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이슈/영적싸움 도우미

하나님의 전신갑주(2)-의의 가슴판

고대 로마군병의 후기(?) 갑옷. 가슴판이, 매우 과장되고 강화된 어깨막이판과 간접 연결돼 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2) 

둘째 무기: 의의 가슴판



우리는 지금 영적 싸움에 있어 필수적이고 치명적인 무기인 하나님의 전신갑주 즉 하나님의 완전무장을 논하면서, 두 번째로 의의 가슴(막이)판을 다루려고 한다. 의의 가슴판은 에페소서 6'14~18에 기록된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7가지[각주:1] 무기들 중 두 번째의 것이다. 



이 두 번째 무기를 논하기 앞서 생각난 김에, 먼저 서론적인 말을 좀 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곧 나의 완전무장이며,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것이어야 한다! 그냥 성경책 안에만 남아있는 것이라면,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좀 더 풀어 써 보자. 우리는 이 진리를 개념적으로만 알고 그냥 놓아 둘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무기, 나의 무기로 삼아야 의미가 있다. 진리를 알면,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해 준다(요한복음서 8'32). 하나님의 전신갑주라는 진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전체가 활용하고 써 먹을 실용적인 것이어야지,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만이라면 무용지물에 불과할 것이다. 안 그런가? 그런데도 신자들 대다수는 성경의 이 부분을 추상적으로 알고 지낸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라는 게 있다대. 온몸에 걸치는 영적 갑옷이고 무기래." "그런가 봐." "그래? 아, 상상만 해도 멋있고 그럴 듯하다야!" 


대강 이런 식으로 그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설교자와 지도자에게도 이것을 알고 자신부터 실천하면서, 교우들에게도 실천하도록 가르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신자들 자신이 성령의 영감으로 이 전신갑주의 진리를 깨달아 실천해야 바람직하다. 


또 잊지 말 것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절로 입혀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나서서 걸쳐 입어야 한다는 점이다. 전신갑주 갖추기는 수동형이 아닌 능동형이다. 바로 그래서 파울은 전신갑주를 입기 바로 앞서, "그러므로 (굳게) 서서"(Stand firm)라는 전제를 달았다(엪 6'14a). 선다는 것, 서 있다는 것은 내가 할 일이지, 누가 대신해 줄 일이 아니잖는가?


이 진리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려면, 이 말씀을 자신에게 선언하고 선포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말하면, 으레 토를 달고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 말씀이 무슨 주문이냐, 주술이고 마법이냐?" 꼭 이런 식이다. 그런 이들에게 묻는다. 그럼, 성경은 눈으로 보기만 하고, 읽기만 하고, 생각만 하고, 느끼기만 하라고 주어진 것인가? 성경은 감상용이고 묵상용일 뿐인가...실천용은 아닌가? 실천은 어떻게 하는가? 도덕으로? 성령의 권능으로가 아니고..? 성령의 권능은 어떻게 역사하는가? 믿음의 선언과 고백과 행동으로가 아닌가? 고백은 왜 하는가? 평소 선서나 선언은 전혀 하지 않는가? 않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서도. 


성경대로 말해 둔다. 우리의 입술엔 초자연적 권능이 주어져 있다[잠언 18'21, 야코보서 3'6~12; 예샤야후(=이사야) 57'19 참조]. 심지어 죽이고 살릴 권능까지도 있다(시편 140'3; 잠언 21'23).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고, 진실이다. 필자의 말이 아니라, 성경이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입에 다름 아닌 성경말씀을 담아 선포하면, 그대로 이뤄지기도 한다(예: 마태복음 17'20).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도 마찬가지다. 역시 먼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선언/선포함으로써 활용하고 써 먹을 내용들이다. 생각만 할 자료가 아니라, 오직 믿음과 권능으로 실천할 사안이다. 그러므로 독자가 영적 싸움에서 이기길 바란다면, 에페소서 6장의 이 말씀을 외우고 다니면서, 믿음으로 선언/선포하고 고백하길 바란다. 이 점을 이해하고 명심하지 않으려면, 굳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의(義)의 가슴막이판(ὁ θώραξ ῆ δικαιοσύνη; Breastplate of Righteousness)

