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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물음과 답(Q.A)

모세는 왜 가나안에 못 들어갔나?




모쉐는 왜 카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나?

바탕본문: 구약 민수기 20장



김삼



티엘티의 새 시리즈로 샬롬님이 연재 중인 '샬롬 성경통독 도우미'를 읽다가 느낀 바 있어, 이 글을 쓰게 됐다. 독자들의 성경 통독열과 정독 열기를 부추기려는 뜻도 있다. 


모세(이하 모쉐)는 왜 '약속의 땅' 가나안(카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4세기 넘게 미쯔라임(아이귚트 곧 에짚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려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광야 생활 40년간 일 많고 탈 많던 이스라엘을 이끌고 골치 아프게, 온 삶을 다 바친 그로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다 죽은 그로서, 어찌 보면 정말 억울하지 않았겠는가? 


히브리 가정 출신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어머니의 보호의 배려로 미쯔라임 공주의 양아들로서 왕자의 한 명으로 미쯔라임 궁중에서 자라난 모쉐는, 분명히 자신과 같은 핏줄인 히브리 민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함께, 그들을 오랜 노예생활에서 구출해 내고 싶은 불타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미쯔라임출국기=출애굽기 1~2장 참조).

 

또 이윽고 지도자로 선택되자, 그들을 이끌고 고대 선조인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그 땅인 카나안에 끝까지 들이고 싶었을 것이다. 적어도 오매불망하며 꿈에도 그리던 그 카나안 땅을 자신의 발로 몸소 밟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그런 꿈은 40년 후에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 왜 그랬을까? 왜 예호봐 하나님은 위대한 지도자인 그에게 그런 배려와 혜택을 허락하시지 않았을까? 왜 그런 인자와 사랑을 베푸시지 않았을까?


성경은 이에 대한 답변을 아주 명확하게 해 주고 있다. 한 번 깊이 묵상해 보기로 하자. 



모쉐가 카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 먼데서만 바라보고 죽게 된 배후에는, 민수기 20장에 기록된 카데쉬(가데스)에서의 머무름과 메리바(므리바)의 물 사건이 있다. 카데쉬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3대 지도자의 현재와 미래의 죽음과 연계된 일이 벌어졌다. 미리암과 아론, 모쉐 등 세 지도자들의 죽음은 다들 남매이거니와 서로 공통된 점이 있다. 


3대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모쉐의 누나, 미리암이 이 곳에서 먼저 죽었다. 카데쉬에 거의 머물자마자 죽은 것으로 보인다. 미리암은 아론과 모쉐보다 퍽 연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쉐가 쿠쉬 여인을 얻었다고 해서 비판하다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 일시 나병에 걸렸지만 모쉐의 간구로 도로 나았다. 그런데 그 얼마 후 '첫달'에 여기서 숨졌다. 


미리암은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 여성 지도자이자 최초의 여성 선지자였다. 모쉐의 누나이기도 했지만 영감과 권위가 있어 홍해를 건넜을 당시, 승리를 자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그녀의 찬양 노래와 춤에 모든 여성들이 따랐을 정도이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그녀의 사회적 위치는, 모쉐의 권위에 감히 도전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도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녀가 카나안 땅에도 못 들어가 보고 여기서 죽어야 했던가? 바로 모쉐의 권위에 도전한 벌로서 잠시 나병을 앓은 뒤 그 충격이 적쟎이 버거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물론 미리암은 이미 나이가 매우 많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옷이 해어지지도 않고 발도 부르트지 않는 이적을 행하셨으므로 병도 나지 않게 하셨을 것이다. 나쁜 죄를 짓지 않는 한. 또 병이 낫게도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과 또 모쉐 등 지도자의 권위에 도전한 경우, 병도 생기고 재앙을 당했다. 그 중 한 명이 미리암이었다. 


자신이 여성 최고의 지도자이면서 지도자의 권위에 도전한 것은 아이러니다. 

