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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음악

한 걸음씩? 보혈을 지나

무릎 꿇은 채 한 계단씩 올라가는 루터(영화 장면).



한 걸음씩(?), 보혈을 지나



김삼


[ 이 글은 내용상의 개념이나 아이디어로든, 문장의 일부분으로든 전체로든 필자의 이름과 함께(!) 출처를 밝히지 않고는 인용 또는 전재할 수 없습니다. 전재시엔 이 경고문도 포함돼야 합니다. ]



필자가 수 년 전 복음찬양곡 '보혈을 지나'에 관한 첫 비평(>)을 쓰기 이미 오래 전부터 교계의 애창곡이었던 이 노래가 이후 현재까지도 더욱 더 자주 불린다는 것 - 대다수 독자들은 알 것이다. 독자들 상당수는 비평 1을 읽고도 노래보다는 오히려 필자의 비평에 대해 더 의문을 가져왔을 터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필자는 이 찬양곡 가사에 대한 의문이 더욱 쌓여간다.


애창곡으로 인기를 끈다는 것은 작가에게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애창곡이라고 해서-문제점이 절로 사라져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교인들이 이 찬양곡에 매료되어 빠져들기만 하지, 왜 작고도 적어뵈는 문제점을 캐취하지 못하는지 안타깝기까지 하다. "좋기만 한데 왜 따지고 들어?" 하는 태도가, 현행 새찬송가가 있기까지 지난 날 우리네 찬송가가 그야말로 한 걸음씩(!) 점진적으로 발전해온 과정을 무시하거나 망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우선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가 '한 걸음씩 나가네'와 맞물려 매번 거듭되는 어떤 절차 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점에서 구약적 내지 구교적이다. 우리는 사제가 미사 집전 시 매번 '성체성사'를 하듯, 아버지 품으로 갈 때마다 보혈을 지나서 가는가? 아니면, 보혈을 지나도 여전히 아버지 품(천국?)까지 나아가는 것은 한 걸음씩의 점진적인 과정인가? 예컨대, 부잣집 앞에서 문전걸식을 하던 가여운 라자루스(나사로)는 죽은 뒤 낙원인 아버지 아브라함의 품에 서서히 다가가 안긴 것인가? 부자는 지옥으로 곧장 떨어지고?


거듭난 우리는 이미 보혈로 씻음 받아 현재 아버지 품에 들어와 있지 않은가?!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심으로써 성삼위께서 우리 속에, 우리가 성삼위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매번 다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에 안기기까지 한 걸음씩 다가가야 하나?
매번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가.는. 절차 같은 것이 필요하다면, 좀 문제가 있다.


오해 말라. 필자는 기도할 때마다 주님의 보혈을 적용할 수 없다는 얘기도, 회개할 수 없다는 얘기도 아니다. 보혈의 효험 내지 유효성이 없다는 것도 아니며, 보혈이 불필요하다는 주장도 아니다. 
회개할 때마다 보혈이 바탕임을 부정하자는 것도 아니다.


문제의 포인트는 작가가 다른 찬송가에서 빌린 듯한 '한 걸음씩'이라는 표현이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매번 들어간다는 어떤 절차와 의식과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또는, 전회에서 비친 대로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갈 때 어린아기처럼 아장아장 걸어서 가게 된다는 것이냐는 물음이다. 


작가의 본의든 아니든 이것은 왠지 천주교 미사를 연상시킨다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인가. 그렇지 않다면, 구약 제사처럼 하나님께 대속과 용서를 받으려면 매번 동물제사를 바쳐야 한다는 뜻이 얼핏 연상되어서다.



   주께로 한 걸음씩?


