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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묵상연구/사복음서

주님을 깨우라?



주님을 깨우라?



김삼


성경을 좀 이상하게 해석하는 설교가들이 늘고 있습니다. 

진실로 성령님의 영감과 도움을 받는 해석이기보다 나름의 '기발한' 해석들이라고 할 수 있는.. 

또 그런 해석으로 청중들의 공감을 자아내려는 생각으로 억지 아멘을 받아내곤 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성경의 저자이심을 잊거나 무시하는 해석들이기 십상입니다. 

이 글에서는, 그런 해석들을 '나름 해석'이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신약성경 마르코스(마가)복음서 4'35~42는 묘한 '나름 해석'들을 자주 보게 하는 본문의 하나입니다. 

그런 해석 하나가 주님을 (기도로) "깨워야 한다", 그 분을 "깨워 드리자"는 식의 해석입니다. 

제자들이 광풍 속에서 곤히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듯, 우리도 주님을 깨워야 한다는 주장이죠. 

이거, 맞는 말일까요? 제자들이 주무시는 주님을 깨웠으니, 우리도 주무시는 주님을 깨워드려야 하나요? 

알고 보면 이 말엔 묘한 모순과 안 되는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로, 그런 주장은 다음 시편 말씀에 모순됩니다: 


  "...너를 지키시는 분, 졸지 아니하시네.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네!"(시 121'3b,4 사역) 


주님은 곧 하나님이시고 지금 영적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늘 쉬지 않고 일(중보)하시는 하늘 대사제(대제사장)이시기에 한시라도 끄덕끄덕 졸거나 주무실 리가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새삼, 땅에 계셨을 때처럼 졸음이나 잠에서 깨어나실 이유가 있나요?

주님께서 피곤하셔서 뱃고물에서 베개 베고 주무신 것은 단지 땅에서 사역하실 때였습니다. 

인간으로 오셨으니까, 당연히 낮 동안의 과로한 사역 탓에 거의 늘 피곤하셨죠. 

그래서 천사들이 수종들기도 했고요.


그러나 주님이 지금은 하늘에 계십니다! 또한 우리 속에 계십니다, 성령님으로서. 

비록 하나님이시면서 하늘에서도 완전한 사람이시지만, 거기서는 졸거나 주무실 일이 없다는 것이죠. 

하늘에서도 노동 같은 사역 일로 "피곤해서" 쉬어야 하는 그런 곳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왜 우리가 지금 주님을 '깨워야' 합니까? 땅에 계신 것도 아닌데, 아직도 곤히 주무실 일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곤히 주무셔야 한다면-어떻게 하나님이실 수 있나요? "항상 기도해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하시는 성령님이 한 편으로는 "그동안 나는 잠 좀 잘 테니." 하십니까? 



성경에서, 이방 신이 잠을 잔다는 표현이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 사이에 큰 대결이 벌어지던 때, 엘리야가 상대측을 조롱하는 장면에서 그런 표현이 나오죠(왕들A서=열왕상 18'27). "큰 소리로 불러요! 그(바알)는 신이니까 묵상을 하고 있는 건지, 잠깐 밖에 나간 건지, 길을 걷고 있는 건지, 혹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했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시편 기자들도 하나님께 그런 표현을 한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시 44'23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정말 주무시고 계셔서가 아니라, 시인이 워낙 마음이 다급하고 답답하니까 하나님이 잠자코 계신 줄로 상상하면서 비유적인 표현을 그렇게 한 것일 뿐입니다. 

문자와 액면 그대로 해석할 대목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깨우다라는 표현을 기도를 가리키는 상징적 용어로 사용된다는 점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소 또는 급한 때에 드리는 기도를 잘 알아 듣지 못하실 만큼 주님이 현재 곤한 졸음에 빠져 계시거나 푹 주무시는 양 생각하면, 옳은 생각이 아니죠. 주님은 언제나 깨어 계십니다! 


