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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영화&드라마

영화 '워룸' 비평1




영화 '워룸'의 문제점들(1)-서론



등댓길(LHT) 사이트 편집

김   삼 편역



영전?

성경교사들?

'워룸'에는 벹(벳) 무어와 프리실러 셔러가 성경교사로 동원됐다. 




워룸 서론 


워룸은 주로 기도와 영적 전쟁(spiritual battle)을 주제로 한 영화이다. 

제작자인 켄드맄 형제들은 이전부터 '거인 맞닥뜨리기', '방화벽', '용기있는 사람' 등 친가족적 내지 친기독교적인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번 영화 '워룸'도 그런 지는 의문이 많다. 이 영화는 프리실러 셔러와 벹 무어 등 교계 일각에서 문제 명사로 지목받아온 여성 영성가들을 등장시켰기에 이들의 영성 영향을 받는 여성들이 대거 관객으로 들락거리기 때문이다. 

위험한 신비주의적 기도인 소위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를 증진 보급해온 영성가인 셔러와 무어를 동원한 것은 혼동스런 메시지를 주고 있다. 



영적 일깨움(대각성)?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말세에 영적 '대각성' 또는 '일깨움'이 있을 것이라고들 주장하고 기대한다. 그러나 글쎄다. 오히려 성경은 그 반대를 말하고 있지는 않는가? 성경은 수많은 사람들이 말세에 배교하여 떨어져나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속임수를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안 그래도 세상과 교계엔 점점 더 잡다한 영성운동이 흔해져가고, 신구교 연합운동 등 종교다원적, 종교혼합적 운동, 뉴에이지와 만인내재신론 등이 나날이 더 활개를 치고 있지 않은가? 


기독교계에서는 영적 대각성이 만트라처럼 유행돼가고 있다. 하나/한분(One), '일깨(우)다', '깨라', 대각성, 영적 각성 등의 용어들이 교계에 두루 퍼져나간다. 참 회개와 부흥을 바라는 것은 좋지만, 신비주의적 영성을 포용하면서 영적 속임수를 이해/경계하지 못하는 지도자들이 어떻게 참 부흥을 몰아올 수 있는가? 성령은 혼돈의 영이 아닌 진리의 하나님이신데도?


2013년 벹 무어는 제임즈 롸비슨의 '지금 깨라'(Awake Now)라는 컨퍼런스에서 하느님(하나님)이 자신에게 위대한 영적 대각성이 다가온다고 말씀하셨다고 주장했다. 흥미롭게도 무어는 약 4천 청중에게 이 대각성과 '쏟아부음'을 의혹하는/할 사람들을 경고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세상의 비난이나 조소는 늘 각오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를 괴롭히는 말은 "다가올 것을 미리 준비하라"고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은 먼저 우리의 형제자매들인 크리스천의 영역에서 판단/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과연 영적 대각성과 일깨움이 있을지에 대해서도 크리스천계안에서 찬반 논란이 있을 법 하지 않은가? 현재 그러하다. 그런 주장을 비웃는 사람들도 있고, 요사이 교계는 지도자들부터가 도덕적으로 점점 더 타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교계 인사들도 400여명 개입됐다는 최근의 뭔 '애슐리 매디슨' 사태가 그 한 예다. 대각성 전 회개할 것이 풍성해야 하기 때문인가? 


아무튼 벹 무어는 이 거대한 '영적 대각성'을 의심하는 분별 크리스천들을 소외시키는 짓을 했다. 말을 바꾸면 이 다가올 영적 대각성의 지도자들에게 감히 누구도 도전할 수 없고 해선 안 된다는 셈. 그런데 성경은 베레아 교우들처럼 성경 말씀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라고 하지 않는가? 



벹 무어(Beth Moore)와 프리실러 셔러(Priscilla Shirer) 

 

   나는 새 방식의 기도로 주님을 경험하도록 그 분이 나를 부르셨음을 알았다. -프리실러 셔러


   우리가 그 분(하나님) 앞에서 잠잠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분이 하나님 이심을 우리의 뼛속 골수 깊이까지 알 수는 결코 없다. 잠잠함이 있어야 한다. -벹 무어


관상기도를, 프리실러 셔러는 '새 방식'이라고 하고, 그리고 벹 무어는 "하나님을 아는 데 필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상 관상기도는 고대의 기도 관행으로서, 본질적으로 뉴에이지나 동양 이교의 명상과 똑 같은 것을 기독교식 용어로 위장한 것 뿐이다. 소위 관상의 침묵에 참여/진입하는 사람은 엄청난 속임수 앞에 자신을 허용하는 셈이다. 


