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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비평/영화&드라마

'기독교영화', 어떻게 볼 것인가?

곁눈질로 '(막달라)마리아'를 보며 거의 실없이 킥킥대며 웃는 '예수'.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의 한 장면이다. 두 배역은 세팅 장소에서 사귀다 이내 동거생활에 들어간 지가 여러 해인데도 여태 미혼 상태다! '기독교 영화'에 출연했더라도 출연자 개인의 삶은 기독교 정신과 거의 전혀 무관하다는 통념이 일대 아이러니다. 영화 내용과 배역(配役)들의 이율배반적 요소라고 할 만하다. 

 

'기독교영화', 어떻게 볼 것인가?

푸에르토리코 출신 미국인인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한 문제작, '조커'가 한국에서도 개봉됐다. [조커에 관해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따로 비평을 해 보겠다.]  
피닉스와 동거녀 여배우, 루니 매러(한국식: 마라)의 최근 움직임을 9월 뉴스에서 읽었다.  보려고 해서가 아니라, 2018년작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Mary Magdalene)의 두 주인공('예수'와 '마리아')이었기 때문에 눈에 띄어서다. 바로 그 영화의 세팅 장소에서 서로 눈이 맞아 "찐하게" 사귀기 시작한 둘은 여태도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연전에 동거에 들어갔단다. 신성해 뵈는(?) 영화 내용과는 너무나 걸맞지 않은 동태가 아닐 수 없다. 

사족적(蛇足的)인 얘기겠지만, '피닉스'(Phoenix)란 이름은 불사조라는 공상의 새니까, 개인의 이름으로선 특이하다. 그런데 같은 이름의 미남 배우였던 그의 형부터가 불사조답지 않게도 이른 나이에 먼저 갔다. 실은 마약 중독 탓이었다. 정말 허무한 것이, 피닉스란 이름이 무색해진다. 사실 피닉스는 오컬티스트들과 비밀집단 사람들이 선호하는 상징의 하나이다. 


아무튼 그런 배경과 행실의 피닉스와 매러가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로 출연했다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다니, 참 가관이다. 그렇지 않은가? 메로빙 왕조가 예수님과 막달라 사이의 후예라는 '다빈치 코드'를 두 배역이 몸소 실행한 셈인가?

피닉스의 집안은 게다가 본디 컬트 추종자들 출신이다. 부모와 일부 자녀가 한때 '하나님의 자녀들'(Children of God)이라는 일종의 섹스종교에 '선교사'로 속해 있다가 빠져나온 것. 
창교자가 모지즈 데이비드(모세 다윗 본명: 데이빋 벍)인 이 사교는 여신도들에게 '하나님의 선물'로서 자신들의 몸을 남성들에게 기꺼이 바쳐가며 포교하는, 소위 '꼬시미 피싱'을 강요하곤 했다. 일종의 종교 매춘이었다. 이 사교단체의 현재 명칭은 '더 패밀리 인터내셔널(TFI)'이다. 


여기저기 웹에 올려진 영화 감상평을 보니, 피닉스를 예수님으로서 참 걸맞은 인물이라고 해 놓았다. 이래서 기독교영화라는 장르부터가 참 문제시된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특히 '예수' 배역이 출연하는 영화가 그렇다. 
  
위 제목의 기독교영화란 단어에 필자가 홑따옴표를 붙인 이유를 독자는 알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보이거나 성경 내용과 비슷해 뵌다고 다 참 기독교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영화에 대한 정의는 독자마다 다를 수도 있다는 전제 아래서다. 그래서 더구나 분별 내지 검증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어찌 보면, 나는 젊던 시절, 영화감상을 통해 성경적 분별을 향한 나름의 만보(慢步)랄까..를 옮기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하필 영화감상을 통해 성경적 분별을..? 돌이켜 보면, 일종의 역설 같다. 

전에 딴 글에서도 비친 적이 있지만, 하나님의 절대 진리말씀에만 인사이더(insider)가 되고, 나머지 모두에 대해 아웉사이더(outsider)가 되려는 평생의 다짐을 하게 된 것이, 나의 지도교수와 친구와 나, 셋이서 함께 한 영화를 보다가 내 맘속에 일어난 일이다. 그 날 공포영화를 보며 몹씨 겁을 내던 나에게 친구가 "속에 몰입하지 말고, 아웉사이더가 되어 객관적으로  무대 위의 연기자들을 내려다보듯 하면 어떠냐?"는 식으로 권한 말이 결정적인 모멘텀이 된 셈이다. 

관객들은 영화 속에 몰입하기를 즐기고 선호한다. 아웉사이더이기보다 인사이더이길 바라곤 한다. 예컨대 공포물을 보되, 심장을 죌듯 무서움을 타면서도 탐닉한다. 살 떨리는 스릴(thrill) 속에 트릴(trill)을 내면서 말이다. 그것이 사실대로의 기록물이든, 완전 핔션에 근거한 공상물이든,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것이든 그렇다. 그런 그들에게 인사이더 아닌 아웉사이더가 되라면, 거개는 "그럼 재미없다", 또는 심지어 "재수없다!"고 내뱉을 법하다. 

왜 그럴까? 색깔과 모양을 갖고 움직이는 시청각적 사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관 중에 시각과 청각보다 더 자극적인 것은 없다. 이것이 눈과 귀에 동시에 다가드는 입체적이고 실감나는 영화야 말로 우리를 강력히 자극한다. 그래서 영화감독들은 더욱 더 자극적이고 소위 "실감나는" 작품을 만들려고 골똘하게 골몰한다. 그런 선구자가 스티븐 스필벍였고, 그런 본격적인 시도가 '라이언 일병 구출하기'였다.  

