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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의 연구묵상/캪튼's 코너

여호수아의 청렴결백

          

아칸의 비리 탓에 돌더미가 돼간 그의 가족과 가축들은 현대 교인들에게도 경종이 된다.

 


여호수아의 청렴결백



여호수아[각주:1](이하 예슈아로 표기).

다들 알다시피 그는 모쉐(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끈 지도자입니다. 

성경을 통틀어 예슈아처럼 훌륭한 지도자도 드뭅니다. 그는 모쉐에게 지적 받은 한 가지(민수기 11'25~29)를 빼고는 실족도 실수도 없었던 사람이었지요. 


그는 카나안(가나안) 일대를 두루 살펴볼 12 정탐꾼의 한 명으로서 파견됐다가 돌아와 보고할 때도,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보고를 했던 10명과는 달리 칼레브(갈렙)와 함께 단 둘이 확신에 찬 긍정적인 보고를 한 바 있습니다. 

그 때문에 카나안 복지에도 1세대로서는 칼레브와 함께 딱 둘만 진입하게 됩니다. 


그는 또 모쉐의 지시에 따라 이스라엘의 광야 행군의 진로를 막는 아말렠 족과 싸워 이긴 매우 용감한 장군이기도 했습니다(미쯔라임탈출기=출 17'8~16)[각주:2].  


그는 그의 본명 호쉐아(구원이라는 뜻)를 모쉐가 바꿔 준 이름 예슈아(예호봐/여호와님은 구원자라는 뜻)라는 이름답게(민수기 13'16) 이스라엘을 카나안 복지까지 내내 잘 이끌었고, 카나안 땅의 지족별 분배까지 모쉐가 남긴 유언과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그대로 철저히, 끝까지 순종하여 이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슈아는 모쉐의 후계자/종으로서 늘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지도자로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예슈아가 미쯔라임 출국(출애굽)의 지도자 모쉐의 뒤를 이어 카나안 정복의 기수로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내력에는, 이처럼 꾸준히 모쉐를 수종하며 배웠던 점 때문도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예슈아는 또 모쉐로부터 지도자직을 인계 받을 때 하나님께 "강하고 담대하라"는 권고와 축복을 받았습니다. 카나안 정복을 위해서는 이 성품이 가장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슈아는 구원자를 가리키는 그의 이름 때문에 예수님의 한 예표이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그리스어 '이에수스'가 바로 히브리어 '예슈아'에서 왔습니다. 


아무튼 이 글에서는 지도자 예슈아의 청렴결백성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현대 교계/교회 지도자들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부각돼온 한 가지가 물욕과 욕정이 많다 못해 지나치다는 것입니다. 걸핏하면 부정부패 등의 이슈에 걸려 넘어져, 교계와 사회로부터 공히 비난 받는 사례가 빈번하게 속출합니다. 정말 우리 자신을 더욱 더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시대입니다.  


예슈아는 오래 전 이 점을 잘 간파했기에 우리의 훌륭한 귀감이 되어줍니다. 


카나안을 모두 정복하여 하나님의 언약적 명령과 모쉐의 지시대로, 각 지족별로 땅을 배분해준 예슈아는 맨 마지막에 자신의 몫을 할당받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의 명에 따라 예슈아가 요구한 성, 곧 에프라임 산지의 가아쉬 산 북쪽에 있는 팀낱 세라(예슈아서 19'50; 24'30. 일명 '팀낱 헤레쉬'. 판관들=사사기 2'9)였습니다. 

예슈아는 에프라임 지족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지요. 예슈아는 이미 노년의 몸이었지만, 자신이 배당 받은 그곳에 손수 성을 세우고 거주하였습니다(19'50b). 


아마도 예슈아는 이스라엘 최고지도자로서 자신이 원했다면, 일찌감치 에프라임 기업(基業) 땅의 더 좋은 성을 요구할 수도 있었을 터입니다. 또 다른 성과 기타 산물을 요구했더라도 백성들이 기꺼이 응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훌륭한 지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물욕이 전혀 없었고 단지 살 곳만 있으면 만족했습니다.  


예슈아는 인생에 있어 물질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나 오직 하나님이 참 기업이시요, 희망의 전부임을 살아오면서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요동이나 흔들림이 없이 늘 꿋꿋했습니다. 

 


돌아보면, 예슈아는 특히 카나안 정복 초기에 이 부분에서 단단히 교훈을 얻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는 예슈아에게 물욕이 많을 수 있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로 예리코(여리고)성의 정복 직후 발생한 아칸(아간)의 전리품 취득 사건 때문이었지요. 유다 지족의 한 후손인 아칸은 예리코 점령 당시 바쳐야 한다고 미리 경고된 전리품(예슈아서 6'17~19,21,24 참고: 7장)들 가운데 일부--쉬나르(바벨론)산인 화려한 겉옷 한 벌, 은 200쉐켈(약 2.3kg), 금 50쉐켈(약 570g)--등을 자기 것으로 챙겨 몰래 숨겨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이 전투 초기에 패배했고, 하나님이 원인을 알려주신 뒤에는 아칸과 그의 자녀, 소유물이 비참하게도 모두 투석형을 받아 큰 돌무더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은 '아코르(괴로움) 골짜기'라는 이름이 붙여집니다. 아칸이 온 이스라엘을 괴롭혔듯 아칸 자신도 괴롭힘을 당했다는 의미이죠.


예수아는 이 사건과 수습과정을 통해 분수를 모르는 무리하고 과다한 경제물욕이 곧 괴로움이 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을 터입니다. 지도자에게 있어서 청렴결백은 필수요건입니다. 아칸은 온전히 바쳐야 할 물건에 손을 댐으로써 이스라엘의 일시 패배를 몰아왔고, 결국 가장인 자신의 후손과 소유물이 모두 대신 멸절된 셈입니다. 아코르 계곡의 큰 돌더미는 분수를 넘은 물욕이 결국 괴로움을 낳는 결과를 만대에 보여준 경고의 기념비였습니다. 


