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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과 검증/현대영성비평

유진 피터슨의 해괴한 주기도2

하루 세 끼 정식을 생존용으로 챙겨 주소서? (사진출처: BBC)




유진 피터슨의 해괴한 '주기도' 2

피터슨 비평 시리즈 3



김삼


[필자와 출처를 있는 그대로 밝히지 않는 한, 허락 없이 글의 일부분도 인용/참조할 수 없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나름 '주기도문' 후반부(마태복음서 6'11~13)에서 좀 더 본격적이고도 문학적인 번안을 해 나아간다. 

우선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께 요청하는 부분을 "Keep us..."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정리해 묶어 놓고 있다. 편리해 보이긴 하나, 번역자 자신의 취향을 따라 취합한 형식이다. 


  Keep us...

  Keep us...

  Keep us...


여기서 keep us는 늘/계속/언제나 우리를 여차여차한 상태로 있게 해 달라는 주문성(注文性)과 지속성을 내포한다. 물론 원어엔 없는 말이다.  



1. 세 끼 정식으로 우리를 생존해 있게 하십시오?


  Keep us alive with three square meals. 

  세 끼 정식으로 우리를 늘 생존하게 하십시오.


그럴 듯 하나, 역시 한껏 의역한 느낌이다. 

이 부분의 그리스 원어는 다음과 같다. 


  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ὸς ἡμῖν σήμερον[각주:1]

직역하면..

  "오늘 우리의 하루치 빵[각주:2]을 우리에게 주소서."


이 두 번역문을 비교해 보라.


  오늘 우리의 하루치 빵(단수)을 우리에게 주소서.

 

   세 끼 정식으로 우리를 늘 생존해 있게 하십시오.


 

차이를 느끼는가? 원어에는 세 끼 개념이 없다. 더 나아가, 생존은 하나님께 내맡기고 지내는 게 크리스천의 삶이다. 

물론 성경엔 우리와 같은 세 끼를 암시하는 대목이 있긴 하다. 예를 들면 판관기(사사기) 19'5, 잠언 35'11, 요한복음서 21'9~15, 루카복음 11'37, 14'12 등이다. 그러나 유대 개념으로는 세 끼를 다 먹어야 하루치 양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본인이 먹는대로다. 금식을 자주 했기 때문이다. 

또 원어의 빵도 단수로 돼 있고 '빵 세 덩이'로 돼 있지 않아, 빵 하나로 하루를 견디는 수도 있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유진 피터슨은 'three square meals'라는 꽤 strict한 개념의 끼니란 용어를 쓰고 있다. 더구나 생존 지속을 위해서 그렇게 부탁드리고 있다. 이것은 날마다 세 끼니를 먹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식의, 순전히 육적인 의미가 되고 만다. 즉 "하루 세 끼 정식을 제때 제때 필수 생존용 식사로 챙겨 주소서(?)"라는 기도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왜 주님이 말씀하신 원문엔 세 끼 개념이 없을까? 그것은 이 기도의 이 요청에 몸의 양식뿐 아니라, 영적인 양식의 의미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미, 광야에서 금식하시던 중 마귀가 나타나 돌을 가리키며 빵을 해 먹으라고 하는 유혹에 대하여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선언하셨다. 그래서 말씀으로 사는 신자는 장기간 금식도 가능하다. 


더욱이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양식, 곧 생명을 위한 빵으로 소개하셨다(요복 6'35). "하나님의 양식은 하늘에서 내려와 생명을 주는 그"라고 말씀하셨다(요복 6'33). 또한 "썩어 없어지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때까지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며 "그것이 내가 너희에게 줄 양식이다."라고 하셨다.   

