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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시편

자살하고 싶은가요?



독자는 삶이 고달픕니까? 때때로 아니면 늘 외롭습니까? 

자살 욕구가 일어납니까? 심지어 신자인데도 그렇습니까? 

자살은.. '막다른 골목'에서, 믿고 의지하고 기댈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던가요?

그렇다면, 이 글을 꼭 읽어 보세요. 조금만 참고 끝까지 읽으셔요!



어제 구약성경 찬양시편(시) 제 23 편을 묵상해 봤습니다. 우리가 자주 묵상하는 다뷔드(다윗)의 노래 말씀이지요. 

평소 늘 읊조리는 말씀이지만, 또 다시 읊으며 음미해 보았습니다. 



   예호봐(여호와/야웨)님은 나의 목자, 나 아무런 부족도 없으리!

   그 분은 나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네

   내 혼을 회복하시고, 그 분의 이름 때문에 날 (의의) 곧은 길로 이끄시네


   나 비록 캄캄한 죽음 골짜기로 걸어도 해악을 겁내지 않음은 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님의 지팡이와 님의 막대기-그것들이 나를 위로하고 편안하게 해 줍니다.  

   님은 내 원수들이 보는 데서 내 앞에 상을 차리십니다. 

   님은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바르시니 나의 잔이 가득찹니다. 


   참으로 선과 사랑이 내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를 테니

   내가 예호봐님의 집에서 살아가리, 영원히!  (사역)

 


흔히 구약 성경 내용을 옛 이야기, 옛 역사 정도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지요. 신약은 둘째 치고라도. 

율법이 포함되어 있고, 율법시대의 것이니까..라는 생각으로 말이죠.

그런 생각의 잘잘못을 가리기 전.. 이 시 23편을 읽어 보면, 한 구절 한 구절, 한 부분 한 부분이 여전히 현실적인 감각으로 되살아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오늘도 나의 양지기이시고, 내 삶의 주인이시자 인도자/지도자이십니다.

비유컨대, 나의 드높으신 이끔이/지킴이/도우미/돌보미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의 양인 이상 나는 아무런 부족함도 없습니다. 할렐루야! 


고대로부터 하나님은 그 분이 몸소 골라 빼어내신 이스라엘 백성을 양떼로, 당신/자신을 목자로 비유하시기를 즐기셨습니다. 성경의 숱한 부분들이 이 진리를 밝혀 줍니다. 

히브리 민족이 본디 유목민이기 때문이죠. 반면, 예컨대 미쯔라임(애귚트/애굽)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양 치기와 목자를 혐오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목자와 양떼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은 기꺼이 그 나라의 목자가 되어 주셨고, 늘 그들이 의지하는 목자이기를 바라셨습니다.  


노아의 아들 쉠(셈)의 후예인 히브리 민족은 족장시대로부터 카나안에 정착하기까지는 계속 수시로 움직이며 옮겨 다니는 삶이었습니다. 

히브리의 어원인 '에베르'라는 (옛 선조의) 이름 자체가 '건너오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족장시대란 주로, 히브리족 선조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짜크, 야콥 등 3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태동기를 가리킵니다. 

하란에 살던 고대 아람 족이자 동시대인들인, 아브라함의 친척들까지 이들은 주로 목축업을 하며 지냈습니다. 


유목이란, 일정한 주거지가 있거나 없거나 양들이 뜯을 꼴을 찾아 천막을 세웠다가 걷었다 하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삶이지요. 

지금도 중동의 베두인 족은 대표적인 유목민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당신이 부르신 택한 민족의 선조로서 부르셨고, 몸소 목자가 되어 양떼처럼 그들을 이끄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이스라엘만의,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크리스토님 안에서 독자인 님에게도 그 분은 목자가 되어 주시고 친히 이끔이/지키미/돌보미/도우미가 되어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진리입니다. 양들은 동물들 가운데도 근시안이고, 온순하고 어찌 보면 우둔하게 보입니다만, 그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잘 압니다. 

목자와 양떼의 관계는 서로를 너무나 잘 아는 관계입니다. 양떼가 아무리 많아도, 좋은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여 일일이 챙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의 이름으로 아시는 분입니다!  

즉 바로 지금 독자를 잘 알고 돌보고 도와 주시는 돌봄이-캐어기버(caregiver)님이십니다.  


잘 안 믿어진다고요? 

나는 독자가 그 돌봄이님을 테스트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할 대상은 아니지만, 성경 이곳저곳에 (믿음으로) 그 분을 시험해 보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기 때문이죠.


