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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 코너/샬롬의 평화칼럼

모큐멘터리 ‘선오브갓(SON OF GOD)’



모큐멘터리 ‘선 오브 갓(SON OF GOD)’



샬롬


며칠 전 다시 한 번 영화를 보았습니다. 초고를 게재한 후 보아서인지 좀 더 차분하게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놓쳤던 부분이나 일부 잘못 인용했던 부분을 발견하였고, (저의 부주의에 용서를 구합니다.) 영화 내용에 좀 더 충실하게 본론 일부를 수정/추가/강화하여 업데이트하였습니다. 결론은 변함이 없습니다만, 자료를 사용하실 때는 업데이트 된 내용을 활용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나는 최근 선 오브 갓( 선오브갓 )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화를 두 번 보았으나, 관람 전 그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미리 밝혀둔다. 심지어는 개봉일도 모르고 있다가 부랴부랴 달려가 볼 정도로 사전 정보가 없었다. 그냥 성경적으로 표현된 영화라고 여기며 볼 분들이 많기 때문에 그 분들 입장에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과연 이 장면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비판적 관점에서 영화를 보기는 하였다. 


그렇게 거듭 보고 나서 내린 결론은 이 영화가 "성경과 아주 미묘하게 부합되지 않는 점이 의외로 많다"이다. 그러나 이 미묘함이 영화적 극적 연출과 성경 말씀의 뒤틈이나 왜곡의 중간 지점에 있는 듯 하였기에, 솔직히 분별하기가 너무 힘들었음을 고백한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문제의식을 가지고 영화를 보지 않으면 크리스천 대다수는 '아멘'로 받을 확률이 아주 높은 영화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영화라는 것이 원래 픽션이고 감독의 창작물인데, 감독의 창작권까지 꼭 성경이라는 잣대로 재야 하는가, 영화는 영화로 봐야지 신앙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든지, 또는 어찌 됐든 잘 봤고 성경 이야기가 많이 나왔으니 그 정도면 괜찮다든지 등등.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일면 타당한 말들이고, 나 또한 그런 면들 때문에 이 영화평을 쓸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을 많이 하였다. 이 영화의 연출력이나 배우들의 호연은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영화는 픽션이지만 성경은 넌픽션이고 변함없는 진리인 것을. 픽션을 넌픽션이라 여기는 혹자들 중 누군가가 아! 이것은 성경대로가 아니라 성경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영화구나 라는 것을  글을 통해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더 진리에 가까워지려 노력하고 성경으로 분별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래서 어느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된다면, 난 내가 보았던 "미묘하게 부합하지 않는 많은 점"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요즘 드라마에는 PPL(간접광고)이 알게 모르게 등장한다. 그 노출 포인트가 치밀한 연출로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것 뿐이지 PPL은 분명히 존재한다. 내가 인식하지 못했다 하여 "그 드라마에 PPL이 없어"라고 여기는 시청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뉴 에이저(New Ager) 제작자인 로마 다우니, 마크 버넷의 경력은 차치하고,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영화를 본 관객들을 위하여 PPL처럼 절묘하게 연출되어 성경말씀과 미묘하게 어긋난 부분들에 관하여 먼저 내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성경 대사를 다수 활용(80-90% 이상)하고 있으나 그 사용 배경이 성경과 다르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미묘함을 캐치해 내기가 쉽지 않다는 데 그 복잡성이 있다. 영화의 흐름을 중심으로 크게 성경과 다른 곳들만 비교해 본다.



1) 갓 탄생한 아기 예수에게 동방박사들 및 목자들이 동시 경배하는 장면

   성경에 따르면, 당시 예수님의 나이는 최소한 2살 이하였고, 동방박사들은 적어도 예수님의 할례(누가복음서 2:21) 이후에 방문하게 된다. 따라서 갓 태어난 아기 예수를 목자들과 동시에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는 것은 시간상 맞지 않는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마태복음 2:16).


2) 예수가 베드로와 최초로 대면한 후 고기를 많이 잡게 하고, 베드로를 제자 삼는 장면

   광야의 묵상 후 갈릴리 호수를 건너 베드로(Peter)를 부르기 시작한다 : "베드로, 시간을 좀 내 주게(Peter, just give me an hour.)" 


우선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은 유혹 장면들이 생략되었다. 또 성경을 보면, '베드로'는 주님이 나중에 갈릴리 해변에서 시몬에게 명명해 주신 이름이다. 극에서는 처음부터 베드로로 불리우며, 예수 또한 시몬을 베드로로 알고 있었던 양 묘사된다(물론 그 분은 전능하시지만 베드로로 부르시기 시작한 시점이 중요하다. 그 때는 신앙고백을 한 때였다. 마태 16:18). 극중 예수는 첫 제자들(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부르는 대신 베드로를 부르고 있으며, 제자로 삼기보다는 베드로에게 간청을 한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마 4:18)


또한, 극중의 예수도 베드로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신다. 정확하게 성경적인 말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어떻게 하실 거죠?" 라고 물을 때, "세상을 바꾸자(Change the world)"라고 답변한다. 과연 극중 예수가 바라는 변화될 그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 영화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 듯 하나, 추측컨대 불행히도 뉴 에이저들이 말하는 그런 세상이 아닐까 싶다(뒤에 이 부분을 다시 언급하련다.) 


