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별과 검증/관상영성

'이 책을 먹으라'? 나의 생각(어부)

 

책을 추천한 강준민/김영봉 목사, 최승락 교수, 싵저 박사 등이 모두 관상영성가들이다. 

 

 


'이 책을 먹으라'에 대한 생각
-TLT 애독자, 어부님의 강평

 

 


평자 머릿글

 

유진 피터슨의 책, '이 책을 먹으라'(양혜원 옮김,  IVP,  2008년)는 은유로 풀이된 자신 나름의 성경인 '메시지'(The Message)를 읽어야 할(?) 당위성 같은 것을 주창하면서, 그 방법론을 제시하는 책이 아닌가 합니다.
아래에 인용하는 부분적인 문구들은 책을 직접 읽어서가 아니라 웹 상에서 찾은 것입니다. 책의 일부 문장들만 보고 쓴 것이라 단편적이어서 어떨지는 모르지만, 전체를 본다 하더라도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을 듯 싶네요.
우선 이 책이 초판 후 7쇄까지 나온 점을 보아 상당히 인기 높은(?) 책의 하나인 듯합니다. 그러나 진보적 중도주의자인 피터슨과 그의 '성경'이 그렇듯, 이 책도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이하에 저의 생각은 • 표로 표시합니다. [ 캪님의 도움도 일부 받았습니다. ] 


 

 

1. 험난한 영적 독서 훈련

 

"나는 그들이 성경을 주먹 세례를 날리는 책, 얼음을 쪼개는 도끼로 보게 하고 싶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전략은 주로 목청을 높이는 것이었고 그러한 은유가 가진 폭력성을 거의 눈치 채지 못했다. ... 강제로 먹이는 것은 영적 독서에 내재하는 독특한 성질을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31)

• 역자가 원문에서 어떻게 번역했는지는 모르나, 교회의 거룩한 의식의 하나인 세례(침례)를 갖고 '주먹 세례', '오물 세례' 등 세속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적어도 크리스천으로선 삼가야 옳다. 비록 은유적이라도 그렇다. 성경이 '주먹 세례를 날리는 책'이라니! 애당초 진보주의자가 아니면 쓰기 어려운, 자못 폭력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성경 묵상 아닌 '영적 독서'는 관상 용어이다. 저자는 관상가(觀想家, a contemplative)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말씀 묵상은 송이꿀처럼 달디단데, 왜 '험난한' 영적 독서 훈련이어야 하는가? 이런 표현은 관상의 선구자인 동시에 금욕주의자들이었던 안토니 등 광야교부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되리라 본다. 그들은 성욕을 비롯한 육욕을 이기려는 채찍 같은 것으로 거의 자해하다시피 자신을 '훈련'했다. 그러나 성경적인 근거는 없다. 사도들은 그렇게 육욕을 이기지 않았다.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했다.



2. 성경을 먹는 거룩한 공동체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 접촉하기 위해서 황홀경의 환영에 빠지는 것을 거부했다. 고양된 감정적 상태는 아주 매력적이며 특히 청소년들에게 더욱 그렇다. 그러한 감정에는 정말로 직접 접촉하는 듯한 짜릿함이 있다. 너무 진짜 같고, 너무 생생한 느낌인 것이다. '열광주의'라는 명칭이 붙은 이 길은 많은 사람들을 유혹해서 정도를 벗어난 자기 만족과 중독의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었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 한편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신적인 잠재력을 일깨우고 전시하기 위해서 도덕적 영웅주의라는 헤라클레스의 임무를 떠맡는 것도 거부한다. ... 우리는 또한 산속 동굴로 들어가서 자신의 모든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다 비워 실재에 대한 직접적 접근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모든 것을 없애 버리는 것도 거부한다. 그러한 행위에는 무언가 아주 단순하고, 순결하고, 정돈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오늘날 가장 선호되는 '텍스트'는 최고의 권위자인 '자아'인 것 같다." (pp.40-41)

• 하나님과 접촉? 신약적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은 거듭남으로 시작되며, 그후로는 성령님이 내주(內住)하시게 되어 하나님과 따로 '접촉'할 필요가 없다. 성경을 바로 읽는데 왜 '황홀경의 환영'에 빠지는가? 온전히 근신하게 만들어주는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체험을 주지 않는다. 반면 관상을 비롯한 영성훈련 등은 황홀경에 빠질 우려가 있다(참고 링크 >   >   > )

• 여기서 유의할 것이 있다. 관상가들은 소위 '종식론'/'중단론'(cessationism) 주장처럼 오늘날에 있는 성경대로의 성령체험을 대체로 부정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을 다녀온 황홀한 체험은 분명 성령의 권능과 은사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만 베풀어진 독특한 계시 체험이었다. 오늘날 신사도운동가들이 누구나 흔히 주장하는 '입신'과는 성격이 다르다.  
위 부분에서는, 자신이 관상가인 저자로서, 관상의 위험과 유혹을 애매모호하게 흐린 위선이 엿보인다.