워룸 영화의 성공 때문에 많은 팬들은 웹사이트로 들어가서 무어와 셔러의 글들을 참조한다. 셔러의 '하느님 음성 분별하기: 말씀하실 때를 어떻게 아나?'(Discerning the Voice of God: How to Recognize When God Speaks)를 읽는 사람들은 관상영성에 대한 그녀의 끈끈한 정을 발견하게 된다. 또 무어의 DVD '잠잠하라(Be Still)'와 책 '경건한 사람들이 불경건한 것을 할 때'를 읽는 사람들 역시 관상기도에 대한 무어의 기호를 느낄 것이다. 


관상기도는, 지상 교회가 건전한 교리로부터 벗어나는 모습을 관찰할 때 우선적으로 살필 요소이다. 이 '기도'는  마이크 비클의 국제기도의집('아이핲'/IHOP), 캘리포니아 레딩의 베델교회(빌/베니 좐슨=빌 존슨), 새들백교회의 맄 워런(릭 워렌), 저술가 케닡 보아(케넷 보아), [심지어 보수교단인 PCA(미장로회)에 속한 리디머장로교회의 창설목사인] 팀 켈러 등이 적극 증진해왔다. 


프리실러 셔러는 어떻게 관상기도를 알게 됐을까? 그녀 자신의 글로 보자.


   내 친구가 침묵기도에 관한 책 한 권을 보내왔는데, 목적을 갖고 침묵기도에 침잠할 때 신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도와줄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난 저자의 영적 여정에 깊이 끌려 들어가, 두 번을 읽었다. 내 심경이 불타면서 주님이 하나의 새로운 방식의 기도로 그 분을 경험하도록 날 부르고 계심을 알았다.


셔러는 그렇게 새로 발견한 '기도' 개념에 매혹되어 한 성경구절도 다음과 같이 나름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 너의 귀는 열고 입은 닫아라(전도서 5:1)


   내가 그토록 끌려왔던 그 책의 메시지, 그리고 성령께서 내게 하기를 이끄셨다고 느낀(sensed) 것을 이 성구가 확신시켜 주었다." 


셔러는 또 자기 교회의 어떤 여성들이 '침묵기도 수련에 참가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 여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열망으로 모여 36시간을 침묵에다 소모하려는  것이었다.'


침묵기도에 관한 책을 읽어온 데다 더구나 똑같은 것을 사람들이 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 이에 따라 셔러는 이 모두를 하나님의 계획으로 여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벹 무어와 그녀의 영웅

 

무어는 그녀의 책 '경건한 사람들이 불경건한 것을 할 때'의 '끊임없는 기도' 섹션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기도를 하나님 임재(앞)의 끊임없는 수련이라고 부른 로렌스 수사(카르멜회 신비가)의 용어를 챙겼다. 실은 지난 해 나의 넘버원 골이 하나님 임재(앞) 수련이었다."

   "크리스토님과의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 마음 없이 머리로만 가득찬 성경 지식은 끔찍히 위험하다. 마치 말썽 벌이기를 기다리는 요새와도 같다. 머리는 꽉 찼지만 혼은 여전히 불만 상태이다." 


이런 표현들은 관상영성을 노골적으로 시사해주며, 우리의 속이 불모지처럼 메말랐다고 한 리처스 포스터의 말, 그리고 교회가 "온전한 성숙"을 하려면 영성훈련('영적 형성' spiritual formation)이 필요하다고 한 맄 워런의 말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철학이나 신앙체제 이상의 것이 아니어서 능률적이려면 관상영성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 발상은 성령께서 이 필수적인 자극 없이는 휴면(休眠)처럼 비능률적이라는 암시와도 같다. 관상가(contemplative)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는 것을 그 분을 사랑하는 것과 구분한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그 분의 말씀 공부와 정상적인 기도만으로는 그 분을 사랑하거나 알 수 "없다"는 암시와도 같다.     


무어는 자기 책에서 현대 관상 선구자의 한 명인 (고)브레넌 매닝을 자주 즐겨 참고한다. 그는 매닝의 기여가 "우리 신자 세대에게 주어진 가히 비길 데 없는 선물"이라면서. 하지만 매닝은 관상학교 창설자 비애트리스 브루토를 극력 찬양하던 사람이다. 브루토는 각 인간 속에 계신다고 믿으며 '동양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는 책을 통해 불교나 힌두교 등 동양종교의 명상을 적극 소개한 바 있다. 


