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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너벨 리'와 포우(Poe)

   에드거 A.와 버지니아 포우 부부[각주:1]

김삼

에드거 앨런 포우(Edgar Allan Poe 1809-1849)가 남긴 마지막 말은 "주님, 나의 가여운 영혼을 도우소서."(Lord, help my poor soul.)라는 짧은 외마디 기도였다. 절규 같은 이 기도는 불행했던 시인/작가의 삶 전체를 되돌아 보게 하면서도, 그가 평생 지탱해 온 문학정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백이기도 하다.

미국의 대표적인 시인/작가의 한 명이던 포우의 작품들 중 가장 인기 높은 시라면, 단연코 '갈가마귀'(The Raven)[각주:2]와 '애너벨 리'(Annable Lee)일 것이다. 특히 후자는 어른들은 물론 어린이/청소년들까지도 폭넓게 애송하는 작품이다. 필자도 철 없던 사춘기 시절 초, 이 시를 처음 접하곤 눈물을 글썽였던 것으로 추억된다.

올해는 포우가 태어난 지 200돌.
포우는 짧은 40년 생애를 살았으면서 미국 문학 지평에 큰 획을 그었다고 평가된다. 그는 미 건국 이래 문학가로선 최초로 유렆에서 더 명성을 떨친 사람이다. 시 '애너벨 리'는 그가 죽던 그 해 봄에 남겼다. 마치 '백조의 노래'인 양. 포우는 그 어둠과 신비스런 추리성 탓에 '죽음의(macabre) 시인/작가'라고도 불리지만 그 대중성과 인기는 여전히 대단하다. 

왜 하필 이런 세속 시를 다루려느냐고 독자는 물을지 모르겠다. 실은, 이 시가 자력 내지 마력(?)에 가까운 대단한 매력을 갖고 인기를 끄는 데다 자칫 잘못된 인상과 영향을 심어 줄 수 있는 탓이다.
그래서 다음 순서로 포우의 삶과 함께 이 시를 다뤄 본다.


포우의 삶과 배경
포우의 작품 세계
의문의 죽음
포우는 안티메이슨?
애너벨 리는 누굴까?
시 '애너벨 리'에 대한 기독교적 분석
포우의 뒷 얘기


포우의 삶과 배경[각주:3]

의학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옛 시대인들-문화예술인들까지 포함해서-이 으레 그랬지만, 포우는 단명한 데다 여러 모로 불행했고 따라서 매우 가여운 사람이었다. 포우의 삶의 역정을 살펴 보면 일찍부터 고아였던 그는 누구랑 사랑을 미처 제대로 받지도, 채 주지도 못한 미완성 애정 행보로 점철돼 있다. 그래선지 평생 술에 찌들어 살았다. 
 
탁월한 문학 재능으로 수많은 신문/매거진 등 언론사의 부편집장으로부터 발행인까지 다양한 기회가 주어졌지만, 성격상 워낙 진득하게 붙어 있지 못해 가정을 꾸려 나아갈 재정력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아내와의 생활 외에도 수많은 여성들과의 애정 편력도 어느 하나 '성공'하지 못한다.   

포우는 1809년 1월19일 매서추세츠 주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조부모가 모두 아일랜드 출신인 포우의 아버지 데이빋 포우 2세와[각주:4], 잉글랜드 출신인 어머니 일리저벹 아놀드[각주:5]는 1806년 초봄에 결혼한 유랑연극 배우였다. 일리저벹은 앞서1805년 남편 찰즈 핲킨즈를 잃은 과부로서 데이빋과 재혼했다.    

본래 법학을 공부하다 배우로 데뷔한 아버지 데이빋 포우2세는 포우가 아주 어릴 때 어디론가 가출해 버렸고(1810년)[각주:6], 혼자 세 자녀를 데리고 순회공연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잇던 엄마는 포우가 겨우 두 살 때 폐렴으로 숨져 갔다[각주:7].
부모의 연기적 소질은 포우에게서 대중적 호소력, 연출적 과장, 무대설정적 창작 기질 등으로 나타난다. 또 데이빋의 충동적/환상적 기질도 물려 받은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포우는,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의 비교적 부유한 연초 상인인 잔 앨런의 집으로 들어간다[각주:8]. 그러나 앨런은 일설과는 달리 그를 공식 입양한 적이 없다. 포우가 3살 때인 1812년 1월 7일엔 성공회 성당에서 잔 부캐넌 신부에게 유아세례를 받았고[각주:9] 이때 앨런이 대부가 된다. 
포우는 어릴 적부터 조숙했다. '유치원'에 다닐 때는 놀이짝꿍인 캐터린 포이티오에게 상당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각주:10]. 그후 둘은 평생 친구가 된다. 
  
여섯 살 적엔 앨런 부부를 따라 영국으로 건너가[각주:11] 이듬해 런던 근교의 '미시즈 듀버그 보딩스쿨'에서 철자법과 성공회 교리문답 등을, 1818년엔 존 브랜즈비 성공회 신부의 매너하우스스쿨에서 라틴어 등 고전 기초를 배웠다. 
영국에 5년간 머물던 그는 11세 때 앨런 가족과 함께 귀국해 리치먼드에 거주하면서 '조셒 클라크 스쿨', '윌리엄 벌크 어캐더미', '레이 토머스 스쿨' 등 사립학교를 계속 다닌다[각주:12]. 포우는 본래 학업 성적이 뛰어났으나 대부 앨런은 넉넉한 학자금을 대지 않았다.

포우는 나이 열 살 무렵엔 대모인 프랜시스 앨런 부인에게[각주:13], 그녀가 죽은 뒤엔 친구 엄마에게 진한 이성애를 느꼈다고 한다(그즈음의 명시가 '헬렌에게'다). 15세 때인 1826년엔 버지니아대학교[각주:14]에 입학, 새러 엘미라 로이스터(SER)와의 첫 사랑을 싹 틔우지만 로이스터 아버지의 방해 작전으로 실연한 뒤 크게 실의해 술과 도박에 탐닉한다[각주:15]

도박으로 진 빚 탓에 학교를 떠난 포우는 대부와 한 바탕 싸운 뒤 가출해 배를 타고 노포크를 거쳐 보스턴까지 갔다. 18세 때(1827년)엔, '22세'라는 거짓 나이와 '에드거 A. 페리'라는 가명으로 육군 포병대에 입대해 보스턴 항 포트인디펜던스에서 복무한다[각주:16]
그 후 소속연대가 사웉캐럴라이나 주 찰스턴 부근 설리번즈 섬의 포트 몰츠리에 배치돼 포병부대 서기관 겸 기술병으로 복무한다[각주:17]. 1828년 12월 중순경 다시 연대가 버지니아 주의 포트 먼로로 이전 배치됐고[각주:18] 포우는 이듬해 정초에 원사(특무상사)로 진급한다. 
 
이듬해 1829년 2월 28일엔 대모 프랜시스가 죽는다[각주:19]. 군대가 지겨워진 포우는 4월15일 제대했고 12월엔 둘째 시집 '앨 에이랲, 테이멀레인과 소시편들'을 볼티모어에서 펴 낸다. 
1830년 7월엔 다시 편지로 대부 앨런의 도움을 청해 뉴욕주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해 10월 대부가 재혼하면서 앨런의 사생아들을 놓고 포우와 둘 사이에 격돌 끝에 결국 다시 한 번 앨런에게 버림 받는다.
그 바람에 포우는 이미 사관학교를 맘 속으로 포기하고 다양한 벌칙으로 퇴교 당하지만, 학교재판에선 교묘히 혐의를 벗어난다.  