"나는 삶의 권위로서 성경보다는 개인의 체험을 받아들이는 관례가 만연한 현실에 반대하고자 한다. ... 나는 성경을 다시 중심부로 이끌어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깊이 있게 하는 텍스트로 세우고자 한다. 나는 권위있는 성경이 권위있는 자아로 대치된 현실에 대항하고 그것을 폭로하여 개인의 체험을 성경의 권위 아래에 두고자 한다. 나는 성경을 우리가 따라 살아야 할 텍스트로 우리 앞에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영성 행세를 하고 있는 종교심리학, 자아 개발, 신비적 실험, 실속 없는 경건의 모양 등과는 대조적으로 굳건하게 서 있는 이 텍스트를 제시하고자 한다." (p.42)

• 성경이 모든 삶의 권위인 것은 맞다. 그러나 관상가로서 은유적으로 해석한 성경(곧 저자의 '메시지' 같은 유)이 삶의 권위라는 데는 금방 의문이 간다. 지금 저자는 개인 체험을 비평하지만, 관상이나 영성훈련은 개인적 체험이 아니고 단체 체험이던가? 비록 단체가 함께 한다 하더라도 관상이 추구하는 (성경적인 성령 내주가 아닌) 그들 나름의 '내면의 신' 역시 개인체험이다. 그런 점에서도 위선이다. 또 성경적인 거듭남과 성령침례(성령세례), 성령은사 등 역시 성경이 말해 주는 개인체험이다. 저자는 이런 것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도매금으로 부정하는 인상이다.

• '중심부'라는 용어는, 신적 잠재력을 계발시켜 준다는 관상의 중심부를 말하는 것인지? 

• 개인의 체험을 성경의 권위 아래에 두고자 한다? 개인체험이든 어떤 체험이든 모든 체험을 성경의 권위 아래 두는 것은 마땅하다. 문제는 어떤 성경이냐는 것이다. 과연 저자 개인의 해석적 성경인 메시지도 그런 권위를 충분히 갖추고 있을지 의문스럽다. 또 그래서, 관상 체험은 빠질 수 없는 것이고, '메시지' 성경을 우산 삼아 관상기도, 렉치오(렉시오/렉티오)디비나로부터 오는 체험을 정당화 시키려는 의도인지?
유진 피터슨 개인의 성경과 다름없는 '더 메시지' 같은 성경을 우리가 따라 살아야 할 텍스트로 제시'한다면 참 위험한 노릇이다!
"영성 행세를 하고 있는 종교심리학, 자아 개발, 신비적 실험, 실속 없는 경건의 모양 등과는 대조적으로 굳건하게 서 있는 이 텍스트를 제시하고자 한다.": 관상 자체가 종교심리적인 것이며, 자아개발이나 신비실험, 실속 없는 경건의 모양과 모두 관련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재차 위선적이다.
• 저자는 또 초반에 이미 결론을 내고서 글을 시작하는 느낌이다.



3. 텍스트로서의 성경 :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것 배우기

 

"언어의 본질은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형성하는 것이다. 언어는 최선의 상태에서 인격적이 되고 계시의 특성을 띤다. 그리고 계시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형성한다. (p.52) ... 우리는 성경을 계시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길을 계시하셨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알려 주시기보다 자기 자신을 보여주신 것이다. ... 이것은 인격적으로 전달된 계시인 것이다. 이 계시는 우리를 어떤 일에 참여시키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사는 것의 의미를 인격 대 인격으로 알려 준다." (p.53) 

"언어의 본질은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형성하는 것이다. 언어는 최선의 상태에서 인격적이 되고 계시의 특성을 띤다. 그리고 계시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형성한다.": 상당히 일방적인 전제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언어 자체가 정보를 형성한다기보다 정보의 그릇 내지 전달도구가 아닐까. 계시적 정보는 절대자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언어를 통해 전달된 것이다. 언어가 최선 상태여도 그 자체가 '인격적'이 될 수가 없다. 인격자에 의해 인격적으로 표현될 순 있어도. 언어 자체는 계시의 특성을 띠지 않는다. 위험한 발상이다. 마치 저자의 해석언어가 계시라는 소리 같이 들린다. 계시는 형성하기보다 반응에 따라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길을 계시하셨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알려 주시기보다 자기 자신을 보여주신 것이다." : 어폐가 있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만, 당신의 길만 계시하셨기보다 우리의 길까지 계시하셨다. 또 무엇인가 알려주셨다!
 
