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언은 옾션 아닌 필수!
참고본문: 코린토A서(고전): 14'2b
천국가기까지 영언(靈言='방언')을 한 마디도 "못"하고, 아니, 안 하고(!) 가는 아쉬운 성도들의 경우를 보곤 합니다. 그런 분들 가운데는 평소 영언을 하나의 옾션으로 여기고, "해도 좋고 안 해도 되는 것"쯤으로 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1
다름 아닌 제 부모님도 그러실 뻔 했습니다. 그러나 두 분 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저의 열띤 권고와 기도로 영언을 시작하셔서 그나마 큰 다행이었으며, 제게 큰 위로가 됐습니다.
영언은 성도 누구나 해야 하는 의무이고, 반드시 지녀야 하는 필수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자 누구에게나 따르는 다섯 가지 표징들 가운데 하나로 영언을 나열하셨습니다(마르코스복음서=맑 16'17,18). 어떤 분들은 맑 16'17,18의 다섯 표징들을 성도들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닌, 사도들이나 극소수의 일부 신자들을 위한 '은사'라고 주장하는데,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
악령들은 누구나 쫓아야 하며, 뱀이나 독극물 등 위험도 누구나 막아야 하고, 환자들 역시 신자 누구나 고치고 돌봐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저는 이 모두를 겪었고 실천한 바 있습니다. 독자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아멘! 2
마찬가지로, 영언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따르는 신자의 표징들의 하나이며, 따라서 누구나 해야 합니다! 영언을 '옾션'이라고 생각하고 할까 말까 망서리면서 기다리기엔, 이 마지막 때 갈 길이 너무 바쁘지 않나요? 길어야 고작 100년인 짧은 인생, 한 시간이라도 영언을 더 하다가 주님께 가야 하는 아쉬운 시간이라고 생각지 않으세요? 3
영언을 비성경적이다, 마귀의 것이다, 이런 '신학'적 논란들...이미 저의 어릴 적부터 정말 지긋지긋하게 들어왔는데요.. 다 허송세월감입니다.
그러면, 영언을 하는 제가 마귀의 사람이고 마귀의 종이라는 겁니까? 왜 선하고 좋으신 성령님이 제게 악한 것을 주실까요???
제가 단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역지사지 격으로, 영언을 '마귀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안 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영언을 안/못 하게 막고 있는 사람들--바로 그들이 마귀의 종 노릇 하고 있음을 불행히도 자신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영언을 새로 시작하게 된 사람들은 과거에 자신도 모르게 마귀의 종 노릇했음을 후회하고 회개하곤 합니다.
그리고..영언은 과거의 것이었지 오늘날의 성도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면서, 성경책만 가지면 만사 오케이라는 오해도 있지요.
아, 그래요? 성경책만 갖고도 다 오케이라고요..? 그렇다면 왜 주님은 "그대들이 성령을 받아모시면, 권능을 받아서.."(행전 1'8a)라고 말씀하셨나요? 성경책만 달랑 갖고 있으면, 성령도 권능도 은사도 필요 없이, 전도도 뭐도 다 오케이인가요? 권능이 뭔데요? 권능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죠. 바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약속된 은사들이(참고 코린토A 12~14장) 권능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를 위해 성령께서는..
오순절 그날 모인 모든 성도들로 영언을 말하게 하셨고..
그 날 원근 각처에서 몰려든 모든 유대인 신자들도 이 선물을 받기 시작했으며.. 4
유대인들이 괄시하던 쇼므론(사마리아) 신자들도 안수를 받고 영언을 하기 시작했고.. 5
순교자 스테판 살해의 주 공범 격인 샤울(훗날의 파울 사도님)도 다마스쿠스 노상에서 하늘의 주님을 뵙고 회개하고 성령 충만을 받으면서 영언을 시작했고.. 6
최초의 이방인 신약 성도인 로마 백부장, 코르넬리우스의 모든 가정교회 교우들도 전원(!) 영언을 말했으며.. 7
오랜 후 사도 파울을 만난 에페소 교우들도 전원(!) 영언을 말했으며, 8
코린토 교우들도 저마다 영언을 하기에 열성적이었고(코린토A 14장 참조),
사도 파울의 이 계시를 받은 다른 교회 교우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9
그러나 영언 반대자들, 종식론자(=중단론자) 등 영언 회의주의자들은 이 '전원(全員)'이란 말을 불쾌히 여기고, 결코 전원이 "아니었다"고 고집부리면서 그 전원에서 빠져나가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입니다. 그런 이들은, 특히나 자신이 신학에 밝은(??) '개혁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유독 더 많습니다.
저도 장로교인이고 따라서 신학적으로 개혁주의 노선에 서 있지만, 제겐 개혁 신학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경 자체입니다. 신학을 성경보다 우위에 놓은 사람들보다 불행한 사람들도 드물어 보입니다. 다양한 학설에 갇혀 자신도 모르게 노예가 되어 있는 탓이죠.
