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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모세오경

롯의 선택





롯의 선택



참고 바탕본문: 구약성경 창세기 13장



인생은 선택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수시로 이것인가, 저것인가를 슬기롭게 잘 선택하고, 결정과 결단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시장에 가서도 값은 좀 "쎄더라도" 몸에 좋은 것을 과감하게 고르느냐, 아니면 돈을 아껴 가며 적당한 것을 사 먹고 지내느냐..- 이런 기본적인 선택부터, 예수님을 믿고 영생(永生)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아니면 거부하고 영원한 저주를 받느냐..로 자신의 영원한 앞날을 가름하게 되는 가장 중대한 선택까지(참고: 신약성경 요한복음서 3'15,36; 5'40; 6'47), 다양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만사를 적당히 "골라잡아 꽝" 식으로 살 순 없습니다.  


인간의 최초 선조였던 아담/하와부터도 선악지식의 열매('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이라는 선택의 기로에서, 뱀의 꾀임에 빠져 그만 불순종 쪽을 잘못 선택하여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구약 창세기 3장; 신약 로마서 5'12; 코린토A서=고전 15'22 참조).


성경엔 한 번 또는 몇 번의 중요한 선택 끝에 큰 복을 누리거나 비참한 지경에 빠져들거나 하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 삶의 귀감(龜鑑)이 되곤 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로서 구약시대의 한 의인으로 기려지는 롵(Lot=한글성경의 '롯')은 그런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의인이라고는 하나, 롵은 선택을 잘했다기보다 복을 받을 수 있는 '길목'에서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의 하나였습니다.
  
롵이, 애당초 하나님의 명을 따라 칼데아 우르를 떠나는 숙부 아브람(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을 따라 함께 떠난 것은 물론 잘 한 선택이었습니다(창 12'4). 

그러나 그는 점차 판단력이 흐려져 갑니다. 미쯔라임(에짚트)에 잠시 머물다 떠나면서 거부가 되어 카나안으로 돌아올 무렵 아브람과 롵의 두 가족 규모가 점점 커져 함께 지내기가 어렵게 되자, 조카의 하인들이 자신의 하인들과 자주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본 아브람은 아무래도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카 롵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 카나안 온 땅을 바라보며, "네가 왼쪽을 택하면 나는 오른쪽을, 네가 오른쪽을 택하면 난 왼쪽을 택하겠다"고 제안을 하자, 롵은 대뜸, 당시로서는 아주 비옥하고 풍요로운 땅으로 보이던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요르단 쪽을 택합니다(창 13'10,11). 그 지역은 온 땅에 물이 넉넉하여 예호봐님의 동산 곧 에덴 동산 같이 보이고, 그들이 얼마 전 떠나온 풍요의 나라, 미쯔라임(에짚트) 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감되게도 소돔, 고모라는 죄악이 극에 달해 사악한 도시여서 하나님이 깊이 우려하고 혐오하시던 대상이었습니다(13'13).


롵은 이처럼 겉보기에 좋아뵈는 곳을 선택했습니다. 가족의 앞날을 좌우할 이 중대한 선택을 앞두고 깊이 생각하거나 기도한 흔적도 없습니다. 자신을 여태 이끌어준 웃 사람인 삼촌에게 특별히 고마워하거나 먼저 선택권을 양보하는 미덕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슬기로운 선택을 하기보다 감각과 시각을 따라 결정해 버립니다.


롵의 이런 선택은 현대인에게도 중대한 문제점의 하나로 비칩니다! 현대인들은 눈을 비롯한 오관에 따라, 감관과 직관으로 만사를 선택하고 결정해 버릴 때가 흔합니다. 인터넽 시대에 우리 한국인들이 유난히 '얼짱', '몸짱'을 찾는 것도, 그래서 한국에 크게 유행해온 성형수술 따위로 '수요'와 '공급'을 맞추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깔끔한 장소, 멋진 경치나 "쌈빡한" 음악, 화려한 그림이나 사진 따위가 '치유'에 좋다는 주장을 하는 것도 그런 부분이고 대목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소외된 사람들과 외진 곳들은 더욱 더 소외돼 가고 외져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막다른 골목에서 이승이 모든 것의 끝인 줄 알고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도 해 버립니다. 

 

안타까운 것은 다수의 크리스천들마저도 그처럼 세상에 한데 어울리고 휩쓸려 간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현대 교인들이 모두 고대의 롵과 같은 처지와 입장이었다면, 필시 다들 롵처럼 풍요롭고 비옥해 뵈는 요르단 강변의 소돔 고모라를 골랐을 터입니다. 그 곳 외에는 거의 메마르고 삭막하기 짝이 없는 광야 지대 같은 곳이 카나안 땅이었기 때문이죠. 솔직히..누구나 전자를 고르려 하지, 누가 후자 같은 그런 땅을 고르려 하겠습니까.

 

그러나 롵이 택한 곳은 죄악이 관영하던 곳이었습니다. 우리 눈에 편하고 좋아뵈는 곳과 대상들이 다 안전하고 선하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 곳은 낙원이 아닌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겉 보기에만 치우쳐 섣부른 '급선택'을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아무튼 롵은 급선택을 하여, 소돔 고모라 쪽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홀홀히 떠나갔습니다. 롵네가 떠나고 나니,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창 13'14~17).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라고. 그리고는 아브람의 눈에 보이는 사방의 땅을 그에게 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거기서 살아갈 후손들이 티끌처럼 많게 하시겠다고 그 땅을 세로와 가로로 두루 다녀보라, 그 땅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헤브론에 거주하며 하나님께 제단을 쌓습니다.