우연치 않게도 그 분이 태어나신 곳의 장소명도 벹을레헴[각주:3] 곧 '빵집'이었다. 그러므로 이 기도가 몸을 위한 양식만 구하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피터슨은 이런 영적인 생명양식을 아랑곳 하지 않는 듯(?), 단지 하루 세 끼니의 정식을 주셔야 인간 생존이 가능하다고 선언하다시피 하고 있다. 정말 피터슨은 하루 세 끼니의 정식이 인간 생존에 필수라고 생각했을까? 이른 바 '서바이벌 게임'에 나선 사람들조차 아연해 할 소리다. 지상에는 하루 두 끼, 아니 한 끼만 먹고 사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


[ 하기야 하루 세 끼는 보다 더 성경적인 연원이 있는 것으로 보이긴 한다. 식품역사학자 캐럴라인 옐덤에 따르면, 고대 로마인들은 점심 때쯤 먹는 하루 한 끼가 더 건강한 식사라고 생각했단다. 중세 때는 아침 미사 전엔 대체로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금식을 깬다"는 뜻의 조반(breakfast)이란 영어 용어가 생겨났다. 산업혁명 이후엔 하루 세 때 배고픈 근로자가 많아져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 


피터슨이 쓴 three square meals라는 용어를 분석해 보자. 'square(정사각형, 정방형)'란 말은 여기서 약간 구식의, 구어체(colloquialism)에 해당한다. square의 해석은 세 가지로 가능하다. 

우선 첫째로, 실질적인, 적절한, 균형잡힌, 제대로 된, 올바른, 진정한, 진짜의, 정식(공식)의, 만족스러운...등의 의미로 쓰인다. 즉 90도 직각 앵글과 같은 딱 부러진 뭔가를 요구한다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square meals라면, 제 때에 먹는, 질 좋고 영양 좋고 분량이 충분한, 바람직한 식사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우리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께 그런 식의 요청을 드린 적이 있었을까?


Square의 두 번째 가능한 해석은 4자에 직결된 개념이다. 음식엔 4가지 그룹이 있다. 즉 육식/어식, 낙농/난식(卵食), 야채/청과, 곡물/전분식 등이다. 이 네 가지가 고루 포함된 식사가 square meals이라는 설이다. 

또 다른 설은 과거 영국 왕립 해군에서 사용되던 네모난 나무접시에서 유래된 개념으로, 근거는 희박하다. 


아무튼 피터슨이 기도문에 삽입한 'three squre meals' 문구는, 매일 3회 제 때 제공되는, 질 좋고 균형잡힌 딱 부러진 정식을 하나님께서 주셔야 한다는 요구처럼 들린다. 

이것은 오늘날 수시로 금식하며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 할 기도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들, 곧 하늘나라 왕자와 공주들로서 요구해대는, '당근'일 만큼 당연한, 너무나 당차고 야무진 기도여선지 의문이 간다.  



2. 당신으로 말미암아 늘 용서받아 남을 용서하게 하십시오.


  Keep us forgiven with you and forgiving others.

  당신으로 말미암아 늘 용서받아 남을 용서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수시로 죄를 회개하여 아버지께 용서받는 것이 바람직함은 물론이겠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그리스어 원문엔 남의 죄를 용서해 줌을 빚진 것을 탕감해 준다는 어의로 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수동적이기보다는 매우 능동적, 적극적인 개념이다. 

그러므로 피동적으로 그저 용서를 받고 용서하는 상태를 지속한다는 개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하나님 앞에 죄 지음은 채무와도 같다. 원문을 보자.


  καὶ ἄφες ἡμῖν τὰ ὀφειλήματα ἡμῶν, ὡς καὶ ἡμεῖς ἀφήκαμεν τοῖς ὀφειλέταις ἡμῶν·[각주:4]

  직역: (또) 우리의 채무자(죄 지은 사람)들을 우리가 용서하듯,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채무(죄)를 사(赦)하여 주소서


참고로, 이 부분에 해당하는 세 가지 주요 영문성경 번역문을 모두 나열해 본다. 


  NIV: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KJV: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NASB: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위의 세 가지 주요 성경이 모두 빚과 채무자라는 원의를 반영했다. 그러나 피터슨의 '더 메시지'는 그러지 않았다. 피터슨은, 죄 빚이라는 개념이 부담스러워서였을까?



3. 우리 자신들과 마귀로부터 우리를 늘 안전하게 지켜 주십시오?


  Keep us safe from ourselves and the Devil. 

  우리 자신들과 마귀로부터 우리를 늘 안전하게 지켜 주십시오.


심한 뒤틀기를 한 대목이다. 

우선 원문부터 보자. 

