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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 코너/샬롬의 평화칼럼

연길에서 장백산까지(샬롬)

 

S 교회 내부



Ⅰ. 출발 전


우리 중국(북한) 단기 선교팀은 모두 8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팀 리더 집사님(1), 목사님 내외분(2), 공무원인 사모님(1), 부자(父子) 집사님(2), 우리 가족(2). 

저야 사실 북한선교 쪽으로 맘에 품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만, 리더 집사님은 오래 열망을 갖고 기도하면서 중국을 그 전초기지로 삼아 그곳 선교를 계속해 오시던 차 연계된 교회를 통하여 장백산(백두산)에서 산상 기도를 드리고 싶어하셔서, 이번 단기선교를 추진하게 된 것이지요. 


팀을 꾸려 보니... 교파 초월, 성별 초월, 나이 초월, 직분 초월에다 다양한 개성과 달란트까지 총집합체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기도로, 결단으로만 모였더군요. 울 바깥 집사님만 해도 출발 당일 새벽 4시까지 근무했고, 또 다른 집사님도 새벽 3시까지 근무하다 와서 사모님이 챙겨준 짐을 그대로 들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런 장기간을 따로 떼어놓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고, 여행 경비도 부담이 되었습니다만, 진작부터 리더 집사님이 ‘콜’을 해 오셨고 또 기도하다 보니 가고 싶은 마음도 생겨서, 뒤늦게 팀에 합류하게 되었답니다. 단기선교 후 자주 받는 질문이 어디 단체를 통해 계획하고 다녀왔냐는 것인데, 우리는 이처럼 독립 팀을 구성해 다녀왔습니다. 사전에 부분적으로 알던 사람들을 리더 집사님이 다 불러 모은 것이지요^^.


선교여행에 앞서 세 차례의 사전 미팅 시간을 가지면서 기도하고, 의논하고, 찬양 연습을 하고 서로 친교도 하였습니다. 사전 미팅 전에 찬양사역 담당 집사님으로부터 찬양 파일들을 전송받았는데 빈야드 & 킹덤나우 계열의 노래가 들어 있어...파일을 보면서 과연 가야 되나 어쩌나 다시 한 번 고민을 했습니다만, 리더 집사님의 성품을 수 년 동안 보아 와서 익히 알고 있었고, 또 개인적으로 리더 집사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신 뜻이 있을 것 같아서, 함께 하기로 맘을 굳혔습니다.


첫 번째 미팅은 사정상 제가 불참했고, 두 번째 미팅 때는 도저히 찬양을 할 수가 없어서 기도하며 고민 끝에 위 찬양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의외로 선선히 기도해 보자는 답변과 논의 끝에, 눈과 귀에 유난히 거슬리는 곡들은 자삭(자진삭제)하고 찬양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주님의 역사로 여겨집니다.


사정상 두 번의 미팅에 불참한 울 바깥 집사님은 세 번째 미팅 때도 못 올 것 같다고 했습니다만, 제 생각에 셋째 미팅까지 빠지면 단기 선교에 아예 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제가 강권하여 결국 둘이서 함께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 마지막 미팅 때 중국에 꼭 같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렵사리 동참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그에게서 들었습니다. 



Ⅱ. 다녀와서 


우리가 다녀온 지역은 연길 - 심양 - 단둥입니다.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중국의 발전상입니다. 제 느낌으로는 1970년대와 2000년대가 함께 돌아가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당나귀와 벤츠와 스마트폰이 함께 있는 곳이거든요.

중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입니다만, 우리가 다녀 본 도시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마치 우리네 80년대와 방불했습니다. 사방에서 건설을 하고 있더군요. 길을 내고 건물을 올리고... 도로는 차가 빡빡하게 다니는 반면, 한 쪽에서는 당나귀를 끌고 나와 야채를 파는 노점상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체제로는 명백한 사회주의 국가인데, 내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 냄새가 많이 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덩샤오핑(등소평)의 ‘흑묘백묘'[각주:1] 이론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 당나귀와 벤츠



다음은 중국 내 교회의 발전상입니다. 우리네 1980~90년대 교회에 십자가만 꽂으면 부흥되었다던 그 시기를 본 듯 하였습니다. 중국 교회에서 사용하는 우리글 성경은 우리나라 ‘개역 한글판’ 성경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발행만 중국기독교양회에서 한 것이었습니다. 기념으로 아무 거나 한 권 집어 들고 왔습니다(물론 허락 하에서^^)



