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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비밀집단

벤저민 프랭클린은 크리스천?

벤저민 프랭클린도 동시대의 조지 워싱턴처럼 프리메이슨이었고, 더구나 최고직인 그랜드 매스터를 역임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크리스천?


글의 일부는 (영문 아티클인) 기독교 세계관 언론(CWP)의 관련 항목을 참고했다. 

 

얼마 전 어느 설교자가 벤저민 프랭클린의 '명언'이라는 것을 아무 사전 평가 없이 인용하는 것을 들었다. 설교야말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해야 하는 행동이다. 설교자는 모름지기 설교예화를 옥석 가리듯 잘 가려 가며 바로 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그 날의 설교 전체를 빛내는 장식용 '보석'으로 쓴다는 게 불행히도 가짜 보석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예화사전' 등에 나열된 세계적인 명사들의 이야기는 설교자들의 입맛을 돋우기 위해 아무 검증 없이 내놓은, 거의 90% 이상 포장된 이야기들이라고 보면 과히 틀리지 않다. 

명사들의 좋은 행동과 발언은 물론 인용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진리인 양, 더 나아가 그 명사의 삶 전체가 올바른 양, 급기야는 그가 크리스천인 양 포장되어 소개되면, 이미 진리와 비진리의 경계선을 넘어 설교 본문의 성경 진리와 마구 '믹스엎' 돼 버릴 위험성이 크다. 자칫 청중인 교우들의 머리 속에 그 날의 설교 가운데 그 명사의 예화만 남고, 나머지는 개숫물처럼 흘러내려갈 가능성마저도 없지 않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크리스천이었을까? 

우선 이름부터가 그럴 듯하다. 벤저민은 성경에서 야콥의 막내아들인 벤 야민('오른손의 아들'이란 뜻)과 이름이 같고, 프랭클린은 프랭크의 지소사로, 프란치스코와 같은 어원이다. 줄여서 '벤 프랭클린'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서구인들의 이름, 심지어 세례명/영세명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딱히 크리스천인지 여부와는 거의 무관하다. 흔히 쓰이니까 적당히 붙인 이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 얼마 전에 죽은 전도자, 빌리 그래엄의 아들 겸 후계자도 프랭클린이다. 

그럼 프랭클린의 삶이 크리스천다웠을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 보자.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은 미국 건국 선조의 한 명으로 18세기 당대의 세계적인 명사였다. 미화 100달러 짜리 지폐에 실린 얼굴이 그다. 아마도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유명할 것이다. 위인전기에 빠짐 없이 등장하는 인물의 하나다. 

독립선언서(DOI) 작성과 미국 헌법 제정에도 기여했다. 또 사실상의 필라델피아 주지사였고, 미국식민지의 주 프랑스 대사로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미국의 독립과 자유 정신을 널리 알려 당시 종주국이던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도 앞장섰다. 그는 베르사이유 조약 서명자들중 한 명이었다. 

필라델피아 우체국장을 거쳐 연방 우정부 장관을 지냈고, 미국 최초의 대여 도서관과 소방서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는 또 철학자에다 저술가였고, 출판인쇄업자, 발행인으로서 신문을 출간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일화는 연을 날리다 번개로부터 전기가 흘러내리는 사실을 밝혀내어 피뢰침을 발명한 이야기일 터이다. 

프랭클린은 근면과 정직 등의 미덕을 강조했고, 노동과 산업, 자기개발과 교육 등에 지대한 열정을 쏟았다. 국내에서 가장 돈 많은 거부들 중 한 명이었고, 당시 독립 중심지였던 필라델피아 시를 위해 자선사업과 시민정신 기리기에 힘썼다. 


그는 또 토머스 에디슨의 대선배 격인 탁월한 발명가였다. 유리 하모니카, 잠수용 오리발, 이중초점 렌즈, 환자의 소변을 빼 내는 도뇨관(導尿管), 마차 주행거리 측정기, 현대형 난로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이고 기발한 도구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번개 치는 날 연날리기 실험을 거쳐 피뢰침을 발명했다. 

하지만 그는 발명품들을 갖고 특허를 얻어 돈을 만들 궁리를 하기보다 인류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내놓기도 했다. 그는 필라델피아 시 우체국장을 지내면서 미국 우정국의 선구자 역할을 했고, 밤길을 밝힐 고민을 하다가, 사면이 유리로 되어 어느 한 면이 깨어져도 촛불이 쉽게 꺼지지 않는 가로등을 고안해 내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훗날 영국을 본뜬 가스 가로등으로 교체되었다가, 드디어는 에디슨이 발명한 전기 가로등으로 바뀌기에 이른다. 