영언이 필수인 이유 한 가지를 사도 파울은 코린토A 14'2에 명기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파울의 신학적 논설이거나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성령의 계시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영언을 말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합니다. 아무도 그것을 알아들을 수 없고, 오직 영으로 비밀을 아뢰는 것입니다."
이 영언은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만 합니다. 이것을 흔히 상향적 영언, 또는 대신(對神)영언 또는 일반영언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알아들을 수 없이 영으로 하늘 보좌에 비밀을 아뢰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나도 알 수 없는 답답한 내 사정을 나의 속사람인 영이 헤아려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하나님께 아뢰어 올린다는 것이지요. 10
여기, 이 비밀성은 중요합니다! 본질적으로 신자 개인의 영이 하나님께만 아뢰는 것이므로, 천사들도, 마귀와 악령들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극비의 군사기밀을 무전으로 타전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또한 개인이 모국어로 하는 기도는 누구나 곁에서 알아듣기가 십상이므로, 나의 은밀하고 깊은 비밀 사정을 소리내어 기도하기란 쉽지가 않지요. 그 대신 영언으로 하면,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내 영이 대신 하나님께 그 비밀을 아뢰게 됩니다.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런데 내가 영언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 영이 효과적으로 내 비밀을 하나님께 제 때 아뢰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셔서 어떤 기도라도 아시고 들으시지만..영언보다 더 직통적인 기도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방식이고 그 분의 패턴입니다! 잔소리가 필요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데도 영언을 하지 않으면, 성령께서도 더 효과적으로 나를 도우실 수 없습니다. 그 분은 영언을 하지 않는 내 속에서 안타까워 하며 불쌍히 여기실 뿐입니다.
이로 보건대 영언은 분명, 매우 긴요하고 필수적인 도구이며, 경우에 따라 치명적이기도 합니다.
고속도로를 주행하던 중 갑자기 영언이 걷잡을 수 터져나와 갓길에다 차를 대 놓고 영언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뒤늦게 뉴스를 통해 알고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숨진 엄청난 교통사고를 미리 피하게 됐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때마침 하게 하신 영언이 사망의 위기에서 살린 것입니다.
한 여성 목회자는 부흥집회를 마친 후 귀가하던 길에, 만취한 흑인 괴한들이 출몰하여 양팔을 휘어잡는 통에 놀라 급히 영언을 했는데, 그 괴한들이 그 자리에 "얼어 붙는" 현상 덕분에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는 증언도 했습니다. 영언을 들으신 하나님이 수호천사 또는 도우미 천사들을 즉각 비상 출동시키신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영언은 구조요청 신호로 쓰이는 SOS 타전과 모르스 부호로 비유해 볼 수도 있습니다.
자, 그런데도 이런 요긴하고 소중한 도구를 독자/성도님은 필수 아닌 '옾션'으로 여길 건가요?
"하나님이 어련히 다 알아서 해 주실 텐데 뭘 필수고 뭐고 법석이냐"고요? 아니, 그렇다면 애당초 기도는 왜 하는 것입니까? 기도를 안 해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얼마든지 도우실 수 있지 않나요? 내 기도제목도 미리 아시고 응답도 아실 텐데 구태여 애써서 기도할 필요가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인 문제를 슬기롭게 잘 판단해야 합니다. 미련하게 속단하거나 고집부리지 말고 지금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냐에 집중해야 합니다.
사도 파울은 코린토 교회의 모든 교우들보다 자신이 영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코A 14'18). 그는 또 코린토 교우들이 모두 영언을 하되, 그 이상의 것도 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14'5).
일부 신학자들의 오해와는 달리, 그는 결코 코린토 교우들의 영언을 금하지 않았습니다(14'26,39)! 코린토 교회에서 문제시된 것은 남을 가르친답시고 나서서 통역도 없는 영언을 남의 코 앞에다 대고 무질서하고 요란하게 남발하는 것 같은 경우이지요. 그밖에도 찬양 화답하고 다 함께 통성기도로 하는 영언이 잘못일 리가 없습니다. 11
분명 사도 파울은 계시의 말씀으로 공석에서의 영언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계시를 보고도, "아니다. 분명 교회서 영언을 금지했다"고 박박 우겨대는 사람들은 어찌 해 볼 수가 없네요. Leave them alone.
영언을 필수 아닌 옾션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흔히 영언자의 모습을 흠 잡기도 합니다. "영언한다는 사람들이 평소 생활은 개판이더라. 그게 무슨 성령의 역사냐, 뭔 성령충만이라는 거냐?" "영언은 관두고라도 행동거지부터 좀 고쳐라.." 이런 얘기들을 귀 따갑게 듣습니다.
이에 대해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등고자비(登高自卑)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술 밥에 배 부르랴? 라는 말도 있죠. 사람의 출생이 개인의 시작이고, 거듭남도 하나의 시작이며, 영언은 또 하나의 시작입니다. 거듭난 사람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잘 하던가요? 아기가 처음부터 말을 잘 하던가요? 엄마 아빠를 비롯한 집안 사람들도 알아보고, 옹알이를 거치고, 점점 자라가는 것 아닌가요?