◀ 중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우리글 성경



현재는 중국도 네트워크망이 잘 되어서 중국 교회 목사님들도 맘만 먹으면 실시간으로 CTS등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하였습니다. 다만 서재들을 훑어보니, 우리가 염려해온 여러 잡다한 영성들도 함께 뒤섞여 있는 것을 보며, 중국 교회 형편상 크게 드러나지 않는 이상(異常) 영성들이 아무 분별이나 제동 없이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 다른 분들과 달리 저 나름으로 다소 우려가 감지되었습니다. 앞으로 중국이 개혁과 개방에 더욱 박차를 가할 때 밀려 들어가는 이런 외래 이상 영성 문제는 우리가 함께 각별히 기도해야 할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중국내에는 크게, 국가에서 공인된 삼자(三自)교회와 비 공인된 지하교회(일명 처소교회)가 있습니다. 우리 팀은 나름 건전한 삼자교회(B) K목사님이 줄곧 동행해 주셨으며, B교회를 통해 선교/개척된 지하교회도 몇 군데 방문을 하였습니다. (혹시나 몰라서^^ 이니셜로 표기하겠습니다)


우리 팀이 방문한 지하교회들은 교회 외부엔 십자가가 없고 그냥 어디 상가에 있는 것처럼 위치해 있였습니다. 내부는 50~60명 정도의 성도들이 있을 정도의 크기였으며, 놀라운 점은 영상시설과 악기와 컴퓨터 등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우리네 개척교회보다 더 낫게 보였습니다. 물어보니 우리나라에서 선교하면서 제공해 주었답니다. 


우리가 방문한 교회들은 삼자교회와 지하교회의 중간형태인 '제3의 교회'라고 본인들이 자임하는 곳이었습니다. 만나본 목회자들은 고신측이나 미국에서 신학 후 중국으로 돌아와 일하는 분들입니다. 


B교회 성도들과도 친교하였는데 참 순수하고 복음을 사랑하는 열정이 엿보였습니다. 다만, 영적 갈망에 비해 분별/검증 부분이 취약함을 느꼈습니다. 우리나라에 취업차 다녀온 사람들도 꽤 되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한 살 아래 친구를 사귀었는데...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은사체험도 한 분으로 영적으로 갈급해 하는 듯 하여, 제 이메일 주소와 함께 가지고 있던 주석 성경을 주고 돌아왔습니다. 생명력 넘치는 성장이 기대됩니다.


여기서 일단, TLT 동역자들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무사 귀환과 순적한 선교 여행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아멘입니다! 


귀국 후 첫 번째로 들은 소식이 고 강호빈 목사님의 순교소식이었습니다.

http://pdf.kukinews.com/viwer.html?exec=viewsearch&height=1640&CNo=117394373


우리 팀 리더 집사님이 성결교인인데, 우리가 도착한 6월 6일이 바로 강 목사님 발인일이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교통사고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순교라고 소식을 전해 주셨습니다. 강 목사님의 순교지가 연길인데 이곳은 우리가 첫날 방문한 곳입니다. 여러 곳에서 주님이 보호해 주심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능하신 손도 함께 해 주셨습니다. 결과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기도와, 찬양, 치유 사역 가운데 주께서 함께 해 주셨음을 믿습니다. 또한, 과정 과정에서 선교 팀원들의 마음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하나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은, 특별히 제가 TLT에 기도 요청을 한대로 목적대로 친교가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전혀 생각지 못한 대상과 깊이 있는 교제를 하게 하셨고, 듣고 보게 하셨으며, 깨닫게 하셨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우리 팀의 일정은 크게 연길 - 심양 - 단둥입니다. 

이제 선교 여행지 따라 찬찬히 한 번 둘러보기로 합니다. (Let's go^^)



Ⅲ. 날짜별 여정 


(5월 31일 - 첫째날)

새벽 6시 출발. 인천공항 행 리무진을 타고 공항으로 향하였습니다. 팀은 새벽 5시 30분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여 한동안 대기했습니다.


16시 15분경 연길공항에 도착하였는데, 우리 짐들은 낌새가(?) 이상했는지 개별 가방부터 시작하여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리더 집사님께서 워~낙~ 선교물품을 많이 챙기셔서 각자 짐에 대짜로 큰 옷가방 8개(charge를 무려 20만원이나 지불하고)를 가지고 갔으니, 눈에 뜨일 수 밖에 없었답니다. 


수하물 때문에 한 4~50분을 연길공항에서 지체했는데... 우리에게는 한국 말, 본인들끼리는 중국어로 이야기를 하니, 패키지 여행도 아닌 우리들은 말은 제대로 안 통하지, 분위기는 안 좋지, 오시기로 한 K목사님과 연결은 잘 안 되지, 입국하자마자 좌불안석의 상황이었습니다. 