3) 제자들과 동시에 나타난 여제자(후에 막달라 마리아로 소개됨) 

   베드로를 제자로 삼음과 동시에 극중 제자들이 순식간에 형성되는데, 시종일관 여제자 한 명이 마치 사도인양 극 전체에 빠짐없이 나타난다. 이 여인은 12사도인 세리 마태보다도 더 먼저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 후에 알게 되지만 막달라 마리아로 불리우는 이 여인은 심지어 극중 사도들보다 더 많은 대사량을 소화하는 저력(?)을 발휘한다. 이유는 영화 속에서 끝내 밝히지 않아 나도 알지 못하겠다. 

영화 속에서..

-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군중들이 배가 고플 것이라고 이야기하여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키게 한 동기유발자이다.

- 막달라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예루살렘 입성 과정에도 12 제자들과 함께 등장한다. 

- 유월절 만찬 후 감람산에서도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 등 제자들과 동행한다. 예수의 체포 순간 제자들이 달아날 때,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 요한과 함께 주의 모친 마리아에게로 달아난다.

-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빌라도의 명령에 의해 채찍을 맞는 장면에서 주의 모친 마리아와 요한과 함께 수 회 클로즈업 된다.

- 막달라 마리아는 십자가 처형 때 예수님이 군중에게 조롱 받을 때도 예수님을 변호하면서 "그 분을 그냥 두시오!"라고 소리지르는 용감한 여성으로 비친다. 아무 말도 못하고 '쪽'도 못 쓰던 남성 제자들과는 전혀 딴 판이다

-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의 제3언으로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의탁할 때도 옆에 있다.

-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주도적으로 수습할 때도 막달라 마리아는 그 옆에 있다. 

- 막달라 마리아는 3일 후 예수님의 무덤을 혼자 찾아간다. 


대조적으로 성경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바로 곁에서 바라본 증인으로, 요한복음에서도 후반부에서 비로소 그 이름이 언급되며, 극중 그녀의 숱한 대사와 액션들은 성경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요 19:25)


4) 어느 세리의 기도가 세리 마태의 기도였던 장면

   극중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앉아 세금을 걷고 있는 세리 마태를 보며, 바리새인과 어느 세리의 기도를 예화로 든다. 극중 세리의 기도는 세리 마태의 기도로 처리되며, 예수님과 마태가 거의 동시에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동시에 말하게 하는 분할 대목은 뛰어난 연출력으로 극의 긴장감을 배가시켰다는 점에서 명장면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성경 누가복음 5장에서 마태는 이미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제자가 되어 있었다(참고: 마 9:9, 막 2:14). 반면 주님이 드신 예화에 나타난 어느 세리의 기도는 누가복음 18장 즈음에 나온다. 성경은 이 세리의 기도를 마태의 기도라고 정의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이 예화의 목적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가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기도가 아니라 세리처럼 통회하는 자의 기도임을 밝히는 데 있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5) 간음한 여인에 대한 처리 장면

   간음한 여인을 잡아와서 예수에게 처리 방법을 묻는 무리에게 예수는 한 손으로 돌을 높이 들고 말을 한다.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로 치라고...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빠져 나가기 시작한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말씀을 땅에 쓰시매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부터 젊은이까지 빠져 나갔다고 묘사했다(요 8:8~9). 물론, 영화의 장면은 극적인 긴장감을 위한 것일 수 있으나, 아무튼 성경과는 상이하다.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 8:8~9) 


Tip : 영어 대사에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투석형으로 벌하려는 무리에게 "자신이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았다고 말하는 첫 사람에게 내가 나의 돌을 주겠소"라고 예수가 한 말은 성경을 뒤튼 표현이다. 주님은 "내 돌을 주겠다"고 하신 적이 없을 뿐더러 퍽 특이한 표현이다. [참고로, 영어에서 '내 돌(my stone)'이라는 식으로 소유격 대명사와 함께 표현될 때, 현대 영어권 사회에서는 자칫 엉뚱한 암시(예를 들면 stone의 비속적 어의 한 가지는 '고환'이다)로 들릴 수도 있다. 이런 뉘앙스를 제작자/감독/배역들이 모를 리가 없다.] 


6)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 장면

  오병이어(떡 5덩이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 이상을 먹이심)의 기적 이후 예수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묻는다. 이 때 베드로는 그 유명한 마 16:16의 고백을 한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자 예수는 베드로를 축복한다.


일견 맞는 표현처럼 보인다. 많이들 알고 외우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상의 배경은 전혀 다르다. 성경에서는 오병이어 기적 직후 주님은 물 위를 걸으시고, 자신도 물 위로 걷다가 물 속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건져 주시고, 가나안 여인의 귀신 들린 딸도 고치시고, 4,000명을 또 먹이셨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표적을 구하는 그때에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시며(마 16:4) 제자들에게 비로소 자기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위 질문을 물으셨다. 그리고, 베드로의 이 고백은 제자들에게만 공개된 일급 비밀이었음을 알 수 있다(마 16:20).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 16:13,20)


7) 물에 빠지는 베드로를 건지는 장면

베드로의 고백과 메시아라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물을 건너오라"는 명령과 함께 예수는 제자들보다 앞서 떠나고, 이후 장면에서 예수님은 풍랑을 만난 배 주위에 홀연히 나타나 물 위를 걸어 나타나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오너라’라고 말하며 베드로를 향해 손을 내민다. 이 말씀에 자신도 믿음으로 바다 위를 걷던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물에 빠지자, 예수는 베드로를 건져낸다.