(엪 6'14)


갑옷 가운데 윗몸 부분을 덮는 가슴(막이)판(breastplate)은 가슴과 등 사이에 있는 심장을 비롯한 장부(藏腑) 곧 오장육부 등 몸의 주요 부위들을 총망라한 몸통(torso)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가슴판은 곤충의 딱딱한 가슴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가슴막이판은 그리스어로 '토락스'(ὁ θώραξ)로 불렸다. 훗날 '퀴래스'(cuirass)로 번역되기도 했다. 가슴막이판(板) 또는 가슴판이라는 것을, 한글 개정역은 옛 번역을 그대로 답습해 '호심경(護心鏡)'이라고 번역했는데, 옛 번역의 '흉배(胸背)'라는 말처럼 좀 우스꽝스런 옮김이다[각주:2]. 이것은 또 구약의 대사제에게 착용하게 한 우림과 툼밈이 든 판결 가슴받이(또는 흉대/胸帶)와도 혼동되곤 한다. 


호심경은, 글자 그대로라면 "심장을 보호하기 위한 거울"이라는 뜻으로 국한되어 들리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경(鏡)'이라는 끝 글자는 곧 고대의 거울을 가리키며, 햇빛을 반사해 내는 구리 등 금속제에 한해 붙은 말이다. 가슴판은 고대엔 금속제보다 가죽제가 훨씬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속제가 없지 않았지만, 무겁고 값비싸기 때문이었다.[각주:3]


아마도 의의 가슴판이라는 명칭 자체가 광선을 반사하는, 좀 더 강력한 의미와 어울려서 이 번역을 지탱하는지도 모르겠다. 가슴판이 흉/복/배부를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부착형 방패인 것은 맞다. 현대어로 쉽게 말하면, '방탄 조끼'와도 같은 것이다. 



가슴판의 다른 용례 


파울은 이 가슴판이라는 용어를 테살로니카A서(살전) 5'8에서도 썼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개정역). 파울에 따르면, 의(義)와 함께 믿음과 사랑도 호심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선지자 예샤야후(이사야)가 비슷한 낱말을 썼다.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이사야서 59:17 개정). 따라서 파울이 에페소서의 이 부분에서 구약의 예샤야후를 인용했다고 보면, 맞는 것이다[각주:4]


왜 파울은 여기 영적 싸움 대목에서 의의 가슴판으로 썼을까? 그것은 예샤야후가 이 무장을 하나님의 것으로 이미 표현한 데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전신갑주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방패와 직결


의의 가슴판은 몸에 바짝 붙어 다니며 몸통을 가려주고 막아주는 몸 방패와도 같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제 4번째 무기인 믿음의 방패(엪 6'16)와도 연관이 있다. 말하자면, 의의 가슴판 위에다 믿음 방패까지 더하여 더블(double)로 몸을 지키는, 이중 보호 효과를 낸다. 물론 믿음은 다른 모든 무기에도 결부되지만, 특히 의의 가슴판과 그러하다. 나의 믿음 없이는 쓸모가 없어지는 게 의의 가슴판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특히 의의 가슴판이 실감나지 않는 사람들은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인 곤충, 악어나 코뿔소, 거북과 아르마딜로 같은 동물을 관찰해 보면, 느끼는 바 있게 될 것이다. 창조주께서 왜 특정 동물들을 그렇게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셨을까? 하물며, 사람들의 영혼육을 보호하기 위한 전신갑주이겠는가?!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의!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완전무장을 우리 것으로 삼아 걸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큰 영광인 동시에 위대한 안전보장이어서, 큰 위로가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신자에게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파울은 에페소서의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호심경인 그 분의 의가 곧 우리의 의임을 강조한다. 구약에는 '예호봐 치드케누'(יְהוָֹה צִדְקֵנוּ)란 문구도 있는데, '우리의 의이신 예호봐님'이라는 뜻이다(예렘 23'6). 한글개정역은 '공의'라고 옮겼는데, 별로 바람직한 옮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같은 낱말이로되, 여기서는 공적인 정의라기보다 개인의 구원과 영적 싸움을 위한 의의 개념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가슴판의 기능: 상체 보호