옷가방에 있는 개별물품은 챙겨도 된다고 해서, 짐 사이에 넣어둔 찬양집을 주섬주섬 챙기는데 쓱~ 한 번 넘겨보더니 그 또한 못 가지고 가게 해서, 결국 선교물품 가방 8개는 모두 그대로 압류 당하고 연길 공항을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나와 보니 K목사님과 연길에 있는 C목사님은 한참 전에 차량을 대기시켜놓고 계셨습니다. 다들 의기소침해 있는데, 중국 사람들은 북한과 교류가 그나마 나으니 북한으로 선교물품이 들어 갈 수 있도록 해 보겠다는 연길교회 C목사님 말씀을 듣고, 오히려 화가 복으로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애초 북한을 맘에 품고 왔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연길에 있는 Y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대단히 크고 웅장한 교회였습니다. 교인수도 1만명 이상이라 합니다. 성결교회가 처음 전도사를 파송하여 교회 개척과 건축을 하였으나, 그동안의 후원은 오히려 장로교측에서 하다가 4월달에 성결교단 총회에서 임원들이 방문하여 다시금 후원을 약속하였다고 합니다. 

  

연길은 조선족 자치지역으로 간판도 한글 먼저, 다음이 중국어로 되어 있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저녁밥으로 전주 비빔밥을 먹었는데... 오리지날보다 맛있다는 중평이었습니다. 


▲ 연길 간판 : 한글 먼저 표기




▲ 연길 비빔밥 - Very gooo~~~d



▲ 식당 내 성구 


식사 후 연길과는 Bye Bye~ 하고, 1차 목적지인 장백산(백두산) 산상기도를 위하여 우리 선교팀과 K 목사님-이렇게 9명이 출발하였습니다.


18시 20분경 출발하였는데, 지독한 안개로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길(그렇게 진한 안개는 처음 보았습니다. 정말로 바로 앞이 안 보이더라는..)과, 굽이굽이 험난한 도로를 거쳐 장장 3시간 40분만에 주님의 돌보심 가운데 무사히 장백산 근처 호텔에 도착하였습니다. 

새벽부터 잠을 못 자고 힘든 터라 아무 생각 없이 바로 딥 슬립...... 


(6월 1일 - 두 번째 날)

나름 호텔식 뷔페로 아침식사를 간단하게 한 후 미리 대기시킨 차를 타고 근처에 있는 장백산(백두산)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장백산 입구는 사람들로 바글바글, 외국인뿐만 아니라 중국 본토인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 장백산 입장권


김일성이 생전에 중국을 '형제 나라'라 하여, 백두산 절반을 중국 측에 주고, 북측은 중국으로부터 섬들을 받아서... 중국에서는 길 장(張) 자를 써서 장백산이라 하고 북측은 백두산이라 한다 하니 우리 문화 유산이 제대로 보존 되지 못하고, 분단 때문에 북측이 아닌 먼 중국까지 와서 빙~돌아 백두산을 올라가야만 하는 현실이 좀 안타까웠습니다.

가는 길은 많이 걷지 않아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산 중턱까지 도로가 잘 닦여져 있었습니다. 목적지 근처까지 차량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아서 맑은 공기와, 정취를 만끽하며 수월한 산행이었습니다. 


먼저 장백폭포에 갔습니다. 9시 30분경에 도착하였는데 멀리서 봐도 장관이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왼쪽에는 눈과 얼음이 녹은 차디찬 물이 흐르고, 오른쪽은 미지근한 물이 흐르는 노천 온천이 형성되어 유황 냄새와 뜨거운 연기 줄기가 계속 오르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 장백폭포의 장관 


장백폭포 근처에서 물을 맛 보았는데, 물맛이 참 좋았습니다. 표현하자면 물맛은 평이한데, 시원하며 깨끗하며 순한 느낌이었습니다.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다음은 천지 등정입니다. 천지 입구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정상에 도착할 수 있는데, 주위는 왼통 하얀 눈밭입니다. 눈이 치워져 있기는 한데, 어른 허리정도 만큼 쌓아놓은 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1박2일이 간 코스는 꽤 험난한 코스로 천지연못 근처까지 내려가는 것인데 , 우리가 간 코스는 산 꼭대기에서 아래로 천지를 내려다보는 것으로 그다지 힘든 코스가 아닙니다.



▲ 천지 등정


장쩌민 주석도 3번이나 등정해도 짙은 안개와 구름으로 못 봤다는 천지를 2분정도 살~짝 열어주셔서 볼 수 있었는데, 얼음이 얼어 있었고 주위가 눈으로 덮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냥 신기한 광경이다 싶었는데, 같이 가신 분들은 하나님의 역사라며 기뻐하셨습니다. 도착하여 빙 둘러서서 천지 정상에서 중국과 북한을 위한 산상기도회를 가졌습니다.



▲ 안개 속에 살며시 열린 천지(붉은 색 부분). 흰색은 얼음이다. 


점심을 든 뒤 우리를 인도한 조선족 가이드가 자신의 민박 집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천지를 하산한 후 방문하여 차 대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와 그의 가정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오고 가는 길에 본 그 지역은 건축이 붐이었습니다.