훗날, 용감한 사제(제사장) 퓌네하스(비느하스)를 대동한 이스라엘의 10 지도자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제라의 아들 아칸이 바쳐진 물건들에 대하여 죄를 지어 이스라엘 온 회중 위에 진노가 내리지 않았소? 그의 죄 때문에 망한 사람들이 그 한 명만은 아니었소."(예슈아 22'20, 이하 성구는 필자 사역) 


이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지난 날 아칸 한 사람의 물욕 탓에 전체 회중에게 엄청난 대가가 따랐음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당시는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신정(神政)사회였기에 형벌과 심판도 즉각적이었지만, 현대에도 이와 방불한 일이 없지 않습니다. 예컨대 근래 한국의 이른 바 '방산(방위산업) 비리' 배후에 물욕이 차고 넘치는 일부 인사들이 웅크리고 있어, 전체 한국 사회에 얼마나 손해를 끼치며 먹물을 끼얹고 있습니까?!(>) 사회 곳곳에 현대의 아칸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에 비하면, 예슈아는 얼마나 올곧고 꿋꿋이 청렴을 지키던 지도자였던지요! 그는 끝까지 흠 없이 자기 삶을 최선껏, 충실히 살아낸 선구자였습니다. 



예슈아 말고도 이런 지도자는 또 있었습니다. 


예슈아의 스승/멘터이자 선배인 모쉐 역시도 더 없이 훌륭한 지도자로서 일찌기 물욕을 떠나있던 사람이었지요. 모쉐는 당대의 최대 제국인 미쯔라임(에짚트)의 왕궁에서 40년간 누리던 모든 영화를 일시에 내버리기도 했고, 40년간 처가살이로 광야의 양지기 생활을 하다가, "내 백성을 건져내어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잡아 지팡이 하나만 달랑 들고 다시 미쯔라임으로 돌아오기도 했지요.


히브리서 기자는 모쉐가 (장차 오실) 메시아(크리스토)님을 위한 수욕(受辱)을 미쯔라임의 보물들보다 더 값지게 여겼으니 자신의 상급을 내다봤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히브리서 11'26). 

현대 교회지도자들이 모쉐 같은 이런 마음만 갖고 있다면 교회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있고, 하나님 나라는 더욱 확장될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상 판관기-왕국시대 사이의 과도기 때 마지막 판관(사사)으로서 다가올 왕국시대를 준비했던 슈무엘(사무엘)도 그런 사람이었죠. 그는 말기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나의 소년기부터 지금까지 여러분 앞에서 사역해 왔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 있습니다. 예호봐(여호와)님과 그 분의 기름부은 이(샤울)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언하시오. 내가 누구의 소를 뺏은 적이 있나요, 누구의 나귀를 빼앗았나요? 내가 누굴 속인 적이 있습니까? 누굴 억압했었나요? 누구에게서 뇌물을 받고 눈감아 준 적이 있나요? 그랬다면 내가 청산하지요."(슈무엘A서=삼상 12'2b,3)


슈무엘의 이 청렴결백은 다름아닌 하나님이 입증해 주신 것이었고, 당시의 왕 후보자와 온 백성이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어 100% 공인해 준 것이었습니다(12'4,5)! 그랬기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위대한 고대 중보자의 한 명으로 꼽혔더랬습니다(예레미야서 15'1).  


그만큼 슈무엘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떳떳했던 것이지요. 

정말 윤동주의 서시처럼 말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과연 오늘날의 지도자들이나 우리 중 누가 감히 이럴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아마 누구든 절로 "나는 아냐.."라고 힘없이 목청과 고개를 떨굴 것입니다. 철저한 무능을 깨달을 수밖에 없을 터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런 청렴결백을 포기해야 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설령 지난 날 끝없이 실패해 왔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신앙 선구자들을 본받고, 역사 속의 지난 잘잘못의 선례를 통하여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그 분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사람들 앞에 청렴결백해야 옳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바쿸의 고백 노래를 다시 한 번 되불러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무화과나무가 피어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올리브나무에선 딸 것이 없고 밭엔 먹을 것이 없어도 

   우리엔 양이 없고 외양간에 가축이 없어도 

   나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리, 예호봐님 내 구주 안에서 즐거워하리! 

   -하바쿸서 3'17,18 


또한 사도 파울의 고백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쪼들려 지낼 줄도 알고, 넉넉히 지낼 줄도 압니다. 배부르든 배고프든, 넉넉히 지내든 가난하게 지내든, 그 어떤 경우와 모든 상황에 대한 비결을 배워왔습니다."(필리포서 4'12)


   '어..? 아냐~, 난 쪼들리면 안 되고 늘 넉넉해야만 해! 좀이라도 배고프면 난 못 해!'

- 이런 사람을 과연 참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름만의 지도자라면 몰라도.



우리는 간혹 물욕에 빠질 수는 있어도 거기 갇혀 있지 말아야 합니다. 

곧장 정신 차리고, 얼른 빠져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지도자로서의 물욕은 자타에게 치명적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물욕 때문에 남까지 망하고 죽게 만드는 현대의 아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아처럼, 슈무엘처럼, 하바쿸처럼, 파울처럼.. 그리고 그 누구보다 우리 주님처럼 살아갑시다. 



  1. 다른 발음: 예호슈아, 야호슈아, 야슈아 등. [본문으로]
  2. 이 승전을 기념하여 모쉐가 단을 쌓고 '예호봐 니씨'(여호와 닛시, 곧 "하나님의 깃발"이라는 뜻)라고 명명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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