1831년 2월 뉴욬으로 떠나 거기서 세 번째 시집 '시편'(Poems)을 낸다[각주:20]. 3월엔 볼티모어로 귀가한다. 그 해 8월 1일 평소 병약하고 알코올중독 증세를 보여온 형 '헨리'가 세상을 뜨고 나자, 포우는 국내 최초로 본격적인 직업 시인로서의 삶을 시작하려 들지만, 당시 저작권 제도가 없어 국내 창작보다 영국 해적판을 즐겨 출판하던 미국 풍토에 타격을 입는다.

운문에서 산문으로 전향한 얼마 후인 1833년 10월. 단편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가 당선돼 볼티모어 일간지 '새터데이 비지터'로부터 상금 50 달러를 받으면서 존 P. 케네디의 주목을 끌어 작품 몇 편이 실린다. [그 결과 1835년 볼티모어를 리치먼드에서 '남부문학메신저'(SLM)의 토머스 화잍 발행인을 소개 받아 '편집인'으로 취직된다. 그러나 몇 주 만에 그의 주벽이 발견되면서 퇴직 당한다.]   

1934년엔 대부 앨런이 죽는다. 죽기 전 한 번 더 재정도움을 요청했으나 포우는 앨런의 유언장에서마저 제외된다. 

오거스트 밴 클맆의 주장에 따르면 포우는그 해 메리 스타(일명 '메리 데버로')와 사랑에 빠졌으나 가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 대신 숙모의 딸인 자신의 사촌 누이 버지니아 클렘을 사랑하게 돼 둘의 나이 각각 27, 13세 때인 1835년 9월 22일 제일장로교회에서 잔 오웬 목사의 주례로 비공개 결혼을 한다(혼인증서 상으로는 버지니아의 나이가 '21세'였다). 그러나 나이차가 심하고 미처 꽃피지도 못한 데다 본래 병약한 버지니아와의 이 사랑은 성숙한 부부의 것이기보다 거의 몽환적인 것이었다.

가정을 갖게 되자 책임을 느낀 때문인지 지난 번 쫓겨났던 직장인 리치먼드의 SLM에다 "개과천선"한다는 약조를 하고는, 버지니아 모녀를 데리고 함께 떠난다[각주:21].  그동안 여러 편의 시/서평/단편/시평 등을 써 냈다. 직장이 안정된 1836년 5월 16일엔 리치먼드에서 버지니아와 공개 결혼식을 했는데, '남부종교통신'(SRT) 편집인 겸 장로교 목회자였던 애머서 컨버스 목사가 주례를 맡아 했다[각주:22].

1838년엔 뉴욬으로 이사를 갔다가 이듬해 다시 필라델피아로 옮겨 간다. 그즈음 작품 '낸터켙에 관한 아터 고든 핌의 이야기'가 히트를 치면서 상당한 인기를 끌고 나서, '패류학을 위한 우선지침서'의 부편집장이 된다[각주:23].
같은 해 '버튼 신사 매거진'(BGM)의 공동 편집장이 돼 다양한 글로 명성을 누린다. 1839년엔 야심 찬 단편집 '그로테스크와 아라베스크의 얘기들'(상하권)을 펴내 찬/반 평가를 들었으나 수입은 별로였다.

1840년 6월엔 자신이 직접 펴 내는 저널 '스틸러스'를 창간할 생각으로 신문에다 거창하게 광고를 냈다(본래 펜실베이니어주 필라델피아에서 발행한다고 해서 '펜 매거진'으로 부를 계획이었다)[각주:24]. 그러나 죽기까지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듬해 초 그는 BGM이 흡수통합된 '그래엄즈 매거진'[각주:25]의 부편집장이 된다. 같은 해 4월엔 그의 첫 탐정소설 '루 모르그 거리의 살인사건'[각주:26]이 그래엄매거진에 실렸다.  
 
1842년 1월 아내 버지니아가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를 하다 첫 결핵 증세를 보이자 그 스트레스로 더욱 술중독에 빠져 든다. 이런 상황이 그의 작품세계를 더욱 어둡게 했다는 설이 있다. 시 '갈가마귀', '애너밸 리' 등이 특히 그렇다.  
같은 해 5월엔 '그래엄'지를 떠나 뉴욬의 '이브닝미러'를 잠시 거쳐 '브랃웨이 저널' 편집인이었다가 발행인이 된다. 당시 그는 시인 헨리 워즈웙 롱펠로의 표절 의혹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롱펠로는 전혀 대응하지 않는다.

그즈음 정계 진출을 목적으로 자신이 위그당 소속이라며 친구 프레드맄 토머스의 지인인 타일러 대통령의 아들 라벝의 도움을 받아 행정부 공무원직으로 필라 세관 직원을 희망했지만, 1842년 9월 중순 약속된 만남에 아프다면서 나타나지 않았다[각주:27]. 포우에겐 아무 일자리도 배당되지 않았다.

1843년 6월. 포우의 대표작의 하나인 단편 '황금벌레'(the Gold-Bug)가 필라델피아의 '달러 신문'(DN)에 의해 당선돼 100달러의 상금을 타면서 대 히트를 쳐, 신문 재판이 나오는가 하면, 극작가 사일러스 스틸에 의해 스토리가 극화돼 그해 8월8일 필라의 어메리컨티어터에서 공연됐다[각주:28]. 인기과 명성에 힘입어 그해 11월부터는 미국 시에 관한 강연을 시작해 4회 계속 했다.   
  
1844년엔 '이브닝 미러'(EM)의 보조편집인으로  취직한다. 맨해튼의 집에서 출근 시간을 엄수하고 잡지 원본이 인쇄에 들어간 뒤 퇴근하는 등 열성적으로 근무했다. 이듬해인 1845년 1월 포우의 시 '갈가마귀'가 EM에 게재되면서 역시 폭발적인 반응을 얻는다. 하지만 첫 출판 때 받은 돈은 고작 15불. 
2월 22일엔 '브라드웨이 저널'의 부편집장이 됐다가 7월 하순 편집인, 10월 하순엔 발행인이 된다. 그러나 빚더미에 앉아 이듬해 정초 폐간된다.   

1946년엔 아내와 장모 등 세 가족이 뉴욬 브랑스의 포담의 작은 집(현재의 '포우 오두막')에 거주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47년 1월 30일 버지니아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 포담의 더치(화란)개혁교회 지하묘실에 매장됐다[각주:29].

