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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성경역사-고고학

성경 속의 주화(2): 렙돈

알렉산데르 얀네 왕 때 주조 발행된 렢톤(lepton) 




성경 속의 주화(2): 렙돈


김삼



지난 2013년에 성경의 고대 주화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데나리온에 관한 해설을 첫 회에 다루고 나서 무려 2년만에, 두 번째로 렢톤(Lepton. 한글 성경은 '렙돈'으로 표기)에 관해 살펴보려고 한다. 앞으로는 주화 시리즈를 틈나는 대로 되도록 자주 이어가련다.

참고글: 예수님 당대의 주화(1): 데나리


우선 성경에서 이 주화가 언급된 곳은 마르코스복음서(맑) 12'41~44, 루카복음(눅) 21'1~4, 등이다. 루카 12'59에서 '호리'(한글개역) 또는 '(마지막) 한 푼'이라고 표기된 그 돈이다.


서기 30년(일설은 33년*)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의 뜰'(히브리어 '에즈라트 나쉼')에 있는 성전 헌금함 가까이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고 계셨다.
당시는 유월절을 앞두고 주님이 수난을 결심하신 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무렵, 성전에서 파리새/사두케 당 사람들과 질의응답을 주고 받으신 뒤여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당히 피곤하셨을 만한 때였기에, 군중을 피하여 잠시 휴식 삼아 이곳으로 여기 오셨을 가능성이 있다.


헤로드(헤롯) 성전 안에는 여러 공간들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인 이 '여인들의 뜰'은 약 71제곱미터 넓이의 정방형으로 , 네 꼭지점을 낀 각 코너에 하나씩, 모두 4개의 방이 있었다*):성전제사에 쓰이는 땔감을 쌓아둔 화목실(북동쪽), 나지르실(나실인의 방)의 방(동남쪽), 나환자실(북서쪽), 성전제사에 사용될 포도주와 기름을 보관하는 방(남서쪽) 등이었다.) 약 6,000명이 서서 동시에 경배할 수 있었다는 이 뜰의 둘레에는 다른 뜰처럼 돌기둥들이 선 회랑이 있었고, 한쪽은 특별히 초막절(수코트) 때 수로를 따라 물이 흘러가는 장관을 여인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위치를 높인 '여인들의 발코니'도 있었다. 뜰 남쪽과 북쪽에 각각 이 발코니로 오르는 돌 계단이 있었다. 절기 축제와 경배 때 남녀가 서로 어울릴 수 없었기에 따로 여인들만을 위한 장소가 바로 이 발코니였다.


참고로, '여인들의 뜰'이라는 명칭은 여성들만 모이는 금남구역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성들은 이곳까지만 나올 수 있고, 그 이상은 성전 안으로 진입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셒을 대동한 마리아가 난지 8일만에 아기 예수를 안고 와 아기 할례를 받은 곳도 이곳이며, 이어서 성전에 기도하면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안나와 쉬메온을 만난 곳도 이곳이다. 또한 소년 예수가 성전의 학자들과 성경에 관한 대화를 나눈 곳도 이곳이었을 터였다. 마리아가 근접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여인의 돌기둥들 가운데 11개에는 헌금함이 매달려있었다.*) 성전문의 하나인 미문(美門 또는 코린토 문*) 양곁에도 헌금함이 둘 있었는데, 이것까지 포함해서 13개로 보기도 한다.


그리스어 '가조퓔라키온'이라는 용어의 이 헌금함은 흔히 히브리어 '나팔'(쇼파롵)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까닭은 헌금함에 돈을 넣는 아구가 나팔 또는 깔때기 모양으로 주둥이 부분이 넓게 둥글고, 돈이 보관되는 함에 연결된 안쪽으로 좁혀져 있었기 때문이다(이와는 거꾸로-즉 바깥쪽은 좁고 안쪽은 넓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음).
13개 헌금함은 11가지 종목의 용도로 분류돼 있었다. 물론 당대엔 지폐가 없었고, 모두 금속으로 주조된 주화였다. 이 11가지 종목은 다음과 같았다:  