오후 3시경 E교회를 방문하였는데 교회 자체는 아담하였으나, 부지는 무려 3,800평에 달하는 곳이었습니다. 여 목사님이 시무하고 게셨습니다. 삼자교회라 밖에 십자가와 교패가 붙어있습니다. 새 성전 건축을 위하여 기도중이라 하였습니다. 기도와 찬양을 하며, 교회를 위하여 기도한 후 선교비를 전달하였습니다.


잠시 짬이 나서 근처 장백산 자연사 박물관을 견학하였습니다. 박물관 견학 후 저녁식사 중 조선대학교 교육대학원 학생들을 같은 식당에서 만나게 되어, 같은 지역 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굉장한 친밀감을 느꼈습니다.



▲ 장백산 자연사 박물관


이제는 14시간 동안 침대 기차를 타고 심양으로 이동할 시간입니다. 19시 10분에 기차가 출발하는데, 기차역에서 18시부터 "무쟈게" 기다렸습니다. ㅎㅎ



▲ 침대칸 기차 티켓 


침대열차는 3층 침대인데 서로 마주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팀은 인도자 목사님을 포함하여 7명은 2층에, 2명은 3층에 올랐습니다. 침대열차인지라 통로는 '1.5명' 정도 지나면 될 정도로 좁은 기차인데, 침대의 시트가 왠지 지저분한 느낌 탓에 저는 준비해 간 개인 침낭을 요긴하게 사용하였습니다. 



▲ 침대칸 기차 티켓 확인 중(우리 멤버들 아닙니다. 그냥 우연히 찍힌 사람들)


책을 읽다 잠이 든 저와는 달리, 다른 멤버들은 저녁에 그 좁은 기찻간에서^^ 성령충만함을 받아 1시간이나 찬양사역을 하였답니다 



(6월 2일 - 세 번째 날)

중국은 아침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빠른 것 같습니다. 새벽 4시 경이면 밖이 훤~합니다. 아침은 울 나라에서 준비해 간 신라면 봉지라면과 햇반으로 대충 열차에서 때웠습니다. 중국 목사님은 봉지라면이 무지 신기했나 봅니다. 군대 다녀오신^^ 집사님께서 라면 봉지를 나무젓가락으로 잘 갈무리하는 봉지라면의 진수를 보여 주셨습니다 ㅎㅎ 


▲ 봉지라면 ^^


역쉬~ 성령충만하신 팀 리더를 비롯한 몇 몇 분이 중국 목사님의 눈총을 받아가면서 두 시간 정도 찬양사역을 하셨습니다. 후문을 들어 보니 우리 나라말로 찬양을 하는데도 근처에 있던 어떤 분이 눈물을 훔치더랍니다. 아마도 믿는 사람이거나 실족한 크리스쳔이 아닐까하는 추측들만 해 보았습니다. 찬양 리더 분은 분명히 그 분께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으실 거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드디어 14시간만인 9시 15분경, 쉔양(심양) 소가툰역에 도착을 했습니다! 일단, B교회에 들러서 도착기도를 한 후 아점을 대접 받았습니다. 이제 숙소로 이동할 시간입니다. 소가툰 지역에서 차로 2~30분 거리에 있는 관립보 지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관립보 B교회는 교회와 양로원을 함께 하고 있는 곳인데, 우리는 최근 리모델링한 양로원 2층 숙소에 짐을 풀었습니다. 샤워 시설이 없었는데, 우리 팀을 위하여 급하게 샤워시설을 설치하여,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할 수 있었답니다.



▲ 양로원 2F 숙소


숙소에서 짐을 풀고 다들 지친 몸을 쉰 후에 14시경부터 1시간 가량 주일날 인도할 찬양연습을 열심히 했습니다. (비트가 빠른 찬양은 50대 이상이 헉헉대고 ㅋㅋ, 간혹 율동이 필요한 부분은 넘어가고 하면서). 리더 집사님 말씀이 주일날 찬양 인도를 2차례 정도 하고, 그러면서 간증집회 & 치유기도까지 할 수 있다고 하셨거든요.


중국에서 놀란 것 중 하나가 저녁식사 시간인데요. 보통 5시 정도가 되면, 중국교회 목사님이 저녁 먹자며 이동을 시키시네요. 밖은 훤~한데... 좀 적응이 안되기도 했습니다만, 가만히 보니 합리적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보통 점심 후 5~6시 정도 되면 시장기가 드니 말입니다. 식사는 거의 심양시까지 나가서 먹곤 하였습니다.


이날은 K목사님의 성도가 운영하는 조선족 식당에서 간단하게 냉면 & 육개장으로 식사하였는데, 식당 분위기가 우리네 여느 크리스천 식당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입구부터 우리가 익히 보아온 성구(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들이 진열되어 있어서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석식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반가운 비라고 합니다. 그동안 가물었는데 우리 팀이 비를 몰고 왔다고 참^^ 능력 많은 분들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들었습니다. 