"이것은 인격적으로 전달된 계시인 것이다." : 역시 어폐가 있다. 신격적인 하나님이시지만, 성령을 통하여 권능적으로 전달하신 계시이기도 하다.

 

"이 계시는 우리를 어떤 일에 참여시키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사는 것의 의미를 인격 대 인격으로 알려 준다."참여시키신다기보다 본래 죄인들이었던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고 신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가르쳐주셨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지만 죄인으로서 그 형상의 상당량을 잃었던 우리는 죄인으로서든 의인으로서든, 하나님과 '인격 대 인격'의 대등한 입장일 수가 없다. 다만 거듭난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우리를 신격 대 인격으로 대해주신다. 그 분은 절대자이시고 우리는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4-5세기가 되자 교회에서 뛰어난 지성을 가진 이들이, 성경을 읽는 일과 하나님이 어떻게 인격적이고 독창적으로 자신의 주권을 우리 가운데 행사하셨는지를 이해하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삼위일체 개념은 매우 천재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의 전 존재와 그분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행하시는 모든 일을 설명하고, 동시에 우리가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어디에서 왔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줄 만큼 충분히 크고 충분히 상세한 개념이다. (p.56) ...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시의 모든 부분, 모든 양상, 모든 형태는 인격적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분이시다." (p.57) 

• 지금 저자는 초기 교회 교인들도 탁월한 지성이나 인격을 지닌 영적인 사람이었던 사실을 잊고 있는 듯이, 4세기부터 시작하고 있다. 4세기는 아우구스티누스 등 카톨맄 신학자들도 나타나지만 흥미롭게도 안토니 등 첫 관상가들이 등장한 시기다.  초기 교인들은 뛰어난 지성을 지니지도, 성경을 읽는 일에 집중하지도 않았다는 말인가. '인격적'으로라는 말은 흔히 '몸소'/'친히'라는 뜻으로 번역돼야 한다. 하나님이 몸소 독창적으로 주권을 우리 가운데 행사하신지 이해하는 일이 구약 때도 신약 초기에도 없었다는 말일까. 4세기 이후 천주교 학자들에게 뭔가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려는 의도는 아닌지.

 

"그들이 만들어 낸 삼위일체 개념은 매우 천재적인 것으로서.." : 그 초기 (카톨맄)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란 용어를 만들어냈는지는 모르나, 개념은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성삼위일체 개념은 이미 성경 속에 존재한다(실로 수많은 관련 성구들이 있다!). 이미 존재하는 성경에서 도출한 것이 뭐가 그리 천재적인 것인가?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보다 신학자들에게 영예를 돌리는 듯한 인상이 노골적으로 든다.

 

• ".. 하나님의 전 존재와 그분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행하시는 모든 일을 설명하고, 동시에 우리가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어디에서 왔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줄 만큼 충분히 크고 충분히 상세한 개념이다." (p.56): 

카톨릭 신학자들의 삼위일체 개념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 이 모두를 우리에게 해 주고 있다. 삼위일체 개념이 하나님의 과거/현재/미래 행적을 다 설명해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나님의 현재와 미래 행적은 성경과 성령께서 알려준다. 우리 모두가 어디(삼위일체?) 속에 포함돼 있다는 것인가?  우리가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어디에서 왔든..? 안 될 말이다. 죄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지 않는 이상 성경이 말하는 신가족(God family)의 어디에도 포함될 수가 없다.