프랭클린은 또 훌륭한 자선가였다. 자신이 세운 병원과 소방서, 도서관, 학교 등은 사회 개선과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이만하면, 크리스천들은 으레, "그런 훌륭한 분이 우리처럼 크리스천이라면 금상첨화 격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을 믿는 청교도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웠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미국의 명사와 위인들도 거의 예외없이 크리스천들이라고 단순히 생각하곤 한다. 하기야 필자도 과거에 그렇게 믿었댔다. 당연히 벤저민 프랭클린도 그런 인물이었다고 보지 않겠는가..

과연 벤저민 프랭클린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로 믿어 거듭난 신앙을 지녔었을까? 아니면 흔히 보는 평범한, 표면상의 종교인이었을까?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우선 프랭클린 자신의 어록부터 읽어 보자.

그의 '10개 (또는 13개) 생활신조'도 꽤 유명하지만, 우리에겐 그의 신앙 신조가 더 중요하다. 

   "다음은 나의 신조입니다. 나는 하나의 신(하나님), 우주의 창조자를 믿습니다. 그는 섭리로써 우주를 다스립니다. 그는 경배 받아 마땅합니다. 그에게 가장 합당한 예를 갖추는 일은 곧 그의 다른 자녀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인간의 혼은 불멸이며, 저승에서는 이승에서 한 행위에 따라 정의로써 처우를 받을 터입니다. 이런 것들을 나는 모든 건전한 종교의 근본원리로 받아들이며, 여러분처럼 나도 이 원리들을 존중하여 어느 종파이든 이 원리로써 대합니다." (이하 어록은 필자 사역)


어떤가? 그럴 듯하게 들리는가?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알고 보면, 프랭클린의 선조도 경건한 청교도적 신앙인들이었고, 그는 어릴 적에 부모와 함께, 뉴잉글랜드의 칼뱅(캘빈)주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통치권, 원죄, 예수의 죽음과 부활 등을 들으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 조사이어(요시아) 프랭클린은 어린 아들이 장차 사역자가 되길 바랐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아들의 교육비용을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보스턴에 있던 형 제임스의 인쇄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하게 두었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15세 때 종교에 관한 책을 몇 권 읽다가, 갑자기 이신교도(理神敎徒,*Deist, 자연신론자, Deism)가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신교에 대한 의혹도 품긴 했다. 17세 때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거기서 '무엇이든 옳다'는 책자를 펴내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신교에 대한 의심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위험한 청소년기'동안 지켜준 친절한 섭리의 손길"이라는 고백도 했다. 

런던에서 돌아온지 2년 뒤인 1728년에는 자신의 '신조'(Articles of Belief)를 썼다. 내용은 그가 성경을 신적 계시로 받아들이기 전, 이신교도 거부한 무렵과 비슷하다. 이 성향은 '설파할 교리'의 아웃라인을 쓴 1731년까지 지속됐다. 이 아웃라인은 성경을 전혀 인용하지 않았어도, 3년전의 '신조'와는 현저히 달랐다. 즉 과거에 태양계나 돌보며 지구촌에 무관심했던 이신교적 신이 아니라, '우주의 아버지'로서 무한히 선하고 권능적이며 슬기롭고 무소부재한 신으로 묘사했다. 내세관도 땅에서의 행위에 따라 내세의 행복 또는 불행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일년 뒤인 1732년, 프랭클린은 '세상을 지배하는 신의 섭리에 관하여'라는 글을 써냈다. 이 글에서 그는 인간사에 대한 신의 개입/중재를 논했다. '설파할 교리'와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우주의 창조자인 신적 존재를 어림했다. 또 신은 무한히 슬기롭고 권능적이고 선하다는 주장을 편 점에서도 연전과 같았다. 

그즈음 그는 처음으로 인간행동에 대한 신의 직접 개입, 인간의 자유의지 등에 대한 그의 신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한 신의 호의와 가호를 얻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734년,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에 나타난 헴필의 설교를 지속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735년 2월 18일, 프랭클린은 '자기부인은 필수 미덕이 아니다'라는 글을 출간했다. 이 글에서 그는 사람은 행위로 보상 받는다는 자신의 기존 신념을 부정했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뭔가 받을 공로가 있는 체 할 게 아니다. 그는 우리의 섬김보다 높이 계신다. 그가 베푸는 혜택은 그의 선과 관대함의 결과이다"라고 그는 썼다. 