좋은 목자와 그 양떼 사이는 서로를 믿고 서로를 아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상호언약을 맺는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은 '초인'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여러 모로 부족하고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홀로 참 신이신 그 분은 온갖 신들과 우상들이 많던 칼데아-우르에서 아브라함을 이끌어내십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데라)만 해도,  본디 그 땅에서 우상제작자로 지내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사람됨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목자는, 온 양떼가, 그리고 양 하나 하나가 자신을 믿고 따라 주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성경은..예수님 역시 선한 목자, 참 목자, 그리고 양들의 문이라고 일러 줍니다. 

요한복음서 10'1~10을 보면, 그 분과 양떼의 관계가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어, 이 시편 23편과 절묘하게 조화됩니다. 

사실 구약의 예호봐 하나님을 땅에서 대리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예샤야후=이사야서 9'6). 

눈에 뵈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게 나타내신 분이죠. 그래서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말을 바꾸면, 예수님을 의지하는 이상 우리에겐 부족함이 없습니다. 목자가 양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기 때문입니다. 

안 믿어진다고요? 그 분을 믿어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자님의 음성과 말씀에 양이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다 양 자신의 믿음을 곁들여야 비로소 결과가 나타납니다. 

결과 - 부족함이 없는 삶 말입니다. 


여전히 내게 어떤 부족이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온전히 목자를 신뢰하고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면 과히 틀리지 않습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그 분과 그 분을 내가 믿고 따르는 관계는 온전해야 합니다.   

그 분은 이미 온전하시기 때문에, 그 분과의 언약 속에서 나도 온전할 때 그 분의 약속들이 고스란히 내게 적용됩니다. 

그 온전함은 100%의 신뢰 곧 믿음을 요구합니다!


양 한 마리라도 그 분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자칫 절벽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을 믿고 따르면, 어둠의 골짜구니에서도 담대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자살욕은 벽에 부딪친 절대한계 상황, 낭떠러지 끝에 온 심경에서 일어납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데.. 어디 마음 기댈 곳이 전혀 없고, 부대낄 곳 하나 없는 눈앞이 캄캄한 지경입니다. 


그런데요, 이것은 바로 목자를 떠나고 잃어버린 양의 상황 그것입니다. 

절망 상태의 양에게는 바른 목자가 필요합니다. 삯꾼 목자, 거짓 목자 말고 참 목자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자신이 참 목자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며, 예수님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예샤야후 9'6). 



이 시를 쓴 다뷔드는 비록 훗날 이스라엘의 국왕이 되긴 했지만, 어릴 때 일곱 아들 가운데 막내로서 일찍이 부모의 마음에서 제껴진 존재였습니다. 

형들은 모두 잘 생기고 키가 커 건장했지만, 그는 체구도 비교적 작고 "예쁘장한" 막내였습니다.  


늘 잘 지내는 형들과 달리, 그는 어릴 적부터 혼자 멀리 들판에서 양을 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친 광야에서 다져진 용감한 목동이요 싸움에 능한 용사가 되어갔습니다. 

때로는 무서운 이리떼, 곰이나 사자 등이나 양 도둑 등이 양을 빼앗으려고 달려들면, 목숨 내 걸고 양떼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로운 들판에서 선조들과 성경에서 읽고 배우고 들은 그 하나님을 늘 믿고 그 분만을 의지했습니다. 

실로 다뷔드는 홀로서기로 일어서서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으로 왕위에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만약 다뷔드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보다 자살욕구가 일어날 만한 사람과 상황이었을지 모릅니다! 

막내로서 부모에게 귀여움을 받아 독차지하기보다, 되레 버림 받고 자주 형들에게 따돌림 받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형들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더 믿는 그를 "교만하게" 보기도 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오직 목자이신 하나님을 따르는 착한 양이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착한 양은 목자를 믿고 따르는 양입니다. 



아직 자살욕이 떠나지 않습니까?


지금 자신의 상황이 왜 그런지, 바로 목자를 잃은 양이기 때문이 아닌지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자살욕구를 내팽개치고 참 목자를 믿고 따르세요!

그 분을 따르면 몸소 목자가 되어 주시고, 캄캄한 죽음 골짝 같은 현 상황을 부족 없는 상황으로 돌려 주십니다.  



참 목자는 예수님-오직 그 분뿐입니다. 

다른 이는 없습니다. 

그 분만이 님의 욕구와 모든 것을 아시며..채워 주시며 고치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영원한 이끔이/돌보미/도우미가 되어 주십니다. 


그 분을 믿고 바로 따르면 결코 후회가 없을 터입니다. 


참으로 내가 사는 날동안 선과 사랑이 나를 따를 테니

내가 예호봐님의 집에 살리.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