"성경을 가지고 삼위일체적인 생각과 기도를 하게 되면,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하신 포괄적이고 인격적인 방식대로 우리를 포괄적으로 형성하시는 과정에 굴복하는 태도가 계발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자신형성의 과정을 직접 관리 할 수도 있다. (p.64)

• 다소 모호한 표현이다. 우리의 삼위일체적 생각과 기도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영과 진리 곧 말씀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이끄신다. 성령님 자신이 곧 성부님과 성자님의 영이시다! 끝 문장은 그지없이 불분명하고 애매하다.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신적인 자아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적인 자아는 일종의 성삼위일체로 이해된다." (p.65) 

• 죄인은 자신을 책임질 수 없으며, 거듭난 후의 의인이라도 성령의 권능이 아니고선 자신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늘 부족하다. '신적 자아'라는 말은 매우 뉴에이지적이다. 우리는 다만 은혜와 의지를 통해 신의 성품에 참여하고 그 성품을 닮아갈 뿐이다(베드로후서 1:4-8).  우리의 신적 자아가 일종의 성삼위일체라니, 말도 안 된다. 다만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계시는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에 매달려 그 분을 전적으로 의존할 때, 비로소 성령 안에서 책임성 있는 인간이 돼 간다.


"이 새로운 삼위일체는 하나님이나 성경을 없애버리지 않는다. 다만 필요와 욕구와 느낌을 섬기는 자리에 놓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주권의 특전이다." (p.68)

• 새로운 삼위일체? 딴엔 기발하다고 느끼며 꾸며낸 저자 나름의 개념이고, 자칫 가히 이단적인 주장이다. 성경은 그런 주장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속에서 성삼위를 대리하시는 성령께서 순종하는 우리를 섬김의 자리로 이끌어주신다. 어떤 주권 말인가? 주권주의적 주권? (참고로, 주권주의는 관상영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눈에 띄는 자리에 성경을 꽂아 놓는 것으로 성경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면서 동시에 자아를 삶의 권위있는 텍스트로 삼는 것의 위험은 엄청나게 크면서 동시에 은밀하게 진행된다." (p.69)

• 성경을 꽂아놓고 존경하든, 빼어 읽든, 은밀하게든, 드러나게 시끄럽게든, 인간 스스로 권위자가 되는 일은 수시로 발생한다.   



4. 형식으로서의 성경 : 예수님의 방식 따르기

 

"성경은 기본적으로 거대하고 광대한 불규칙하게 뻗어 있는 내러티브다.(p.78) 

• 무슨 도표라도 보고 하는 말인지? 무엇이 불규칙하다는 것인가.. 하나님과 그 분의 행적엔 우리가 알듯 말듯 잘 모르는 규칙적인 부분이 있다.

 

"이야기는 단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여를 요구한다. 정직한 이야기는 우리의 자유를 존중한다. 그러한 이야기는 우리를 조작하지도 않고, 강제하지도 않으며, 인생에 대한 주의력을 흐트리지도 않는다. 정직한 이야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는 넓은 세상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p.79)

• 성경이 내러티브 적 성격을 갖고는 있으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참여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긍정과 순종을 요구하는 계시요 성령님의 신탁이다. 구원과 복은 '넓은 세상'에 있지 않다! 오직 하늘로부터 왔고 궁극적으로 하늘에 속해 있는 것이다.


"성경을 텍스트로 사용하는 영성신학은 우리에게 도덕적 규칙을 제시해 주면서 "여기에 맞게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혹은 교리 체계를 제시하면서 "이렇게 생각하면 잘 살 것이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성경적인 방식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야기 안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 안으로 들어와 살라. 하나님이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이 세상 속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인간이 되어 가고 인간으로 성숙한다는 것인 것이다". (p.84) 

• 자기 나름 성경의 내러티브만 중시하는 저자의 '영성신학'의 맹점이 엿뵈는 대목이다. 성경은 내러티브성만 강조하진 않는다. 다양한 도덕적 규칙도 제시하며, 어떤 의미에서 내적인 교리적 체계도 보여준다(예: 히브리서 6:1,2).  성경이 제시하는 수많은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면서 "여기 맞게 살라"고,  "이렇게 하면 잘 될 것이다" 해 주지 않는다면, 그건 영성도 신학도 아니다! 저자 스스로가 그런 영성신학이 헛것임을 자증하고 있는 셈이다. 성경의 내러티브나 내러티브 성이 성경의 교훈을 희생시키진 않는다. 성경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살라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의 핵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살라고 초청한다. 내 속에 그 분을 모셔들이면 우리가 그 분 속에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인간이 될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참 사람, 참 의인이 되어간다!