   0. 미문 납세함(2개): 반 쉐켈(세겔)씩의 성전세
   1. 멧비둘기,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씩을 제물로 드리기 위한 헌금
   2. 번제용 조류를 위한 헌금
   3. 번제용 땔감 나무를 위한 돈
   4. 향단에 쓸 유향(乳香)을 살 돈
   5. 시은좌(속죄소)에 쓰이는 금을 위한 돈
   6. 속죄제를 위한 잉여(나머지) 헌금
   7. 속건제를 위한 잉여 헌금
   8. 조류 제사를 위한 잉여 헌금
   9. 나지르(Nazir)*인 예물을 위한 잉여 헌금
   10. 나환자 속건제 잉여 헌금
   11. 민중/무리를 위한 여하한 헌금


*이 11가지 용도 가운데서 이 과부에게 가장 걸맞은 헌금은 마지막인 11번일 것이다. 예수님도 이 헌금함이 걸린 기둥 맞은 편 좌석에 앉아 계셨다가 이 여인을 목도하셨다. 

아무튼 주님은 이 헌금함이 달린 기둥 맞은 편에 마련된 돌 의자에 앉아계시면서 사람들의 봉헌 광경을 "바라보셨다(맑: 테오레오)", 또는 "올려다보셨다(뤀: 아나블렢사)"고 했다. 이 말은 유심히 주의깊게 지켜보셨다는 뜻도 되고, 헌금함이 기둥에 매달렸으니 앉은 위치에서는 눈높이보다 약간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도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봉헌 광경을 바라보신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내고 있었다. 부자들도 많아서, 자신들이 가진 많은 돈들 중에서 두둑히 일부를 바치고 있었다. 비록 로마 속국이긴 하지만, 당대가 아직은 자유와 여유를 구가하고 있었다는 뜻일 터이다. 누군가는 거액의 헌금을 바친다는 것을 자랑삼아 과시하며 내기도 했을 법하다. 주님께서는 열심히 헌금하고 있는 이 부자들에게 무슨 비판감정이나 적개심을 갖고 바라보시지는 않은 거 같다. 그냥 좋게 바라보신 셈이다. 사실 부자들은 풍성히 내어야 옳다. 하나님은 인색한 마음이 아닌 기꺼운 마음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 때였다. 명절을 앞두고 경배하러 성전에 나온 어느 과부가 헌금함으로 다가오더니 정성스럽게 렢톤 두 푼을 던져넣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초라한 차림의, 아주 가난한 여인임에 틀림없었다. 본문에서 "가난하다"(πτωχή)는 원어 '프토케'는 고전 그리스어에서 흔히 면걸(免乞) 차원의 극빈 상황을 가리켰다.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시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잘들 보게나. 참말로, 지금 이 가난한 과부는 여기에 헌금을 넣은 그 모두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바쳤다네! 다른 이들 모두는 자신의 많은 것들 가운데 일부를 바쳤지만, 이 여자는 자기가 가진 모두를, 심지어 생계비까지도 몽땅 기꺼이 바쳤기 때문이지."


참 놀랍기 짝이 없는 말씀이다. 우선 주님은 그 밝은 영안(靈眼)으로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든 봉헌자들의 마음을 일일이 꿰뚫어보고 계셨고, 그 누구의, 아니 그들 모두의 풍성한 헌금보다 이 여인의 단 두 푼이 더 값어치가 있다고 놀라운 일대 선언을 하신 것이다. 물론 이 선언은 세상의 과학이나 수학을 초월하는 영적인 선언이다. 숫자로 적고 많음을 헤아리는 세상 사람들로서는 좀체 이해할 수 없는 유의 선언이다. 하나님은 숫자를 보시지 않는다. 속마음과 동기를 보신다.


둘째로 놀라운 것은 여인의 믿음이다. 극빈상황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크고 담대하고 강인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당대 유대인들 다수는 자신을 위해 돈을 아낌없이 쓰면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흥청망청 살아가다가 그 일부를 하나님께도 가져오곤 했다.
그러나 이 과부는 자기 가족의 생계비 내지 생활비인 돈 전부-그것도 고작 동전 두 닢을 아낌없이 바쳤다! 고대에 마지막 한 끼분으로 남긴 곡식 가루와 기름으로 과자를 구워 엘리야를 먼저 대접한 자렢타(일명 사르밧)의 과부처럼, 이 과부는 이렇게 생계비를 바쳐도 하나님이 당장 식구들을 먹여 살리실 줄을 안 것이었다. 찌든 가난 속에 풍요로운 믿음!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죽은 남편 대신 돈의 힘을 믿는 여느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여러 모로 현실을 초월한 상황이다. 첫째로, 세상 수학과 과학을 초월한다. 세상에서는 주로 눈에 보이는 것을 갖고 모든 것을 판단한다. 숫적으로 두 렢톤은 도저히 두 데나리온이나 두 탈렌트 이상일 수가 없다. 아마도 웬만한 보통 사제라면 과부의 두 동전을 보고 "쯧쯧, 저걸 다... 어지간히 못 사나 보네" 했을지 모른다. 