그러나 성경은 오병이어 사건 후 예수님은 무리를 보내는 동안 제자들이 먼저 건너 편으로 가게 하신 뒤,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신다. 풍랑을 만나 갖은 힘을 써 가며 고생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몸소 물 위로 걸어와 그들을 구조해 주신다(막 6:48). 그러자 배에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 경배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데(마 14:33), 이는 제자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완전한 명칭으로 부른 사건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이같은 믿음의 바탕과 배경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마태복음 7장 제자들과 동일한 고백이기도 하다. 


또한, 영화는 물에서 건져진 베드로가 정신을 차리는 장면에서 끝나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매 바람이 그치었음을 나타낸다. 이는 주님이 진실로 천지의 주인이심을 나타내며, 우리 인생의 풍랑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함(같은 배를 타야 함)을 성경이 알려주는 듯 한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 편으로 가게 하시고...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 14:22,32,33)


8) 나사로의 부활 장면

   영화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폭동 장면 이후 군중 속을 걸어가다 막달라 마리아가 마르다가 우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마르다가 예수께 나아와 나사로의 죽음을 알린다. 이에 예수는“"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과 함께 나사로의 머리에 입 맞추자 나사로가 부활한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다. 성경은 나사로의 부활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요 11:43-44) 이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이 그대로 드러난 말씀이다. 영화에서는 입을 맞추자 나사로가 부활한다. 이 정도 쯤이야 영화적 연출이라 관대하게 봐 준다 하더라도 실상 '입맞춤'은 영화 후반에서 또 하나의 장치로 등장하게 된다. 이 부분은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장면에서 좀 더 다루련다.






9) 빌라도 아내 '클라우디아' 등장

   극중에서 총독 빌라도의 아내 이름은 '클라우디아'이다. 영화인데 이것이 무슨 문제가 되나 생각할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빌라도의 아내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카톨릭 전승의 충실한 전달자인 앤 캐서린 에머릭 수녀의 개인적 환상을 바탕으로 지은「그리스도의 수난」에는 이러한 표현이 있다. "빌라도의 궁전 뒤쪽에는 테라스와 정원이 많았다. 그리고 한 채의 저택이 있었다. 정원은 총독의 궁전과 그의 부인 클라우디아 프로클레스의 처소 중간에 있었다." 또한, 카톨릭의 교회 상식에서도 빌라도 부인의 이름을 클라우디아라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방 정교회 일부(하베샤 교파, 일명 아비시니아 교파)는 빌라도와 그의 부인인 클라우디아 프로쿨라를 성인으로 추앙하며 7월 25일과 10월 27일을 축일로 경축한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보건대 이 이름이 어찌 상상의 소산이겠는가? 카톨릭의 전승과 외경이 상당 부분 참조된 것으로 보인다. 


10)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모친을 만나는 장면

 영화에서 예수는 나사렛에서 모친을 만나게 되며, 혼자 지내고 있는 듯 보이는 마리아가 아들을 반겨 맞이한다. 예수님은 나가서 이사야서를 읽는데 우리 귀에 익숙한 말씀이 들린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이 장면 이후부터 주의 모친 마리아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후 마리아의 주된 대사는 "내 아들"(My son)이다. 성경에서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 받으시고 이후 가버나움으로 옮겨 사역을 계속하게 됨을 나타내고 있다. 영화에서는 적대적인 바리새인을 제외하고 예수님께서 민중의 환영을 받는 부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눅 4:16-18, 21, 28-29) ]


또한 성경에서, 예수님은 고향(나사렛)에서 환영 받지 못하였으며(마13:57) 어머니 마리아는 한 때 예수님의 동생들과 함께 예수님이 "미쳤다" 하여 그를 잡으러 다닌 적도 있다. 그런데도 영화에서는 은근슬쩍 예수님이 마리아의 유일한 아들이며, 마리아는 예수님을 철저히 지지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막3:21, 31~32)


11) 예수가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은 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장면

   적대적인 바리새인에게 세례(침례) 요한의 죽음을 들은 후 "이제 시작되었고, 나는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다(It has begun. I'll go on to Jerusalem)라고 말하고 예루살렘으로 떠난다. 무엇이 시작되었고, 왜 예루살렘으로 가는 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 입성 후 베드로의 "우리가 바라는 건 평화 (peace)"라는 답변을 통해 예루살렘 입성의 목적이 (모종의) 평화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자신이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의 길을 가려고 하심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전에 이미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이르셨다.(마 20:17~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 20:17-19) 


12) 예루살렘 입성 후 장면

① 우리가 바라는 건 평화

   영화 속의 예수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오다 바라바와 대면하는데 바라바는 혁명적 메시아를 요구하였으나 이에 대하여 베드로는 "우리가 바라는 건 평화(peace)"라고 답변한다.


베드로가 말하는 '평화'가 성경에서 말하는 샬롬인지, 아니면 단순한 비폭력적 저항을 의미하는지 모호한 발언이다. 

더욱이 주님은 이런 역설적인 말씀도 하고 계신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눅 12:51)


② 성전 훼파를 예언

  영화에서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 후 유다는 어디론가 혼자 사라지고,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있는 중에 니고데모와 성전세에 대하여 논쟁을 하였다. 그 후 길을 가다 한 어린아이와 마주치는데, 그 아이와 장난을 치듯 이마를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한다. 무시무시한 예언을 하면서 아이와 장난을? 참으로 이해되지 않은 장면이다. 