1848년 7월엔 포우의 산문시 '유레카'가 긍/부정 반응을 얻었지만 "범신론적"이라는 비판을 받자 포우는 부인한다. 그는 아내를 잃고 불안정한 가운데 그 해 후반기부터 뉴잉글랜드의 여류시인 새러 헬런 휘트먼을 사귀어 약혼까지 하지만, 자신의 주벽과 헬렌 어머니의 방해로 결혼에 실패한다[각주:30]

이듬해 6월말 '스틸러스' 창간을 위한 기금모금을 위한 남부 순회 강연 차 리치먼드에 들렀다가 청소년시절 대학 동기이자 첫 사랑이었고 지금 과부가 된 로이스터(쉘튼 부인)와 다시 만나 재혼을 호소, 7월 하순에 약혼하기에 이른다[각주:31]
결혼을 위해서였는지 8월 하순엔 술중독을 탈출해 보려고 '절제의 아들들'(Sons of Temperance)에 가입했다[각주:32]. 그러나 그후 그를 기다린 건 행복한 재혼생활이 아닌 검은 죽음이었다. 
1848년엔 자살을 기도했다. 자살 연기(?)와도 같은 그런 시도는 사실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포우의 작품 세계

이런 삶을 배경으로 한 포우의 작품은 당연히 암울하고 퇴폐적인 미를 발산했다. '갈가마귀', '애너벨 리'처럼 그의 작품 다수가 아름다운 여인의 죽음을 기리고 있다.
그래서 (그가 혐오한) 초월주의에 대치되는 '어두운 낭만주의자'로 간주된다. 그는 어둠과 침울의 미학을 추구하면서, 어떤 의미에서 당대로선 진정한 현대주의의 세속적인 창작 정신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미국 명시인들의 보편적 성향을 앞질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샤를 보들레르 등 프랑스 문학계의 '상징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각주:33]

그는 또 추리/탐정소설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각주:34]. 포우는 시 보다는 단편으로 널리 알려졌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은 대중의 흥미를 끌기 위해 따랐던 장르인 '고틱'.  가장 대중적 단편의 하나가 '붉은 죽음의 가면극'이었다[각주:35]. 가장 관심을 가진 부분은 죽음의 다양한 국면들이었다. 그래서 공포추리물 외에도 풍자적 시/산문, 유머, 야담, 과학공상물 등을 다뤘다.  

전술한 대로, 포우의 젊은 시절인 18세 때와 사관학교 퇴교 후에 이미 시집을 냈지만[각주:36] 별 주목을 못 받다가 24세 때인 1833년 단편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로 상금을 받으면서 결혼 이후까지도 줄줄이 걸작 단편들을 발표한다. 1835년 발표된 소설들은 환상적 아름다움과 공포, 이상심리를 바탕으로 한 추리적 내용들이다.

시집에 대한 낙담과 좌절감은 커서 무려 14년간 시집 출판을 미루다가 '갈가마귀'가 히트한 1845년 1월 이후에야 시인으로도 주목 받는다. 그는 유렆에서 더 인기를 끈 국내 최초의 문학인이다.

그의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파리의 사립탐정-'C. 오귀스트 뒤팡'은 훗날 비슷한 장르의 효시가 된다. 미국추리작가협회(MWA)가 제정한 우수상 이름이 '에드거 상'이다. 프랑스의 과학공상물 작가 줄 베르느는 포우를 본 따 '스핑크스에 관한 아터 고든 핌의 해설'을 쓰기도 했다. 역시 공상물작가인 H.G 웰즈도 포우의 핌이 100년전 이미 남극탐험을 예견했다고 평가했다.   

포우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연적(戀敵) 겸 필적(筆敵) 러퍼스 그리스월드 외에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랠프 월드 에머슨 등은 포우의 작품들을 폄하했는데 둘 다 초월주의자 스베덴보리의 추종자들이다. 올더스 헉슬리(메이슨) 역시 포우를 싫어 했다. 

포우는 '빜 뱅'설이 나오기 80년 전에 이미 그의 에세이 '유레카-산문시'(1848년)에서 과학 아닌 하나의 '예술'로서 비슷한 설을 배태했다. 또 자신의 예리한 분석력에 바탕을 둔 암호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황금벌레' 등 작품화와 대중화에 기여했다.
'애너벨 리' 등 그의 시의 각 연에서 느껴지는 영어 자/모음의 미묘한 변화는 이런 그의 암호학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암호학의 경지가 깊지 않았다.   
 

의문의 죽음

자신의 많은 추리소설 못지 않게 포우 자신의 삶 자체가 의문의 도가니다. 특히 그의 죽음은 그렇다.  

1849년 강연여행을 하던 도중 리치먼드에서 과부가 된 첫 사랑 로이스터와 약혼을 하지만, 그해 9월말 볼티모어의 한 술집에서 열린 어느 부인의 생일파티 때 ('절제의 아들들'과의) 서약을 깨고 건배에 참여, 술을 마신 것으로 추정된다.
며칠 후인 10월 3일 조셒 W. 워커에 의해 한 여관으로 옮겨졌다. 당시 포우는 거의 의식을 잃은 데다 남의 남루한 옷차림에 남의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이윽고 포우의 친구 조셒 스낟그래스가 도착하자, 포우의 친척 헨리 헤링 등은 마차로 워싱턴대학병원(현재의 처치호스피털)으로 옮겨져 잔 모런 박사에 의해 진찰을 받았다[각주:37].  

포우는 병원에 옮겨진 사흘 째 밤엔 광적인 발작을 하면서 "레이놀즈!"라는 의문의 이름을 여러 번 외쳤고 나흘 뒤인 7일 새벽 5시 세상을 떴다. 포우의 마지막 말은 "주님, 나의 가여운 영혼을 도우소서!"였다고 한다. 불과 40세였다. 이상하게도 그의 입원/사후기록은 모두 분실됐다. 그가 남긴 츠렁크 안에는 숙모/장모에게 선사 받은 작은 성경책도 있었다.  

1849년 10월8일(일설은 9일). 볼티모어 웨스트민스터 공동묘원의 할아버지 묘지 부분에서 치러진 포우의 장례식은 아내 버지니아와 사촌 간이었던 감리교 목회자, 윌리엄 T.D. 클렘 목사가 집례했다.  

포우의 말기의 정신불안증, 자살욕구, 집단에 의한 피해망상증 등에 대해선 여러 원인이 제기돼 왔다. 포우가 죽자 뛸 듯이 좋아했던 그리스월드가 쓴 포우 전기에서 퍼뜨린 포우의 '마약중독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포우는 그래서 프리메이슨들에게 장기간에 걸친 독물질 주입으로 암살됐다는 일설도 있어 왔다. 실제로 잔 코트니 박사는 그의 '중독과 에드거 앨론 포우'(1971년)란 책에서 포우는 머리를 가격 당해 숨졌지 약물중독 따위로 죽지 않았다고 단언한 바 있다. 그리고 그리스월드가 포우의 문제점을 지적한 '증거'로 제시한 '편지'들도 위조된 내용이었다. 


포우는 안티메이슨?

포우의 보복피살설을 제기해 온 코트니 박사의 가설은 포우가 최소한 4권의 단편소설에서 프리메이슨리를 강하게 비판한 데 대한 보복을 당했다는 것. 그런 단편들은 '아몬티야도의 술통', '종탑 속의 마귀', '멜론타 타우타', '마귀한테 목을 걸지 마라' 등. 이 작품들은 모두 메이슨에 대하여 적어도 간접적으로 상당한 비판과 타격을 가한 것으로 평가된다. 

포우는 19세기에 메이슨에 의해 납치/피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윌리엄 모건 '대위', 몰몬교주 조셒 스밑 2세, 비밀집단 비판 연설을 한 얼마 후 암살된 존 F. 케네디 전대통령 등과 함께 메이슨리에 의해 '보복'을 당한 명사들로 일각에서 손꼽힌다. 물론 대부분 추정이고 확증된 것은 없다.  
윌리엄 살턴은 그의 '에드거 앨런 포우-회상되는 일부 사실'에서 "그는 많은 적을 만들어 많은 거친 말투를 불렀다"고 한 잔 살턴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각주:38]
 
또 한 가지 의문은 포우의 사망 100주년이던 1949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그의 생일인 1월 19일 어둔 새벽에 검은 옷차림에 지팡이를 든 의문의 '사나이'가 포우의 원래 무덤 비석이 있는 웨스트민스터 홀로 찾아 프랑스제 꼬냨과 붉은 장미 세 송이를 들고 와 혼자 축배를 든 다음 사라지곤 하는 '포우 토스터' 전통이 지켜져 왔다는 점. 가끔 쪽지도 남기고 가는 이 괴상한 사나이의 정체는 단 한 번도 밝혀진 적이 없다.    