우리 한국 교인들은 '한 걸음씩'이라는 점진적 표현에 상당한 매력을 갖는 모양이다. 현대 한국인들의 한 특성이라는 "빨리 빨리"와는 대조적인 부사인데 말이다. 어쩌면 한 걸음씩에 대한 잠재적 인식이 우리에게 도움될 지도 모르겠다. 우리 찬송가에서 '한 걸음씩' 또는 '한 걸음'이라는 가사가 들어간 찬송가가 셋 있다. 379, 430, 532장이다. 어떤 '한 걸음'을 가리키는지 하나씩 간추려 살펴 보자.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한 걸음씩 늘 인도하소서
 
379장의 이 가사에서 '한 걸음씩'은 과연 한 걸음 두 걸음의 그 한 걸음씩인지, 원문에는 분명치가 않다. "단지 (날마다?) 한 걸음만으로 충분하다"는 어의가 담겨 있다. 이 한 걸음이 어떤 한 걸음인지가 애매하다. 이 찬송가의 작시자 존 헨리 뉴먼은 성공회 사제였다가 나중 카톨맄교로 개종해 훗날 천주교 추기경이 된 사람인데도 그의 찬송시가 우리 찬송가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다. 그에게 끝까지 충실한 (애인 아닌) 여성 친구였던 화가, 마리아 로지나 드 기번도 그를 따라 천주교로 개종해 수녀가 되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장로교인 출신으로 신유를 강조하고 오순절 성결교 입장을 취하여 '기독교연합선교회(C&MA) 교단을 세운 A. B 심슨이 작시/작곡을 한 이 유명한 이 찬송가-Step by Step-야말로 '한 걸음씩'이라는 번역어에 딱 적합한 찬송가이지만, 번역 당시 '씩'이라는 접미어가 붙을 자리가 없었는지 끝내 '한 걸음'으로 끝났다. 날마다 주님과 손 잡고 정답게 걸어간다는 내용으로 '동요스럽'긴 하지만, 별 문제가 없어 뵌다.



   주님께 한 걸음씩


제 3의 '한 걸음' 찬송가는 번역가사가 크게 문제시되는 경우이다. 원문에서 완전히 오역돼있기 때문이다. 이 찬송가에서 계속 반복되는 '한 걸음씩'이라는 부분이 번역상 대단히 잘못돼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모양이다. 이 찬송가는 한국 보수 교단들이 만든 (옛)'새찬송가'에 실려있다가 '(통일)찬송가'로 편입된 것인데, 아무 검토없이 여태껏 수용돼온 이 번역 가사는 첫 단추를 잘못 낀 대단한 오역이다! 그 가사를 한 번 살펴 보자. 


   1.

  주께로 한 걸음씩 왜 가지 않느냐
   네 죄를 자복하고 그 앞에 나가라


   (후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주께 나오라
   주님께 아뢰이면 너 복을 받으리라
   값없이 주는 은혜 너 거절 말아라


   2.
   주께로 한 걸음씩 너 빨리 나가라
   주께서 너를 맞아 네 죄를 사하리


   3.
   주께로 한 걸음씩 주 은혜 받으라
   기회를 잃지 말고 네 마음 정하라


   4.
   주께로 한 걸음씩 곧 와서 아뢰라
   기쁘게 너의 몸을 주 앞에 드리라



이상하다. 왜 주님께 가는 과정이 길고  느리고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지는가? 이렇게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점진적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왠지 값이 있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여기서 자연히, 번역가가 아닌 원작가는 어떻게 썼는지 알아보게 된다. 

패니 크로즈비가 쓴 이 찬송가 가사의 원문(Only A Step)을 1절만 직역해 보겠다. 독자는 여기서의 '딱 한 걸음만'이 '한 걸음씩'(step by step)과는 전혀 다른 성격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 (딱) 한 걸음만!
   그런데 왜 그대는 지금 (당장 그 분께) 가지 않으려오?
   오시오, 님의 구주 예수님께로
   그리고 님의 죄를 자복하시오, 엎드려서.


   [후렴]

   한 걸음만, 딱 한 걸음만
   오시오, 그 분이 님을 기다리시니
   오시오, 님의 죄를 고백하면서.
   님은 (그) 복을 받을 테니,
   그 분이 님께 값없이 베푸시는
   그 온정을 거절하지 마오.



