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런 글 저런 글

절대표준과 비평정신

사진은 글 내용과 직접 연관이 없음

우리에겐 절대라는 표준과, 그에 따른 바르고 총명한 비평정신(critical mind)이 필요합니다.
표준 없이는 비평정신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비판에 불과합니다.

표준도 절대라야 합니다. 상대적 표준은 기초가 없는 집처럼 늘 흔들리므로 표준이라고 할 것도 없지요. 


비평정신이라면, 일부 독자들은 꼭 "비판을 하지 마라"는 말씀을 구호처럼 들고 나오지만, 성경은 그와 동시에 대상에 대한 판단과 검증을 요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이 critical mind가 없었다면, 교회는 오래 전 옛날에 이미 이단 물결에 휩쓸려 가버렸을 터입니다. 


둘러보면 오늘날의 사회에는 절대란 것이 없고, 거의 모두 상대적인 것들 뿐입니다. 절대를 함부로 내세우고 주장하다간 '이단아'로 몰리기가 쉽지요.

비근한 예로 현대에 와서 두드러진 동성애 현상을 들어 보죠. 과거엔 남녀 1대1의 전통적 결혼관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절대 가치가 세상 일각에서는 상대적으로 변모해 갑니다. 사회의 극소수에 불과한 사람들이 절대 기준을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또 남녀 구분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 절대적인 것이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커 가면서 '트랜스젠더'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자신의 성은 "잘못"돼 있다는 생각과 따라서 바꿔야 한다는 사람들의 성전환을 돕는 성형수술이라는 것도 매우 발달해 있습니다. 누구나 원하면 모종의 과정을 거쳐 모양만이라도 성을 바꿀 수 있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과거엔 상상도 못할 일들이죠. 이런 들의 집단인 LGBT 그룹이 오늘날 사회의 중요한 부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상대윤리가 지배하는 사회가 돼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같은 절대부재 현상은 일반 사회에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교계에도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도 타 종교와의 '공존'을 부르짖으며, 물 타기 식으로 기독교와의 선을 흐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방식이 아닌 이상한 기도 방법들이 교회 안에 존재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묵상이 아닌 이상한 명상들이 교계 안에서 판을 칩니다. 정당한 불이 아닌 '딴 향불'을 갖고 제단에 향을 올리려 드는, 현대판 나답과 아비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오컬트 요소와 기독교와의 접합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절대자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인 성경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기독교 안에 존재합니다. 삶의 절대 기준이 흔들리거나 아예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좋은 게 좋다'가 그들의 삶의 표준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반석 위에 잘 지어진 집은 비바람과 홍수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반면, 모래 위에 세운 집은 그렇지 못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반석이 아닌 모래-이 모래가 문제입니다. 반석은 절대표준과도 같은 말씀을 가리키지만, 모래는 상대주의의 상징입니다. 모래 위에 세운 집은 오래 못 갑니다. 금방 폭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단단하지 못하고 푸석한 모래 위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자신을 반석 또는 진리라고 하신 것은 그 분은 영원한 바위처럼 흔들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절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절대진리, 절대 가치관, 절대 잣대 등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상대화하려는 것이 세상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절대가 없다면 금방 쓰러지고, 무너지고 맙니다. 
절대 잣대가 없이는, 바른 비평이나 분별/검증도 불가능합니다.
잣대가 없이 무엇 갖고 판단을 하며 검증을 합니까?


영어 낱말인 배너, 곧 '깃발'이란 말은 스탠더드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히브리어의 '니쓰'에 해당하는데, 기둥이란 뜻도 있지요.
표준이란 뜻의 스탠더드는 잣대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광야시대 때 12 지족들은 군대처럼 각기 지족 별 깃발이 있어 깃발 아래 모이곤 했습니다. 깃발이 없다면, 자기네 지족을 찾지 못합니다. 자기네 깃발을 찾지 못하면 소속과 의식이 투철하지 못하고 불분명한 사람입니다. 

절대표준의 깃발이 없다면, 우왕좌왕하다가 적군에 당하고 맙니다.

깃발은 또 승리를 의미합니다. 세상의 어떤 이들은 깃발을 정복의 의미로 사용하곤 합니다. 텐징 노르가이는 필생의 목표이던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오르자 자국인 네팔의 깃발을 펼쳐 보였습니다.

모쉐는 예슈아가 이끄는 군대가 적인 아말렠 족과 싸우는 동안 팔을 들고 있다가 피곤해지자 팔을 내리게 되고, 팔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아말렠 족 앞에서 후퇴하곤 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아론과 후르가 곁에서 각각 모쉐의 양팔을 들자, 모쉐의 두 팔은 내려오지 않고 예슈아는 마침내 아말렠을 모두 무찔렀습니다.
이 전쟁이 끝나자, 모쉐는 제단을 쌓고 '예호봐 니씨'(예호봐님은 나의 깃발)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일한 절대신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깃발입니다.
예호봐님은 곧 우리가 바라볼 절대의 진리이며 절대 표준입니다.
예호봐님은 곧 영원한 성자(聖子)요 메시아이신 예수 크리스토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절대 표준을 갖지 못한 사람은 영원한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깃발과 같은 절대를 붙드는 데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를 잡은 사람은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팔 힘이 없다고 놓아선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흔들림 없는 절대 표준인 성경 말씀이 우리의 삶의 좌표, 판단의 잣대여야 합니다.
거듭난 크리스천으로서는 오직 성경만이 참되고 유일한 절대 잣대입니다.
구약의 인명들중 하나인 '예호샤팥'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재판관이라는 뜻입니다.
그 분의 지혜를 받은 슐로모는 일찍이 한 때나마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그 분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택할 때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바른 잣대라는 것입니다.

물론 절대 표준이 있다고 하여 맨날 성도에 대한 비판을 일삼아선 안 되겠지요.
그것은 사랑의 작업이 아닐 터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판단력에 의하여 바른 비평을 할 수 있게 돕는 것입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것이오."(마 7'16,20)


주 나의 반석이시니
나 거기 굳게 서리라
딴 곳은 모두 모래 땅

-에드워드 모트(목사)의 찬송시에서



'이런 글 저런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데니스 굳델의 르네상스  (0) 2018.08.27
기도는 어떻게 하나요?  (10) 2018.04.11
우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7) 2015.05.31
손님 치르는 교회들  (8) 2013.08.01
돼지코에 금고리  (13) 2013.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