애너벨 리는 누굴까?

'애너벨 리'는 포우가 죽은 해 봄에 완성된 맨 마지막 작품이자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요 노래다.

포우의 삶을 거쳐 간 많은 주요 여성들이 있었기에 시의 주인공 '애너벨 리'가 실제로 누구겠냐를 놓고 온갖 추정이 회자돼 왔다. 그가 죽기 불과 2년 전 먼저 폐질환으로 숨져 간 젊은 아내 '버지니아'였다는 게 물론 가장 유력설이지만. 또 아무런 실제 인물이기보다 추상적인 이미지라는 설도 있다. 

아내 버지니아 말고도..그가 어릴 때 숨져 간 어머니 일리저벹, 청소년 시절 연인이었으나 집안의 반대로 깨졌던 관계였다가 죽기 얼마 전 당시 과부로서 둘이 재회해 약혼한 새러 엘미라 로이스터(SER), 버지니아와 자신의 남편의 묵인 아래 포우와 교제했던 기혼녀 패니 프랜시스 오즈굳, 포우가 죽기 1년전 약혼했다가 여자 측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된 스베덴보리 추종자 새러 헬렌 휘트먼, 포우를 재정 지원한 새러 애너 루이스, '애니' 리치먼드 부인 등이 이 시에 영감을 주었다는 설이 있어 왔다.

그러나 포우에게 가장 순결한 여성, 그래서 '애너벨 리'의 이미지에 가장 걸맞은 쪽은 역시 아내인 버지니아였다.   


또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야설(野設)은..사웉캐럴라이나 찰스턴의 소녀 '애너벨 리 레이버넬'(ALR)의 전설.
군항인 찰스턴의 공동묘원 어디엔가 비석이 있다는 이 소녀는 실제로 포우의 영감의 뿌리였다거나 포우와 극한초월적 사랑을 나눈 애너벨 리 본인이었다는 주장까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실제로 포우는 젊은 시절(1827-29년) 이곳 부근인 설리번즈 섬의 몰츠리 항에서 군 복무를 했고, 지체 높은 레이버넬 집안과도 교류가 있었다는 일설도 있다. 포우의 단편 '황금벌레'는 이곳을 배경으로 했다.  

ALR의 아버지 에드먼드 레이버넬 박사(1797-1871)는 찰스턴 저지대의 명사였고, 개업의사 겸 대학교수, 패류학자로 설리번즈 해안에선 주로 해안의 조개의 생태를 연구하곤 했다. 그는 이 작은 섬에서 생활하면서 역시 패류에 관심이 많았던(?) 포우와 교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딸이 한 젊은 군인 청년(포우?)과 몰래 깊이 사랑하게 된 것을 알고 상대방의 가문 등을 의식해 둘의 만남을 막자, 둘은 필사적으로 몰래 밤에 사립 공동묘원인 이곳에서 만나기 시작했다는 것. 둘의 밀회 현장을 추적해 발견한 아버지 레이버넬은 격노하여 딸을 방안에다 여러 달 가둬 놓는다.

그동안 청년은 제대하여 버지니아로 귀가한 뒤 사랑하던 애너벨 리가 모기에 물려 황열병(또는 말라리아)을 앓다가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찰스턴으로 달려왔으나 아버지의 방해로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고 무덤도 못 찾아 맨날 공동묘원을 두루 뒤지며 슬픔을 달랜다. 그러나 레이버넬은 끝끝내 청년의 근접을 막는다.
     
레이버넬 박사는 '북미조류도감'을 펴 낸 조류탐사가/화가 잔 제임즈 오더본과도 친분을 가지면서 자신도 패류도감을 낸 바 있다. 그의 또 다른 딸인 애너벨 리의 자매는 일기에다 문제의 군인(포우?)이 술과 마약을 즐겨 겁을 낸 가족들이 무덤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썼다는 얘기도 있다. 이 자매는 포우의 괴벽을 자세히 묘사했단다.

레이버넬 가문은 프랑스 신교도들인 위그노 계 귀족 명문가 '라브넬' 가문을 잇는 집안으로 프랑스 비트르 출신의 르네 라브넬이 미국에 첫 이민을 왔다. 르네의 아들 대니얼 레이버넬(1692-1736년)은 최초로 찰스턴에 집을 세웠다. 

올해 2월 이 전설을 다룬 일간지 '보스톤글로브' 특집 기사를 보면 'E.V.H.'라는 이니셜로 정체를 숨긴 한 옛 학자는 그의 편지에서 시 '애너벨 리'와 관련, 소녀는 당시 13살이었던 애너벨 리 레이버넬, 청년은 당시 19살의 에드거 앨런 포우였다고 단언하고 이 시의 끝 연과 관련, "설리밴 섬에 비친 것보다 더 밝은 달빛이 어디 있겠냐? 젊은 연인들에게 물어 보라!"고 묻기도 했다.   

역시 여인의 죽음을 다룬 포우의 '갈가마귀'(Raven)라는 시 제목도 혹시' 레이버넬'이란 이름에서 유추된 것일까? 포우는 '황금벌레'와 이 시를 비교한 바 있다. 그래선지 포우의 흔적을 애써 살린 현지 마을엔 오더본의 갈가마귀 그림도 걸려 있다.
과연 레이버넬 박사는 드높은 가문의 명예를 더럽힐까 봐 딸과 포우에 연계된 모든 것을 숨기려 한 걸까?
그래서 포우는 실제로 말은 못하면서 환각처럼 당시의 추억에 사로잡혀 죽기까지 평생 애너벨 리를 잊지 못해 더더욱 같은 나이인 13세의 사촌녀와 결혼한 걸까?
그래서 나이 40에 과거의 모든 비밀을 승화시켜 밝힌, 어린 '애너벨 리를 위한 이 백조의 노래로 추억과 삶과 사랑을 총결한 것일까? 
포우의 삶에 깊이 스민 평생의 암울함은 당시 어린 연인의 무덤을 찾아 묘원을 미친 듯 두루 헤집고 뒤지고 다니면서 절망하던 탓일까?

그게 사실이라면, 아내 버지니아는 포우의 또 다른 'ALR'일 수 있다. 포우는 실제로 버지니아를 무척 사랑했다. 마치 군인 청년이 숨진 레이버넬을 지극히 사랑하듯.

흥미롭게도 포우의 어머니인 여배우 일리저벹은 생애 말엽인 1811년초 겨울과 봄에 찰스턴에서 공연을 한 바 있다. 당시 그녀의 자녀들-윌리엄 헨리, 에드거, 로절리 등은 아직도 어렸다. 남편이자 포우의 친아버지인 데이빋 포우는 1809년 가족을 버리고 사라졌기에 그녀 혼자 자녀를 거느리고 이 '남부투어'라는 순회공연을 했었다. 따라서 찰스턴은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가능한) ALR의 죽음이 함께 오벌랲 내지 적스타포즈 되는 곳이다.

그런데도 ALR 이야기는 아직까지는 시인도 부인도 안 된 일종의 전설로 알려져 있다. 포우 자신, 레이버넬 박사와의 교류에 관해서조차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모두 주변의 추정으로만 일관돼 있다.  