브루토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나는 하나의 이것'이라는 둥 '나는 그런 특성을 지닌다'는 따위의 술어가 없이 오직 '나는 있다/이다(I AM)'고 말하는 자아로서의 우리 자신을 깨달아왔다." 오직 무제한 존재로서의 절대적인 '나는 있다/이다'일 뿐이다.


매닝은 '압바의 자녀'(Abba's Child)에서 브루토를 '관상의식(觀想意識/contemplative consciousness)으로의 믿을 만한 가이드'라고 불렀다. 매닝은 이 '관상적 의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당신의 하느님과의 친밀 관계의 오묘한 맛을 간파하는 거룩한 낱말 또는 문구를 고르라. 예수, 압바, 평화, 하느님, 또는 '압바, 나는 님께 속해 있습니다' 등등... 당신의 입술을 움직임이 없이, 이 거룩한 낱마을 속으로, 천천히, 자주 되뇌라."


   "주의가 산만해질 때는 단순히 거룩한 낱말을 다시 들어라. 당신의 맘을 부드럽게 신성한 낱말로 되돌려라." 

   "하느님과의 거룩한 침묵으로 들어가라. 오직 침묵 속에서, 내적인 소음은 가라앉고 사랑의 음성이 들릴 것이다." 


여기서 '사랑의 음성'이란, 누구나 관상침묵 속으로 들어갈 때 듣는 음성이란다. 무어는 매닝을 상찬하다 못해 그의 책 '누더기 복음(Ragamuffin Gospel)'을 "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한 권"이라면서 인용했다. 그러나 매닝의 진짜 영적 소재를 밝혀주는 책이기도 하다. 매닝은 자신의 '누더기 복음'의 뒷 표지에서 카톨맄 사제이자 신비가인 버질 페닝턴을 참조하면서, 페닝턴의 기도 방법이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깊은 관계로 이끌어주는 기도의 한 방식"을 제공해 줄 것이라고 추천한다. 그런데 페닝턴의 그 기도방식이라는 바로 동양종교에서 도출한 방식이다. 

페닝턴은 자신의 책, '중심에서 은혜 찾기'에다 이렇게 썼다: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오랜 동양의 지혜의 열매를 찾아야 하며, 크리스토님을 위하여 그것을 "거머쥐어야" 한다. 사실, 우리 사목자들은 이 동양의 (명상)테크닉을 되도록 많이 익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자신의 기도생활을 진지하게 하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요가, 선(禪), TM(초월명상)과 기타 비슷한 관행들의 큰 도움을 받아왔다. 


매닝은 '누더기 복음'에서 (심리학자) 카를 융, 심령술사 겸 관상 신비가인 앤터니 드멜로, (예수님의 동정녀탄생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는) 마커스 볽, 몰턴 켈지, 제럴드 메이, 헨리 나우웬, (대속을 부정하는) 앨런 조운즈, (더 메시지 '성경' 번안자인) 유진 피터슨, 여신숭배자인 수 몽크 키드 등을 인용했다. 이들 대다수는 만유내재신론자들이다. 분별 있는 성경교사라면 결코 아무도, 직접이든 간접이든 자기 학생들을 그들에게 이끌지 않으리라! 그런데도 벹 무어의 수많은 추종자들은 그녀가 열나게 추천해대는 브레넌 매닝과 그의 누더기 복음을 소개 받아 왔던가!?


무어가 매닝의 책을 '놀랍다'며 이 세대 신도들에 대한 그의 기여를 "비길 데 없는 선물"이라고 한 것을 보니, 벹 무어는 매닝의 영성에 대단한 영향을 받았다는 결론이다.  

 


영화 '잠잠하라' 


지난 2006년, 팍스홈엔터테인먼트(FHE)사가 '잠잠하라'는 영화를 제작/배포했다. 영화에 등장시키기 위해 그들이 접촉한 대상 하나가 프리실러 셔러였다. 셔러에 따르면 상황은 이렇다:


   그들은 '잠잠하라'라는 관상기도 관련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면서 내게 그 프로젴트에 부분적으로 동참해 주길 요청해 왔다. 그것은 하느님 앞에 침묵으로 보내는 시간의 중요성을 미국인들에게 알리는 데 도움을 주려고 고안됐다. 나는 즉각, 하느님이 내가 그 프로젴트의 일부가 되길 바라심을 알았다. 