찬양 리더들은 내일 있을 찬양예배를 위한 PT작업에 부산합니다. 찬양 리더는 앞서 소개시켜드렸던 부자(父子) 집사님이 맡으시는데요, 아빠는 찬양 인도를 맡고, 아들은 꽃다운 20살로 기타 연주 등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들이 "젤로" 잘하는 것은 드럼이랍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악기 다루는 것(드럼, 기타, 피아노 등)은 거의 만능인 듯 싶었습니다.  


오후 9시경 천둥 번개와 폭우로 정전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 읽는 것도 포기!

전기는 물론 화장실도 올스톱!!


그 무렵에 내일 있을 예배 준비 겸 합심기도와 영적 싸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기도 동역자들을 모았는데, 반응이 쫌 심드렁해서 혼자라도 해야겠다 싶은 생각으로 기도장소에 가 있었는데, 저를 포함해 무려 4분(승률 50%^^)이나 참석하셨습니다.

다들 사전 교제가 충분치 않아서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 했습니다만 어느새 한 마음이 되어 주께 구하고 부르짖고 있었습니다.(저도 처음엔 속으로 땀께나 뺐습니다... 이 어색함을 어찌해야 하나 싶어서 ㅋㅋ ).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감동하심, 진실한 교제, 부르짖는 기도가 함께 하였습니다.

오히려 어두워서 진지한 이야기들을 무리 없이 나눌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기도 시간 이후 비로소 저는 한 분과 허심탄회한 친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일들을 위하여 내가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후문을 들어보니...마땅히 기도해야 할 사람들이 모인 것 같고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 엄~청~ 부르짖어서^^, 숙소에서 숙면하던 분들이 자주 깨었다고들 합니다. 저는 그렇지 않아도 약한 목청이 쉬어버려서 다녀와서까지 쉬 회복이 안되었습니다만, 은혜의 훈장으로 여깁니다. 

아무튼 세 번째 날은 찬양과 기도로 준비하며, 주일을 기대하며 쿨~쿨~~



(6월 3일 - 네 번째 날, 주일 날)

럴수~ 럴수~ 이럴 수, 어제 가버린 전기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샤워기, 화장실, 세면대...... 모든 게 먹통! 새벽 6시 이전부터 일어나서 나름대로 단장을 하는데요^^ 단장이란게 1층에서 받아놓은 빗물로 세수 & 세면 & 머리감기..


빅 뉴스는 1층에 있는 '퍼세식' 화장실 사용. 저희 세대는 그럭저럭 이해를 합니다만, 꽃다운 20살 청년은 모든 게 힘들었을 것만 같습니다. 아래층에 모여 계신 할머니들은 본인들 잘못도 아니건만, 지저분하고 불편하게 됐다면서 연신 미안해 하셨습니다. ㅎㅎㅎ 할머니들 우리도 옛날엔 그렇게 살았답니다. 


우여곡절 속의 원시시대 체험 후 오늘의 주요 사역지인 소가툰 B교회로 7시에 출발하였습니다.


도착 후 교회에서 준비해 준 간략한 식사를 했는데, 중국식 꽃빵입니다. 일단 크고 맛은 담백하니 괞찮습니다. K목사님 말씀이 9시 30분에 1부 예배가 있는데 8시 30분부터 찬양을 인도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7시 30분에 오는 성도들도 있다고 하셨는데... 정말로 두 시간 전부터 모이기 시작하여, 8시 정도 되니 20~30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중국식 큰~~ 꽃 빵


우리는 당일 연습 시간 부족에다 장비는 세팅해야지, 동선은 익숙치 않지, 사람들은 하나 둘 모여 들지...... 땀 좀 뺐습니다. ㅎㅎ 8시 10분경부터 9시 30분까지 찬양 인도하고, 말씀은 우리 팀에 함께 하신 목사님께서 주님 사랑에 대한 설교&간증으로 11시경에 1부 예배가 끝났습니다.



    ▲ 한시간 반 전에 이미 와 계신 성도님들 : 시간은 08시 2분정도


중식 후 B교회 청년들과 급친해진 우리 팀 막내는 자신의 재능인 기타 연주 강습을 하였습니다. 젊은이들은 확실히 빨리 친해지나 봅니다. 


중식 후 휴식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이제 우리 팀은 2팀으로 분산하여 오후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1팀은 B교회에서 간증 & 치유기도로, 2팀은 우리가 묵고 있는 관립보 B교회로 이동하여 양로원에 계신 어르신들과 국악찬양 & 치유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찬양을 워~낙~ 잘 하고(?), 목도 쉬어 있는 터라 자연스레 1팀에 합류하였습니다.