시 '애너벨 리'에 대한 기독교적 분석

Annabel Lee 
by Edgar Allen Poe  
 
It was many and many a year ago,
In a kingdom by the sea,
That a maiden there lived whom you may know
By the name of ANNABEL LEE;
And this maiden she lived with no other thought
Than to love and be loved by me.

I was a child and she was a child,
In this kingdom by the sea;
But we loved with a love that was more than love-
I and my Annabel Lee;
With a love that the winged seraphs of heaven
Coveted her and me.

And this was the reason that, long ago,
In this kingdom by the sea,
A wind blew out of a cloud, chilling
My beautiful Annabel Lee;
So that her highborn kinsman came
And bore her away from me,
To shut her up in a sepulchre
In this kingdom by the sea.

The angels, not half so happy in heaven,
Went envying her and me-
Yes!- that was the reason (as all men know,
In this kingdom by the sea)
That the wind came out of the cloud by night,
Chilling and killing my Annabel Lee.

But our love it was stronger by far than the love
Of those who were older than we-
Of many far wiser than we-
And neither the angels in heaven above,
Nor the demons down under the sea,
Can ever dissever my soul from the soul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For the moon never beams without bringing me dream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feel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 my darling- my life and my bride,
In the sepulchre there by the sea,
In her tomb by the sounding sea.


애너벨 리

(김삼 역)

아주 아주 오래 전이었지요
바닷가 어느 왕국에
한 소녀가 살았는데 님도 아마 아실 테지만
'애너벨 리'란 이름이었죠. 
그런데 이 소녀, 아무 딴 생각 없이 살았어요
날 사랑하고 내게 사랑 받는 것 밖엔.

나는 한 아이, 그녀도 한 아이였지요
이 바닷가 왕국에서
하지만 우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으로 사랑했답니다
-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천국의 날개 달린 세랖[각주:39]들이
그녀와 나를 부러워 한 그런 사랑으로.

그리고 바로 그 탓이었지요, 오래 전
이 바닷가 왕국
한 구름에서 불어 나온 바람이
나의 고운 애너벨 리를 차갑게 식혔고
그녀의 지체 높은 가문 사람이 와서
그녀를 내게서 가로채어 갔지요
바닷가 이 왕국의
한 무덤 속에 가둬 버리려고.
 
천사들은 하늘에서 그 절반도 행복하지 못해
그녀와 날 시새웠는데
예! 그게 그 까닭이었죠 (모두들 알아요,
바닷가 이 왕국에서는)
- 그 바람이 밤에 구름에서 나와
나의 애너벨 리를 차갑게 해 죽인 것.

그러나 우리의 사랑 그것은 여느 사랑보다 훨씬 더 강했지요
우리보다 나이 든 사람들의 사랑
우리보다 훨씬 더 슬기로운 다수인들의 사랑보다.
또 하늘 위 천사들이든
바다 밑 악령들이든
내 넋을 내 고운 애너벨 리의 넋에서
떼어 놓을 순 없어요

왜냐면 달은 고운 애너벨 리의 꿈을
내게 갖다 주지 않고는 결코 비추질 않고
별들은 고운 애너벨 리의 반짝이는 두 눈을
내가 느끼지 않고는 도무지 뜨질 않거든요
그래서 온 밤을 난 그 곁에 누워요
내 사랑-내 사랑-나의 생명과 나의 신부 곁
바닷가 그 무덤
철썩이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 속에.


앞서 비친 대로 1845년 작인 시 '갈가마귀'와 1849년작인 '애너벨 리'는 둘 다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다룬 작품으로, 시기적으로 아내 버지니아의 죽음을 예고하고 추억한 셈이 된다. 두 시편은 길이나 형식에 있어 서로 매우 대조적이다.      

'애너벨 리'는 어찌 보면 포우의 말년에 걸맞지 않게(?) 동화적 요소를 갖고 있어 낭만주의 시인의 더욱 순수낭만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되나, 실은 이 작품도 그의 보편성향인 암울미(暗鬱美)를 벗어나지 않는다. 아름답지만 밝거나 환하지 않고 어둡고 침울하고 쓸쓸하다.

마치 그의 추리 단편소설에서 죽음 주변의 정황 분석을 하듯, 이 시도 애너벨 리의 죽음 주변의 요소들이 분석되는 듯 꼼꼼하게 따져진다. 바꿔 말하면 절대순수/순결무구/무죄무흠한 애너벨 리의 싸늘한 시신과 타살/피살 사건을 놓고, 역시 절대순수한 주인공이 가해자/살해자들의 살의와 혐의를 추적/분석하듯 한다. 

다만 비음(鼻音)과 압운/각운 등 시음악적 요소만이 죽음의 연가임을 상기시켜 주지만, 그나마도 사뭇 비의적이고 암호학적인 접근을 했다. 포우의 시작품들은 어둠 속에도 놀라운 음악적 리듬을 지닌다. 특히 애너벨 리는 그렇다. 그도 예기치 못했겠지만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2년 안에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이런 노래를 했다는 건 비록 문예적 표현방식이라곤 하지만 하나의 아이러니다.
  
포우의 시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운(beautiful) 여인의 죽음 이미지는 이성 쪽의 침묵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주인공만의 일방적인 노래다. '갈가마귀'도 그렇고 '애너벨 리'도 그렇다. 상호대화라는 게 없다. 포우 자신의 초/중/장년에 걸쳐 주변에 재잘거리며(?) 접근해 온 문학가 등 '미녀들의 수다'와는 반대적인 개념이다.
결국 포우의 이성애란 것은 자신만의 몽환에 가깝지 않을까.

시인은 거듭 사랑하는 연인이 '아이' 내지 '소녀'였음을 강조한다.포우 자신, 유치원 시절부터 소녀를 흠모했고 SEL은 그 대표적인 예다. 또한 아내 버지니아 역시 아직 어린 틴에이저 때 포우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결혼 당시 소녀였다.
그렇게 해서 소녀의 청순미를 사랑의 순수성과 연계시키고 있다. 

둘 사이에 자녀도 전혀 없었던 포우와 버지니아의 사랑도 어쩌면 플라토닠 러브 차원을 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핏줄인 포우-버지니아의 관계는 이성이라는 차이 뿐 오누이의 사랑 같다고 할 수 있다. 
포우는 정작 아내인 그녀를 비롯, 그 어느 여인과도 무르익을 만큼 "충분한" 사랑을 나누지 못했다. 그처럼 '애너벨 리'도 바닷물 같은 플라토닠 러브로 넘친다. 해안선에서 철썩이기만 하는 바다는 어떤 경계를 넘지 못하고 풀지 못하는, 열매 없는 아쉬운 사랑 같은 느낌이다.

이런 그의 사랑은 일찍이 자녀로서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을 시절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대모를 향한 연모의 정 등에서 예견되던 요소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술은 충분한 사랑을 누리지 못한 아쉬움과 절망을 달래는 한 수단이기도 했다.       

주인공은 애너벨 리와 자신의 사랑을 오로지 순수미화하여 볼 뿐 자신의 잘못, 악과 죄 따위의 의식은 전혀 없고 모든 잘못의 요인을 주변에다 돌린다. 즉 이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합리화시키고 있다. 여기서 플라토닠 이성애를 절대화하는 낭만주의 이상의 표본을 볼 수 있다. '버지니아'라는 이름 자체가 처녀성을 가리킨다.