사실 창세기를 보면, 첫 히브리 족장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는 남편에게 무조건 마냥 순종한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생존(서바이벌) 위기 차원의 상황 속에서 거의 명령적인 말도 했다(창 21'10).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아브람을 '주인님' 또는 '주님'으로서 섬겼다(페트로A서=벧전 3'6).

미리암은 이처럼, 자신의 프로토타잎 같은 사라의 강인한 점에서 어떤 힘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동생이기도 한 모쉐를 탓하려 했는데, 하나님은 이를 용납치 않으셨다. 왜 그럴까? 모쉐는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최고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미리암은 남동생인 모쉐에겐 큰 의미성을 띤 존재였다. 성경은 아무 말도 않고 있지만, 둘 사이가 각별했을지 모른다. 어머니 요케벧의 지시를 받아 아기 모쉐를 넣은 갈대상자를 들고 미쯔라임 궁중 곁 나일 강변에다 놓아두고 숨어서 목욕하러 나온 미쯔라임 공주가 어떻게 하는지 엿보다가 아기를 발견한 공주가 좋아하자, 그 앞에 나타나 '유모'(어머니 요케벧)를 추천하기까지 했다(미출 2'1~10 참고). 대단한 용기요, 지혜였다. 

모쉐는 그런 누나에게 평생 큰 고마움을 느끼며 살았을 법하다. 그래서 미리암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 뒤 나병에 발생했을 때, 연민을 느끼며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누나를 옹호하고 치유를 호소했던 것이다. 그런 관계였기에 미리암은 모쉐를 더 만만하게(?) 보지 않았을까? 

아무튼 미리암이 죽자, 모쉐와 아론은 깊이 슬퍼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바로 이 곳 카데쉬의 메리바 물에서 아론과 모쉐의 죽음을 각각 예고하신다. 아론은 두 아들에게 사제(제사장)직을 물려준 뒤, 이곳 호르산 정상에서 죽을 것이라고. 그리고 모쉐는 이 광야 여정이 끝날 즈음 카나안에 못 들어가고 역시 죽어갈 것이라고. 


둘의 죽음도 본질상 미리암이 받은 징벌과 비슷한 성격이다. 둘은 특히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이신 예호봐님의 권위에 감히 간접적으로 도전했다. 

어떻게 도전했다는 것인가? 민수기 20'8~12에 명기된 메리바 물 사건 전말이 이를 잘 밝혀주고 있다. 



카데쉬에 물이 없어 불평부터 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쉐와 아론 앞에 모여 들어 따지고 들자, 모쉐와 아론은 회막 문 앞에 가서 엎드린다. 그러자 하나님은 영광으로 나타나셔서 모쉐에게 말씀하셨다. "지팡이를 갖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아, 그들 보는 데서 너희 둘이 바위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게 해라. 그래서 바위가 그 물을 내어 회중과 짐승들이 마시도록 하라"고.


여기서 하나님은 분명히 모쉐에게 지팡이를 든 채 바위에게 스스로 물을 내도록 명령하라고 하셨다. 한 번도 아니고, 거듭 강조하셨다. 

바위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이것은 우선적으로 모쉐와 아론의 믿음을 요구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모쉐와 아론은 단순히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바위에게 "물을 내거라!" 하고 마땅히 선포해야 했다. 


그런데 그즈음 둘은 속에 부글부글 끓어오를 정도의 열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물이 없다고 둘에게 마구 따지고 들던 백성들에 대한 분김이 머리 끝까지 치솟아올라, 하나님이 지시하신 말씀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다. 아니 말씀을 정면으로 무시해 버렸다!

그렇게 혈기를 조장한 건 마귀의 유혹이었는데도 말이다. 마귀는 모쉐와 아론이 하나님이 약속해 놓으신 카나안 복지로 못 가게 만들 계획이었는데, 그의 간특한 계획대로 성공해 버렸다! 

