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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관상영성

'죽음의 미학'?-성경이 말하는 죽음

 

죽음의 미학?
-이성희 목사 영성비평 (2)


이성희 목사의 관상적인 책, '도시 속의 사막'에서 문제점을 느끼는 부분들을 다시 챙겨 읽게 된다. (시리즈 첫 회도 참조하기 바란다. >> )

책 제3부 '인생' 편의 10번째 칼럼, "죽음의 미학"도 제목에서부터 짙은 세속성을 느낀다. 
"죽음의 미학"..요즘 흔히 듣는 말인데, 독자는 성경적이라는 인상을 받는가? 미상불, 저자는 성경과 철학을 희석해 사상 전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철학은 성경이 아니며, 성경은 철학이 아니다. 
믿거나 말거나, 성경에 따르면 세속 철학이 기독교나 성경에 들어올 자리는 전혀(!) 없으며(참고: 콜로새=골 2'8, 코린토B=고후 10'4b), '기독교 철학'이란 게 구태여 원용될 필요가 있다면, 어디까지나 말씀 앞에 무릎 꿇는 성경의 시종이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과거 '기독교철학'이란 것을 진지하게 연구해 본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다.

목사는 우선적으로 철학자가 아니라 양들의 영혼을 다루는 목회자이다. 파울(바울)은 당대의 철학도시 아테네에서 에피쿠로스/스토아 철학자들과 변론할 때 그들의 철학 담론에 즐겁게 참여한 게 아니라, 예수 크리스토(그리스도)님과 부활을 전했다(행전 17'18)!


요즘 죽음을 긍정적으로 미화시키는 말들이 많다. 그렇다고 근래에 한국을 비롯한 온 세계에 유행돼 온 낙태나,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르완다 등에서 저질러진 집단학살 따위가 아름다울 순 없다. 누구나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하기 때문이다. 같은 죽음이라도 특히 그런 죽음 앞에서 감히 '죽음의 미학'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뭘 말하는가..? 죽음의 미학을 거론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는 뜻이다.  


성경이 죽음의 미학을 말하고 있느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성경이 죽음의 미학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말씀을 오해한 것이며, 성경과 철학을 서로 혼동한 것이다. 우선, 용어부터가 성경에 배치된다. 성경에 따르면, 죽음은 본래 어글리한 것이지 결코 아름다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미학'이란 용어는 분명 성경 아닌 철학에서 왔다. 즉 철학에서, 자연·인생 및 예술에 담긴 아름다움의 현상이나 가치·체험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을 '미학'이라고 하며, 이것은 심미학(審美學)과도 같다. 특히 철학은 소위 '감정미학'(感情美學)이란 것을 논한다. 이것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감정적인 면에서 찾으려는 미학이다.
죽음의 미학이란 개념은 바로 이 감정미학에서 비롯됐다. 죽음을 "아름답게" 느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죽음 자체를 아름답게 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인 우리는 사망관을 바로 정립해야 한다고 본다. 


본 필자가 아는 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죽음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철천지 원수다!

   "멸망 받을 최후의 적은 죽음입니다."(코린토A=고전 15'26 참고: 15'53. 이하 인용 성구들은 사역)

또 요한계시록(20'13)을 보면, 죽음의 끝과 운명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음부(陰府)와 함께 영원한 불못에 던져질 운명이다.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두 번 다시는 사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게 된다(요계 21'4). 저주와 심판이 아름다운가..? 그리고 죽음이 정녕 아름답다면, 왜 아름다운 천국에서 주님과 성도들, 천사들과 영원히 함께 존재하지 않겠는가.

죽음은 율법, 죄, 저주의 결과로 왔다(참고: 창세기 2'17, 비교: 3장). 
그래서 파울은 로마서 5장에서 말한다.

   "그러기에,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왔듯, 죽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 것도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롬 5'12)


많은 사람들이 전도서 4'2,3; 6'3-6이나 요계 14'13을 보고 죽음을 아름답고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죽음으로 인한 결과에 대한 가치관을 논하고 있지, 죽음 자체의 미 내지 미학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개념 설정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피할 수 있는 혼동은 마땅히 피해야 한다.


저자는, 더 나아가 숙명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늘 준비된 자세로 사는 것이 지혜라면서, 죽음에 대한 준비가 삶의 지혜라고 한다. 자신의 죽음을 늘 느끼며 사는 사람, 쉽게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죽음이 어려운 사람은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매우 과감하게 말한다.

그런데, 이런 말은 대단한 혼동을 준다. 저자는 이 칼럼에서 '지혜자'와 자살자를 사실상 전혀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글을 읽으면, 누구나 자살을 동경해도 좋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죽음이 그처럼 아름다워 미학이란다면, 자살도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죽음은 아름답고 자살은 추악하다고 말한다면, 일종의 차별이요, 모순이다.