  Καὶ μὴ εἰσενέγκῃς ἡμᾶς εἰς πειρασμόν Ἀλλὰ ῥῦσαι ἡμᾶς ἀπὸ τοῦ πονηροῦ[각주:5] 

  직역: (또한) 우리를 유혹에 빠져들지 말게 (하시고), 오히려 우리를 악에서 건져내소서


원문에는 '우리 자신'이라든지 '마귀'라는 말이 없고, 다만 '유혹'과 '악'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피터슨은 [유혹=자신], [악=마귀]라는 등식을 사용했다. 

유혹이 자신이고, 자신이 곧 유혹인가? 악이 곧 마귀라면, 우리가 짓는 악이 모두 마귀 자체인가? 범주 구분이 애매해진다. 그는 자아를 마귀와 똑같이 경계해야 할 적으로 삼고 있다. 물론 자아는 유혹에 빠져들기 쉬운 에이전트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경우에 따라) 선한 에이전트일 수도 있다. 따라서 유혹에 빠져들지 어떨지 가능성은 50%씩이다. 


세상과 마귀의 모든 유혹을 받으셨어도 단 한 번도 거기 빠져들지 않으신 예수께서는(히브리서 4'15) 그처럼 우리도 유혹에 빠져들지 말게 해 달라고, 의지를 선하게 사용하도록 아버지께서 도와주시라고 긍정적으로 기도모범을 보이셨다. 

그런데 피터슨은 자기식의 이 '기도문' 속에서, 유혹에 대처하여 그것을 이기려 하기보다는 일단 자아를 마귀와 다름없는 적으로 보고, 단지 그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달라고 한다. 이것은 역시 보다 피동적이며, 의지의 활용과 단련에 소극적인 입장이다. 

파격적이라기보다는 주님의 모범기도의 형편 없는 오역이자 왜곡이다. 왜 피터슨이 이런 악역(惡譯)으로 악역(惡役)을 자처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야말로 아리송하다. 



이하 부분


피터슨의 '주기도문' 이하 대목은 정말 그 나름의 준(準, quasi)기도로서, 성경에 없는 부분이다. 만약 주기도 끝 부분을 번안했다면, 원 재료야 어떻든 완전히 엿장수 식으로, 피터슨 조리사 마음대로 풀고 적당히 주물러 내놓은 희한한 '요리'와도 같다. 점입가경이다. 


주기도 끝 부분은 (주요 후대 사본에 따라) "나라와 권능(또는 권세)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는 송영인데, 피터슨은 이 부분이 없는 고대 사본에 딱히 충실한 것도 아니고, 사실상 후대 사본 문구 대신 거의 자신의 작문으로 대체한 모양새다. 가관이다. 


  You're in charge! 

  You can do anything you want! 

  You're ablaze in beauty! 

  Yes. . .


4. 당신께서 도맡아 계십니다(님의 주관이고, 책임입니다)?


  You're in charge! 

  당신께서 도맡아 계십니다(님의 주관이고, 책임입니다)!


원문의 "님의 나라가 영원합니다" 대신 이 문구를 썼다. 

주기도를 번역했다기보다 자신의 칼뱅주의 신앙을 현대어로 바꿔 표현한 듯하다. 그런데 이건 옛 신정시대(theocracy)나 주권주의에서는 통할 법한 말이다. 우리가 성령을 모시면서 내 마음 속 보좌를 그 분께 내어드리고 그 분에게 내 삶을 맡겨드리지만, 그 분의 전적인 통치 여부는 그 분에게 복종하려는 내 의지에 달려 있다. 안 그랬다면 왜 아담과 하와가 그토록 빨리 타락했겠는가? 그 둘은 얼마나 쉽게 마귀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버렸는가!    

어찌 보면, 기도말인즉슨 이렇게 해 놓고, 실제로는 내가 내 의지로 마음대로 일을 벌여 놓고 책임은 하나님께 떠맡기고 전가할 수도 있는, 그런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사제 앞에서 오늘 지을 죄까지 대강 적당히 '고백성사' 해 놓고 그 죄를 되풀이하는 일부 천주교도들처럼. 



5. 당신은 원하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You can do anything you want! 

   당신은 원하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후대 사본의 "님의 권세(또는 권능[각주:6])도 영원합니다"에 해당하는 부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까 응당 그렇겠지만, 문장이 가볍다 못해 자칫 경망스럽기까지 하다. 마치 뭔가를 잔뜩 제공해 놓고 당신 맘대로 해도 된다고 오퍼하는 듯한 느낌은 필자만의 것인가. 