 

"만약 기독교의 성경을 단지 계몽을 위한 또 하나의 도구나 권력이 되는 지식을 얻는 길로서만 다룬다면 신성모독을 범하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사유화해서 그것을 흔히 '영감'이라고 습관처럼 부르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사용할 때에도 우리는 형식을 모호하게 만든다. 인격적인 것은 사적인 것과는 다르다. 사적인 것은 소유하고 격리시키며, 개인적으로 통제하거나 사용하기 위해서 공동의 선으로부터 분리된다. 그러므로 사유화는 훔치는 행위다. 성경을 사유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공동의 화폐를 횡령하는 것이다. 계시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끄집어내며, 우리가 맹렬히 지키는 개인성으로부터 우리르 끄집어내어서 책임과 공동체와 구원의 세계, 하나님의 주권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p.88)              

                   자신의 '메시지'를 든 유진 피터슨 

• 점차 더 진보화해 가는 저자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성경이 깨우침을 위한 주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인가? 지식을 얻는 길이 아니라는 건가? 

 

• "우리가 성경을 사유화해서 그것을 흔히 '영감'이라고 습관처럼 부르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사용할 때에도 우리는 형식을 모호하게 만든다."는 저자의 이 문장 자체가 우리를 모호하게 한다! 우리가 성경에서 매일 또는 매 순간을 위한 영감을 얻지 않고 어디서 얻을 것인가? 저는 어디서 영감을 얻는가? 관상에서? 자기 자신 속의 신의식? 영감은 딴 데서 얻고 정작 성경의 영감은 무시하는가?
성경 말씀을 내 것으로 삼지[사유화!]하지 않고 어떻게 성경 기자들의 말을 실감할 수 있는가? "내 길, 내 발 위의 등불"이 아닌가? 성경의 감동과 영감을 남의 것으로만 여긴다면 불행이다.

 

"인격적인 것은 사적인 것과는 다르다. 사적인 것은 소유하고 격리시키며, 개인적으로 통제하거나 사용하기 위해서 공동의 선으로부터 분리된다. 그러므로 사유화는 훔치는 행위다. 성경을 사유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공동의 화폐를 횡령하는 것이다. 계시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끄집어내며, 우리가 맹렬히 지키는 개인성으로부터 우리를 끄집어내어서 책임과 공동체와 구원의 세계, 하나님의 주권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 이 역시 이해되지 않는 저자 나름의 주장이요 논리다. 성경을 내 것으로 삼지 않고 언제나 우리의 것, 공동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인가? 저자는 사유화와 내 것으로 삼기를 혼동하고 있다. 

중세 카톨릭교야말로 사제계급이 성경을 사유화하다시피 한 시대였다. 대중은 성경의 깊은 것을 몰라도 된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러고도 오래도록 어려운 라틴어로 읊어오지 않는가? 대중은 무지하게 놔두고 사제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민으로 둘 셈인지.
성경 사유화 절대 반대 입장 같은 것을 열나게 읊고 있으니 자칫 저자의 '메시지'를 개인 개인끼리만 사지 말고, 단체로 더 많이 사서 읽으라는 소리 같이 들리기도 한다.


"사실 관계가 가깝고 친밀할수록 우리는 정확하게 듣기 위해서, 철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적절하게 대답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저자의 '메시지'는 정말 자신이 성령님과의 관계를 가깝고 친밀하게 하여, 정확하게 듣고, 철저히 이해하고, 적절히 옮기느라 신중을 기한 성경인가? 혹 반대는 아닌가?


"이 말은 우리가 더 '영적'으로 될수록, 더 신중하게 주해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더 성숙해질수록 우리는 더 엄격하게 주해를 해야 한다."

• 오히려 저자 자신에게 먼저 요구되는 사안이 아닐까. 안 그렇다면 왜 뜻있고 생각 깊은 비평가들이 '메시지'를 그렇게 구구히 그리고 누누히 비평하는가? 왜 그리도 문제점들이 많은가? 저자가 관상가이고 이상(異常)영성인이기 때문은 아닌지.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의 말씀은 그 텍스트를 오염시키는 개인적 기호와 문화적 가정, 죄의 왜곡, 무식한 추측으로 계속해서 덧칠되고 있다." (p.99)

• 저자의 '메시지'야 말로 텍스트를 오염시킨 개인적 기호를 여러 모로 엿보여준다! 생각 있는 비평가들의 지적이다. 문화적 가정, 죄의 왜곡, 무식한 추측도 없기를 바라지만 글쎄다. 