성경은 오히려 예루살렘의 훼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안타깝게 생각하며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는지 잘 보여준다(마 23:37). 오죽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울며 따라오는 큰 무리를 향해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향하여 울라고 하셨겠는가(마 23:27~28)?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마 23:27~28) 


아울러 니고데모와 성전세에 대하여 논쟁을 하다니 성경에도 없거니와 어불성설이다. 주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오직 한밤중에 찾아온 그에게 거듭남에 관한 대담을 나누었을 뿐이다(요한복음 3:1~21 참조). 


③ 니고데모와의 대화 장면

  예수는 홀로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요한복음 3장의 내용 일부를 말해 준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3: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복음의 핵심은 요한복음 3:16-21에 간추려져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들을 죄와 그 형벌에서 구출해 주시려고 함이다. 바로 그것이, 복음은 모든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소식인 이유이다. 전능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재자(중보)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주 예수님 그리스도 뿐이다.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우리들을 땅 끝까지 이르러 그분의 제자들을 삼을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예수님은 죄와 그 정당한 형벌에 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뉴에이지의 특징이다), 우리가 회개와 믿음으로 새 피조물이 되어야 할 필요성도 알리지 않는다. 다만 새 길, 더 나은 세상 또는 더 행복하고 더 평화로운 삶으로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④ 환상을 통해 자신이 미래를 알게 되는 예수: 수동적 예수


 저녁 식사 즈음 환상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된 예수는, "내가 죽기 전에(before I die)하는 마지막 식사라며,  (본을 보이노니) 이것을 함으로 나를 기억하라"며 유월절 만찬을 시작하신다. "너희가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는 말에 제자들은 동요하고, 예수는 가룟 유다에게 서두르라고 명령하자 유다가 밖으로 나가다.


서둘러 만찬을 끝내고 나가는 예수님을 뒤따라 베드로가 "난 랍비를 버리지 않는다"고 말하자, 기쁜 표정으로 베드로를 포옹하던 순간 (환상을 보는 듯) 잠시의 침묵 후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할 것을 말하신다. 


감람산에서 예수는 또다시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환상을 본다.


이처럼 영화에서는 예수가 환상을 통하여 자신이 당할 일을 비로소 알게 되나, 여기에 언급된 부분외에도 수회 그런 장면이 연출되었다. 성경의 예수님은 삼위일체 중 제2위의 하나님으로 전지전능하시며, 그때그때의 환상에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성령충만함으로 스스로 아시는 분이시며 자기를 사람에게 의탁치 않으신 분이다. 예수님은 그저 단순하게 아무런 감정 없이 계시를 전달하기만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예수님은 계시의 원천이시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영화의 러닝타임 2시간 18분중 1시간 13분경부터 예수님의 수난이 예고된다. 비록, 그 잔인성은 많이 중화되었을 지라도 예수의 수난에 그 포인트가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는 분량이다. 고난 없는 십자가는 없음은 사실이나 예수님은 고난이 아니라 긍극적인 승리를 위하여 오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현재 예수님은 고난 당한 어린양으로만 계신가? 아니다!!! 부활 승천 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는 살아계신 분이시다. 할렐루야~!


⑤ 영지주의적 내용인 유다 복음서적 장면들

   예수의 예루살렘 훼파 예언 후 유다는 은밀히 성전에서 대제사장을 만난다. 유다는 민족의 파멸까지도 말하는 대제사장의 말에 심히 고민을 한다. 대제사장은 유다에게 ‘그(예수)를 은밀히 이리로 데려오게’라고 말을 한다. 유다는 그 댓가를 요구하며, 대제사장은 그에게 돈을 준다.


다음 장면인 유월절 만찬 전 유다의 표정은 밝다. (대제사장의 말에 고민은 되었을지라도 선생을 대제사장에게 넘김이 죽음까지는 갈 위기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수는 유월절 만찬중 "너희 모두가 나를 버릴 것이다"라는 말을 한다. 이를 들은 유다는 "전 랍비를 팔지 않아요."라고 답변한다. 그런데도 예수는 "서둘러라"(Do it's quickly)라고 명령한다. 딴 제자들이 유다의 배신을 알자 베드로가 막으려고 하지만, 예수는 베드로에게 그냥 놔 두라고 말한다. 유다는 밖으로 나와서 불안정한 모습으로 구토를 해댄다. 


유다는 대제사장에게 위협당하다시피 해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겟세마네로 군인들을 인도한다. 유다는 예수께 입을 맞추는데... 이 장면에서도 유다의 당황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표현되었다. 


여러 차례 영화를 보다 보니 심지어는 유다의 고뇌하는 모습까지도 보인다. 마치 유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위하여 억지로 악역을 도맡은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영지주의적인 신약 외경의 하나인 유다 복음서가 연상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억지로 하기 싫은 일을 시키거나, 독려하신 사례가 없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욕심과 의지로 예수님을 팔았으며, 돈궤를 맡아 있으면서 거기 있는 것을 훔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유다조차도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하시며 긍휼히 여기신 분이시다. 또한, 제자들은 유다가 나가는 영문을 끝까지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요13:27~29).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요12:6)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막14:21)


  ※ 유다 복음서: '유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가룟 유다 사이에서 이루어진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고 알려진 영지주의 복음의 하나이다. 이 문서가 유다 자신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고는 주장되지 않으며, 오히려 영지주의적 예수 추종자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고 본다. 현재는 4세기에 쓰여진 콥트어 문서로 남아있다. 신약성서에 속하는 외경 중의 하나로, 나그함마디 문서와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적인 시각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실제로는 예수님의 명령이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3) 예수가 감람산에서 체포되는 장면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는 고통스런 모습으로 예수와 함께 감람산으로 향한다. 예수의 간절한 겟세마네 기도 장면은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온 제자들과 함께였다. 가룟 유다와 함께 온 로마 병정들의 등장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라버리게 되고, 예수는 잘린 귀를 고쳐준다. 제자들은 흩어지며 (전술한 대로)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 요한과 함께 주의 모친 마리아에게로 달아난다.