참 사랑에 대한 시인의 절절한 그리움과 아쉬움, 절망감은 오로지 크리스토의 사랑 안에서만 해소될 수 있었다. 

'애너벨 리'의 시인은 하늘과 천상적 실존에 대한 모종의 반발 의식을 지니고 있다. 일찍부터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로 모조리 하늘이 앗아 갔다고 믿는, 포우 자신의 깊은 한이 서린 것으로 느껴진다. 처음부터 자신의 불행이 하늘로부터였다는 푸념을 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좀 더 설명한다면..이 시는 죽고 말 없는 상대방-애너벨 리-을 절대 사랑하는 자기 사랑의 순수성만 강조하고 나머지는 다 "남 탓"인 책임전가적/객체비판적인 요소가 강하다. 상대방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절대적인 애정을 확인하고, 나머지를 책임전가 한 뒤, 주인공이 지려는 책임은 고작 무덤 속 연인 곁에 나란히 눕는 것.

실제로 버지니아가 죽은 얼마 후 포우도 죽어 갔다는 사실에서 이 시는 어쩌면 예언시요, 마지막 연은 그야말로 핵심적인 죽음의 예언송이다. 포우 판(版) '사의 찬미'다! 여기서 인간의 한계라는 비극을 본다.
 
필자의 졸견으로는..'애너벨 리'란 존재는 비단 버지니아 뿐 아니라 시인의 어릴 적 숨진 친어머니로부터 그에게서 떠난 모든 여성들이라고 통틀어 말할 수도 있을 거 같다. 안으로 쌓인 그런 한(恨)과 원(怨)의 결집 내지는 죽음 속에 결빙시킨 결정체가 애너벨 리다. 술로 세월을 보낸 당시의 삶이 반영해 준다.

애너벨 리와 자신의 살뜰한 사랑을 부러워 하다 못해 시샘하고 마침내 빼앗아 갔다는 천사들, 찬 바람을 쏘아 목숨을 앗아 간 구름 속의 바람, 그에게서 애너벨 리를 데려간 '지체 높은 가문 사람' 등이 그렇다. 후자는 하나님을 상징한다고들 본다.

문학적으로는 어떨지 모르나 성경적으로 천사들의 이같은 시샘/강탈 등의 위해는 성립되지 않는다. 타락한 천사가 아닌 이상. 혹 독자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에 관하여 포우와 같은 오해를 하고 있다면 즉각 그것부터 풀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리의 품에서 앗아 가시는 분이 아니다. 죽음은 현재 마귀가 관할하고 있다.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심은 이 때문이다. 

'바닷가 왕국'은 내세가 아닌 일종의 중간계이면서 세상에서 참 행복을 찾으려다 절망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는 무덤 너머 저 편을 그리거나 상상하지 못하며 죽기에 앞서 오히려 위엣것, 하늘의 것을 적대시한다. 이 시인에겐 죽음 뿐 부활이라는 게 없다. 죽음과 그에 대한 원망 뿐이다.

시인은 죽음도 초월한다고 믿는 애너벨 리와의 사랑의 완결로부터 모든 고통과 좌절, 절망의 해결점을 찾으려 한다. 그런 세속적 사랑은 성경 속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가 성경적 사랑을 생각하지도 않지만, 성경에서 이런저런 용어와 개념을 빌렸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영적/프뉴마적 차원이 것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심적/프쉬케의 차원에서 머물고 있다. 그래서 이 시의 음악성과 리듬들은 한의 '살풀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의 주된 배경인 바다는 흔히 망망한 허무와 절망을 상징한다.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는 영원한 노래소리라기보다 언젠가 폭풍우와 파도에 밀려 갈 운명을 예상하게 한다. 그와 달리, 우리가 장차 대하게 될 폭풍 없는 하늘의 수정바다는 영원한 참 하늘 평화를 상징한다.  

포우의 '갈가마귀'가 철저한 청사진적 설정과 계산에 의해 그렇듯, 이 시에서도 무대와 상황 설정 및 전개가 중시된다.

'아주 아주 오래 전'이란 서두는 전형적인 동화의 들머리 같으면서 순진스럽게 독자들의 마음을 연다. 아울러 얼마 전에 죽은 연인/아내와의 옛 사랑의 족적을 더듬어 가려는 시인의 의도를 엿보여 준다.    

'바닷가 어느 왕국'이란 말은 어느 모로든 포우에게 걸맞다. 첫째로 그의 선조는 섬 나라인 아일랜드 출신인 데다 어릴 때 어머니와 찰스턴 항을 거쳤고 대부모와 함께 여러 해 영국에 거주했었고 군항과 섬에서 복무하면서 바닷가를 자주 거닐기도 했다. 

'소녀'는 SEL과 버지니아, 또는 (전설의) ALR에게 모두 어울린다. '님도 아마 아실 테지만'이란 문구는 물론 자연스럴 수도 있겠으나 공감과 대중적 호소력을 중시한 그로서 의도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소녀, 아무 딴 생각 없이 살았어요
날 사랑하고 내게 사랑 받는 것 밖엔.

시인의 아내는 처음부터 죽기까지 남편에게만 충실했다. 남녀/부부의 사랑은 늘 정절 본위여야 하지만, 40년 삶을 거친 포우의 애정관은 여전히 보수적임을 나타낸다. 그렇지 않다면 위선일 것이다. 죽기까지 포우의 주변엔 여성들이 퍽 많았고 일부는 애정 편력이 복잡했다. 그러나 포우와는 대부분 플라토닠 러브에 그쳤다.  

나는 한 아이, 그녀도 한 아이였지요
이 바닷가 왕국에서
하지만 우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으로 사랑했답니다..

포우는 어리고도 초월적인 것으로 사랑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강조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가 13세의 버지니아를 사랑하고 결혼했을 때는 중년을 바로 앞둔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 경우는 SEL, ALR과 더 걸맞은 상황일 것이다.
그러나 포우의 생애로 봐서는 사춘기/청소년기의 치기 어린 사랑과 성숙한 사랑으로의 연접선상에 상당한 무리가 따랐다. 근본적으로 그가 어릴 적부터 충분한 애정이 결핍된 것이 주요인이었다.

신적이거나 천상계의 존재들이 인간의 사랑을 부러워하거나 시샘한다는 발상은 신화에 흔히 나타나는 주제다. 물론 시인 자신이 진정 그렇게 믿었는지 노래로만 그쳤는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삶 전반에 걸쳐 사랑이 마냥 아쉽기만 한 포우의 한이 묻어나는 부분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사들은 하늘에서 그 절반도 행복하지 못해'라는 부분은 천국의 현실이기보다 독자로 하여금 짐짓 그렇게 믿게 만드는 가상적 'make-believe'성이 강하다. 그래서 시인 자신의 '행복'은 자위적 행복이라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랑 그것은 여느 사랑보다 훨씬 더 강했지요
우리보다 나이 든 사람들의 사랑
우리보다 훨씬 더 슬기로운 다수인들의 사랑보다.

이 부분은 무려 14년차인 버지니아와의 사랑의 독특성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특이성과 고유성/유일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엿뵌다. 또한 평생 지켜 봐 온, 흔해 빠진 사회의 엘리트/인텔리층의 '구르기'형 애정 행각과 순수한 부부사랑 사이의 차별화를 겨냥하고 있다.    