 

혈기에 사로잡힌 모쉐는 지팡이를 들고 바위에게 명령하는 대신, 백성에게 대성일갈, 고함을 지르며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내리쳤다. 왜 죄 없는 바위를 그것도 두 번씩이나 쳤는가? 홧김에 그랬다. 모쉐의 목청은 분노에 차 있었다. 말투도 이런 식이었다. 


  "너희 반역자들아, 듣거라! 우리가 너희들에게 이 바위에서 물을 내어 주랴?"


하나님의 말씀 '대본'에는 없던 대사였던 셈이다. 그냥 바위에게 할 명령―"물을 내거라"가 오리지널 대사의 전부였다. 그런데 모쉐는 분노에 찬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즉흥 '생쇼'를 부렸다. 엉뚱한 말을 하면서 지팡이가 부러져라 있는 힘껏 바위를 후려 갈긴 것이다. 


오리지널 각본에 따르면, 그 바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물을 내어 줄 만반의 채비가 이미 되어 있었다. 명령만 하면 즉각 복종할 참이었다. 그런데 난데 없이 지팡이로 매를 맞은 것이다. 그것도 시쳇말로 "훅 가게" 두 대씩이나. 지팡이가 안 부러진 게 다행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바위에 커다란 혹이라도 안 난 게 그나마 다행이다. 워낙 단단해서 그럴 리도 없겠지만.


순간 바위는 엄청 놀랐는지, 엄청난 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20'11b). 콸콸콸콸~..끝도 없이 쏟아 내어 온 백성과 그들이 거느린 모든 동물까지 다 마셔도 남았다. 작은 시내처럼 졸졸졸졸 흘려 낸 게 아니었다. 

 

뭘 말해 주는가? 

하나님은 홧김에 저지른 모쉐의 행태에도 불구하고, 바위에서 물을 나게 하신 것이다. 왜냐고? 하나님은 이미 모쉐와 아론 등을 지도자로 기름부으셨고, 모쉐의 지팡이도 기름부으셨다. 비록 모쉐가 바위에게 명령하는 대신 지팡이로 후려갈겼다고 해도, 몰려든 이 전체 백성 앞에서 물은 나와야 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나마 남은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다.  


모쉐는 "우리가 물을 내 주랴?"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 


이 말을 한 번 따져 보자. 그냥 바위에게 "물을 내거라" 하면 되는데도, 뜬금없이 1인칭 복수 대명사인 '우리'를 끌어들였다. "하나님이 바위에서 물을 내신단다!"도 아니었다. '우리'가 이 바위에서 물을 내어 주랴?? 왜 '우리'가 들어간 건가?! 설령 실수라도 아주 시건방진 말이다. 본의 아니게 마땅히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막았거나 가로챈 셈이 됐다. 그냥 2인칭으로 (너 바위야,) "물을 내거라"고 지시하면 될 것을 '우리가 내 주랴?'로 1인칭 동사로 바꿔 버리면서 아울러 대상도 바위에서 백성으로, 명령형을 의문형으로 바꿨다. 


이게 하나님 앞에서 말이 되는 행동인가? 지켜 보던 천사들마저 탄식이 절로 나게 생겼다. 

잘 나가다 여기서 어찌 이런 일이..?


하지만 모쉐는 자신의 격노를 참지 못했다. 혈기를 제어하지 못했다. 우리의 성마른 분노가 이런 결과를 낳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중범죄를 자초한다. 


만약 모쉐가 이 때 끓어오른 분노를 참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단순히 믿음으로 바위에게 명령만 했다면, 분명히 그는 카나안에 들어갔을 것이다! 죄 많은 형 아론까지도. 

그러나 딱 한 순간의 혈기가 오랜 옛적 선조 아브람이 약속 받은 카나안에 대한 그 절절한 그리움과 특권을 모두 날려 버리고, 카나안까지 이끄는 최고 지도자의 영예를 막아버렸다. 


그지없이 육적인 혈기는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 데 도움이 안 된다. 

우리의 혈기를 이기자.