사람들이 소위 기독교영화를 볼 때도 예외가 아니다. 듣고 읽기만 하던 성경을 눈으로 실감나게 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주님이 어떤 분이심을 여태 귀로만 듣다가 이젠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요브서=욥기 42'5)란 욥의 고백을 영화 앞에서 따라 하기라도 할 것인지. 


난, 익히 아는 성경 스토리나 알 법한 크리스천 이야기를 대할 때, 내가 이미 잘 아는 주제라서 맘이 한결 느슨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긴장하곤 한다. 선이 극명하고 팽팽한 절
대 진리인 성경을 소재로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흔히 대상을 볼 때, 진리보다 사랑을 중시한다. 으레 코린토A서(고전) 13장을 떠올리고 인용하면서 모든 것을 가볍게, 기분 좋게, 관용미 넘치게, 느슨하게 대해 주고 넘어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생각들을 한다.

그러나 성경의 사랑이란 것이 과연 그런 것이던가? 성경이나 기독교적 주제를 다루기만 하면, 그 모두가 다 '기독교영화'라는 식의, 장르 판별과 단정부터가 사랑에서인가, 진리에서인가? 세속 영화와 기독교 영화를 나누는 표준이 단지 그런 수박 겉 핥기 식의 판단으로 그치는 것인가? 사랑이라고 포근하게 느끼는 그 감정이 제일인가? 사랑의 하나님은 동시에 진리의 하나님이심을 그리도 쉽게 잊는 것인가?

요즘은 모든 종교를 공평히 대한다면서 기독교도 수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란 식으로 대하는 뉴에이저들이 한국에도 상당히 늘고 있다. 예컨대 그들은 불교를 존중하고 거기 동정적이듯, 기독교에 대해서도 짐짓 존경하는 태도로, 관용적, 동정적으로 대해 온다. 그렇다고 그가 크리스천인가? 큰 착각이다. 

우리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주제와 표면상 기독교영화라고 해서 나도 그것을 기독교영화로 선뜻 따라 주는 판단은 속단이지, 판별이나 분별이 아니다. 검증은 더구나 아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영화로 속단하고 그대로 믿고 나가다간, 개념상, 논리상으로 나는 참된 의미의 크리스천이 아닐 수도 있다. 절대 진리인 성경의 잣대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혹시, 필자가 절대 진리라고 언급한 것 때문에, 불쾌하게 생각할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듭난 크리스천이 아니라면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이라면, 더구나 거듭난 크리스천이라면, 진리가 무엇이며 왜 성경이 절대진리인지를 깊이 생각해보고 태도와 기분을 결정할 일이다. 

성경은 타협과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진리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단언컨대 나는 성경을 믿을 필요가 없다! 상대적 진리는 적어도 내가 믿을 가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런 이름과 무늬만의 '진리' 따위는 세상에 너무나 흔해 빠진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 진리란, 내가 100% 믿고, 단연코 100% 의존하면서 목숨까지 걸 수 있는, 그런 대상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자신을 속이는 데 불과하다.  

이렇게 나는 이 절대진리의 잣대로 무장하고서, 영화든 뭐든 모든 문화예술 작품을 필터링 한다. 물론 아예 보지도 않을 경우가 더 많다. 트레일러만 보고도 거기 절대 진리가 보이지 않을 때, 진지하게 감상할 가치를 못 느껴서다. 


다시 영화 '막달라...' 이야기다. 짐작하거나 이미 판단이 된 독자가 많겠지만, 이 영화는 성경의 막달라 마리아를 대폭 변질시켜 놓은 작품이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12 사도에 끼어넣어, 제13사도, 유일한 여성 사도로 선임하신 적이 없다. 

그 마리아가 그날 부활의 새벽에 되살아나신 주님을 처음 목격한 증인인 것은 맞지만, 부활의 증인은 사실 그녀뿐 아니라, 그 날과 그 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이었다! 또 부활하고 승천하신 주님을 직접 목도한 사람들은 최소 500명이나 된다! 훗날 사도 파울까지도 찬란한 빛 가운데 나타나신 부활/승천의 주님을 직접 보고 한때나마 눈이 멀기까지 했다. 그들이 다 부활의 증인들이었고, 세상을 떠난 성도나 현재 믿는 우리들도 비록 되사신 주님을 눈으로 보진 못했더라도 마음으로 믿는 부활의 증인들이다! 

주님은 토마(도마)에게 "자넨 날 봤으니까 믿는 건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은 복되다네"(요한복음서 20'29) 하신대로 주님의 부활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막달라 마리아가 아닌 우리라도 충분히 복되다!   

그런데 천주교가 그 마리아를 '사도 중 사도'라고 불러가며, 마치 부활의 유일한 증인인 양 포장해쌓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소행이다. 안 그래도 그들이 "흠숭"해온 성모 마리아 위에다 또 다른 마리아를 의식적으로 오벌랲(?) 시키려는 느낌이 든다. 이처럼 성경 속 여성을 거의 여신화(?) 해온 그런 천주교가 절대로 여사제를 쓰지 않고 페미니즘도 철저히 배척하는 건  매우 모순되어 보인다.

게다가 그런 영화를 참 기독교영화인 양 경탄하다 못해, 출연자 프로파일까지 입술에 침이 마를 정도로 상찬하는 사람들은 더 우습다. 

독자여, 관객이여. 소위 기독교영화에 쉽게 끌리거나 매료되지 마라. 시각과 감관과 감정에 치우치지 마라. 할리우드 출연자의 삶에서 무슨 거룩함을 기대하지 마라. 
적당히 잘 포장한 시각문화가 아닌 절대 진리인 말씀에 귀착하라. 그 진리를 잣대 삼아 잘 분별하고 판단하여 검증하라. 그러지 않는다면 독자의 분별력은 나날이 둔화되고 퇴화되다  못해 불능해질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