호사가인 빌 폴턴베리는 심지어 '프랭클린의 신앙: 제1 미국인의 종교에 관한 결정적 가이드'(Franklin on Faith: The Definitive Guide to the Religion of the First American. 2015년 출간)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프랭클린이 곧 참 크리스천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신론은 신이 하나 있다고는 믿으나 그 신이 창조물과 인터랙션을 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 신은 시계 제조공처럼 세상을 만들긴 했지만 그후로는 그냥 돌아가게 놔 두고 지내며, 따라서 이 종교 구조 안에서는 초자연적 기적이라는 것이 없다. 바로 이 이신론에서 창조론의 한 유형인 소위 '지적설계론(ID)'도 나왔다.   

'종교혁명가들'을 쓴 롸벑 풀러에 따르면, 프랭클린은 평생 이신교도였다. 프랭클린은 여러 이신교도들의 책을 삼키듯이 읽어 나아갔고, 기존의 교리적인 기독교를 직관적으로 거부했다. 그는 더 합리적이고 더 실천적인 종교철학을 지행해 나아갔다. 모든 이신교도들처럼 그도 신적 계시를 거부했고, 그가 서술하는 '종교의 필수'는 거의 모두, 자신의 이신교적 종교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풀러의 묘사 그대로의 이신교도는 아니었다. 그는 신은 특정 섭리에 따라 자연과 세상 일에 개입하여, 그렇지 않으면, 우연히 산출될 수도 있는 결과를 미리 막는다고 믿었다. 역사가인 좐 퓌도 프랭클린은 자연 피조물을 돌보고 때때로 인간의 삶에 개입하여 중재하는 능동적인 신을 믿었단다.

프랭클린은 또한 신은 예배를 요구하며, 기도에 응답하고, 역사 속에서 특정 인물의 필요를 따라 역사 속에 개입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미국은 신에게 영향, 보호, 인도와 지배를 받는다고 믿었다. 또 개인과 나라를 위한 기도의 힘도 믿었고, 1787년 여름 제헌회의 때 기도를 요청하기도 했다. 


유일한 구세주인 예수 크리스토님에 대한 프랭클린의 견해는 어떠했을까? 다음은 그가 직접 한 말이다. 

"여러분이 특히 갈망하시는 나사렛 예수에 관한 저의 견해는, 그 분이 남겨 두신 도덕체계와 종교는 일단 보기에 세계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양하게 변질돼 왔음을 감안하면서, 저도 영국의 수많은 비교도들처럼 그 분의 신성을 좀 의심하는 바입니다. 이것은 제가 교리적으로 묻는 질문도 아닐 뿐더러, 그에 대해 공부한 적도 없고, 또 지금 그것 때문에 바빠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문제성이 적은 진리로서 알 기회가 있기를 기대합니다만."

프랭클린은 예수가 세상 구원에 꼭 필요한 육화(성육신)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신약성경은 변질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성경에서 믿고 싶은 부분을 가려서 믿곤 했다. 위에서 본 대로, 그는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신성을 트러블 투성이 문제 이슈쯤으로 여겼다. 

그럼에도 그는 내세에 대한 일종의 확신을 갖고 지냈다. "만약 그분(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그가 이승에서만 아니라 저승에서도 계속 저를 돌봐 주실 것임을 의심할 수 있겠어요? 어떤 이들은 이것을 단순한 추정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제겐 가장 탄탄한 희망으로 보입니다. 과거 체험 위에 세워진 미래의 희망 말입니다!"

그러나 프랭클린은 성삼위나 크리스토님의 신성과 그분의 속죄(대속)와 부활, 구원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다. 그는 참 기독교는 남에 대한 선행이라는 나름의 신앙을 지녔었다. 그는 심지어 "덕스러운 이단자는 사악한 크리스천보다 앞서 구원받을 것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의 종교는 기독교이기보다 미덕교 내지 덕행교, 또는 자선교였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는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을 뿐이다. 

당대 역사로 미루어 볼 때, 벤저민 프랭클린은 참으로 예수님을 믿거나 회개한 적이 없다. 그는 성경대로의 크리스토님을 믿지 않았다. 그는 근면과 선행으로 그 나름의 내세로 갈 수 있을 줄을 믿었다. 

이런 점에서, 벤저민 프랭클린은 당대의 토머스 제퍼슨이나 좐 애덤즈, 그리고 다름 아닌 조지 워싱턴과 별 다름없는 이신교도, 자연신론자였다. 성경을 믿는 신자가 아니었다.

우리가 폴텐베리의 견해를 십분 받아들여서, 프랭클린이 어느 정도 크리스토를 믿는 일종의 신자였다고 치자. 그러나 그는 프리메이슨이었던 역사적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일이다!


프랭클린의 메이슨 활동사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 건국선조들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열혈 프리메이슨이었다! 프리메이슨 자신들의 자료에 따르면, 프랭클린은 1727년 필라델피아의 비밀집단인 '가죽앞치마'(LA) 클럽을 조직했다[각주:1]. 이어서 1730(31년)년 2월 필라델피아의 성요한라지(SJL)에 입단했다. 