이래서, 셔러는 잠잠하라 영화의 주요 역인 벹 무어와 함께 참여한 것이다. 프로듀서와 디렉터들은 그들이 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를 설명했다. 


   "남편과 나는 이 아름다운 초기 교회(즉 카톨맄 교회) 행습을 현대 교회 사람들에게 소개할 한 길을 모색하기 바랐다."


이 '초기 교회의 행습'은 바로 사막교부들의 그것을 가리킨다. 이 교부들은 이 행습을 타 종교에서 배웠다. '잠잠하라'에서 셔러는 자신이 "현현된 하느님의 임재"라고 부르는 이 체험을 심지어 어떤 '위대한 책'(즉 성경을 포함한)이라도 대신할 수 없다고 진술했다. '잠잠하라' DVD에 한 가지 주요 메시지가 있다면, 그것은 "만약 당신이 관상의 침묵으로 들어가는 이 기술을 배우지 못하면 하나님을 진짜로는 알 수 없다"는 주장이다. 


셔러는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잠잠하라' DVD 제작 동참에 대하여 관상기도를 "정상적이고도 정신없이 바삐 돌아가는 삶의 리듬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분명하게 하느님을" 볼 수 있다는 관상기도를 묘사하고 있다. 관상가들은 정상적인 '리듬' 속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실제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고, 따라서 그 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파수'를 바꿔야 한다고 가르친다.  


새들뱈교회의 사역자였고 관상기도의 옹호자인 랜스 위트의 설명을 들어보자:


   "고독의 목표는 나의 미친 듯한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 만큼도 아니며, 단지 아버지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주파수를 바꾸는 것이다." 리처드 포스터가 말했듯, "고독은 쳇바퀴 경주에서 이길 힘을 주지 않지만, 그것을 통째로 무시할 힘은 준다." 

관상기도가 '주파수 바꾸기'를 위해 필요한 이유는 생각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브레넌 매닝은 말한다: 


   믿음의 첫 걸음은 기도할 때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멈추는 것이다. 


다음으로, 관상기도 수행을 통해 생각들이 중단되고 나면 하나의 대체 상태에 이르는데, 거기서 마음이 하나의 중립상태로 들어가 마침내 하느님/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잠잠하라' DVD가 강조하는 침묵은 마음의 한 특수상태로 정상적인 기도와는 다르다. 이 DVD는 시청자들에게 이 침묵상태에 관하여 가르치려고 잡다한 종교신념과 배경을 가진 일단의 명상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 비디오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은 뉴에이지적인 이미저리(구상화) 가이드로부터 호흡기도, 초종교영성(interspirituality: '신비적인 마음'의 저자인 고 웨인 티즈데일이 착안해낸 용어)들까지 온갖 잡다한 것들을 증진하는 사람들이다. 

이 관상기도 정보물은 위험한 속임수 해설들을 모은 콜렉션들이며 '누구에게나 안전한 것은 아님'(NSFA)이라는 경고딱지가 붙어야 마땅하다. 


무어는 초종파적인 관상가인 리처드 포스터, 댈러스 윌러드 등의 가르침도 전혀 문제삼지 않는다. 무어의 사역체인 살아있는증거선교회(LPM)는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시청자가 '잠잠하라' 비디오를 일단 보게 되면, 그것의 진리 표현에 아무 문제가 없음에 동의할 것으로 믿는다." 


과연 그럴까? 

무어는 이 비디오에서 이렇게 진술한다: 

   "우리가 그분 앞에서 잠잠하지 않으면 그 분이 하느님이심을 우리 뼈속 골수 깊이까지는 결코 참으로 알지 못하게 된다. 반드시 잠잠함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잠잠함" 없이는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참으로 알 수 없다고 할 때, 무어는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말하지 않고 (관상가들이 애써 시도하는) 그 마음의 침잠 상태로서, 이 마음의 잠잠함을 수행하지 않고는 주님과의 관계가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벹 무어에 따르면, 마땅히 알아야 할 방식대로 주님을 알 수도 없단다. 



