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열흘을 출타하였다 집에 돌아와 보니 내게 남긴 전화 메시지가 있다. 셀폰으로 전화할 수도 있는데, 굳이 집 전화에 메시지를 남긴 걸 보니 긴급한 일은 아니어도 대화가 하고 싶었음을 나는 짐작한다.
며칠 후 안부 전화 하면서 그녀가 심중에 있던 말을 쑥스러워 하며 어렵게 꺼낸다.
“뉴하우스님, 왜 교회에 가면 교회에 오래 다닌 저한텐 사람들이 친절하지도 않고 관심도 안 보이고 친교 시간에 옆에 와 잘 앉지도 않는데 얼마 전에 새로 온 자매한테는 왜 그렇게 잘 해 주지요?”
참으로 어렵고 복잡하고 정답이 없어 보이는 인간관계로 인한 갈등. 이런저런 형태로 엮인 관계 속에서 우리의 삶이 때론 많은 고통과 상처를 동반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더는 새삼스럽지 않은 인생살이의 일부이자 현실로 자리잡은 지 오래되었건만 나이 어린 이 자매에게는 아직도 힘겨울 시기다.
관계 속에서 나의 가치란 나를 아껴 주는 식구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왠지 위협을 받는다. 더는 허물을 덮어 주는 관계의 형성이 아니어서인지 모르지만 수없이 많은 잣대로 판단 받고 구분되고 나누이고 속하기도 하고 멀리 하기도 한다. 소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보기를 실천할 의무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교회라 할지라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중간 중간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는 동안, 사람에게 실망한 그녀의 상처 받은 얘기는 계속된다.
“그 자매는 사랑 받을 만하게 행동해요. 근데 부럽고 질투가 나요. 제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계속되는 그녀의 실망과 자책 속에 비치는 마치 세상 풍파를 모르는 어린아이와도 같이 여리디 여리기만 한 그녀의 마음이 너무 조심스러운 나머지 나는 아예 할 말을 잠시 잃는다.
사람마다 가진 고민의 색깔은 각양각색이나 문제의 본질은 대개 대동소이하다. 대부분 "나도 그랬어." 하며 쉽사리 공감할 수 있는 그저 ‘사람 사는 이야기’이다. 그 누구의 인생도 완벽할 수 없는 이런저런 삶의 이야기를 통해 우린 서로 유대감을 형성하기도 한다. 그런가면 가끔은 내가 가 보지 않은 길에서 겪는 그 사람만의 독특하고 힘든 인생 여정 이라 과감히 나의 관점을 접어 놓고 수용하는 인내의 노력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사는 이야기’도 있다.
나는 내게 풀어 놓은 이들의 다양한 사연으로 가득한 인생의 짐 보따리를 대신 짊어 질 수는 없다는 것은 잘 안다. 몇 알만 먹으면 체증이 내려 가는 만병통치약을 알고 있지도 않다.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위로나 충고를 한답시고 상대가 느끼는 감정을 별 거 아니게 여겨 기분전환에 초점을 두는 실수를 하거나, 아니면 상대의 나이가 어린 경우는 우선 고쳐 주고 가르치려 드는 소위 ‘부모의 어젠다 심리’가 발동해 상대가 원하지도 않는 또는 상대에게 적절하지도 않은 훈계를 하려 드는 어리석음과 무모함의 과오도 범한다.
그것 뿐인가. 너무 앞서 가서 힘겨워 하는 이를 더 큰 혼란에 빠뜨리기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 날이 있다면 바로 오늘이지 싶다. 오늘은 내 속에 여느 때보다 더 격렬한 절제의 투쟁이 예측된다.
이 젊은 아기엄마가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을 수도 있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한 데는 여러 원인의 요소가 있겠지만, 지금은 그녀가 느끼는 소외감과 외로움의 호소가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혼자만 겪을 수 밖에 없는 아픔과 괴로움의 몫이 누구에게나 있어도 가끔은 이유를 불문하고 공감과 이해를 받고 싶은 것이 모두의 마음이거늘, 아직 스스로 자신을 달래고 위로하지 못하는 그녀를 나는 어떻게 공감하고 위로할 것인가? 안타까운 마음에 내가 내는 조바심만치 적절한 아이디어는 쉽게 떠오르질 않는다.
돌아보면, 내가 어른이 되긴 했으나 아직 내 속 사람이 미처 채워지기 전, 주변에서 혀를 칼처럼 쓰던 이들이 내뱉던 말들에 수없이 베이던 시절이 내게도 있긴 있었다. 자기 자녀의 위험한 행동에 주의를 준 것 뿐이건만 다시는 안 볼 듯 하고 사라져 버리던 이가 주던 무언의 보복으로 말미암은 상처의 흔적도 있기는 있다. 이젠 다 아물어 굳은살로 변해서인지 같은 곳에 상처가 나는 일은 거의 없다.
