그도 젊은 교인들이 그 실험을 그럴 듯하다고 approve한다고 해서 하나님도 approve 하신다는 보장이 없지요.
신약 경배의 표준은 어디까지나 영과 진리에 의할 뿐입니다(참고: 요한복음서 4'23,24).

 
그리고 하나님의 표준은 다름아닌 성경입니다.
파울은 또 필리포서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끝으로, 형제님들. 무엇이든 참되고 무엇이든 고상하고 무엇이든 옳고 무엇이든 순결하고 무엇이든 사랑스럽고 무엇이든 영예스럽고, 무엇이건 탁월성과 기림이 있다면 그런 것들을 생각하시오.

이것은 우리 크리스천의 문화생활을 비롯한 범사의 잣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호DJ님.
디제잉 경배는 정말 참되고 고상하고 옳으며 순결하고 사랑스럽고 영예스럽고 탁월성과 기림이 있는 겁니까? 아니면 그렇지 못한 부분이 더 많은가요?

혹시, 디제잉 경배에 객관적 진리나 진실성이 넘치기보다 님 자신의 판단에 의한 주관적 진실이 더 많은 건 아닌지요?
고상하기보다 천한 요소가 더 많을 수 있고,
옳은 점보다는 그른 점들이 많고,
순결하기보다 불순한 요소가 더 많을 수 있고,
사랑스럽기보다 뭔가 이상하며..
영예스럽고 탁월하기보다 세속을 더 닮은 거 같고,
기림이 있기보다 웬지 수치심이 더 느껴지는 건 아닌가요?


저는 단죄를 하려는 게 아니라 '혹시'라는 전제로 그럴 수 있지 않느냐는 개연성을 물어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느낌보다는 성경이라는 바위 위에 선 믿음을 관건으로 삼아야 옳습니다. 단단한 말씀의 바위 밖에는 다 푸석푸석한 모래땅이기 때문입니다.
모래밭 보다는 바위 위에 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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