그러나 성경은 주님과 주의 제자들은 하나님을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향하였다(막14:22, 26)고 말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감람산을 가시던 도중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영화 내용과는 달리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베드로/야고보/요한, 셋만 데리고 가셨다(막 14:32~33).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가니라"(막14:22, 26)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막 14:32~33)  


14)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요한이 예수의 모친 마리아를 만나는 장면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 요한과 함께 예수의 모친 마리아에게 피하게 되는데, 이 때 마리아는 아들이 어디 있는지("Where is my son?")를 계속해서 묻는다. 


어머니가 아들을 찾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될 수 있겠나마는, 영화에서는 마리아의 등장 장면부터가 시종일관 예수님의 든든한 지지자인 양 미화되었다. 이 장면부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SON OF GOD)보다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은근히 부각되기 시작한다. 필자의 기우인 지 아닌 지, 마리아를 감독이 어떻게 그려내는 지는 다음 내용들을 통해서 보자.


- 예수가 빌라도의 명령에 의해 채찍을 맞는 장면에서만 모친 마리아는 단독, 또는 막달라 마리아와 투샷으로 14회 이상 클로즈업 된다.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넘어지는 장면에서 마리아는 "내 아들아(My son)!"를 외친다. 그리고 예수님을 터치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워 준다. (*19. '십자가를 지고 가다 넘어지신 예수를 격려하는 마리아' 설명 참조)

- 예수의 십자가 장면을 막달라 마리아, 요한과 함께 보면서 마리아가 다시 "내 아들아!(My son)"라고 외친다.

- 가상칠언(架上七言)중 제3언 곧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장면: 예수가 마리아를 향해 '어머니'(Mother)라고 힘겹게 말을 건낸다.(*22. '십자가상의 가상 칠언' 장면 설명 참조)

-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릴 때, 마리아가 주도적으로 일을 처리한다(*23. '예수의 시신 수습' 장면 설명 참조)


15) 가야바의 심문장 장면

 니고데모는 가야바의 심문에 반대한다. 가야바의 심문장에 참여한 니고데모는 예수께 "하나님의 아들인가(Are you the son of God)?"라고 묻자, 예수는 I'am(그렇다).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대제사장은 옷을 찢고 유죄를 선고한다.


영화에서의 니고데모는 절박한 마음으로 그가 인자인지 아닌지를 묻었으나,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니고데모의 질문이 유죄판결을 가져오는 중요한 포인트가 되어버렸다. 성경에서는 가야바의 심문장에 니고데모는 등장하지 않으며, 심문의 주도권이 대제사장에게 있었음과 그의 물음이 믿음이 아닌 정죄를 위함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마 26:63-65)] 


16)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否認) 장면

  베드로는 동일한 장소에서 병사와 여종 앞에서 2번이나 "나는 그를 모른다(I don't know him)'며 예수를 부인하게 되고, 이 때 새벽 닭이 운다. 그리고는 죄책감에 제자들을 피하여 숨어버린다.


성경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으되 그 장소는 점점 예수님께 가까워지고 있는 동시에 부인의 강도 또한 점점 세지고 있는('알지 못한다' → 맹세하고 부인하면서 '알지 못한다'고 → 저주하고 맹세하여 '알지 못한다'고 한)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아마도, 이 상황에서 베드로는 생명의 위급함까지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어찌 됐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셔서 이미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셨으며(눅 22:32), 베드로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긍휼의 눈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셔서(눅 22:61) 그가 회개의 마음을 갖도록 역사하셨다. 어찌 보면 영화보다 성경이 훨씬 더 디테일하고, 드라마틱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님과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님과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마 26:69-70) 


"...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 22:60~22)


17) 빌라도의 퇴장 장면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빌라도는 흥분한 이스라엘 군중 앞에서 아무 말 없이 손을 씻고 떠나버린다.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영화에서는 설명이 나오지 않는다.

반면 성경은 빌라도의 이 행위가 자신의 '무죄'함과, 죄책을 이스라엘에게 전가함을 의미하며, 그 백성은 심지어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는 무시무시한 말까지 서슴없이 하는 무지함을 보여 준다(마 27:24~26). 이런 무지함을 영화에서는 왜 부각시키지 않았을까? 영화에서는 설명을 하지 않으니 알 수 없으나, 현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감정적 고려가 감독으로 하여금 이토록이나 생생한 장면을 생략하게 하지 않았을까고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마27:24~26)


18) 십자가 처형 전 예수가 십자가에 입맞추는 장면

  성경에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은 대목이다. 감독의 '창작권'으로 치부할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이 장면에 감독의 의도가 드러나 있다면 단순한 창작으로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장면은 환상과 입신을 바탕으로 철저히 카톨릭적 시각과 전승과 전설들을 혼합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록한 앤 캐서린 에머릭 수녀의 글 일부를 그대로 차용한 장면 같다.  