하지만 그 당시 갈릴리에서는 주님이 분명 곤히 주무신 것, 맞습니다. 

또 사람들을 돌보시느라 낮 동안의 사역으로 인한 과로 때문에 때로는 푹 쉬셔야 했던 것, 맞습니다.  

그러나..주님이 하늘에 계신 지금, 우리의 기도를 듣기 앞서 평소 곤하게 주무시고 계시기에 우리가 그 분을 '깨워' 드려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 볼 물음은..제자들이 당시에 주님을 깨운 것이 과연 정상적인 기도와 같은 바른 믿음의 행동이었는가란 것입니다. 이것은 좀 민감한 문제이기도 하여, 우리가 본문을 잘 살펴보고, 잘 생각하고, 바로 해석해야 할 이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곤히 주무시다가 제자들이 마구 흔들어 깨우며 살려 달라고 울부짖을 때,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으셨으리라 저는 상상됩니다. 곤한 잠을 깨울 때 좋아하는 사람 봤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피곤하셨느냐 하면, 배가 광풍에 나뭇잎처럼 마구 흔들리고 산 같은 파도가 덮쳐와 배 속에 물이 가득 차도 여전히 코를 골며(?) 잠자고 계실 정도였으니까요. 


일부 설교가들은 이 때 주님이 정말 주무신 게 아니라, 실은 상황을 다 알고 계시면서도 이 위기상황에서 제자들이 어쩌나 보시려고, 그들의 믿음이 얼마만큼인지 달아 보시느라고 "주무신 척" 했다는 '허위수면설' 같은 것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시니까 다 아셨다는 발상에서지요. 


그러나 그런 발상은 또 다른 '나름 해석'으로서, 몇 가지 문제점을 더 낳습니다. 


우선, 주님이 당시 정말 깊이 잠들지 않아도 될 정도로 피곤하지 않아 실상 깨어계셨는데도, 짐짓 눈을 붙이고 계시면서 그보다 더한 위기상황 또는 '막장 상황'을 기다리셨다는 말이 됩니다. 

다음으로, 제자들이 그렇게 발악을 하다시피 바람과 바다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데도 주님은 여유를 부리시며 속으로 관망만 하셨다는 얘기가 됩니다. 

또한, 주님은 잠든 '척', 주무시는 '체' 하신 분으로 몰아가, 결국 주님을 이중적이고 진솔하시지 않은 분으로 오해하는 셈입니다. 제 생각엔 적어도, 신실하신 주님은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르게, 꾸미는 거짓 행동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아무튼, 이 때 제자들은 주님을 (아마도 흔들어) 깨우며, 소리를 높여 "라삐(선생님)!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돌보시지 않나요?"라고 원망과 항변을 합니다. 원문의 뜻은 "라삐, 우리가 빠져 죽어도 상관 없나요?"에 가깝습니다. 바꿔 말하면, "아니, 왜 우린 죽게 내버려 두고 혼자서만 쿨쿨 주무세요? 그렇게 모르는 척 하시긴가요?" 정도의 뜻입니다. 상당히 고도의 불만이 담긴 원성인 것이죠.



자, 여기서 잠시 제자들의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갑자기 불어닥친 광풍을 보자, 뭐 이곳 갈릴리에서 늘 당하는 것 중 하나이니까..하고 대수롭지도 않게(?) 생각하고, 자기 딴엔 이 바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경험, 그러니까 수십 년 갈릴리에서 배를 타고 고기잡이 해온 '경력어부'의 경험과 실력을 총동원하여, 바람과 파도 속에서 배를 다잡아 보려고 있는 힘껏 노를 저으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도 살리고 주무시는 주님을 지켜 드리려 애썼을 터입니다.   


그런데 이 광풍은 달랐습니다. 뭔가 달라도 달랐습니다. 아무리 기를 쓰고 애를 써 봐도 배를 저어갈 수 없이 산더미 같은 파도가 덮쳐오면서 배 안을 물로 채워버려,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기세였지요. 