또 하늘 위 천사들이든
바다 밑 악령들이든
내 넋을 내 고운 애너벨 리의 넋에서
떼어 놓을 순 없어요

이 부분은 신자들에겐 신약 로마서 8:35-39을 연상시키며 특히 39절이 그렇다. 세속적으로는 로미오와 줄리엩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사랑은 아가페 밖에선 얻을 수 없다.
죽음도, 요르단 강물도 가르지 못할 영원한 불멸의 남/녀 사랑의 개념은 성경 상으로는 없다. 그런 세속적 '사랑관'을 우리는 기독교를 알면서 포기해야 한다. 그런 사랑은 어디까지나 "넋이라도 있고 없고' 식 혼적/철학적인 개념이다. 크리스천 부부 간의 사랑도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 안에서 예수 크리스토의 형제 사랑의 것으로 초월/승화되는 사랑이 있다면 있을 뿐이다.  

이 점이 바로 우리가 '애너벨 리'로부터 문학적 서정 뿐 아무런 영적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성경과 천상의 용어를 빌려 썼어도 그렇다. 한 문학가가 죽음을 얼마 앞둔 시점에서 아무런 영적 감흥을 지니거나 주지 못한다면 불행이다.

시인은 지금 하늘도 바다 밑도 아닌 바닷가 왕국이 중간계라고 믿는 지상과 대동소이한 막연한 '피안'/낙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는 지상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 애너벨 리와의 혼연일체/일심동체를 외치지만 하늘에서 앗아 갔다고 이미 자인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무덤 곁에 있어도 하나일 수 없는 절망이다. 절망적인 하나됨..그것은 일말의 희망이 아닌 영원한 절망으로 그친다는 데 이 시의 슬픔이 있다.

그는 미를 노래하고 애너벨 리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시인에겐 죽음과 어둠, 아름다움이 서로 대비되는 듯 하면서 그것 자체에서 일종의 '구원'을 찾고 있다. 이생에서 이루지 못할 사랑의 완성과 극치를 하늘 너머 천국이 아닌 죽음 저편의 그늘지고 막연한 '피안'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교적 내세관이다.

그는 달이 갖다 주는 꿈, 별이 갖다 주는 빛 속에서 상실한 애너벨 리의 구원의 미를 오로지 추구하는 데서 아쉬운 절망과 상실감을 달래며 위로를 느낀다. 시인은 암울한 삶을 끝내 절망의 노래로 매듭 짓고 있다. 포우는 죽음을 통한 '애너벨 리'와의 합일을 그리워 한 나머지 과음 속에서 죽어 갔는지도 모른다.
 
애너벨 리에 서린 한과 아쉬움, 외침은 소월 김정식의 시-'초혼'을 연상시킨다. 죽음으로 이루지 못하게 된 사랑을 죽음을 넘어 저승에서서라도 뒤늦게 이루고자 하는 갈망, 그것은 세속적이고 이교적인 것이다. 

'애너벨 리'는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이 시 속의 음악적인 백치미, 바닷가의 파도소리와 밀물/썰물이 오가는 듯한 주기적 진동과 리듬은 마치 처연한 달빛/별빛 아래서 무덤 속 연인에게 불러주는, 채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한하는 애틋하고 음울한 자장가 같은 느낌, 불멸의 확신보다는 아쉬운 나머지 꿈의 종결을 향한 달램 내지 자위, 부우연 환영 속에 단 둘만의 죽음의 무도 같은 분위기다.

죽음이라는 정(靜)과, 죽은 넋과 하나 되려는 절망적 몸부림 같은 마지막 설렘의 동(動)이 아울린 정중동(靜中動)이 그나마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 이 시의 리듬이다.
이미 차게 식어 버린 죽은 사람과의 곁에 눕더라도 하나 되려는 욕구 내지 죽은 사람과의 의도적인 친교는 좀 "creepy"한 무엇이다. 더 나아가..이생에서 다 하지 못한 사랑을 이루려고 죽은 사람과의 합일을 시도하는 일종의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 욕구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포우의 살아 온 과정과 그의 영혼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의 죽기 전 기도 같은 마지막 말 한 마디가 사실이었다면, 주님 곁 십자가 위의 강도처럼 하나님이 그를 받아 주셨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의 이 유언은 '애너벨 리'에 나타난 배타적/혐오적 정신과는 조화되지 않는 정반대 개념이다.

참된 사랑의 완성은 오직 예수 크리스토 안에 있다!
온 하나님의 왕국, 천국을 아우르는 사랑의 완결, 그 불멸의 결정체는 어린양과 그 신부인 (거듭난 지체들의 한 몸인) 교회의 영적이고 상징적인 결혼에 있다.


포우의 뒷 얘기

포우의 생애 말엽 잠시 뉴욬시 맨해튼 믿타운(중부)의 터틀베이에 살다가 옮겨 간 뉴욬 브랑스에 있는 포우 오두막집은 지금 '포우 공원'의 일부로 지정된 곳이다. 그의 최후 단편작 '랜도우 오두막'의 모델로 추정된다.
3년 동안 산 이 집은 작고 초라한 데다 가구도 별로 없는 겸허한 곳이었지만 여기 살 동안 마리아와 버지니아 클렘은 가장 행복감을 느끼곤 했단다[각주:40]. 가족들은 뜰의 새장 속에 새를 길러 아침마다 새소리를 들으며 깼고 포우가 '애너벨 리', '율럴럼' 등을 쓸 때 고양이가 그의 어깨 위에서 목을 꼬르륵댔다.

포우는 비록 애주가였으나 주인집인 잔 밸런타인 등 이웃 사람들과 친근하게 지냈고 그의 이름을 딴 '에드거 앨버트'를 비롯한 동네 아이들의 세례 때 '대부'가 돼 주기도 했다. 그는 세인트존스(성요한)대학[각주:41]의 제주잍[각주:42] 교수들과 사귀기도 했는데 포우는 이 교수들이 여느 신사들처럼 술/담배와 카드놀이를 즐기고 종교 얘기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버지니아는 이 집 아래층 침실의 침대 위에서 죽었다. 가족의 친지 메리 고브 니콜스는 그녀가 "마치 거의 옷 벗겨진 영혼 같았다"며 "기침할 때마다 점점 죽어가는 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포우네가 여러 도시에서 살던 집은 현재 모두 박물관 또는 사적 등으로 지정돼 있다.