사람의 몸통은 오장육부-심장과 폐, 간과 다양한 장들이 집중된 곳이어서 특히 치명적이다. 영적으로도 우리의 핵심 부위를 보호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지대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마귀는 우리의 양심과 율법을 악용해 늘 우리를 (과장하여) 단죄하고, 참소한다(요계 12'20. 사탄의 전형적인 언행인 참소의 개념을 위해 특히 요브서=욥기 1'9; 2'4,5, 제카리야서=슥 3'1~2 등을 참조하라.). 남을 앞장서서 참소하는 것은 마귀적인 언행이다. 그렇게 해서 자책감 및 자괴감, 죄의식 따위를 심어주고, 믿음을 약화시켜 두려움을 주며, 심지어 자살욕구 따위를 갖게도 만든다. 


따라서 크리스토님을 통한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마귀의 참소를 비롯한 온갖 공격으로부터 막아 주는 치명적인 역할을 한다. 의가 그만큼 중요하다! 의는 죄의 반대개념으로서, 율법과 직결된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완전한 의이기 때문이다.

 

한자의 '의(義)'라는 글자의 구성은 자못 신기하다. [羊+我]로, 양 양(羊)자와 나 아(我) 자가 합해져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상형문자인 한자를 만든 고대 중국인들은 양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내가 의로워진다는 관념을 마음에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 놀라운 개념이다. 

이 한자 '義'는 곡물을 제물로 바친 성경의 고대 인물, 형 카인과 달리, 새끼 양으로 제사를 드렸던 그의 아우 아벨을 연상시킨다(창세기 4'4).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아 주시고 그를 의인(義認, justify)해 주셨기 때문이다(히 11'4). 아벨이 드린 양은 곧 우리의 영원한 속죄의 어린양이신 예수 크리스토를 상징하는 그림자였다(페트로A=벧전 1'19; 요한계시록 7'9)! 침례(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키며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시오(요한복음서 1'29)"라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므로 참된 의는 오직 예수 크리스토로부터 온다. 오직 그 분을 믿음으로써 그 의를 적용받을 수 있다. 죄인은 어린양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될 수 있다. 그래야만 죄와 죽음을 벗어나 영생, 곧 영원한 참 삶을 누릴 수 있다. 이 말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또 소위 '지상천국'의 삶도 아니다. 영원한 나라인 천국에서 길이길이 누릴 구체적인 삶이다! 우리가 크리스토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해지며,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될 수 있다. 



영적인 몸통 보호하기


영적 싸움에서도 예수님의 의를 믿음으로 적용함으로써 우리 영혼의 치명적인 영적 몸통을 보호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의의 가슴판은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으로써만 그 역할을 제대로 한다(갈라티아서 2'16). 마귀의 참소와 단죄/정죄를 막을 길은 그 뿐이다. 


영적인 몸통이라지만, 혼과도 연계된다. 즉 우리의 머릿속 생각과 연관되는 우리의 감정과 감각도 연관이 있다. 이 의의 가슴판과 직결된 주된 감정 한 가지는 담대함 곧 용기와 담력이다. 이 담력은 주로 믿는 사람들의 영적 가슴에서 솟아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천주교인들의 특징 한 가지는 하나님 앞에서 이 담대함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죄를 짓고 나면, 으레 고백성사를 해 줄 사제를 찾는다. 직접 하나님 앞에 죄를 아뢰지 않고, 자기 죄를 '신부'에게 고하고, 그 사제가 하나님을 대리해 죄를 용서해 주고 죄사함 곧 사면선언을 해 주길 기대한다. 이런 그들은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 거의 무력하다. 