그와 함께 제자들 마음 속에도 파도 못지 않은 높이의 두려움이 쓰나미처럼 밀려듭니다. 

어마어마한 광풍과 파도 앞에 그저 아무 도리 없이 물에 빠져 죽는 것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자기네 힘으로 자신들과 주님을 지켜보려는 노력이 이렇게 무참하고 헛일에 불과하다는 절망 속에서, 배 안을 채운 물 속을 이리 첨벙 저리 첨벙대고 허우적거리며, 마지막으로 뱃고물로 가서 주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공포와 좌절감에 가득찬 처참한 모습이었죠. 그들에겐 믿음이라곤 조금치도 남아 있지를 않았습니다. 

남은 것이라면 "저 양반은 왜 이 판국에 혼자서 단잠만 주무셔?! 우리가 이 지경인데."라는 원망의 눈초리 뿐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겐 진실로 겨자씨만한 믿음조차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주변이 온통 야단법석이면서 마구 질러대는 큰 고함소리에 번쩍 눈을 뜨신 주님은 그제야 잠에서 깨어나셔서 주변을 둘러 보십니다(39a). 그 정도로 고단하셨다는 얘기지요. 

그런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우선 거센 풍랑부터 잠재우셔야 했습니다. 전후상황이 확 바뀝니다: 본인은 깨셔야 했고, 주변은 잠재우셔야 했고.  


주님은 다짜고짜 "야, 니네들, 왜 나한데 그래?! 피곤한 내가 잠 좀 자면 안 되냐? 이깟 걸 갖고 남의 단잠을 깨워? 니네들이 직접 좀 해 봐! 믿음 어디 갔어, 믿음? 그걸로 해결해 봐. 바람과 파도를 때려잡으라고! 얘네들 정말 답답하네. 언제까지 저러고 싶을까. 쯔쯔쯔...아이 짜증나~" 하시지 않습니다.  


화를 내고 야단을 치시는 대신, 당장 제자들의 두려움과 곤경을 해소해 주십니다. 그만큼 제자들과 배 속의 상황이 급박했기 때문이죠. 우선 사람들부터 살려 놓고 봐야 하니까요. 

주님은 몸을 일으키시어, 바람과 바다를 차례로 꾸짖으십니다. 바람이 주된 동인(動因)이고 바다와 파도는 덩달아 난리였으니까요. 


  "어이 조용해! 잠잠하라고!" 


주님의 이 호통에 바람과 바다는 즉각 순종했습니다. 미친 듯 사납고 무섭게 날뛰던 바람소리와 파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잠자고, 아주 완전히 잦아져 버립니다. 평온하던 평시의 갈릴리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수직으로 치켜서서 잡아먹을 듯 달려들던 파도가 수평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 두렵고 컸던 문제를 간단히 호령 두 마디로 해결하신 주님은 이어서 이번엔 제자들을 향해 물으십니다:


  "왜들 겁 내나? 자네들은 아직도 믿음이 없는 건가?"

 

하지만 방금까지도 익사할 줄로만 알았던 제자들은 공포와 절망에 가득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기도 전, 또 주님의 말씀을 채 귀담아 듣기도 전, 이번엔 또 다른 놀라움과 극도의 두려움에 숨이 다 멎을 듯, 입을 쩍 벌립니다. 


  "허억~! 아아니,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저 분이 누구라고 바람과 바다까지 다 말을 듣지?" 


온 몸의 털이 다 곤두설 지경이었습니다. 

그 분이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죠. 창조주 하나님이시죠!


그제야 제자들은 비척거리며 생각난 듯 물을 퍼내기 시작합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내적인 '불편한 진실'이랄까, 몇 가지를 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자연을 향한 두려움 탓에 곁에 계신 든든한 주님께 대한 신뢰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겨자씨 만한 끄트머리 믿음까지도 바람과 파도에 뺏겨버린 것이지요. 