위 직역을 검토해 본 독자는 여기서의 '한 걸음'이 '한 걸음씩'과는 영 딴판임을 충분히 간파했을 것이다. 크로즈비의 원시는 주님께 한 걸음씩 또박또박 또는 살금살금, 아장아장 걸어가라는 의미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첫 단추를 잘못 낀 번역가의 실수 탓으로 지난 수 십년간 여기 "속아" 온 것이다. 찬송가 공회원들도 다 마찬가지다. 큰 실수요, 큰 과오다!


사실 보기에 따라서는 여기 원시에서의 딱 한 걸음은 번역가사의 '한 걸음씩'과 정반대의 의미일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는 하늘과 땅 차이이지만, 누구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주님의 부르심과 동시에 나 자신의 결단에 달려있을 만큼 그 분과 나 사이의 거리가 단 한 걸음일 정도로 생각보다 가깝다는 것이다. 지금 크로즈비 여사가 저 찬송시에서 하고 있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찬송가의 번역자는 '딱 한 걸음'을 '한 걸음씩'으로 번역하여 주님과의 거리를 너무나 넓혀 놓았고, 우리가 애써서 한 걸음씩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결과 곧 '완전 딴 판'으로 만들어놓았다.


주님께 자복하러 나아가는 것이 그처럼 점진적/단계적이고 장황한 과정이란 것인가? 그렇다면 전설에서 마르틴 루터가 개혁 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사 시절, 무릎 꿇은 채 올라가야 했다는 28개의 흰 대리석 계단인 천주교의 '스칼라 상크타'와 그다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 인상이다. 


자, 그런데도 번역자는 이렇게 썼다.


   주께로 한 걸음씩 곧 와서 아뢰라


'한 걸음씩'이면 천천히 뜸을 들이면서이지 어떻게 '곧'일 수 있는가?? '곧'이 들어가려면 이렇게 써야 바르지 않겠는가?


   주께로 한 달음에(!) 곧 와서 아뢰라
 
원작가가 쓴 문구 하나를 오해한 나머지 이렇게 모순된 문구와 문장으로 통일해 버린 것이다. 어이없는 일이다. 그래도 한국교회는 지난 수 십년간 이 찬송가를 아무 문제 의식이나 의심이 없이 그대로 애창해 왔다.  

찬송가 하나의 가사가 줄 수 있는 엄청난 오착(誤錯) 이미저리를 우리는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보혈을 지나'의 '한 걸음씩'은 (작가와도 비슷한 뿌리의 오순절교 계열인) 심슨이 쓴 430장 보다는 이 532장의 잘못된 번역가사에 더 가깝다. 532장에서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때마다 보혈을 지나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하는 점진적인 스칼라 상크타 같은 과정을 '재개설'해 놓은 셈이다.


이런 개념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필자는 다시 한 번 '한 걸음씩'에서 구약적이고 구교적인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똑 같은 한 걸음, 더구나 (보혈을 지나와 같이) 한 걸음씩을 쓴 찬송가 379장의 '한 걸음씩'에서는 아무 문제도 찾지를 못한다.
우리는 정말 다정하신 주님의 손을 잡고 날마다 걸음걸음 걸어가기 때문이 아닐까? 때로는 주님과 함께 달음질도 마다하지 않는 우리가 아닐까? 한밤의 야뽁 강가에서 야콥과 밤새 씨름을 하시고도 못(?) 이기자, 환도뼈를 치시면서도 "니가 (그래도) 날(하나님을) 이겼다"(=이스라엘!)는 애교스런 이름을 붙여주신 그 유머스런 주님과 함께 말이다.



끝으로 다시 한 번, 필자는 이단들의 상투적인 수작처럼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헐어내릴 의도로 이런 글을 쓰는 것은 결코 아님을 분명히 해 둔다. 한국교회를 더불어 함께 바로 세워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지, 다른 뜻은 없다. 마찬가지로 찬송가 공회나 김도준 목사에 대해 아무런 사적인 감정도 없다.



기타 참조 글


보혈을 지나 촌평(수정)


보혈을 지나 토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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