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오직 믿음(!),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마서 1'17)를 외치면서 감연(敢然)히 천주교를 탈퇴하고 그 거대한 비진리의 세력을 대적할 수 있었음은 이 의를 통한 담대함 때문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의의 가슴판은 중요하다. 


우리의 매일 영적 싸움에서도, 우리는 시시로 다가와 우리를 겁 주는 존재인 악령들에게 이 의의 가슴판으로 담대히 대적해야 한다. 



어떻게 막아내나?


마귀와 그 졸개인 악령들은 우리의 치명적인 약점들을 노린다. 예를 든다면, 미루고 미처 회개하지 않았거나 잊어버린 지난 죄악을 갖고 우리를 참소하고 단죄하면서 공격할지 모른다. 그들의 공격 한 방에 멍멍해져, 죄의식 탓에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못할 만큼 맥을 놓을 수도 있다. 누군가 나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정작 내가 가장 무력해지고 나약해지는 악몽 같은 순간이 있을 수도 있다. 


"니 잘못이다, 야 이 나쁜 놈아, 다 니 탓이야!"라고 단죄하고 공격해옴으로써 나의 무력감을 자아내는 것은 율법과 나의 양심 차원을 넘어, 마귀의 정죄이고 악령들의 공격이다. 이럴 때 즉각 회개가 필요하지만, 미처 회개하지 못한 사이 죄의식과 무력감에 빠져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럴 때 나는 어떡해야 하나? 죄를 회개한 뒤에 믿음을 발동하여, 내 의가 아닌(!) 주님의 의를 힘입어(페트로B서=벧후 1'1) 견디고 막아내야 한다. 영적인 적에게 항거해야 한다! 의의 가슴판이다! 루터처럼 벽에다 잉크병을 내던질 필요도 없다. 내가 떳떳하고 담대해질 수 있음은 내 자신이 아닌, 주님의 의 때문이다.  


죄의식은 두려움도 가져온다.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두려움이 아닌, 겁을 먹고, 불안해지고, 안절부절해지고 떨게 만드는 이 두려움은 하나님이 아닌 두려움의 영이 갖다 주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인 우리는 겁 먹을 필요가 없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파울은 믿음의 아들 티모테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움의 영이 아니네. 오직 권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네."(티모테B서=딤후 1'7 사역) 


위의 두려움에 해당하는 원어 낱말은 '데일리아(δειλία)'로, 겁 또는 비겁함이라는 뜻도 있다. 우리가 겁을 내거나 두려움에 휩싸일 때, 극복하는 길은 오직 크리스토님의 의의 옷을 입는 길이다(참고 시 132'9)! 그 분의 의가 내게 담대함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크리스토님 안에서 언제나 이기게 되어 있다(코린토B 2'14a). 할렐루야~!


파울은 또 코린토교회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리는 모든 면으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자천해 왔습니다...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갖고 그렇게 해 왔습니다."(코린토B서=고후 6'4a, 7b)


또한 로마 교우들에겐 이렇게 교훈한다: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도구(또는 무기)들로 하나님께 드리시오."(로마서 6'13)

이처럼 크리스토님의 의는 우리를 구원해 줄 능력과 힘이 될 뿐더러 강력한 영적 무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늘 훈련받는 병사가 근육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가슴을 내밀면서도, 갑옷이나 현대의 총알받이용 '방탄조끼'를 걸쳐입고 용감하게 적을 상대하듯이, 크리스토님의 군병들도 의의 가슴판을 걸치고 영적인 적인 마귀와 그의 졸병들 앞에 서서 그들과 담대히 맞싸우게 된다. 물론 그들을 우리의 권역(圈域)으로부터 밖으로 물리치는 싸움이다. 