배 안에 가득해진 물과 함께 그들의 희미하고 작은 믿음까지 다 잠겨버리고 맙니다. 

자신들의 재주와 기술과 힘과 노력으로도 이루 감당 못할 거센 풍랑에 압도 당한 채, 주님께 대한 신뢰감보다는 바람과 바다에 대한 두려움-어쩌면 '외경'-이 더 커져버렸습니다. 

우리들 다수는 때때로 두려움 탓에 주님보다 마귀 권세나 자연의 위력을 더 크고 두렵게 여기곤 하지요. 

이것은 일종의 우상숭배에 가깝습니다. 두려움에 마냥 짓눌리고 굴복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믿음보다는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힘과 재간과 노력으로 이겨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은 그들 속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두려움. 바로 두려움이죠! 

주님께서는 "왜 두려워하나? 자네들, 아직도 믿음이 없는가?"라고 답답해 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두려움의 역 상관관계를 이해해야 좋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반대로 일말의 두려움이 있으면 믿음이 단박에 사그러들고 맙니다. 이처럼 둘은 역비례합니다. 


제자들은 바다 위의 돌발 사태가 벌어지자 워낙 겁에 질린 나머지, 곁에서 마음 편히 태평하게 주무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도,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두려움을 해소하시는 주님이심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귀는 믿음을 빼앗아 가는 원흉이기 때문이지요. 

두려움은 갖다 주고 믿음은 앗아가버린다-이게 마귀의 전형적인 탴팈(tactic)입니다.  


제자들은 배 위에 덮쳐오는 집채만 한 파도와 물결을 보자, 주님이 지금껏 들려주신 말씀과 보여주신 권능을 까맣게 잊어먹고 맙니다. 눈 앞과 머리 속이 캄캄해집니다. 믿음의 구석이라곤 영 보이질 않지요.


그뿐 아니라 또 참 평안까지 앗긴 상태였습니다. 아무리 외부 상황이 거칠고 거세더라도 흔들림이 없는 평화, 엄마 품 속의 젖 뗀 아이(시편 131'2) 같은 고요함과 평온이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그들은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는 시편 기자의 질문과 그 해답(시121'1,2)도 잊어버리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늘 지켜 주시는 하나님,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해할 수 없게 간직해 주시고 돌봐 주시는 그 하나님에 관한 믿음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바람도 바다도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의 두려움이요, 믿음 없음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문제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진작에 날 깨우지 왜 그랬어, 엉?"이 아닙니다. 

"앞으론 이러자마자 즉시 날 깨워, 알겠나?"도 아닙니다. 

주님이 요구하신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있느냐는 것이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길은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 그 분을 기쁘시게 할 길이 없.습.니.다(히브리서 11'6). 


믿음이 있는 사람은 두려울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님을 믿는 우리 신자가 믿음이 있는데 어찌 두려워해야 합니까? 성경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늘 수시로 요구하시는 것은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강하라는 것입니다!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날 깨워라, 깨우려면 진작, 일찌감치 깨웠어야지"가 아닙니다. 그 분은 졸거나 주무시는 분이 아니시니까요. 그렇다고 그 분에게 간구를 하지 말라거나 기도를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죠!


겁내지 마라! 믿음으로 두려움을 물리쳐라! 믿음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라!

빼앗긴 믿음을 되찾아라. 믿음으로 평화를 확보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해라! 마귀와 그 졸개들을 대적하고 꾸짖어라!


-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성경을 왜 보며, 왜 믿습니까..도대체?


그런데도 많은 설교가들이 성도들과 함께 아울러 무력한 가운데서, "마귀는 절대로 우리가 상대하지 못 한다. 우리보다 훨~ 힘 세고 우리보다 아이큐도 한참 높으니, (겁내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 어서 주님을 깨우자!"라고 강조합니다. 


이거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요..?

사실은 주님의 마음과 그 분의 희망, 요구 사안을 너무 몰라주는 소치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