 

" ... 그렇다. 겸손이다. 우리가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할수록 우리는 홀로 나서서 자신의 놀라운 지식을 가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운영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p.106)

• 저자에게 애당초 필요했던 덕목이 이것 아닌가? '메시지'는 개인의 오만에 찬 번역성경이다. ‘겸손’을 내세움으로써 본인의 주장에 권위를 부여하여 관철시키고자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기존의 성경을 읽어온 이들은 '그 텍스트를 오염시키는 개인적 기호와 문화적 가정, 죄의 왜곡, 무식한 추측으로 계속해서 덧칠하고 있으며 ...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할수록 홀로 나서서 자신의 놀라운 지식을 가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운영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의미인지? 결국 새롭게 쓴 '메시지성경'을 읽어야 할 당위성을 주장하고 싶은지?



5. 대본으로서의 성경 : 성령 안에서 우리의 역할 해내기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급박한 과제 중 하나는, 성경을 자기 주권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태도를 버리고, 그 성경을 철저히 살아내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단언함으로써 그러한 자기 주권성에 대항하는 것이다." (p.110) 

• 오늘날 '메시지'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직면한 가장 급박한 문제 하나는 성경을 자기 식으로 풀이한 저자의 자기주권적 목적이 정작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관상가인 자신의 사상적 제자들을 만드려는 건 아닌지. 

성경을 철저히는 둘째치고-누가 성경을 '철저히' 잘 살아낸다는 것인가? 피터슨이? 관상가들이? 교만한 표현이다-비교적이라도 잘 살아내기 앞서 필요한 것은 진리를 진리대로 전달한 바른 성경이다! 독특한 영성 원리를 따라 나름 원칙으로 나름 풀이하여 짜깁기한 자기식 성경이 아니라..


"영적 독서란 바로 참여의 독서를 의미했다. 그것은 지면에 기록된 모든 단어를, 내가 참여하고 있는 어떤 것을 확장하고 심화하고 교정하고 확인하기 위해 읽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p.128) 여기서 핵심은 순종, 즉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능동적 반응 속에서 사는 것이다. (p.129)

• 영적인 성경묵상은 바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 속에 잠기고 그대로 순종/실천하려는 것이다. 그러기에 순종은 단순히 그 말씀에 수긍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다. 또한 그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거기 준하여 성령께서 보여주시는 길에 호응하는 것이다. 


"성경에 성부, 성자, 성령으로 인격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성경을 읽지 않는 세상과 동떨어져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세상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모든 창조 세계와 역사를 하나님 앞에 가져오고, 우리의 몸과 인류의 모든 아름다움과 필요를 하나님 앞에 찬양과 중보로 내어 드리고,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의 강력한 이름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신 이 세상에 침투하고 섬기는 것이다." (p.135) 

• 저자는 성경이 말하는 바,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성별되어 있는 크리스천의 거룩한 이중적 위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거룩/성별의 뜻 자체가 세상에서 구별/구분되어 있음이다. 우리는 세상을 위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영혼들을 위해 할 일-전도-을 해야 한다. 나머지는 듣기 좋게 꾸며낸 수식적인 문장으로 들린다. 저자는 웬지 대속/부활/승천을 상대적으로 중시하지 않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뿐만인가?

 

"우리가 책을 먹고 이 텍스트를 내면화하는 거룩한 공동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p.138)

• 어떤 책 말인가? 다양한 영성 서적? 저자의 '메시지'? 저자의 메시지를 먹고 그 텍스트를 내면화하는 거룩한 공동체(어떤 공동체 말인가? 관상영성 공동체?) 해방되고 자유를 얻는가??



6. 독자여 주의하라

• 마침 말 잘 했다. 딴 독자들은 몰라도(?) 정말 티엘티 독자들은 유진 피터슨과 그의 '메시지'를 주의해야 한다!   


"누군가가 말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듣는 것이다. 누군가가 글을 쓸 때 우리가 하는 일은 읽는 것이다. 말이 먼저 온다. 글은 말에서 파생된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말 즉 하나님의 말씀의 힘은 온전히 다 느끼고자 한다면 그 말에 있는 구어의 성격을 회복해야 한다. (p.152)
'렉치오 디비나'의 임무는 잉크로 쓰였고, 이제는 피로 다시 쓰인 그 말을 사람들이 주의해서 듣게 하는 것이다. (p.154)

• 저자는 지금 자기 말을 잘 듣고 자기 글을 잘 읽어달라고 호소하는 듯하다. 그러나 독자는 실상 모든 관상가들과 영성가들의 말을 조심해서 삼가야 한다. 성경과는 사뭇 다른 얘기들을 하기 때문이다. [ 본 블로그의 다양한 관련 비평 참조 ]

• 천주교식 독서방식인 ‘렉치오 디비나'가 드디어 등장했다! 저자의 본론을 드러낸 것이다. 렉치오 디비나의 다양한 문제점을 여러 비평가들의 글을 참조하여 발견하길 바란다.