그녀의 글을 한 번 보자 : 그들은 곧 주님의 양팔을 십자가의 중앙부에 묶었다. 주님은 그 곁에서 무릎을 꿇으신 다음, 거룩한 두 팔로 그것을 안고 세 번의 입맞춤을 통하여 구속의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리셨다. 이교도들에게는 제사장들이 새 제단을 끌어안는 관습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피묻은 속죄의 희생을 바치는 존엄한 제단인 당신의 십자가를 안으셨다. 궁수들은 잠시 후 주님을 일으켰다가 다시 무릎을 꿇렸다.


얼마나 유사하고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는지 영화를 본 독자들은 알 것이다. 결국 이 장면은 감독의 친 카톨릭적이며, 친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은밀히 나타낸 계획된 연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 십자가를 지고 가다 넘어진 예수를 격려하는 마리아

전술한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다 넘어지는 장면에서 마리아는 "내 아들아(My son)!"라고 외치고 예수께 다가간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두려워하지 마세요” 라고 말한다. 마리아 또한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예수님을 터치하며 예수님의 넘어진 십자가를 세워 준다. 


이 또한 성경에는 없는 대목이다. 마리아 또한 사람인지라 애끓는 모정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우리 주님 예수께서 가신 길은 한 여자의 아들로서가 아닌, 온 인류를 위한 대속의 길이니 성경이 그리 표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앤 캐서린 에머릭 수녀의 글을 다시 한 번 보자 : 그녀(주의 모친 마리아)는 주님을 모욕하며 학대하는 무리 속으로 갑자기 뛰어들어가 주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와락 껴안았다. 내(에머릭 자신)가 (환상중) 들은 유일한 말은 "사랑하는 내 아들!"과 "어머니"뿐이었다. 주님과 마리아가 다른 말들을 나눴는지, 아니면 정말 이 말만 했는지 모르겠다. 


20)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지는 장면 

  병정들이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으나, 예수가 넘어지자 곁에 있던 사람을 시켜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한다. 검은 피부를 가진 그의 첫 마디는 "주님(My Lord)!"이었다.


하지만 성경은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음을 알려준다(막 15:21). 혹 후에 그가 예수님을 믿었을지라도 구레네 사람 시몬은 주님의 십자가를 기쁜 마음이 아니라 억지로 지고 갔다는 말이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 15:21). 


21) 여인이 쓰러진 예수의 상처를 흰 천으로 닦는 장면

  극중 어느 여인(아마도 초반부에서 간음한 여인으로 잠시 등장한 듯)이 예수가 쓰러지자 번개처럼 나타나 예수의 상처를 흰 천으로 닦고 바람처럼 사라진다. 예수의 고난이 불쌍하거나 안타깝다는 맘 보다는 뭔가 신비스런 느낌을 주는 장면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보면 이는 성물(聖物) 숭배를 위함이다. 

성경에는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은 부분 중 하나다. 필시 어디선가 모티브를 얻었을 텐데 유사한 장면이 앤 캐서린 에머릭 수녀의 '그리스도의 수난' 중에서 '베로니카의 베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이 용감한 여인은 세라비아다. 대담하게도, 그녀는 분노한 폭도들과 맞섰다. 그녀는 성전에 속한 공회원인 시라크의 아내였다. 이 여인은 후대에 베로니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그녀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베일을 건내면서 말했다. "내 주의 얼굴을 닦도록 허락해 주소서." 예수님은 왼손으로 베일을 잡으시고 피묻은 얼굴을 닦으신 뒤 고맙다고 하시면서 돌려주셨다. 세라비아는 베일에 입을 맞추고 그것을 옷자락 속에 감추었다... 세라비아는 집에 가자마자 양모 베일을 탁자 위해 올려 놓고, 넋 나간 듯이 무릎을 꿇었다. ... 그 때 주님의 피묻은 얼굴이 거의 그대로 찍힌 베일을 보고는 놀라워 했다... 베로니카는 죽을 때까지 이 베일을 머리맡에 두고 간직했고, 그녀가 죽은 후에는 주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전달되었으며, 나중에 사도들의 손에 들어가 교회에 전해져 내려왔다.


22) 십자가상의 가상 칠언 장면

  십자가 위의 가상칠언 장면은 영화에서도 성경의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다만 제 3언의 경우는 성경과 약간 차이가 있다. 극중 예수의 주변에는 모친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요한이 있고, 예수는 "어머니(Mother)"라고 힘겹게 부르며 제자 요한에게 마리아를 의탁한다.


성경에서는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 19:26)"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분의 어머니,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요한이 함께 하였다(요 19:25).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우리들이 죄로 인하여 여러 가지 슬픈 일을 많이 겪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슬픔 한 가지는 자녀를 일찍 잃는 것-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일 것이다. 로마 병사에게 고난을 당한 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분명히 갈기갈기 찢겼을 것이다. 아마도 마리아는 33년 전 성전에서 시므온이 한 예언("이 아이로 인해 칼이 그대의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 2:35)을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어머니를 십자가상에서 내려다 보시며 주님 또한 어머니로 인하여 맘이 아플셨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당신의 고초 당하심이 한 어미의 아들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메시아로서의 대속의 고난과 죽으심이기에 어머니를 "여자여(헬라어 '귀네'-모든 연령층의 여성에게 쓸 수 있는 호칭)라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자신을 "여자여!"라고 부르는 의미를 알았을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요 19:25-26) 