행전과 코린토A서의 계시로 보건대, 분명 영언은 성령충만한 사람으로 커 가는 데 필수적인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는 데도 필수 도구입니다. 영언을 자꾸만 하다 보면, 그의 영이 자라게 되어 그의 사고와 바깥 행동도 점점 다듬어지고, 더 크고 튼실한 열매도 맺는 법입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잘 할 순 없다는 것이지요.
계속 영언을 하다 보면, 반드시 더 성숙하게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야코보서 3장을 잘 읽어보십시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의 하나인 우리의 혀와 입술에는 남을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말입니다. 그런데 이 혀와 말을 잘 제어해 주는 것이 영언입니다!
그러므로 영언을 하면 할수록 언행이 길들여지는 법이지요. 사람이 자기 혀를 잘 제어할 수 있다면 능히 온 몸에도 굴레를 씌울 수 있습니다. 더 온유하고 거룩하고 온전한 행동들이 나오기 마련이라는 것이죠. 혹 오랜 세월 영언을 하고도 아직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야코보서 3장을 잘 읽어 보고 영언을 양심껏, 진심으로 더 하면 됩니다.
영언은 은사의 하나니까, 내가 꼭 할 필요는 없다. 더 좋은 은사를 기다리겠다.
나는 사랑의 은사를 받으려고 한다.
이런 생각들 역시 성경과는 코드가 다른 주장입니다. 은사 가운데 영언의 은사가 있긴 하나, 이 은사영언은 성도 누구나 하는 영언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본 블로그 여기저기에 참조할 만한 관련 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은사이기보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첫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어 원어에 단수로 돼 있습니다. 왜 복수가 아닌 단수일까요? 신자 누구나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 역시 옾션이 아닙니다. 누구나 맺어야 합니다.
그래도 아직 영언을 옾션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여유를 부리며 영언 시작하기를 미루실 건가요?
언젠가 그 날이 올 것입니다.
영언을 진작 하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할 날요.
또.. 영언을 진작부터 시작했던 것을 절실하게 보람스러워 하고 감사할 날요.
그 날이 반드시 올 줄 저는 믿고 삽니다. 아멘!
- 영언이라는 말은 필자가 coin해낸 티엘티의 용어이다. '방언'이라는 한글 번역어는 영언의 성격을 몰랐던 초기 번역자들이 잘못 낀 첫 '단추'였다. 성령께서 주신 이 영적인 언어는 2000년전 오순절 이전엔 지상에 없던, 그야말로 새 언어였고, 따라서 지상의 사투리나 지방 언어와는 차원이 다르다. 결코 외국어가 아니다. 한국어도 영언일 수가 없다! [본문으로]
- 필자는 사도 파울처럼 독뱀이 물거나 다가와서, 필자가 집어올리거나 물리친 경우는 아직 없다. 그러나 사나운 맹견이 바로 앞에서 으르릉대며 노려보기에, 예수 이름으로 물리친 적은 있다. 독뱀이나 맹견이나 목숨에 위태롭긴 마찬가지라고 믿는다. [본문으로]
- 이 말씀을 안 믿는 사람에겐 (설령 그가 성도라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주님께서는 믿음이 없거나 적은 사람을 구분하여 책망하셨다. [본문으로]
- 이것은 행전 2장 후반부의 맥락을 볼 때, 즉 페트로의 설교에 감동하여 첫 교회 교인들이 된 유대인들을 볼 때, 자명해지는 사실이다. 딱 120명만 영언을 했고, 그 후 추가된 교인들은 영언을 하지 "않았다"는 발상은 성령님을 위한 생각이 아니라, 영언을 하지 않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그릇되고 악한 생각이다. [본문으로]
- 행전 8장을 보면, 사도 페트로와 요한이 쇼므론으로 가서 성령님을 받아모시도록 안수를 했다. 이때 분명히 그들이 영언을 했기 때문에 이 광경을 보고 마술사 쉬몬도 자신도 그런 능력을 (돈으로) 사기를 바랐다가 되레 저주를 받은 것이다. 이때 쇼므론 사람들이 영언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도 그릇된 발상이다. [본문으로]
- 파울은 이 당시 영언을 하기 시작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훗날 이런 말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들 모두보다 더 영언을 말하기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본문으로]
- 행전 10장 특히 45절 참고. [본문으로]
- 행 19'1~7 참고. [본문으로]
-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단지 다른 교회의 영언 상황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굳이 그들이 영언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발상도 잘못된 것이다. [본문으로]
- 사람들을 향해 하는 영언이 따로 있다. 이것을 대인(對人)영언, 또는 은사영언이라고 한다. 이것은 공개적으로 많아도 3명이 이어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반드시 해석자(통역자/통변자)가 있어서 해석해야 한다! 또, 성도 모두가 하는 영언과 달리, 이 영언은 오직 은사로서의 영언을 받은 사람만 한다. 코린토A서 14장을 잘 분석해 보라. [본문으로]
- 초기 성도들은 영언으로 서로 화답했다(에페소서 5'19, 콜로새서 3'16). '영적인 노래' 또는 '신령한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이 노래는 결코 지상의 노래가 아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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