매튜 풀의 연구에 의하면 당대의 화폐는 노동자의 일급에 해당하는 1 데나리우스(데나리온)를 기본 가치로 하여 셈할 수 있는데, 1 데나리우스는 6 메아(므아)였고, 1메아는 2 폰디온, 1 폰디온은 2 아싸리온*, 1 아싸리온은 8 렢톤이었다. 2 렢톤은 (로마제국의 주화인) 1콰드란스(고드란트)였으니, 1 데나리온의 1%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무게는 겨우 1.7g이었다.


이 여인이 렢톤 두 개를 모두 드렸다는 것은 찬탄할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만 내고 나머지 하나는 만약을 위해 그냥 갖고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런다고 누가 탓하겠는가! 그런데도 다 바쳤다. 우리는 행전에서 아나니아와 사피라가 집 판 돈을 바치고도 저주를 받아 죽은 사실을 본다. 사도 페트로가 지적했듯 그들은 애당초 집 판 돈의 절반을 남겨둘 수 있었다. 문제는 절반은 감추고 절반만 내면서도 몽땅 다 바치는 양 하나님과 사람들을 속인 것이다.


그에 비해 처음부터 결심하고 생활비로 여분을 가르지 않고 전액을 다 바친 이 과부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실로 진솔하고 과감한 희생적인 믿음이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절대 신의존적 신앙이었던 셈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런 신앙인들을 찾아 큰 복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이런 신앙인은 물론 드물다.


왜 주님은 이 광경을 조용히 혼자 보시지만 않고 제자들까지 불러, 보게 하시고 또 평가까지 하셨을까? 제자들에게 가르치심으로써, 올바른 헌금의 본을 보이고, 값비싼 향유를 몽땅 주님께 부어바친 베타니 여인의 선행처럼 이 여인의 행실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마다 본이 되고 기념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주님은 사실 이 두 여인들이 각각 자기 지닌 것을 아낌없이 기꺼이 바친 불과 얼마 후, 그 분의 생명을 그렇게 몽땅 주셨다! 즉 베타니 여인의 향유와 과부의 두 엽전은 주님의 희생의 예표였던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엔 사람들이 갖다바친 그 모든 헌금들보다 여인의 단 두 푼이 더 귀하고 소중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현대 교회들도 세상을 닮아간다. 아니 세상과 대동소이하다. 요즘 웬만한 교회엔 큰 돈을 "확 확" 바치는 '큰손'이 필요하단다. 천원권, 만원권 정도는 헌금위원들의 눈에 차지도(?) 않는다. 싯누런 오만원권 정도는 돼야 간신히 헌금답게 쳐 주며 그것도 다발로 바치는 "간 큰" 사람이 제대로 신자 대접을 받는 것 같다.
물론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이 바친 (적지만 많은) 헌금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교회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드물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들이 바치는 적은 헌금이 모두 다 올바르다는 의미는 아니다. 각 사람이 최선껏 바치는 헌금이 그러할 뿐이다. 


둘째로, 여인의 믿음은 상상을 초월한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 자칫 온 가족이 굶을 수도 있는 생계적 아니 생존적인 위기상황인데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이 과부는 주된 수입원 노릇을 하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 그제는 하나님만 믿고 '홀로 서기'를 해 왔을 터이다.  


마르코스(마가) 복음서의 본문 앞 두 절(맑 12')은 주님께서 특히 당시 교사라고 하는 서기관들의 사악하고 위선적인 관행을 통렬히 지적하신 내용이다. 서기관들은 율법사처럼 율법을 갖고 교사 노릇을 했다. 고대 유다 교사들은 돈을 받을 수 없는 대신, 민중에게서 선물을 받아냈다.