  1. 버지니아의 이 초상화는 그녀의 죽음 직후 그려졌다. [본문으로]
  2. 1845년작. 죽은 연인에 대한 허전한 심리를 한밤 중에 문을 "두드린" 갈가마귀와의 '대화'를 통해 엮는다. 볼티모어 미식축구팀 '볼티모어 레이븐즈'는 이 제목에서 땄다. [본문으로]
  3. 이 부분을 위해 다음 자료들을 참조했다. 영문 위키피디어: 포우 항 / 위키피디어 포털: 에드거 앨런 포우 캘린더 / 토머스 O. 매봍: '포우 시전집' 부록 / 볼티모어에드거앨런포우협회: 에드거 앨런 포우 생애 연대기 [본문으로]
  4. 흥미롭게도 포우의 조부모의 이름도 데이빋-일리저벹이었다. 할아버지 데이빋 포우 1세는 조지 워싱턴 장군 휘하 '혁명군'의 부병참감(assistant quartermaster general)을 지냈고 그래서 실제 계급은 대령인데도 흔히 '장군'이라고 불렸다. 통이 커서 혁명군에다 자신의 거금을 투입한 그는 라파옡 장군의 친구였다. 훗날 71세의 나이로 기꺼이 참전하기도 했다. [본문으로]
  5. 흔히 '일리저'(Eliza)로 애칭된 일리저벹은 본래 자신의 어머니 '아놀드 부인'(즉 포우의 외할머니)과 함께 런던 코벤트 가든 왕립극단 소속의 여배우로 보스턴 공연을 나왔다가 미국에 눌러 앉는다. 모녀는 노래 솜씨도 빼어나 독창을 종종 하곤 했다.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진술이 있다. 초상화 참조: 이 초상화는 포우가 어릴 때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6. 자신보다 연기력이 뛰어난 아내에게서 열등감을 느꼈다는 얘기가 있다. 데이빋이 일시 귀가했다는 설도 있다. 아내가 죽은 며칠 후(12월10일?) 버지니아주 노포크에서 죽었다는 설도 있고 그 전인 10월 19일에 죽었다는 유력설이있어 왔다. [본문으로]
  7. 1811년 12월 8일. 일각의 결핵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본문으로]
  8. 스코틀란드계 이민자였던 앨런에겐 스코틀란드에 사는 '포우'라는 사돈집 사촌이 있었다. 포우네와 어떤 관계인지는 확실치 않다. [본문으로]
  9. 그의 공식 이름은 이때의 세례명과 같다. 가운뎃이름 '앨런'은 그래서 생겼다. [본문으로]
  10. 포우는 1814년 무렵 '피셔'라는 이름의 여교사가 운영하는 일종의 사숙(私塾)을 다닌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1. 1815년 6월 [본문으로]
  12. 어캐더미 재학시 체육 방면에 뛰어난 소질을 보여 1824년엔 학교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임즈 강을 따라 약 10km를 수영했다! [본문으로]
  13. 매우 아름다운 부인이었다. [본문으로]
  14. 1년전인 1825년 토머스 제퍼슨에 의해 설립됐다. [본문으로]
  15. 재학 시절 그는 큰 잔에 담긴 복숭아 브랜디를 단숨에 마시기도 했고 도박하다 상대방의 속임수로 모두 2천 달러의 거금을 잃기도 했다. 포우는 최소한 양심상 빚을 갚을 심산이었으나 대부 앨런은 그 돈을 대신 물어주길 거부했다. 이 문제로 둘은 맹렬히 싸웠다. [본문으로]
  16. 이 무렵 첫 시집 '테이멀레인과 기타 시편들'(40쪽)을 '보스턴 사람'이란 익명으로 냈다 대부분 바이런 기법을 모방한 시였지만, '호수'만큼은 포우의 독창적 시세계를 유감 없이 드러냈다. [본문으로]
  17. 이 무렵 패류학자 에드먼드 레이버넬 박사와 교류했다는 추정이 있어 왔다. 레이버넬은 애너벨 리의 중요한 모델의 하나인 전설의 '애너벨 리 레이버넬'의 부친이었다. ;한편 포우는 이때쯤 대부 앨런에게 뉘우치는 편지를 보냈고 나중 일시 화해하게 된다. [본문으로]
  18. 같은 달에 첫 사랑 로이스터가 앨릭잰더 쉘튼과 결혼했다. 쉘튼 부부는 5자녀를 낳았으나 남편 쉘튼은 37세인 1844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새러는 부부생활을 하던 24살 때(1835년) 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1888년까지 78세를 산다. 부부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는 게 새러의 자평이었다. [본문으로]
  19. 매장된 후까지 포우는 모르고 있었다. 장례식 이튿날에야 휴가를 얻어 리치먼드의 대부네 집으로 조문을 나섰고 둘이서 일시 화해한다. [본문으로]
  20. 사관학교 동료생 여럿이 75센트씩 총170달러를 거둬 보내 출판이 가능했는데 친구들은 포우가 재학 시절 교수들을 그린 풍자시 같은 작품을 그에게서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시들' 표지엔 옛 동료 생도들에 대한 헌사도 곁들여졌다. [본문으로]
  21. 포우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1837년 1월까지 근무할 동안 SLM 구독건수가 700부에서 3500부로 5배나 늘었다. [본문으로]
  22. 컨버스 목사는 '크리스천 업저버'를 창간했는데, 이 신문은 훗날 장로교계의 대표언론이 됐다. [본문으로]
  23. 토머스 와이엍 교수가 포우를 끌어들였다. 1845년까지 3판이 발행됐다. 포우가 관여한 책 형태로서는 유일하게 상업적으로 성공한 케이스다. [본문으로]
  24. '스틸러스'는 펜을 뜻한다. 이 펜과 '펜'(Penn)의 유추를 보라. 1843년엔 토머스 C. 커트럴과 공동발간 계약까지 맺기도 했지만 결국 재정적으로 불가능함을 발견한다. [본문으로]
  25. 발행인 조지 그래엄. [본문으로]
  26. Murders in Rue Morgue [본문으로]
  27. 프레드맄은 당일 그가 만취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본문으로]
  28. 수 년 후 불어판도 프랑스 잡지에 게재됐고 런던에선 해적판이 나오기도 했다. [본문으로]
  29. 버지니아는 당년 24세였다. 포우의 어머니 일리저벹도 24세 때 별세했다. 교회내의, (포담 주인집인) 밸런타인 가문용 납골당이었다. [본문으로]
  30. 휘트먼은 포우의 사후인 1860년 포우의 숙적 그리스월드에 대응, 포우를 변호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본문으로]
  31. 새러로서는 남편 쉘튼이 남긴 거액의 유산을 포기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어서 처음엔 꺼리다가 포우에게 설득돼 (술을 끊는다는 조건 아래?) 약혼을 허락했다. [본문으로]
  32. 1840년대에 미국/카나다에서 유행한 '절제의 아들들'은 삼각형(=피라믿) 속에 헥서그램(육각별)이 들어있고 광선이 비치는 로고, 비밀의식, 비밀코드, 비밀악수, 레갈리아 등 프리메이슨리의 전통과 닮은 점이 많았다. 이 단체는 지금도 영국/그리스 등에서 활약 중이다. http://www.sonsoftemperance.abelgratis.co.uk [본문으로]
  33. 보들레르의 번역에 힘입은 바 크다. [본문으로]
  34. 추리소설 대표작은 '루 시체공시소 살인사건', '도둑 맞은 편지' 등. [본문으로]
  35. Masque of the Red Death. 한 왕자가 자기 손님인 가면극 관객들과 함께 자기 성에 숨는 줄거리. [본문으로]
  36. 포병대 복무 시절 그는 바이런 식 시법을 버리고 밀턴과 토머스 무어 기법을 모방, 수 백 줄에 걸친 고도의 난해시 '알 아라프'를 썼다. [본문으로]
  37. 포우의 죽음 원인에 관해선 그의 추리소설만큼이나 다양한 추정이 있어 왔다. 자살/타살(보복살인)/주독/약물중독/광견병/폐결핵/뇌출혈/콜레라/당뇨/심장병 등. [본문으로]
  38. 잔 살턴은 심지어 "그(포우)가 술취한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해 포우의 주벽을 부정하는 듯한 신빙성 없는 발언도 했다. [본문으로]
  39. Seraphim. 한글 성경의 '스랍'. 머리와 어깨, 발 등에 모두 세 쌍의 날개를 갖고 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 그룹이다. [본문으로]
  40. 이 3년간은 포우 부부에게 가장 불행한 시기이기도 했다. [본문으로]
  41. 현 포담대학교. [본문으로]
  42. 예수회 회원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