23) 예수의 시신 수습 장면

  예수의 시신 수습 씬은 어머니 마리아가 노골적으로 부각되는 장면 중 하나다. 흰 천을 십자가에 달아 시신을 내리는데, 그런 예수를 마리아가 안아서 내리며, 이어서 요한은 예수의 머리에 씌어진 가시관을 벗겨낸다.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을 정성스럽게 닦기 시작한다. 이 장면을 니고데모, 요한,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이 내려다보고 있다. 니고데모는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성경은 마리아가 이 일을 주도한 것이 아님을 밝히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시체는 아리마대 요셉이 주도하여 내렸으며, 니고데모는 시신수습을 위해 가져온 물품들을 급히 조달했고, 이 광경을 주의 모친 마리아가 아닌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마리아의 모성과 예수님의 인성을 가장 크게 부각시키려는 듯 성경과는 전혀 다르게 연출되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막 15:42-47)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요 19:38~40)


24) 예수의 부활 확인 장면

  막달라 마리아는 3일 후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다. 무덤 문은 깨져 있고 예수의 시신은 없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와 대화를 나눈 뒤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 소식을 알린다. 


성경은 막달라 마리아 뿐 아니라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으로 나타난다(막 16:1-2). 큰 무덤문은 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굴려져 있었으며, 그들이 무덤에서 최초로 만난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흰 옷 입은 한 청년(천사)였다.


25) 예수의 부활 확인 후 베드로의 성찬 집례 장면

  예수의 부활을 확인한 뒤 베드로는 예수의 옷을 가지고 나온다. 이 장면 또한 영화에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성물(聖物) 숭배를 연상케 한다. 그 다음엔 곧 바로 베드로의 성찬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한 베드로는 가장 먼저 이 것은 그의 몸이요(his body), 이 것은 그의 피로다(his blood)라며 빵과 포도주를 나누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초대 교황' 베드로가, 최초로 성찬을 집례하였고, 그에게만 그러한 권리가 부여된 것임을 보이려는 의도처럼 느껴졌다.  


26) 부활 후 예수가 요한에게 나타난 장면

  영화 첫 머리와 영화 내내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자신이 예수와 함께 지낸 과거를 회상하면서 해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영화 끝머리에서 요한의 해설이 멈춰지면서 예수가 나타나 확신시키는 미소로 "이제 더는 죽음, 고통과 울음이 없다. 나는 곧 온다(I'm coming soon)"고 선언한 뒤 눈을 깜박이고는 사라진다. 


그러나 성경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예수님은 "그 분(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죽음이 더 있지 않을 것이며, 애곡이나 울음도, 고통도 더 없을 것이니, 이전 것들이 지나갔음이라"라고 하신다. 주님은 요한에게 오직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유일한 구주로 믿는 크리스천들만이 볼 것이고, 살 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 주신 뒤에 이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마치 관객들 모두가 이것을 함께 포괄적으로 누리게 될 것인 양 은근히 묘사해 놓았다. 



  이상은 정말 단순하게 성경을 중심으로 이 영화와 성경이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만 살펴본 것이다. 정리하다 보니, 생각보다 성경과 다른 부분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에 나 또한 깜짝 놀라게 되었다. 


종합해 보면, 성경은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500년에 걸쳐 40명의 저자가 기록했을지라도 시대와 상황을 초월한 일관성과 지속성이 있으며, 이것이 구속사적으로 모이게 마련이다. 성경기록에는 질서와 영적 원리가 스며 있게 마련인데, 이것을 무시한 배열과 장황한 상황묘사 또는 성경적 언어 사용은 당연히 성경의 기록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뿌리게 된다. 영화에서는 이것이 곧 제작의도인 셈이며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 영화가 과연 기독적인가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이제부터는 제작자의 기본적 사상과 배경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제작의도를 충분히 알려면 어떤 성향의 사람이 제작했는지 아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이 부분은 다른 비평가분들의 자료를 다수 참조했음을 미리 알린다).


뉴 에이저(New Ager) 제작자 : 로마 다우니, 마크 버넷


 '선 오브 갓'의 제작자 다우니와 버넷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완전히 뉴에이저들이다. 둘이 가정초점(FOF)과 인터뷰를 할 때, 자신들은 크리스천으로서 주님이 이 시리즈를 만들도록 부르셨다고 주장했다. 다우니는 자신이 (TV 시리즈였던) '천사에게 만져져서'(Touched be an Angel)에 출연했을 당시, 성령께 자신을 채워달라고 기도했다고 '간증'했다. 사실 이 주장과 간증은 다 뉴에이지를 겉포장한 거짓에 불과하다. 


이 불편한 진실은 다우니가 다른 데서 밝힌 진상에서 드러난다. 즉 (오프라 윈프리가 적극 소개하고 장려해온) 뉴에이저 명사 에크하트 톨, 토니 로빈스의 책과 테이프 가운데서 골라 자기 차 안에서 들었다면서 "나의 남편(마크 버넷)이 내게 말하길 내가 너무나도 자기 각성을 획득한 나머지 실제로 공중에 둥둥 떠 있다(이것은 실제 공중부양술보다는 비유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고 했다. 톨은 자신의 힌두교/불교/도교/(일본)신도교 철학으로 성경을 왜곡시켜온 대표적인 뉴에이저, 종교혼합주의자이다. 

다우니는 또 뉴에이지 전문대학인 산타모니카 대학교에서 '영성심리학'을 공부했다. 이곳에서의 영성심리학은 뉴에이지 사상과 의식의 진화를 가르치고 증진하는 학문이며,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의 매일 삶의 경험을 영적 진화의 사다리의 계단으로 바꾸는 테크놀로지"이다. 