예배 후 기도 받으실 분들을 초청하는데, 우리 팀은 15명 정도, 2팀은 10명 정도가 자원하여 나오셔서 기도를 받으셨습니다. 마치 예전 80년대 우리네 교회 모습을 보는 듯 했습니다. 성도님들의 순수함이 느껴졌습니다.


관립보 B교회로 가셨던 분들이 교회로 돌아 오셨는데, 이어서 청년 몇 명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알고 보니 한국사람^^! 사정인즉 한국 유학생들이 주일 오후예배 후 15시부터 B교회에서 유학생 자체 예배를 드린다는 겁니다. 유학생 8명에 선교회 간사 1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는 이 예배에도 함께 동참하였습니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예배의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주일이라 드리는 예배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아 되레 안타까웠습니다.


저녁 식사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온 장로님과 선교사님을 소개 받아 그분들과 함께 식사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새벽부터 풀 타임 사역 후 숙소에 돌아오니 다들 녹초가 되어 있더군요. 가장 먼저 잠에 떨어진 사람은 팔팔한 20대 막내^^;; 곧 바~로~ 넉 다운. 오히려 우리들은 잠깐 쉬고 기력을 되찾은 이 아이러니는 뭥미? ㅋㅋㅋ


그 와중에도 우리 팀 리더 집사님은 우리가 오르내리는 계단의 페인트 칠이 벗겨져 있는 게 맘에 걸리셨나 봅니다. 갑자기 나가셔서 페인트, 붓, 신나(thinner), 녹 제거용 칼 등을 구입하시더니, 열심히 페인트 사역을 하시기 시작합니다. 해 지기 전에 해야 하신다며 한 시간 반 정도 작업을 하셨습니다. 중국은 희한하게도 해가 긴 나라 인 듯합니다. 8시가 넘어도 환하니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네 번째 날은 풀 타임 사역 & 1차 페인트 사역으로 하루가 또 지나갔습니다.



(6월 4일 - 다섯 번째 날)

오늘은 무지 긴~ 하루가 됩니다. 심양에서 단둥까지 왕복을 해야 하니 말입니다. 편도 4시간 걸리는 거리인데요 , 단둥에서 의미 없이 1박 하느니 서둘러 출발해서 숙소에 도착하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K 목사님은 단둥은 북한과 접경지역이라 많이 조심해야 된다고,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신신당부 하셨습니다.


새벽 4시 20분에 다들 기상을 했습니다.(중국은 새벽 4시 20분도 전혀 어둡지 않고 환합니다!) 5시 30분에는 출발을 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아침도 포기하고 부랴 부랴 준비하여 단둥을 향해 출발~~~~


오늘 아침은 좀 특별합니다. 천하에 없는 별미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가는 길에 너무나도 다들 시장해 하길래, 비빔밥을 제조해 버렸습니다. 밥은 K목사님이 가져 오셨고, 우리는 한국에서 가져온 반찬거리를 가져왔는데 장소도 마땅치 않고, 그릇도 여의치 않아서 몽땅 비벼 버렸습니다.

비빔밥의 포인트는 바로 참.기.름.^^ 준비해 온 반찬에, 참기름을 넣고 김 가루를 쓱쓱 뿌려서 비벼드렸습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배 고플 때 먹는 비빔밥~ 모두들 대 만족이었습니다. 근데, 중국 사람들은 참기름을 안 좋아하더라구요. K목사님은 참기름 없이 드셨는데, 매우 흡족해 하셨습니다.


4시간 달려서 드디어 단둥에 도착했습니다. 단둥에는 K목사님 연락을 받고 S지하교회 목사님 내외분이 나와 계셨습니다. 유람선을 타고 강을 보니, 정말로 강을 중심으로 한 발짝만 떼면 여기는 중국, 저쪽은 북한-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쪽 중국은 건물들이 쭉쭉 서 있는 반면, 북측은 좀체 개발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막사 같은 건물들이 있었습니다. 줌으로 잡아 보면 광물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 우열이 확연했습니다. 



▲ 배 위에서 본 단둥


▲ 배 위에서 본 북한 1




▲ 배 위에서 본 북한 2


압록강 중간에 끊어진 철교가 있습니다. 6.25때 중국-북한 물자가 왕래해서 UN군이 끊어버린 철교랍니다. 그 뒤로 새로 만든 철교를 통하여 중국과 북한이 왕래하고 있기는 했습니다만, 분단의 현실을 느낍니다.

함께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에서 선상 기도회를 조용히 가졌습니다.