남편의 임지가 바뀔 때마다 교회를 찾아 다니던 때가 생각난다.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교회에서 나를 향한 눈길은 다양하나 아무도 내게 다가 오지 않을 때 그 어색하던 순간들을 온몸으로 느끼던 시절도 생각난다. 아니다. 오히려 아무도 아는 척 안 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색함을 떨치느라 아무와도 눈도 안 마주치면서 스스로 소외시켰는지도 모른다. 대부분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는 미국 교회의 풍습이 맘에 들기도 했다.
모른 척하고 앉아 있으면 되었으니깐. 그때는 새로운 환경이 왜 그리 낯설고 내 속에 일어나는 감정에 왜 그리 민감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낯이 두꺼워지지 않았나 싶게끔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만남을 은근히 기대하게 되었으니 나도 참 많이 달라졌다.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에 조금 더한 세월 이것만 지금의 나도 강산 못지 않게 많이 변해 있다.
지금만큼의 용기와 배짱. 분명한 판단의 기준. 감정의 절제와 지혜가 있었더라면 소외감도 외로움도 아픔도 덜 했겠지. 사람들이 절제 없이 마구 휘둘러대는 세 치의 무기도 지금 같은 순발력이 있었다면 잘 막아낼 수도 있었을 텐데. 인제 와서 돌아 보면 그 때의 고통이 너무도 대수롭지 않게 느껴져 이렇게 쉽게 잊고 용서해도 되는가마저 싶다. 역시 세월이 약인가 보다. 아니면 쓴 약의 대단한 효과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이런 갈등이 인생의 과정이자 변화하고 성숙하기 위한 계기와 자극제가 되고 쓴 약일 수록 효과가 있다는 말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어차피 나처럼 세월이 한잠 지난 후에나 여유를 갖고 되돌아 보며 할 수 있는 말이겠지 싶어 이 말도 아끼기로 한다.
그래서, 나는 뜬금없는 추운 겨울날 아침 나의 일상을 들려 준다.
“제니 엄마, 우리가 사는 데는 물 가라 바람이 많이 불잖아요? 걸어서 한 5분이면 짐(gym)에 갈 수 있는 거리이지만 추울 땐 정말 가기 싫지요. 특히 다리를 건널 땐 살 속까지 파고 드는 찬 바람이 너무 싫어 그냥 집에 있고 싶을 때가 잦아 간혹 그냥 집에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 그래도 내가 옷을 잔뜩 껴 입고라도 가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집에 올 때는 운동을 하고 난 후라 내 몸에서 열이 나니까 바깥 온도는 별 차이 없어도 갈 때 같이 춥게 안 느껴지거든요. 나는 이 맛에 집을 나갈 땐 힘들어도 돌아오는 길은 훈훈하니까 가기 싫다가도 마음을 바꾸고 집을 나설 수 있어요.”
내 속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에 집에 돌아올 때는 그렇게 싫은 추위와 거센 바람의 잔혹함이 오히려 신선하고 시원한 바람 정도로 느껴진다는 생리학적 사실에 나는 더는 찬 바람과 냉기가 두렵지 않았다. 의지가 약하고 어떤 육체적인 단련도 내게는 취약점인 나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다 동원해야 하는 판이라 대수롭지 않은 이론이긴 하나 나 자신에게 운동하러 가는 동기를 부여하는 큰 이유 중 하나이다.
한결 가뿐해진 발걸음이여서인지 아니면 몸을 움츠릴 필요 없이 아침의 신선한 공기를 맘껏 들이마셔서인지는 모르나 이 심오하지도 않은 평범한 겨울을 나는 내 나름의 대처법이 내겐 어느 아침 날 영감으로 다가왔다.
설사 내가 매일 아침 겨울 동안 맞는 찬 바람 이상으로 실망과 상처의 바람이 불어제껴도 내 속에서 나오는 열기가 바로 마음의 살을 에지 않게 하는 특효약임을 알기에 나와 그녀의 이런 대화는 계속된다.
“내 속이 훈훈하면 내 주위에도 덜 민감해지나 봐요. 사람에게서 나오는 매서운 추위와 바람에도 덜 민감해지고. 내 몸에서 열기가 안 나면, 비좁은 창 틈새를 비집고 들어오는 약한 바람마저도 손끝을 얼게 하듯, 내 속이 비면 빌수록,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 설혹, 나와는 직접적으로 상관 없는 일에마저도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져 상처도 받고 소심해지고 결국 관계에 소극적이 되더라고요.”
“그렇지요?” 하며 되묻는 그녀의 약간 실망의 흔적이 담긴 말끝의 여운도 난 직감한다.
차라리 일관성 없고 변덕스러운 인간 ‘그 누구’를 탓하면 잠시는 우리 둘의 마음 속이 더 후련했으려나 싶지만, 이도 잠시요 다시 상처는 아려오게 마련인지라 이것도 올바른 지혜 있게 공감하는 방법은 아니다.