롵은 훗날, 이런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실로 너무나 쓰라리게 맛보고, 처절히 겪게 됩니다. 


그가 소돔 땅에 정주하게 된 얼마 후, 저 동북 쪽의 큰 나라 엘람의 케돌라오메르 왕과 그 부근의 나라인 쉬나르(바벨론)의 아므라펠 왕 등 4 대국의 연합군이 남쪽으로 밀고 쳐들어오자, 소돔 고모라를 비롯한 5개국 동맹군이 그들에게 대응하다 패전하여 도주하면서 소돔에 거주하던 롵의 가족과 친척들도 그만 몽땅 4대 왕에게 사로잡혀 갑니다(참고: 창 14'1~12)! 비보에 접한 아브람은 의분에 차서, 318명에 불과한 자신의 수하 군대를 거느리고 용감하게 적을 추적해 가서 양동작전 및 야간 기습을 통해 4대국 동맹군을 쳐부수고, 조카 롵과 가족/친척과 가산을 모두 되찾아 무사히 돌아옵니다(14'14~16).


그러나 롵의 환난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가 살던 소돔과 고모라는 날로 더욱 사악해져가고 급기야 죄악이 관영(貫盈)하여,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고는 차마 더 보실 수가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창 18'20,21). "갈 데까지 가버린"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예언적 지시로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게 되는 99세 되던 해, 하나님이 천사들을 데리고 아브람의 장막 집에 나타나셔서 아브람에겐 아들을 주신다는 확약을 새롭게 하신 것과 동시에 롵이 사는 소돔 고모라가 임박한 심판의 대상임을 통고하십니다(창 18'1~15 참조). 아브람은 롵을 생각하면서 소돔 고모라를 구해보려고 하나님께 여러 번 간구했으나, 하나님은 소돔 성에 의인 단 10명이 없는 이유로 멸하시려는 뜻을 굽히시지 않습니다(18'22~33).    

 

결국 이튿날 새벽까지, 소돔에 살던 롵의 가족중 롵 자신과 두 딸만 간신히 탈출한 뒤,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 불비에 맞아 모두 옹기가마처럼 구워져 버렸습니다(창 19'1~29). 롵의 아내는 풍족하게 지내온 아까운 집과 보물이 생각났는지 천사의 경고를 잊고 뒤를 돌아본 순간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19'26).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지역은 영원히 저주를 받아, 생물이 살 수 없는 거대한 소금 호수인 사해(死海) 아래 묻혀 버렸습니다. 사해는 곧 소돔/고모라에 대한 저주의 상징입니다. 

마치 사막의 푸른 오아시스처럼 광야 한 가운데 비옥하고 풍요롭게 보이던 그 소돔과 고모라가 유황불 잿더미가 되어 무생물과 광물질 천지로 변해버렸으니 얼마나 대조적이고 놀라운 변화입니까! 반면 아브람은 자손 대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카나안의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실로 지옥과 천국의 대비 같은 모습이 아닌가요.

 

소돔 고모라 멸망 예고를 농담으로 여긴 두 사위들도 잃고, 아내도 잃고, 겨우 두 딸과 함께 간신히 살아남은 롵은, 어머니를 잃고 난 뒤 종족 보존을 염려한 두 딸의 계략으로 부지 중에 그들과 동침한 끝에 모압 족과 암몬 족이라는 후손들의 조상이 되지만(19'30~38), 이제 더는 큰 복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나마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이스라엘의 왕국시대 이후까지도 "롵 족속" 곧 모압과 암몬이 버티게 놓아두신 것입니다(참고: 신명기 2'9,19 비교: 느헤미야서 2,10,19). 삼촌 아브라함의 후예인 이스라엘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민족으로 그치고 맙니다. 더구나 대대로 이스라엘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민족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양쪽의 선조들이 서로 가까운 친척 관계였는데도 말입니다. 이 모두가 궁극적으로, 롵의 잘못된 선택 탓이라고 할 수 있죠.



알고 보면, 사실 롵은 애당초 얼마든지 더 크고 좋은 복을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훌륭한 신앙위인인 삼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롭게 잘 선택하기만 했더라면, 숙부가 받는 복을 자신도 나눠 누릴 수가 있었을 터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예인 히브리-이스라엘 민족이 크게 융성하여 대대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아간 것처럼, 그의 후예도 그 일부로서 이스라엘 못지 않은 강하고 좋은 민족으로 자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롵은 소돔의 죄악상을 바라보며 날마다 가슴 아파 하던 의인이기도 했습니다(페트로B서=벧후 2'7). 그러나 애당초 선택을 잘못한 그는 그 곳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과감히 떠날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아간 결과, 간신히 목숨만 부지했다가 근친관계라는 비윤리적 과정으로 간신히 후손만 남기는 정도의 결과를 얻게 됩니다.



자, 이 모두가 한 때의 선택 탓입니다! 하나님께는 롵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책임이 없습니다. 
선택이 얼마나 중요함을 단단히 일러주는 교훈이지요.

크리스천으로서 날마다 선택하며 살아가는 우리..오늘도 지혜롭고 영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예들로서 약속된 은총과 평화와 복을 누리는 우리들이기를 열망합니다(신약 갈라티아서 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