무기의 실제 적용: 고백과 선언


이 둘째 무기를 갖고, 다음과 같은 고백과 선언을 해 보자: 되도록 일어서서 실제로 갑옷을 입는 것처럼 두 손으로 시늉을 하면, 더 실감이 갈 것이다: 


   나는 믿음으로 굳게 서서, 진리로 허리 띠를 띤다. (첫째 무기에 대한 복습이다: 허리에 벨트를 두르고 버클을 잠그는 동작)

   나는 (굳게 선 채로) 의의 가슴판을 나의 영적인 몸 위에 걸친다. (어깨 위로 가슴판을 걸치는 동작)    나는 나 자신의 의가 아닌, 주님의 의로써 원수들의 공격을 막는다. 나 자신의 의는 누더기나 걸레쪽과도 같다(예샤야후=사 64'6). 


   사탄과 그 졸개들은 들어라. 내 의가 아닌 주님의 의가 지금 나를 덮어 가려주고 있다. 나의 영적인 가슴과 몸통은 주님의 의로 덮여 있다. 지금 너희가 날 공격하는 것은 곧 주 예수님의 의를 공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날 공격할 생각일랑 말고, 나와 내 삶과 내 가족과 내 주변에서 물러가라! 

   전능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1. 6가지 설도 있다. 하지만 6이라는 수가 첫째로 하나님의 수가 아닌 사람의 수이며, 파울은 분명히 엪 6'18의 기도를 무기에 포함시키고 있다. [본문으로]
  2. 흉배는 과거 조선 시대의 왕족과 문무관들의 관복의 가슴과 등에 붙인 천조각이었다! 아마도 초기 한글성경 번역자들이 이것을 상상했던 모양이다. [본문으로]
  3. *흔히 가슴막이판은 고대의 흉갑(胸甲)과 배갑(背甲)으로 된 허리갑옷/동체갑옷(cuirass/퀴래스)과 동일시되곤 해왔다. 영어의 '퀴래스'라는 낱말은 무두질하다/치료하다/회복시키다는 뜻의 동사 cure와 어원이 같을 것으로 보인다. 즉 고대의 갑옷은 금속뿐 아니라 본디 주로 가죽으로 되어있었음을 시사한다. 이 단어는 초기 라틴어 코리움(corium/피부/가죽)에서 비롯된 후기 라틴어, 코레아케우스(coreaceus 코레아체우스=가죽제품을 가리킴)의 여성형인 코레아케아(coreacea)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전(BC) 14세기 사람으로 추정되는 고대 미쯔라임(아이귚트=에짚트) 제18왕조의 파라오, 투탄카문(Tutankhamun)의 관에서는 그의 '갑옷'도 발견됐는데(1922년), 정교한 가죽판을 물고기 비늘처럼 겹겹이 꿰어 만든 것이었다. [본문으로]
  4. 구약의 해당구절은 וַיִּלְבַּ֤שׁ צְדָקָה֙ כַּשִּׁרְיָ֔ן (봐일바쉬 제다카 카 쉬르얀)으로 돼 있다. 즉 "(예호봐님이) 의로움을 호심경처럼(또는 호심경으로서) 걸치시고"란 뜻이 된다. 쉬르얀/쉬르욘은 구약에서 주로 갑옷으로, 그밖에 가슴판으로 번역됐다. 따라서 가슴/복부/등을 감싸는 상체 갑옷으로 이해하면, 더 맞을 것이다. KJV 등 일부 영역들은 이 낱말을 '쇠사슬갑옷'(habergeon/hauberk)으로도 옮겼는데(예: 요브서=욥기 41'26), 좀 넌센스다. 쇠사슬갑옷은 주로 중세 기사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KJV는 또 이 구절 후반절에서 이 낱말을 갖고 어불성설 급 오역을 했다. [본문으로]

'성경이슈 > 영적싸움 도우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의 방패  (7) 2019.12.10
하나님의 전신갑주(3): 평화의 복음 군화  (4) 2019.10.23
하나님의 전신갑주(1)  (5) 2019.02.06
영적싸움의 개념과 완전무장(1)  (7) 2017.08.09
피의 선언  (15) 2012.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