“나는 변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하잖아요?. 근데 내가 조금씩이라도 성장해서 든든히 서가면 주위 사람도 변하고 상황도 같이 변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여전히 내 주위에는 아직도 내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는 사람은 항상 있다. 나의 삶은 하루도 그 모습이 같은 날이 없이 매일 매일 새롭고 숙제와 도전의 연속이다. 그러고 보면 나 말고는 변한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제가 인사도 잘하고 친절하게 하는데도….”
“우리 애들은 어려서 전 주방에서 봉사도 못하는데, 아마 그 분은 봉사를 잘해서 사람들이 좋아 하고 잘 해 주나 봐요…”
그녀가 느끼는 외로움과 아픔은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그녀의 행동거지에 대한 대가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관심이든, 친절이든, 사랑이든, 받기만 하는 입장에 서 있는 한은 항상 타인의 반응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지 모른다.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채우려고 받기를 기대하고 끊임없이 채워지길 바란다. 그런데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듯 호감과 존중, 관심과 친절 따뜻한 마음도 감사도 주는 자리에 있을 때가 한결 낫다. 주는 것이 받는 것이고 주면서 내가 채워진다는 불문률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 아닌가.
모든 이에게 다 줄 수는 없어도 누군가 혹시 나의 예전 모습과 같거나 아니면 이 자매와 같이 아직은 단단하지 못한 ‘단 한 사람’ 은 어디나 있다. 나 한 사람의 변화가 다른 한 사람의 변화를 낳아 점점 주는 자리를 지키는 자들의 수가 늘어나면 그만큼 내 주변은 환해진다.
내게도 한때 나의 쓰라린 마음과 상처만 달래고 있을 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멘트로 하루 저녁에 나의 키 한 자가 자라게 하시던 어느 장로님의 처방약 같던 인자하신 말씀이 있었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사소한 칭찬. 새로운 환경과 근무지에 갈 때마다 소외감을 안 느끼게 티 안 내고 배려하던 이들의 친절.
경험이 부족하고 시야가 좁아 실수하고 낙심할 때 동전의 뒷면도 보여 주며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게 하던 이의 논리적이면서도 차분한 성품과 용기. 이 모두 나를 지금의 나 되게 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나는 주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끼치는 영향력의 위력을 잘 안다.
베푸는 것. 사랑을 주는 것. 나누는 것. 배려하는 것. 섬기는 것. 다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렇게 처음부터 주는 자리에 설 수 있는 건 아니다. 주려면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의 가치를 충분히 알 때 걸맞은 권리 행사도 있게 마련이다.
우린 너도나도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는 착각을 하며 산다. 그래서 성경은 ‘네가 아는 것을 의지하지 마라’고 하시나 보다. 대신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말씀하신다. 나를 신묘막측 하게 지으시고 나의 머리카락 수까지도 세시리만큼 나를 정확하게 아시는 하나님, 앉고 서기도 전에 나의 생각까지도 아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참된 나의 모습을 알게 되는 시발점이다.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 아직 죄 가운데 있을 때 아들로 하여금 나의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게 하신 기막힌 사랑으로 부르시고 보여 주시고 믿게 하시고 자녀 삼으신 하나님. 이 사랑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는 나의 존재감. 이 귀한 사랑은 내 속에서 계속 자라 갈수록 빛과 위력을 발산한다. 이 사랑이 내 속에서 훈훈한 열기가 되어 나의 마음을 모진 세파로부터 보호하고 지킨다.
자신의 이런 귀한 가치를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귀하게 여긴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진정한 나의 가치를 알면 자신에게도 너그러워진다. 사랑을 얻고자, 인정을 받고자 사는 삶은 바둥거리지만 이미 차고 넘치게 받은 사랑과 계속 부어 주시는 은혜로 사는 삶은 느긋하다. 자신에게 너그러워질 때야 비로소 우린 다른 이에게도 너그러워질 수 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달란트 그리고 나의 장점을 볼 수 있어야 남의 재능과 장점도 눈에 들어오게 마련이다.
그 누구도 사람과의 관계 자체를 초월할 수는 없지만, 나의 가치를 판단하는 사람들의 판단 기준은 초월 할 수 있다. 사람마다 제각기 갖다대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은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나의 가치는 하나님께로 난 것이기에 인간이 씌우는 어떤 굴레도 나를 정의하지 못한다.
그래서, 진정한 자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사랑하기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실패도 거부 당함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마음의 살이 단단해져 가는 동안은 상처도 입고 낙심은 될 망정 사랑하기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완전한 사랑을 받아 본 자만이 줄 수 있는 또 다른 사랑과 섬김의 위력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완전한 사랑의 묘미를 아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녀가 곧 이 갈등의 동전 뒷면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고민하고 괴로워 하는 그녀의 모습을 안쓰러워하면서도 언젠가는 더 단단하고 의연하고 지혜로운 믿음의 여인으로 변화되어, 주고 싶고 섬기는 자리에서 인생을 바라보게 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한결 맘이 놓인다. 아프고 난 후 훌쩍 크는 아이와 같이 훌쩍 커 있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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