7.  주께서 나를 위해 귀를 파셨으니

• 주님이 내 귀를 팠다니 어디서 나온 표현인지..

 

"'렉치오 디비나'. 텍스트를 질문과 대답, 개념 정의와 교의로 탈인격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독서방식. (p.155) '렉치오' 읽기의 출발점은 ...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성경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인 은유를 고찰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p.160) 

• 이런 특유한 스타일로 하는 관상적 독서방식은 대체로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위험할 수 있다.


"은유라는 수단을 통해서 우리는 개별적인 사물 이상의 것을 보며, 모든 것을 다른 모든 것과의 역동적인 긴장과 관계 속에서 인식한다. 은유의 언어는 모든 단어의 상호 연결성을 표현한다." (p.165)
우리는 성경 속에 뒤죽박죽 엉켜있는 은유 속에서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정보 혹은 '교리'를 수집하는 학생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p.167)

• 직유든 은유든 직설이든 우리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묵상해야 옳다. 

성경의 어떤 은유들이 뒤죽박죽 엉켜 있다(무질서?)는 것인가? 뒤죽박죽 엉킨 은유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발견한다는 것인지.  


'메디타티오'. 묵상은 텍스트에 나오는 말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텍스트의 세계로 들어간다. (p.169) 묵상은 침입이 아니라 반추다. 계시 전체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우리의 이해력을 꿰뚫고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p.173) 우리는 텍스트와 공감하기 위해서 묵상한다. 우리는 비판적인 아웃사이더에서 수용적인 참여자가 되는 쪽으로 이동해 간다. 이 텍스트는 더 이상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전문성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장난스런 호기심을 가지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p.174)

• 저자가 무슨 고급스런 라틴어 용어나 온갖 화려한 수식어를 갖고 장난(?)을 치든, 성경묵상은 있는 그대로를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 곧 영적인 영감으로 묵상해 나가야 한다(벧후 1:19-21). 우리는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계시에는 오직 인사이더, 나머지 모든 정보에 대해선 아웃사이더로서 대해야 바람직하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슨 헛소리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라티오'. 언어는 본질적으로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화체다. 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계시의 문법, 하나님 말씀의 문법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기도는 편안하지만 비좁은 자아의 세계로부터 나와서 자기 부인의 세계, 드넓은 하나님의 세계로 찾아가는 길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자각하고 하나님 차원에 딱 들어맞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자아를 제거하는 행위다." (p.183)

 

• 저자는 난해하고 난삽한 용어를 쓰고 있지만, 성경에 따른 기도는 단순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교적 대화이며 간구이다. 가장 바람직한 이상적인 기도는 우리의 영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아뢰는 방언기도이다(고린도전서 14:2을 음미해 보라). 말로는 안 되는 기도를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아 탄원하는 것이다(로마서 8:26). 관상가들과 영성가들의 기도의 정의를 주의하라. 뉴에이지 방식과 사뭇 닮아 있다!  


"'콘템플라티오'. 렉치오 디비나의 마지막이자 그것을 완결짓는 요소는 관상이다. 관상은 성경의 계시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고, 허세 부리지 않으면서 그것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p.190) 관상은 읽은 바를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어떤 것도 낭비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저장해 두지 않고 삶에서 그것을 다 써 버리는 것이다. (p.191) 말은 이미 물리적이다. 그것은 말을 예수님의 육신으로 만든다는 의미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잉태되는 것이다. 그것은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가 잘 수용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p.195)

 

• 관상은 관상일 뿐, 성경적인 묵상이 아니다. 성경적인 묵상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음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계에 깊이 침투한 관상은 성령님의 역할을 중시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저자가 성령님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실감이 가는가?

 

이 부분에 대한 추가적인 생각들


• "성경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인 은유를 고찰하는 것에서 시작..": 상상의 나래를 펴라는 의미?

• "성경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출발부터 은유를 고찰하라고 하는 건 결국 '렉치오 디비나'로 가자는 의미인가?

• "은유의 언어는 모든 단어의 상호 연결성을 표현.." : 상상의 나래를 펴라는 의미?

•  "성경 속에 뒤죽박죽 엉켜있는 은유 속에서 자신을 발견" :  무슨의미인지? 뭐가 뒤죽박죽 엉킨 은유인지? 성경에 직유가 많은지 은유가 많은지? 결국 상상하라? 직유는 직유대로 해석하고 은유는 성경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 맞게 해석하는 것이 아닌지?