1732년 6월엔 SJL의 단칙 초안을 펴냈고, 1733년엔 라지 서기관이 됐다. 6월 24일엔 같은 라지의 주니어 그랜드 워든[각주:2]으로 선임됐다.  2년 뒤 1734년 6월 24일엔 펜실베이니어 그랜드라지의 그랜드매스터로 선출됐다. 그해 8월엔 미국 최초의 프리메이슨 관련 도서인 (영국)앤더슨의 '프리메이슨 헌법'의 재판을 펴냈다. 

프랭클린이 그랜드 매스터였던 1734~35년에, 필라델피아 주의사당인 인디펜던스 홀이 건립될 때, 메이슨 의식에 따라 프랭클린이 이끄는 SJL 단원들이 직접 모퉁잇돌을 놓았다. 

1738년 4월 13일, 프랭클린은 어머니 어바이어 폴저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리메이슨들은 종교 및 좋은 관례들과 불일치한 원리나 관행이 없습니다."라고 변호했다. 그의 어머니는 프랭클린 형제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한) 아리우스파나 (칼뱅주의의 반대파인) 아르미니우스파가 되었다고 우려하곤 했다.

1743년 5월 25일엔 보스턴 제1라지를 방문한 뒤 1749년 6월 10일, 보스턴의 토머스 옥스나드에게 프로빈셜 그랜드 매스터로 임명받았다. 

1752년 필라델피아 프리메이슨 라지 건축 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다. 1755년 6월 24일, 미국 최초의 메이슨 건물인 필라델피아의 프리메이슨스 라지 헌정식에서 중요 역할을 했다[각주:3]. 1759년 10월 10일, 스코틀런드 에든버러의 성다윗 라지(LSD)를 방문했다. 1760년 필라델피아 프로빈셜 그랜드매스터가 됐고, 같은 해 11월 17일 런던에서 열린 영국그랜드라지 모임에 아들과 함께 참석했다. 

1762년엔 펜실베이니어 그랜드 매스터로 연설했다. 1776년, 프랑스 메이슨 라지와 자매결연을 했다. 1778년 4월 7일 그랑도리옹 드 파리(파리 그랜드라지)에 속한 로주 데 뇌프 쇠르('7자매 라지')에서 프랑스 작가/사상가인 볼테르의 입단을 도운 뒤 이 라지와 자매결연을 했다. 1778년 11월엔 '슬픔 라지'에서 열린 볼테르의 (메이슨식) 장례식을 집전했다. 1779년엔 파리 근교 파시의 '9자매 라지', 1782년엔 로주 데 뢰프 쇠르의 워시풀 매스터로 뽑혔다. 

1782년 7월 7일엔 르스펙타블 로주드생장드제루살렘(추존예루살렘성요한라지)의 회원이 된 데 이어 1785년 4월 24일엔 같은 라지의 영예 도뇌르로 뽑혔다. 

1785년엔 프랑스 루엥의 로주 데 로헌아미(좋은친구라지)의 명예회원으로 선출/추대받았다. 

1786년 12월 27일엔 펜실베이니어 그랜드라지의 요청을 받은, 필라델피아 세인트폴 (성공회)성당의 조셉 필모어 신부가 프랭클린을 "메이슨들 가운데 최고의 존경을 받을 탁월한 업적을 이룬 걸출 형제(IB)"로 찬하했다. 

1790년 4월 17일 프랭클린이 죽었다[각주:4].  

1906년 4월 19일엔 그의 탄생 200주년 기념행사가 크라이스트교회 뜰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치러졌다[각주:5].  

이런 사실 다수가 자신의 신문에 보도됐다!

 

일설에, 프랭클린은 성병인 매독에 걸렸다는 호색가이기도 했다.  


이런 점들을 설교자들은 통찰하여 프랭클린을 설교 예화로 인용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가 그를 신자로 만든다고 해서, 이미 죽어버린 그가 신자가 되어 줄 리는 만무하지 않겠는가?



  1. 앞치마는 메이슨들의 중요한 제복의 일부이고, 상징물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2. 라지의 한 직책. [본문으로]
  3. 참고: 1717년 6월 24일은 영국 프리메이슨 그랜드라지의 창설일이었다. 이들에겐 날짜나 숫자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성을 지닌다. [본문으로]
  4. 메이슨들은 죽고 나면 위(저승)의 그랜드라지에 가입된다고 믿는다. [본문으로]
  5. 이 교회 묘원에는 여기저기 피라믿 형상 등 숱한 머사닠(프리메이슨적인) 상징물이 곁들여진 묘비와 기념비가 서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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