벹 무어와 천주교


관상 신비가들의 신앙과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이 잡다한 초종교영성과 만유내재신론적 견해를 흡입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헨리 나웬과 브레넌 매닝이 그렇다. 지지자들은 또한 으레 천주교와 밀접한 관게를 나누기 시작하게 된다. 이것은 신비적 기도 관행이 천주교 수도원(예: 토머스 머튼, 버질 페닝턴, 토머스 키팅)에서 나온 것을 봐서도 알 만하다. 대표적 사례로 2014년, 벹 무어가 수많은 청중 앞에서 자신이 하느님께 받았다고 주장하는 한 '비전'을 나눈 바 있다. 이 비전을 설명하려고 무어는 상당수의 여성들을 무대 위에 초청해 다양한 교파 그룹별로 구분했는데, 그중 한 그룹은 천주교 여성들이었다. 무어는 서로 다른 이 그룹 공동체가 "예수님이 보신 대로의 교회"의 모습이라고 주장했다. 


벹 무어의 사역체에 관여해온 사람들은 TV 크리스천 호스트인 제임즈 로비슨(라이프아웉리취인터내셔널=LOI 대표)이다. 무어는 로비슨의 정기적으로 출연, 서로 잘 어울려 왔다. 2014년 5월, 로비슨은 이렇게 썼다:


   "나는 크리스토를 알고 '크리스천'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연합을 중요시한다. . .나는 신교와 구교 공동체에 크리스토께 진정으로 헌신한 사람들의 마음들로부터 중요한 영적 각성이 시작되고 있다고 믿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천주교도들뿐 아니라 신교도들로 알려진 사람들에게도 하나의 기도의 응답일 수 있지 않을까?"


무어가 천주교를 크리스토의 몸의 합법적인 한 교파로 본 것은 그녀가 로비슨의 견해와 같음을 입증한다. 분명히 그들 둘은 천주교를 가치있는 교파로 보고 있다. 



프리실러 셔러: 관상 기원의 이상한 관행


셔러는 자신의 책, '하느님 음성 분별하기: 하느님이 말씀하실 때를 구분하는 방법'에서 "내가 한 구절을 묵상할 때, 나는 내 이름이나 다른 대명사를 거기 대입해 보다 더 개인적으로 만든다. 어느 성경이야기를 읽거나 묵상할 때면 내가 주인공이 되어 단순히 남의 하느님 체험이 아니라 바로 내 것이 되게 한다. 나는, 내가 관상을 한 결과로 어떤 것을 행하기를 하느님이 바라실까 자주 자문하곤 한다." 


그래서 모쉐가 아닌 프리실라와, 불타는 덤불나무가 된다는 것인가(참고: 출 3'2-4)? 

엘리자벹이 아닌 프리실러가 요한의 어머니가 된다는?(루카 1'13)

하와가 아닌 프리실러가 아담의 아내?(창 2)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보존의 중요성에 관해 매우 명백하다. 그것을 바꾸거나 더하거나 빼선 안된다고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마다 순결하구나. 그 분은 그 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방패이시다. 그 분의 말씀에 더하지 말거라 너를 책망하실라. 네가 거짓말쟁이로 드러나리."(잠 30'5~6)


자신을 바이블 캐맄터로서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자신을 주입하는 이 이상한 개념을 셔러는 어디서 배웠을까? 관상교사인 잰 좐슨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프리실러 셔러의 말을 보자.


   "연전에 잰 좐슨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 . 여러 모로 고무적이었고 새 방황으로 전환케 해 주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의 인&아웉을 파악하고 방향모색을 하러 애 쓰는 젊은 시절, 잰은 나의 삶의 극중한 지혜를 개인 담화와 사역을 통해 알려 주었다. 


셔러는 자신의 책 '하나님의 음성'에서 가이드 명상 옹호자인 잰 좐슨을 인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셔러는 로렌스 수사, 댈러스 윌러드 등 관상가들을 인용했다. 좐슨의 웹사이트에서 이런 글을 발견한다. 


   "여러분은 자신이 크리스마스 스토리에 등장한다고 상상해 봤나요? 만약 자신이 제카리아(사가랴)나 엘리자벹(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 마리아 또는 요셒이었다면 어떻게 느껴질까요? 만약 천사나 목자, 박사중 한 명이었다면 또 어떨까요? 잰 좐슨의 이 대강절 가이드에서 님은 아기 크리스토님의 탄생을 둘러싼 다양한 사건들의 일부가 돼 보기를 초청합니다. 그 스토리의 인사이더로 한 동안 지내보시면서 '맛보고 아는' 기회가 되기를." 


