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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슈/영적싸움 도우미

하나님의 전신갑주(3): 평화의 복음 군화

현대에 복원해 본 로마군인의 군화 '칼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3): 평화의 복음으로 갖춰진 군화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엪 6'15, 개역개정역)

καὶ ὑποδησάμενοι τοὺς πόδας ἐν ἑτοιμασίᾳ τοῦ εὐαγγελίου τῆς εἰρήνης,
또한 (두) 발엔 평화의 복음으로 갖춰진 군화를 신고서(자역)


하나님의 전신갑주 곧 완전무장에 속한 요소들 하나 하나가 중요하듯, 신발인 군화 역시 엄청나게 중요하다. 영적인 군사 내지 전사는 영적인 군화를 신어야 하는 법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영적 싸움에서는 물리적 전쟁에 쓰이는 도구와 무기들과 같은 요소들을 영적/상징적으로 사용하긴 하지만, 영적 전쟁은 물리적 전쟁보다 더 실제적이다! 내가 영적 싸움에 진다면, 물리적으로는 당장 아무 표시가 안 날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큰 손해를 입게 된다. 일차적으로는 영적인 손해가 오게 되겠지만, 정신적, 물리적, 물적 손해가 덩달아 올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 무기를 이해하는 것은 물리적 무기보다 더 큰 중요성으로 대두된다. 그렇지 않은가?


알다시피 신발은 다리와 함께 발을 주축삼아, 인체 상하반신의 무게 전체를 한꺼번에 떠받쳐 주는 바닥 구실을 한다. 몸에 비해 작아보이는 발바닥 아래 몸무게의 하중이 집중적으로 실리는 데가 신발이다. 건물로 말하면, 주춧돌 내지 초반석(礎盤石) 같은 역할이다. 따라서 신발은 그만큼 중요하며, 견고하고 몸의 균형을 완전하게 잡아 주는 것이어야 한다. 
하물며 전쟁을 하는 군인의 신발이랴!

로마군의 군화 '칼리가(Caliga)' 

이 군화의 기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먼저 고대 로마 군인의 군화가 어땠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고대의 군화는 창검을 주로 쓰는 보병들의 백병전에서 많이 쓰였기 때문에, 두 다리를 땅 위에 탄탄히 굳히고 버티며 흔들림없이 서야 했고, 그만큼 바닥을 특별히 강화해야 했다.    

고대엔 중동과 유럽 지역에 흔한 신발로 주로 샌들(sandal) 형을 신었기에 좀 대수롭지 않게,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로마 군대의 샌들부츠였던 칼리가(caliga 한 켤레니까 복수 caligae를 주로 썼다. "단단하다"는 뜻의 callus에서 유래.)는 모양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개념상으로는 현대군의 발 장비와 거의 다름없는, 엄연한 군화였다. 

유물로 남은 고대의 칼리가

 

갈릴리 호반에서 발견된 칼리가의 징 자국

그런데 평화의 복음으로 갖춰진 군화라니?..도대체 무슨 뜻일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로, 전신을 떠받들어 주는 탄탄한 신발처럼 평안(에이레네/εἰρήνης)의 복음은 두려움 없는 든든함과 침착함과 위로를 공급해 준다. 이 평안은 오직 크리스토님만이 주실 수 있는 하늘 평안이다. 영적 싸움에서 이 평안의 무장은 실로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사람들은 복음이라 하면, 우선 전파의 대상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나 자신부터가 누리지 못하는 복음이라면, 복음(=복된 소리)이라고 하기 어렵다. 나와 내 전우가 누리지 못하는 평안은 평안의 가치가 없다. 나와 우리가 누려야 평안과 복음의 의미가 있다. 싸움터에서도 도무지 흔들림 없고 요동치 않는 이 하늘 평안은 순교에도 필수적이다. 

더 나아가, 내가 누리지 못한 것을 어떻게 남에게 전달할 텐가? 그러므로, 전쟁에 앞서, 그리고 싸움을 치를 동안 나와 내 전우가 누릴 평안이 중요한 것이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화인 크리스토의 평안은 깊은 강물 아니 바다 속과 같이 흔들림 없는 무한한 절대 평안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평안이 없어, 이 절대 평안을 맛보지 못해 실상 죽어가는 것이다. 이 평안을 얻지 못하고 누리지 못해 삶이 시들어가거나 자살하는 사람들이 무수하다. 
그러므로 영적 싸움에 앞서 이 평안의 든든한 복음을 신발로서 갖춰 신는다는 것은 곧 적진 속에서도 속으로는 두려움 없는 무한한 평안을 바탕으로 전쟁에 임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니, 그럴 수나 있는가? 도대체 될 법한 소리인가? 그렇다! 크리스토님은 전능하시고, 그의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전능한 절대 평화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칼리가 

둘째로, 이 구절의 의미는 비록 영적 전쟁이긴 하나, 살인과 폭력의 발길이 아니라 평화의 복음을 전달하는 발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참 평화를 전해 주며, 평화의 필요를 일깨워 주고 갖다 준다. 이 평화는 세상 평화가 아니다. 유엔의 평화가 아니다. 

세상은 폭력과 무력으로 단합된 힘으로 궁극적인 평화를 얻으려고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크리스토의 전능한 힘과 그 복음으로 참 평화인 하늘 평화를 전달한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직 예수 크리스토 안에서 세상 뭇 영혼과 화해/화목하기를 바라신다는 그 화해 복음의 전달자, 대사들인 것이다.   

그래서 예샤야후(이사야)는 "아름다워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여!"라고 예언했다. 발 없이는 갈 수 없고, 전달할 수가 없다. 발은 이동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두 발은 나란히 평형을 이루고 균형을 갖춘 채, 단단한 진리의 반석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 진리 위에 서고, 걷고, 달려야 한다. 그밖에 다른 곳은 푸석푸석하고 허허로운 모래땅일 뿐이다. 그런 데서는 제대로 백병전을 치를 수가 없다. 


로마 군의 칼리가는 치명적인 약점도 있었다. 액체로 미끄러운 바닥에서 미끌어져 넘어지기 쉽다는 점이었다. 한 로마 백부장은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침공 당시, 피해자인 유대 레빝 사제(레위 족 제사장)들의 피가 온통 흥건했던 성전 대리석 바닥 위에서 넘어져 결국 죽은 사건이 있었다. 바로 칼리가 바닥의 쇠붙이 탓에 미끄러진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적 군대인 우리들의 군화는 결코 그럴 일이 없다. 진리의 복음으로 예비된 신발이기 때문이다. 예호봐 이레(앞서 미리 준비하시는 여호와)님이 갖춰 주신 평화의 복음의 군화이기 때문이다! 

이 신발을 신어야 우리의 적과 맞서서, 장부답게 맞싸울 수 있다. 내 나름으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나의 나름 칼리가로는 이길 수 없다. 든든한 평안으로 무장한 진리 말씀의 신발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