▲ 압록강 끊어진 철교



▲ 압록강 국경 배 : 한 가운데 떠 있는 배를 중심으로 중국과 북한 구분


중식으로 특별히 북한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평양 냉면을 먹어보았습니다. 서빙하는 여자분들이 예쁘고 늘씬한데 표정들이 없다는 말들을 하시더군요. 김치, 깍두기, 백김치는 끝내주게 맛있었습니다. 시원하고, 아삭아삭하고... 그런데 냉면은 우리나라 쪽이 더 맛있었습니다 ㅎㅎ


▲ 평양냉면과 온면 (냉면은 양이 많다.)


북측에서 중국으로 100년간 빌려준 평야지대를 가 보았습니다. 그 대가로 중국은 북한에 다리를 건설해 준다고 하는데, 그 다리를 통하여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이 중국으로 많이 흘러 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헐값에. 

철조망 사이로, 중국과 북한을 향한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하였습니다.





'국경언제'라고 표시되어 있는 안내판에서 무시무시한 오타를 발견했습니다. 관광객 주의사항인데... '관광개'(^^)라고 적어 놓았네요. 아마도 우리글 전문가가 없어서 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야들이 정말로 관광객을 ‘개(Dog)’로 여기고 있는 거 아니야?' 하는 뜬금없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단둥 지하교회인 S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교회는 여느 상가처럼 되어 있고, 밖에 십자가도 없어서 모르면 그냥 지나칠 정도였습니다. 성도님은 5~60명 정도 되며, 7번 쫓겨났는데 한 달 뒤에 또 이사 가야 한다고 합니다. S교회 목사님은 천안 고신대에서 신학을 하였다고 합니다. 목회를 위해 한국에서 'G12' 등도 수료하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 목사님 아이디어가 깜찍합니다. 밖에는 십자가를 못 세우니까 교회 천장에 십자가로 등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또, 천장에 등 12개는 12제자를 의미하여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 S교회 내부의 십자가 등과 둘레의 12개 등


찬양과 기도, 교제를 하였으며 선교헌금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막내는 달란트를 발휘하여 기타줄을 완벽하게 교환해 주고 조율을 해 놓았습니다. 


다음은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삼자교회인 C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이곳은 길에서도 한국성예배당이라는 안내를 볼 수 있었습니다. 들어가는 길은 꾀죄죄했지만, 안은 깔끔 그 자체였습니다. 당회장실도 별도로 근사하게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교회 규모도 상당해 보였습니다. 진리 선포를 위한 당부기도와 선교헌금을 드렸습니다. 



 


교회 근처의 한 간판을 보면서 우리나라와 다른 원색적인 발음에 저는 간판을 잘못 읽어 버렸습니다. 중고아빠트 매매를 '중고아빠 매매'로 읽어버려, 우리 팀 모두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여기는 중고 아빠도 매매하는 곳이다^^ 하면서 ...


마지막으로 지하교회인 P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아무 표시가 없어서 교회가 창고인 줄 알았습니다. 그냥 창고 한 칸이 교회였습니다. 성도님은 50명 정도 되는데, 지하교회인 P교회에서 지하 신학생을 양성하여 교회 개척을 도와준다고 합니다. P교회 목사님은 미국에서 신학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역시 자기네 교회가 중간형인 '제3의 교회'라고 귀띔했습니다. 


찬양과 기도, 교제를 하였으며 약간의 선교헌금을 드렸습니다. 우리의 막내는 여기서도 기타를 수선해 주었습니다. P교회 목사님은 길이 서툰 우리를 위하여 고속도로까지 지름길로 차량을 에스코트 해 주시고 귀가하셨습니다.


저녁은 간단하게 휴게소에서 중국 컵 라면으로 때웠습니다. 돌아오는 길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식당에 들를 틈이 없었지요. 봉지라면의 추억을 가지신 분들은 신라면 봉지라면으로 때우셨고요......닭 소시지를 간식으로 먹어봤습니다만, 제 입맛에는 그저 그랬습니다. 라면도 먹을 만은 한데 우리 것이 더 제 입맛에는 맞았더랬습니다.


8시간 왕복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바로 페인트 사역 2차! 남자분들 땀 뻘뻘 흘리며 해 질때까지 열심히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제 서서히 돌아갈 날이 다가옵니다. 그래서, 저녁은 파~뤼~(Party)를 제안했습니다. 원래 먹거리와 분위기 챙기기는 저의 몫입니다. ㅋㅋㅋ

저까지 한 세 명이 10분 거리에 있는 작은 상점에 겁도 없이 '밤마실'을 나갔습니다. 손짓 발짓, 짧은 중국어와 한국을 다녀온 조선족을 만나서 수월하게 미션 완수^^! 우유, 빵, 아이스크림, 과자, 생수를 한 보따리 안고 돌아가서 밤 늦게 넘치는 칼로리를 섭취하며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이날 하루는 너무 강행군이었습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좋지도 않은 도로를 돌고 돌아 8시간 차를 타다니......이건, 광주에서 서울을 하루 만에 왕복하는 엄청난 거리임돠 ㅋㅋ 



(6월 5일 - 여섯 번째 날)

오늘은 좀 여유 있는 날입니다. 심양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시타(서탑/西塔)를 가는 날입니다. 그래 기상도 여유 있게 8시~


심양시내 삼자교회인 S교회를 들렀습니다. 86세 되신 여 목사님을 만나 뵈었는데, 중국 문화혁명[각주:2] 당시에도 신앙을 지키며, 여러 차례 어려움도 많이 겪으셨고 평생 독신으로 지내시며 후진을 양성하셨다고 K목사님으로부터 소개 받았습니다. 중국 기독교사의 산 증인처럼 느껴졌습니다. 