위클리프나 틴데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순교한 것은 기껏 성경 이야기에 나오는 성인들이나 천사들 대신 자신이 그들의 옷과 신발 속에서 그들의 모습이 되어보는 '광대놀음'을 위한 것이었나? 그렇지 않다. 이런 관행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전혀 높여주지 않는다. 


잰 좐슨은 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관련 배경을 갖고 있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소위 '예수회'(Jesuits)의 창설자로, 루터 등 신교의 (종교)개혁에 반대되는 천주교 반개혁의 앞잡이였다. 오늘날까지 예수회는 잃어버린 형제들(곧 천주교 이탈자)을 도로 '어머니교회'로 되돌리는 작업에 앞장서 왔고 특히 관상기도의 실천자들이다. 이그나티우스 계열의 웹사이트에 실린 글을 보자.


   이그나티우스 영성은 성경 이야기와 동일한 것을 보게 한다. 우리의 상상은 폭풍의 호수 위 배 안의 예수님과 그 친구들에다 우리 자신을 대비시킬 수 있게 한다. 또는 마지막 만찬 테이블에 앉아 그곳 대화를 듣든지 참여할 수도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우리의 상상을 강압하거나 대본식 판박이를 하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면, 하느님이 뭔가를 보여주시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나의 기도 속에서 마리아/마르타 자매와 함께 하는 생생한 장면들을 떠올린다. 나는 나의 오라버니 라자로(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 데서 일으키려고 도착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친구들 가우네 한 명이었다. 우리는 라자로의 삶에 관하여 말하고 이제 얼마나 그리워하는지를 말했다. 하지만 그 다음으로 우리 친구 예수님이 오셔서 라자로를 되살리셨다. 우리 넷이 눈물과 포옹 속에 서로 기뻐하는 모습을 당신은 봤음직하다. 


이런 것을 우리가 읽을 때, 우리는 성경의 경고를 되새기지 않을 수가 없다: 

   "스스로 속지 마시오. 하나님은 조롱 당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기 마련입니다." (갈라티아서 6'7 사역)


한 비평가는 잰 좐슨의 이런 대강절/성탄절 스토리 명상 접근을 이렇게 묘사한다. 

   "좐슨은 독자들에게 소위 '참여적 명상'이라고 하는 신(新)이그나티우스적 접근을 통해 스토리에 진입하도록 초청한다." 

 

프리실러 셔러가 잰 좐슨에게 여러 모로 영향 받았다는 데는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NSFA(누구에게나 안전하지 않다)


관상교사들은 신자들에게 예컨대 옴(Ommm)과 같은 동양적 만트라 반복에 집중하도록 조언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예수'나 '아바 아버지' 또는 성구 하나를 갖고 그렇게 하게 만든다. 관상기도가 이런 식으로 기독교적인 체 하지만, 문제의 침묵으로 들어가는 도입구 구실을 한다. 여기엔 흔히 렉치오 디비나라고 부르는 과정이 도입된다. 즉 성경이나 기타 책의 낱말이나 문구를 천천히 되뇜으로써 개인의 생각이 아닌 관상적 침묵에 초점을 두도록 돕는다. 


이 관상기도의 침묵은 거짓 비전, 거짓 '크리스토'의 음성과 기타 초자연적/비학적인 체험을 위한 비옥한 터전이다. 변증가/검증가인 레이 영엔은 관상기도를 통해 수행자는 친숙령들과 접촉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사실 관상기도 속 침묵은 성령님의 사역을 대신하려는 위험한 대체물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벹 무어와 프리실러 셔러를 예찬하고들 있다. 또한 둘 다 오컬트에 바탕을 둔 뉴에이지 스타일의 신비기도운동에 얽혀있다는 사실은 기이하게 보인다. 가장 널리 읽히는 기독교 매거진에서도 무어를 관상옹호자로 규정해 놓고 있다. 


수년 전 관상기도 옹호자들이 관상기도와 동양/뉴에이지 명상 사이의 커넥션을 발견하고 경계심을 갖는 크리스천들에게 소위 답변이란 것을 들고 나왔다. 뉴에이지와 동양종교는 마음 비우기에 애를 쓰지만, 크리스천 관상가들은 하느님으로 마음을 채우기를 구한다는 것. 그러나 의도가 달라 보여도 방법이 같고 결과도 똑 같다. 사람은 선의를 갖고도 동시에 완전히 속을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