'쉽게 죽을 수 있는 사람'이라..자살자들은 그런 부류의 하나가 아닌가? 아니 자살자보다 더 한 사람이다. 수많은 자살자들은 어렵사리 최후의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모든 자살자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 죽어 갈 때와 죽어야 할 때, 쉽게 죽을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냐?"고 따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 목사는 양쪽 사이에 구분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소위 '안락사'와도 미처 구분이 안 된다. 죽음이 아름답다면, 안락사도 아름다운 것인가?

저자는 죽음의 아름다움에 도취된(?) 것인지, 죽음 이후 제대로 판가름 나는 내세에 대하여도 구체적인 말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죽음은 우리의 수고를 그치고 쉬는 안식이고,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참 신자의 경우에 한한다.

독자는 또, "책 자체가 신자들을 위한 책이기 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글쎄다.. 책 전체와 함께, 특히 이 부분이 성경보다는 철학을 더 논하고 있는 탓이다. 철학은 기독교 신자들을 위한 것이기보다 우선적으로 무신론자를 포함한 모든 세속인들을 위한 것이다. 그 점에서 철학을 말하다 보면, 세속과 성경관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책 전반적으로도 그렇지만, 특히 이 칼럼에서 철학과 성경을 묘하게 희석해 놓고 있다.

저자는 관상영성가이기에, 비록 여기서 관상을 논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죽음도 관상적으로-소위 '비움', '내려놓음'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대 광야의 수사들이 나름 통찰한 차원의 관상적 '비움', '내려놓음'은 본래 광야 수사들이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는 불교에서 왔음이 거의 틀림 없다. 이것은 중세에 '무'와 어둠, '제로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욥이 한, "내가 모태에서 맨몸으로 나왔으니 맨몸으로 돌아가게 되오리"(욥 1'21)라는 고백은 불교가 말하는 비움/내려놓음과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 하나님/신개념이 없는 불교의 비움은 모든 것을 허(虛)와 무(無)와 공(空)으로 보기 때문에 나온 개념이다.
반면, 욥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관을 말한 것이다. 

크리스천인 우리는 불자들처럼 허와 무와 공을 본질로 삼음으로 인하여, '비움'과 '내려놓음'인 그런 죽음을 통해 세상을 떠나지는 않는다.


저자는 또, 쉐잌스피어의 희곡, '햄맅'에서 거트루드가 햄맅에게 한 말,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는다"를 인용, "모든 것은 죽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면서 가치 있는 존재는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연 그럴까?
하지만, 갓 태어난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는 집안에서 그런 말을 해 보라. 기가 찬 저주로 들리게 된다. 생명은 죽음과 비슷한 게 아니라, 죽음의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기의 생명이 조성되자마자 죽음 골짜기로 내려 보낸다. 그 죽음도 아름답기 때문인가?   


죽음을 바로 논하려면, 철학이 아닌 성경이 말하는 죽음을 말해야 한다. 이 목사가 칼럼 말미에서 죽음의 미를 예찬하기 위해 인용한, 바로 그 파울이 뭐라고 말하는가? 죽음은 우리가 정복하고 삼키고 이길 대상 곧 적이라고 말한다! 멸망 받을 마지막 원수, 최후의 대적은 죽음이라고.

파울은 위 성구가 있는 부활 계시의 장(!)-코린토A서 15장에서 이어서 노래한다. 장엄한 승리의 노래다. 

    "죽음! 너의 승리는 그 어디에? 
    죽음! 네 독침은 어디 있나?
    죽음의 독침은 죄,
    죄의 권능은 율법!"
(코린토A 15'54,55)

파울은 연이어 예수 크리스토(그리스도)님을 통해 우리에게 죽음에 대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또 예수 크리스토께서 죽음을 폐하셨다고 선언한다(티모테B 1'10).
파울은 여기서 결코 죽음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서 죽음을 미화한다. 성도의 죽음이 복 되고 귀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죽음 자체가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죽음은 우리가 정복할 대상이지, 예찬하고 반길 대상이 아니다!

죽음이 아름답다면, 거듭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사실상 죽어 있는 영혼의 죽음도 아름답다고 할 것인가? 아담의 범죄와 거기 해당하는 율법의 저주로 인하여 온 그 죽음이 아름답다면, 죄와 율법의 저주도 아름답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죄 많고 저주 많은 이 세상이라 한 없이 아름다운 것인가?


이 목사는 세상의 미물들도 자기 죽음을 예기하고 슬퍼하는데, 사람은 죽음에서 면제된 존재처럼 살 때가 있다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지 못하는 우둔함 탓이라고 주장한다.

묻고 싶다. 거듭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부활에 참여할 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사실상 영원히 죽음에서 면제된 존재가 아니던가? 우리가 죽는 것은 잠깐 잠자는 것, (이 목사 말마따나) 잠시 안식을 취하는 것 뿐이다. 

사실 크리스토를 통하여 죽음을 면제 받은 의식이 없는 사람은 목숨을 절절이 아까워 하고, 바로 죽음 앞에서도 죽음을 두려워 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은가?