그들은 긴 예복을 입고 다니며 장터나 길거리에서 문안과 존경을 받기를 즐기고, 장황한 기도를 읊어대고, 공적 모임에서는 언제나 웃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며, "그 어느 사회인사들보다 가장 훌륭한 직책"인 교사들에게 돈이나 선물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선행'이라고 짐짓 가르쳤다. 그들은 하나님과 거의 동등한(!) 대우를 받아내곤 했다.


서기관들은 특히 선물을 줄 것이 별로 없는 빈민과 환자나 약자들, 과부들의 집을 노렸다가 가로채곤 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모두가 큰 단죄와 저주의 대상이라고 경고하신 것이다(참고: 마태 23'33).
혹 가난한 이 과부의 집도 서기관에게 이미 삼키웠다면, 이 헌금은 더욱 더 귀한 것이었으리라!


하나님은 이 과부가 두 렢톤을 내고 나서 그녀와 가족을 크게 복 주셨을 것이 틀림없다. 그 누구보다 더 큰 희생은 그 누구보다 더 큰 대가를 받아야 걸맞다.
하나님은 숫자를 보시지 않는다. 마음과 믿음을 보신다.


파리새들과 사두케들과의 논쟁으로 피곤하셨던 주님과 제자들의 눈과 마음 앞에서 이 과부의 믿음의 헌금은 정말 신선하고 청신한 모습이었다. 우리의 봉헌은 이처럼, 사람의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어야 할 터이다.



렢톤에 관한 또다른 언급


루카복음서 12'58, 59에서는 피고소인이 고소인과 제때 화목하지 않을 경우, 결국 마지막 한 잎의 렢톤까지 빚을 몸값처럼 죄다 갚지 않고선 감옥에서 놓여날 수 없다는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렢톤에 관하여:


위 성경 본문에 언급된 렢톤(그리스어 λεπτόν, 복수=렢타/λεπτά)은 그리스어로, '작다' 또는 '얇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리스 돈은 아니다. 당대에 그리스어가 공용어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리스어 화폐용어가 널리 쓰인 것 뿐이다. ] 따라서 당대의 유대를 비롯한 헬레니즘/그리스어 고전언어권에서 폭넓게 통용되던 최소 단위의 흔한 화폐 명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름답게 이 돈은 당시 통용되던 주화 가운데 최소 단위 및 최소 크기의 동전(銅錢 곧 놋/구리로 된 주화)이었다. 넓이가 고작 연필 뒤에 달린 지우개 정도였다고 한다. 현대의 대다수 동전 크기의 4분의 3도 채 안 되는 것이었다. 아마도 현재 미국의 최소 은전인 다임(dime: 10센트)만한 크기였을 것이다.

*)참고로, 렢톤의 현대형인 그리스어의 현행 렢토(λεπτό)는 19세기 이후 그리스의 모든 역대 화폐의 100분의 1에 해당하는 단위로 사용돼 왔다. 즉 퓌닉스(1827~1832), 드라크마(1832~2001), 유로(2002~현재) 등이 그것들이다. 즉 현재 그리스의 렢토는 영어권의 유로센트에 해당하는 돈이다. 렢토의 비공식 상징어는 람다(Λ). 그러나 1870년 후반부터 2001년까지 5렢타 이하의 그리스 주화는 주조된 바 없다.


두 가지 학설

유대의 렢톤의 기원에 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한 가지는 중간기*)의 유대 왕조였던 하스모네아 왕조의 왕/대사제(대제사장)이었던 알렉산데르 얀네(Alexander Jannai, 라틴어 얀네우스/Jannaeus 103-76 BC) 당시 주조된 것이라는 설, 또 한 가지는 그보다 훨씬 이전, 같은 하스모네아 왕조기의 다른 전왕 무렵 발행됐던 것이라는 설이다. 양쪽 다 일리가 있다.

얀네 시대의 렢톤은 한 쪽 면은 셀루키우드 왕조의 문장인 닻과 그리스어 바실레우스 알렉산드루(알렉산데르 왕)라는 명칭이, 다른 쪽은 8개의 살이 속에 든 전차 바퀴(일설엔 원 속의 별) 문양이 있고, 이 살 사이에 '예호나탄 하 멜렠'(요나단 왕이라는 뜻)이라는 문구의 히브리어 글자가 새겨졌다. 얀네의 또 다른 이름이 예호나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