역시 '주권주의'스럽다. 아무튼, 하나님은 그 분이 지으신 우리의 의지를 무시하고 마구 행하시진 않는다. 



6. 님은 아름다움 속에 빛나십니다? 


   You're ablaze in beauty! 

   님은 아름다움 속에 빛나십니다! 


후대 사본 원문의 "님의 영광도 영원합니다"에 해당한다. "님은 아름다움에 충일해 계십니다" 정도로 풀이된다. 

서술적인 형용사인 'ablaze'란 단어의 한 가지 뜻은, 요새 우리네의 흔한 유행어 '격한/격하게' 정도에 해당한다. "님은 격하게 아름다우십니다" 식의 어투라고 보면 된다. 그밖에도 ablaze는 "활활 (불)타올라, 흥분하여, 번쩍이어.." 등의 어의를 갖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남성인 자신이 찬탄해 마지 않는 미모의 여성에게도 저런 표현이 쓰이곤 한다. 상황에 따라 천한 세속시로 느껴질 수도 있는 문장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빛과 아름다움으로만 끝나는 개념인가? 하나님의 영광은 빛과 구름과 보좌 및 보좌 주변의 거룩한 무지개, 음성과 이름, 영예...등으로 표현된다. 딱 부러지게 한 가지 개념으로 몰아넣을 수 없다. 

더구나 성경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란 말이 거의 없다. 우리 말 성경(개역/개정)에 유일하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예샤야후=이사야 35'2)이라고 옮겨진 부분도 대다수의 다른 성경엔 'beauty'로 하지 않았다. 대신 "장엄함, 찬란함, 뛰어남, 탁월함.." 등으로 번역됐다. 하나님의 영광은 미(美)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7. 예, 예, 아무렴요?


  Yes. . .

  예, 예, 그렇고말고요!



피터슨이 전통 주기도(후대 사본) 끝의 '아멘'을 대체해 놓은 부분이다. 

가장 문제시되는 부분의 하나다. 왜 문제냐고? 아멘은 "진실/충성"과도 같은 말이며, "이상(以上)은 참으로 그렇습니다"라는 엄숙한 신앙적 동의가 내포돼 있다. 

그러나 피터슨은 기도문을 완결짓는 지엄하고도 진실해야 할 문구라기엔 너무나 경박하고 통속적으로 풀어 썼다. 아멘이 예스에 가깝다면, 왜 세 번이나 늘어놓는 것인가? 


더구나 "You are ablaze in beauty." 해 놓곤 곧 이어서 Yes. . yes.라고 했기 때문에 더 그렇다. 이 끝 부분만 놓고 본다면, 풀이에 따라 "님은 정말 황홀하게 아름답네요~! 오 예~, 정말 그래요!" 정도로 들릴 수도 있는 투의 말이다. 

KJV 유일주의자인 힌턴 박사는 "예스, 예스, 예스" 문구를 할리우드가 영화 속의 성적인 상황을 통해 폭넓게 유행시킨 "성행위에 대한 야한 언급"이라고 빗대고, "(피터슨이) 이를 모를 리 없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힌턴은 또 이 '피터슨 주기도'의 끝 부분이 마치 여신에게 찬사를 던지며 경배하는 듯하다고 투덜댔다. 



 '피터슨 주기도'에 대한 결론


유진 피터슨 비평 시리즈의 일부로서 그간 다룬 이 '주기도'는 탈 많고 말 많은 그의 '더 메시지' 가운데서도 문제의 핵심의 하나로 보인다. 적어도 필자는, 주기도에 대한 피터슨의 접근 태도만 보아도 '더 메시지' 전체의 영적 그림이 그려진다. 

독자의 소감이야 잘 모르지만, 나의 결론은 하늘에서 내려진 메시지로 받을 지엄한 성경 말씀이기보다 황당한 '신독(神瀆/blasphemy)'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다. 


아무튼 '더 메시지'와 피터슨에 대한 비평은 이 새해에도 계속될 터이다. 그러나 집필 때마다 피터슨만 붙들고 있겠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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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첫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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