• "이 텍스트는 더 이상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전문성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조명의 영감을 의존하여 보아야 하는 법이다.

• "어린아이의 장난스런 호기심을 가지고" :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장난치자는, 상상의 나래를 펴라는 의미?

• "우리가 하나님을 자각하고 하나님 차원에 딱 들어맞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자아를 제거하는 행위 : 자아를 제거하는 행위? 어디서 많이 본 표현 마음 비우기와 통하는 듯.

•'콘템플라티오'. 렉치오 디비나의 마지막이자 그것을 완결 짓는 요소는 관상이다. : 이제는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말은 이미 물리적이다. 그것은 말을 예수님의 육신으로 만든다는 의미다." :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천주교의 성체성사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대목이다.

•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잉태되는 것이다". : 소위 ‘그리스도 의식'과 관계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내 안에 잉태된 그리스도’는 ‘선물’이며 잘 수용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 그럼으로써 결국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신적인 자아’가 되는 것인지?
• 정리해 보면, 차원 높은 은유의 방법을 통해서 상상력을 펼친 뒤 관상의 세계에 들어가라. ‘살아가는 것’은 관상기도이다. 라는 의미인지?



9. 메시지

 

"언어의 신성함은 무게를 달거나 치수를 잴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능력, 신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영을 드러내는 능력, 즉 내적 실재를 드러내는 능력에 내재한다. 언어가 위선적인 말이나 진부한 말 혹은 허위의 말로 타락하게 되면 언어는 인간의 혹은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을 침해한다. 그럴 때 언어는 인간이든 신이든 그 실재를 그것보다 못한 비인격적인 무엇, 내가 조작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사물이나 이미지로 축소해 버린다. 상향의 모독은 언어가 추상적으로 부풀려지거나 레이스처럼 엮인 거미집처럼 비실체적인 것이 될 때 일어난다." (p.229) 

• 가벼운 사고이다. 저자의 이런 말 자체가 사뭇 추상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인간의 언어 자체는 신성하지 않다. 하물며 죄인의 언어이겠는가! 언어는 쉽게 영을 드러내지 못한다. 언어에도 성령님의 기름부음이 필요하다.


"성경을 읽고 성경에 반응하는 문제에서라면 하향 모독보다는 상향 모독의 위험이 훨씬 더 큰데, 그 이유는 단순히 상향 모독이 간파하기 더 여럽기 때문이다. 화가 나서 "빌어먹을 하나님!"(God damn it) 하고 내뱉는 말과 같은 공공연한 신성모독은, 예를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존귀하시고 높으시며, 거룩하고 비길 데 없는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읊조리는 아첨 떠는 경건보다 훨씬 더 이목을 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후자가 오히려 전자보다 더 심하게 언어를 모독할 수 있다." (p.230) 

• 어찌 보면 좀 유치한 비교이다. 생각 나름일 뿐이다. 하나님은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나는 듯한 교인들의 이중적인 말이나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말이나 악인들의 악담과 저주 욕지거리를 모두 함께 심판하신다.

 

"문자적인 것에 대한 선호는 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무분별한 선호라고 믿게 되었다. 부모로서의 경험에다가 목사로서의 경험이 더해져서, 나는 문자적인 것이 위험한 이유는 모든 언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모호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유념하게 되었다. 극단적 문자주의는 모든 단어를 고정된 부동의 위치에 강제로 끼워 맞출 것을 주장하며, 모든 문장에 구속복을 입힐 것을 주장한다." (p.283) 

• 저자의 '메시지'는 또 다른 나름의 문자주의적 산물이다. 문자주의를 혐오하여 자기식 풀이를 절대화하여 나온 반사적 문자주의말이다. '구속복'이 뭔가? 책 속의 앞의 다른 문장에서 설명됐는가? 성경엔 없는 말이다.

• 성경은 본질적인 모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 극단적 문자주의는 위험하지만, 극단적 은유주의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는 일에 협력하는 사람들이며, 이 텍스트를 읽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살아내는, 그 책을 먹는 사람들이며, 그 다음에는 이 성경을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에서 듣고 있는 그대로의 언어로 옮기는 사람들이다. (p.292)

• 더 메시지의 출판과 판매 보급과 그 실행을 돕는 사람들이라는 뜻인지? 



 

참고자료

 

유진 피터슨의 성경읽기 방식은 왜 위험한가?(정태홍목사)
유진 피터슨과 '더 메시지' (The Mess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