영매/교령사/사이킥(초능력자=심령술사)인 존 에드워드('크로싱 오버' 대표)는 (이 영화의 원 소스인 시리즈에 대하여) "내가 구태여 심령술사(초능력자)가 아니더라도 이 미니시리즈는 (나에게) 스펙태큘러할 것"이라고 트위팅을 했다. 다우니는 사이파이 채널 쇼의 초청으로 에드워드와 함께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에드워드의 도움으로 자신이 10살 때 죽은 어머니 '모린'과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것은 성경에서 철저히 금지한 "죽은 자와의 교제(necromancy)"이다. 물론 여기서 '모린'으로 등장하는 존재는 유령을 흉내낸 악령이다. 더욱이 다우니는 에드워드와 함께 책을 쓰기도 했는데 그 책에서 에드워드는 카톨릭식 십자가 목걸이를 쥐고 마리아에게 드리는 묵주기도를 장려했다. 뉴에이저이자 심지어 방송에서 영매를 통해 그녀의 죽은 엄마와 '접신'행위 까지 한 로마 다우니는 이 영화에서 예수의 모친 마리아역을 연기했다. 접신자가 한 마리아 역할이라 ......


'선 오브 갓' 제작사 라이트워커스(Lightworkers) 미디어와와 같은 이름의 뉴에이지 사이트 라이트워커스 (Lightworkers)가 증진하는 뉴에이지의 소위 "마스터(승천대사) 예수 사난다"의 모습과 '선 오브 갓'에 나오는 예수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단순히 우연의 일치일까? 잘 판단해볼 일이다. 뉴 에이저들에게 예수는 유일한 구원자가 아니라 진리를 깨달은 선한 존재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그들의 영적 이끔이로써 '예수라는 존재'를 이용하는 것이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예수는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코 일치 하지 않음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여기서 말하는 평화와 새로운 시대가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고 궁금했더랬다. 개인적으로 엔딩곡을 들으니 이 영화의 실체(?)를 잘 알 수 있었다. 나는 영화를 자주 보진 않지만, 보게 되면꼭 마지막까지 자리에 앉아 있는 스타일이다. 성룡 영화 같은 경우는 촬영수기 같은 엔딩이 더 재미있기도 하고 사실 앞서 놓쳤던 부분들을 다시 엿보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엔딩곡은 "Mary, Did You Know(마리아, 당신은 알고 있었나요)?"이다.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마리아 당신은 알고 있었나요'로 시작되는 가사와 함께 화자가 마리아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듯 예수의 일대기를 표현하는 음악 전개방식 방식은 다른 뮤직 비디오와 다른 차별점으로 어필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의 주인공은 SON OF GOD이 아니라 Mary 곧 마리아라고 보는 건 지나친 억측일까? 

더구나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실로 그린(Cee Lo Green)은 평소 F---자 욕을 잘하기로 악명이 높고(참고: > ), 'F--- You'라는 제목의 노래도 불렀다고 한다.[각주:1] 그의 더럽고 거친 입에서 어떤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물론 버넷-다우니 부부가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그런 그에게 거룩한(?) 주제의 이런 영화의 엔딩송을 맡겼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신독적이다. 



결론


  이와 같은 이유로 본 영화는 일부 성도들이 여기듯 성경을 충실하게 고증한 다큐멘터리적 영화, 성경에 충실한 영화가 아니라, 성경을 모티브로 유대인적 사고와 카톨릭의 전승, 외경, 그리고 뉴에이저인 제작자의 사상이 은연중에 나타나 있는 혼합적 성격을 지닌 영화이다. 바로 그래서 나는 이 영화에다 '모큐멘터리'라는 초두를 달았다. 어찌 됐든 영화는 상업성과 화제성을 바탕으로 만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혹자들의 말대로 영화는 영화로만 보기를 권한다. 본 영화는 성경의 일부분만을 인용한 철저히 상업적이고, 뉴에이지적, 카톨릭적인 영화이다. 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화 속에서 진리를 찾고 아멘으로 화답하려는 부질 없는 노력을 하지 않길 바란다. 진리는 오직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분을 나타낸 성경을 통해서만 바르고 정확하게 나타날 뿐이다. 성경 외에서 진리를 구하려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의 행태에서 이제 벗어날 때이다. 


참고: 흥미롭게도 교계의 문제명사 릭 워렌은 이 영화가 제작되면서 이미 이 영화에 기초한 커리큘럼을 써서 남침례교의 라이프웨이 출판사를 통해 발행한 바 있다. 또 미국의 최대급 교회인 레이크우드 교회의 조엘/빅토리아 오스틴 목사 부부도 티킷 8,000매를 구입해 교회에 배포했다. 그밖에도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아이면서 메가처치 목회자인 T.D. 제익스 목사, 천주교 로스앤젤레스 대교구의 호제이 고메즈 대주교가 영화 보급을 후원하였다. 즉 이미 미니시리즈에서 문제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영화 내용에 상관 없이 에큐메니칼적이고 대대적인 지원을 '교계'에서 받아왔다는 뜻이겠다. 



참고자료: 

그리스도의 수난(앤 캐서린 에머릭 지음)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183

http://blog.naver.com/yoochinw/

기독교 논평가 서니 쉘의 논평

'더 래스트 하이커' 블로그

네이버 지식인.

  1. 그의 크리스마스 앨범 '레이디 킬러'의 3번째 곡목인 이 노래에는 'f---' 낱말이 16회, 또다른 쌍소리인 s---, a--, 흑인을 비하하는 'n' 낱말 등이 여러 번 반복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