본래,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이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이 당연하다.
죽음과 두려움은 늘 함께 간다.
그런데..
자살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죽음을 두려워 해야 한다!
반면 꼭 순교를 해야 할 마당에 목숨을 구걸한다면, 그것은 죽음 앞에 굴종하는 것이다. 그에겐 별 가치 없는 내세가 기다릴 것이다.


성경은 죽음에 대하여 할 말이 많다. 많은 말을 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죽음과 정반대 되는 장수의 복과 약속이다.

닳고 닳은 현대의 많은 크리스천들은 장수와 복을 피해야 할 하나의 '기복' 대상쯤으로 여긴다.
심지어 어떤 신자들은 장수를 일종의 저주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생명과 장수를 중시한다(신명기 4'40; 6'2, 왕들A=왕상 3'14 시편 118'17, 잠언 3'2,16; 4'4,10; 5'9; 9'11; 10'27, 11'4;  13'14; 14'27; 15'24; 28'16; 예샤야후=이사야 65'20, 하바쿸 1'12, 에페소 6'3 기타 다수).

그리고 성경은 분명, 삶과 죽음의 갈림길, 장수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입술로의 고백에 달려 있다고 선언한다(시 34'12,13. 비교: 페트로A=벧전 3'10,11). 삶과 죽음의 권세가 우리 입술에 달려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잠 18'21). 그래서 필자는 단언한다. 밤낮 죽음을 미화하고 예찬하는 사람들은 일찍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다고. 그러기 마련이라고.


반면, 의인의 장수는 복이다(시 21'4; 91'16)!
성경은 결코 장수를 경시/무시하고 죽음을 미화하지 않는다. 물론 악인들과 악한 부자들의 장수는 헛것이지만.


크리스천 사망예찬론자들에게 묻는다.
만약 흔히 '비움'과 '내려놓음'을 논하는 일부 관상영성가들이 말하듯 장수는 추하고 죽음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이라면, 유다 왕 히즈키야(히스기야)는 왜 죽음이 다가왔을 때 기쁘게 맞아들이고 고이 죽지, 구차하게 생명 연장을 위해 울부짖었는가(참고: 왕들B=왕하 20'1-11)?


요즘은 "깨끗한 죽음"을 목청 높여 부르짖는 사람들도 많다. 지저분하게 길고 질기게 살기보다 깨끗이 가급적 일찍 가는 게 옳은 양. 과연 늘 그런가?
흔히 한국 말기환자들의 가족은 세속인들과 크리스천들을 막론하고 산소호흡기를 떼어 놓는, 의학적 조기 안락사를 선호하고 추구한다. 또 추하게 길게 살다 죽는 것보다 깨끗이 일찍 죽는 게 낫다고들 말한다. 현실적 이유에서 안락사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듯 들린다.
그 점에서 어떤 안락사이든 죄악시 하는 미국 교계와는 사뭇 다르다. 또 진정한 장수란 깨끗이 죽는 것이지 지저분하게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는 의식 아래, 노인성 치매환자나 장기 말기 환자들을 결국 욕뵈는 주장들을 강단에서 서슴치 않는다. 

묻겠다. 사람이 자신의 죽음이 "깨끗하다"고 예견할 수 있는가? 희망과는 달리, 그 누구도 장담 못한다! 아무리 치매를 예방하고 건강한 노년을 위해 발버둥 쳐도, 당장 다음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모른다. 안락사를 눈 앞에 둔 말기환자들, 의식을 잃은 뇌사환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영의 귀는 살아서 주위의 모든 목청들을 생생히 들을 수 있음을 아는가, 모르는가? 아울러, 겉사람은 쇠퇴해도 거듭난 사람의 영은 늘 살아있다!
그러므로 마치 누가 뭐래도 자기는 깨끗한 죽음을 맞을 수 있을 것처럼 장담하지 마라. 치매환자들을 속으로 흉 보고 비웃지 마라. 

엘리야의 후계자였던 엘리샤(엘리사)는 우리가 존중하는 위대한 구약 대언가(선지자/예언자)였지만, 그는 죽을 병이 들어 앓다가 죽었다. 이 경우, 그의 죽음은 깨끗한 죽음인가, 아닌가? 놀랍게도, 그는 병들어 죽었지만, 그의 뼈는 사람을 살려냈다(왕들B 13'21). 과연 깨끗한 죽음인가, 아닌가? 


죽음의 '미학'을 논하고 그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이 목사는 이런 점들을 논하지 않는다. 이 칼럼엔 한번쯤 나올 만한 부활이란 낱말조차 전혀 안 나타난다. 그 점에서 세속인들과 교인들의 혼동을 아울러 자아낸다.


끝으로, 의인의 죽음은 왜 복된가?
죽음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살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잠 14'32).

예수 크리스토의 죽음은 왜 복된가?
그 분의 부활 때문이다. 죽음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죽음이 아름답다면, 그 분은 사망 권세의 사슬을 깨고 죽음을 정복하실 게 아니라, 무덤에 그냥 누워 계실 때 더 아름다워 보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