일찍이 이스라엘의 선조 야콥은 이런 예언을 했다. 


   "오, 내 혼은 그들(쉬몬과 레뷔)의 모의에 들어가지 말고, 내 영광도 그들의 모임에 끼여들지 말길! 

    그들은 홧김에 사람을 쳐죽이고, 재미로 황소의 발목 힘줄을 끊어버렸네!"(창 49'6)


이 예언의 성취는 물론 아니지만, 모쉐와 아론은 레뷔의 후손이었다. 


모쉐는 동족을 위한 복수심(?)에 미쯔라임 관리를 쳐죽이는가 하면(출 2'11,12), 코데쉬에서 홧김에 애먼 바위를 두 번이나 내리쳤다. 


그럼에도 모쉐는 지면의 그 어떤 사람보다 온유한 사람이었다(민 12'3). 모쉐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모쉐가 예견한, 오실 메시아 예수 크리스토님은 모쉐보다 훨씬 더 온유하신 분이었다(마태복음서 11'29). 아무리 적이 모독하고 주먹으로 내리쳐도 참으신 분이니 말이다. 


카데쉬의 이 바위 샘에는 '메리바'(다툼)라는 이름이 붙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다투었기 때문이다. 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대표하는 모쉐 및 아론과 다퉜다. 

우리는 하나님과 다투어선 안 된다! 그 분의 말씀에 우리의 믿음을 섞어 화합해야 한다. 그 분의 계시에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그밖에도 수많은 사건에서 하나님의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고 끝내 하나님과 다툼으로써 광야에서 모조리 죽어갔다. 장정들만 60만, 전체 수백 만의 그들 가운데서 영광스런 약속의 땅 카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광야세대 1세라곤 예슈아(여호수아)와 칼레브(갈렙) 뿐, 나머지는 모두 그들의 2세들이었다. 

실로 일도 많고, 탈도 많고, 죄도 많았던 세대였다. 



메리바 바윗물이 터져나와 온 백성과 짐승들이 배 터지게 마신 다음, 하나님은 모쉐와 아론, 둘에게 기막히는 말씀을 하신다. 둘 다 죽고 카나안 땅에 못 들어간다는 예언의 말씀이었다. 더욱이 아론은 당장 죽어야 한다. 여태 카나안 진입을 기대해온, 아니 고대로부터 선조에게 대대로 예언된 그 복지를 열망해온 모쉐와 아론으로선 가히 "눈알이 튀어나올" 만한 말씀이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아니, 그,그럴 수가~?" 하고 둘은 자칫 항변할 수도 있었겠지만, 너무나 엄정한 내용이어서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었다. 혹 입이 열이더라도 할 말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미 일을 저지른 제 '꼬라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론은 호르 산 위에서 자기 두 아들들에게 사제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산 꼭대기로 올라가 거기서 숨져 갔다. 모쉐와 둘이서 열 받아 바위를 친 게 그에겐 마지막 화근이었던 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김이 없다. 

모쉐 역시도 광야 생활 40년이 다 지난 뒤, 드디어 모아브 평원 한 가운데 네보산을 오르다 피스가 봉까지 다다라서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약속의 땅 카나안을 구석구석 두루 바라다 보며 죽어 간다(신명기 34장 참조). 그의 나이 120세 때였다. 


모쉐는 참으로 충성된 청지기 역할을 다 했다(히브리서 3'5). 하나님의 명령을 받잡고, 450년간 종살이 하던 히브리 민족을 파라오의 손에서 건져내어 광야로 탈출시켰다. 40년간의 광야 생활 동안 그들을 이끌었다.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쓰신 율법을 받아 백성에게 전수했다. 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전달했다. 여호수아를 시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게 도왔다. 이스라엘이 들어갈 카나안을 정탐하게 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하나님의 명령대로 멀리서 바라보며 죽었다. 


그 점에서 속절 없이도 느껴지지만, 아무튼 그는 끝까지 충성을 다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