교회는 상당히 컸습니다. 주보를 보니 아직도 본인이 말씀을 전하시는데, 그 영적인 강건함이 부러웠습니다. 


S교회에서 우리 팀은 피아노를 치며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 S 교회 내부


동관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동관교회는 1876년 존 로스 목사님이 세우신 교회인데, 중국에서 가장 큰 교회로 1만명 정도 모인다고 합니다. 로스 목사님은 스코틀란드 출신의 장로교 선교사로 동관교회에서 (불완전하지만) 한국 최초로 우리글 번역을 한 분인데, 이분이 기거하셨던 작업장을 둘러 볼 수 있어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동관교회는 중국에서 문화재급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동관교회 내부는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존 로스 번역 성경 (신약 요한복음 표지)



▲ 동관교회 내부


페인트 사역을 위하여 서둘러 심양으로 귀가를 하였습니다. 러쉬아워와 겹쳐서 돌아가는 길은 더욱 붐볐습니다. 역쉬나~ 벤츠와 당나귀가 공존하는 중국입니다.


양로원에 5시경 도착하여 3차 페인트 사역을 하였습니다. 친절한 할아버지께서(^^) 차분히 작업하라고 사다리며 올라 갈 수 있는 책상들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남자분들은 하는 수 없이 높이높이 올라가 작업을 하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센스, 짱입니다 ^^b




▲ 페인트 사역 중 : 사다리 & 높이 높이


이제 중국에서의 마지막 식사입니다. B교회의 한 여자 집사님께서 저녁에 초대하셨습니다. 이제껏 먹어 본 중 가장 많은 음식이 나온 것 같습니다. 조선족 식당에서 다양한 음식을 대접 받았습니다만, 음식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맛나게 먹었다는... 



▲ 다양한 중국 음식


특색있는 음식으로 ‘초란’이 있었는데요, 우리네 홍어처럼 계란을 삭힌 거라고 합니다. 전, 특이한 음식 먹는 것 좋아해서 냉큼 먹어봤는데 먹어볼 만 합니다. 뒷맛이 약간 발효된 맛이 나니까 특이한 맛을 꺼리시는 분은 안 먹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 초란


식사 후에 2가정을 방문하여 치유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숙소에 도착하니 8시가 넘었습니다. 이렇게 중국에서 우리의 마지막 날이 저물어 갑니다. 슬슬 돌아가 해야 할 밀린 업무 생각이 납니다 ㅠ ㅠ



(6월 6일 - 일곱 번째 날)

오늘은 귀국하는 날입니다.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식사도 포기하고 페인트 마무리 작업을 한 후, 출입문을 폐쇄시켰습니다. 그리고 별도의 통로를 통하여 선교물품을 다 전달해서 가뿐해진 짐들을 들고 그 동안 정들었던 숙소를 나왔습니다.


아침도 굶고 간다는 우리에게 팥죽을 쑤어서 먹고 가라는 할머니 권사님의 성화에 못 이겨 간단히 요기를 하고, 심양 공항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비록, 중국 국적을 지닌 조선족들이지만, 한국사람 특유의 정(情) 문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심양 공항을 출발하여 오후 13시 경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리무진 버스를 타고 광주 터미널에 도착하여 감사기도를 한 후, 아쉬움을 뒤로 남긴 채 해산하여 집에 도착하니 오후 18시 40분 정도... 드디어 6박7일의 장도를 마치고 귀가하였습니다.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역사 해 주시고, 함께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1. 黑猫白猫 :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 1970년대 말부터 덩이 단행한 중국의 경제정책을 말한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이끈 덩이 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뜻으로 한 말로, 80년대 중국 시장경제를 대표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덩의 이러한 개혁ㆍ개방정책에 힘입어 중국은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거듭하면서 세계에 유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탄생시켰다) [본문으로]
  2.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간 중국의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주도된 극좌 사회주의운동. 부르주아 세력의 타파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면서 이를 위해 청소년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 각지마다 청소년으로 구성된 홍위병이 조직되었고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전국을 휩쓸어 중국은 일시에 경직된 사회로 전락하게 되었다. 마오쩌둥에 반대되는 세력은 모두 실각되거나 숙청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