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이거 며칠 만에 최심층까지 도달하시네요. 성경교사 30년 만에 수제자 만난 거 같은데요?]
어? 나도 어,다.
어.. 머... 그거 한 마디로 금방 수제자 반열에 들어서나? 수제자 되기 쉽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함으로써 죄가 사라지는데 그 죄를 결정짓는 것은 율법이라는 뜻인가 싶은데요, 그러면 그 율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인가요? 그리하여 사망을 이겨내고 자유롭게 다시 사는 삶?]
고린도전서 13장을 혼자 읽고 보낸 간단한 질문에, 그가 보낸 답글은 짧지 않았다. 게다가 저 분에 겨운 칭찬이라니.
독해 문제 지문 읽듯 읽어낸 답이 다행히 크게 어긋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일단 안심이다. 망신은 면했다.
마지막 시험 치른 게 대체 언제적 얘긴데, 아직도 문제 비슷한 거 풀고 나면 틀리는 게 싫으니 이건 무슨 컴플렉스인지 원.
[질문하신 그 부분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거의 뇌관에 해당해요.]
'복음'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복 소리'이다. 복의 소리, 복된 소리, 복이 될 소리, 복을 가져오는 소리..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는 말이, 복이다? 어떤 복?
거의 뇌관에 해당할 정도라니, 그냥 어물쩡 안 지나갔길 다행이다.
[잘 이해하면 패러다임의 폭발적 전환이 일어날 수도 있고, 잘못 이해하면 이단되기도 하루 아침입니다. 실제 '구원파'라는 이단이 있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생겼지요.]
폭발적 전환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한다. 아니, 읽은 거니까 눈이 번쩍 했나, 어쨌든 귀든 눈이든 번쩍 했다.
나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좋겠다. 내 의지로는 쉽게 신앙을 갖게 생겨먹질 않은 거 같고, 누가 아니면 무언가가 내 대신 나를 그렇게 만들어 주면 좋겠다. 내 의식에 폭발적 전환이 일어난다면.
[실제 목사님들도, 자기 생각에 한 번 사로잡히면, 아무리 여러 번 반복해 읽어도 정답은 못맞추면서, 우기는 일이 많습니다. 상상이 되시죠? 그 분들이 언어 괴수들은 아니니까요. 그런 경우에는 읽으면 읽을수록 자기 생각이 맞다는 확신만 더 키우게 되는데, 이 부분도 그렇게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많답니다.]
내 짧은 짐작보다 훨씬 중요한 부분인가 보다, 이 곳은.
[글을 읽을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상황과 의도와 문맥과 호흡이지요. 성경에는 그것들이 다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은 거룩하니까 어쩐지 그런 것들이 없을 거라고 미리 전제를 하고는 자기 마음대로 읽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정확한 의미는 파악하지 않고서, 좋게만 생각하면 그걸로 다 되는지 알지요. 성경인데 뭐, 다 좋은 얘기잖아, 좋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하는 거죠.]
그렇겠다.
성경이니까, 좋게만 해석하면 된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좌우지간 '성경'인 거다. 성스러운 경전. 어디라도 어떻게라도, 읽으면 다 유익한 거다.
그는 성경을 놓고, 무지무지 많이 생각하고 고민했나.
성경을 읽던 내 어머니의 모습에서는 별다른 고민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이 곳과 관련된 같은 저자인 바울의 강론이 로마서에 있습니다. 7장이죠. 아주 어려워들 하는 부분인데, 저런 정도의 이해가 스스로 되시면 쉽겠어요.
로마서는 바울의 논리적 성향이 제대로 드러나는 서신서죠.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로마서를 읽고는 기독교 신앙은 바울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의 뜻을 정확하게 파악한 겁니다.]
바울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로 보면 지배계급, 따라서 바울은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자란 다음 예수님을 만난 거니까, 교육으로 훈련된 변론이나 지식들을 기독교 전파를 위해 쓴 거다. 즉,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부류의 사람들이 시켜준 교육의 결과물을, 바울은 예수의 뜻을 널리 알리는데 사용했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예나 지금이나 재미있는 세상이다.
[천천히 하나씩 진행해 보겠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나, 전에 없던 화법이다.
[율법은, 계명이라 해도 마찬가진데요, 인간의 삶에 주어진 방향적 지표입니다. 신의 창조 의도를 지향하고 있지요.]
율법... 율법은 어째 나를 좀 헷갈리게 한다.
율법을 지키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좋은 나란지 나쁜 나란지.
[그것은 신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라는 원리와 그 실천사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효를 행하라 하고,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무고죄들을 범하지 말라고 하죠.]
[그런데 인간은 이 율법을 지키지 못합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그렇지만 그 원리에 가까이 가려는 노력은 해야 해요, 율법을 지키려고 애는 써야 한다는 의미지요. 그게 윤리입니다.]
그렇구나,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게 타락이구나. 타락한 인간. 율법을 지키지 못한 인간.
[이건 동전의 뒷면같은 겁니다만, 율법을 지키지 않아 타락한 인간에게, 율법은 그 타락을 일깨우는 역할을 동시에 합니다. 그 일깨움에 의해 인간은 겸손해져서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지요.]
그렇다면... 율법을 받기 전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율법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영화로도 나와 있다.
그럼, 모세가 율법을 받기 전에는 율법이 없었으니 타락한 인간도 없었나?
아니,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이 있다. 동생을 죽여 이마에 평생 표시를 지니고 살았다는 남자. 모세가 받은 율법은 아직 없었어도, 카인의 살인행위는 분명 비윤리적이다. 아닌가...? 율법을 받기 전인 당시의 도덕률은 지금과는 달랐을까? 설마.
동생을 죽인 카인을 하나님은 보호해 주신 걸로 알고 있다. 무슨 의미였을까? 왜 카인을 보호해 주셨을까?
아.. 머리 아픈 율법. 율법이 먼저인가 죄가 먼저인가.
[따라서 율법을 이해하고 따르는 인간은 동시에 죄를 의식하고 그 해결을 원하게 됩니다. 즉, 구원을 간절하게 바라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죄를 의식한다든가 구원을 갈구한다든가 하는 말은 종교적 영역에 한정시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죄와 그 결과가 우리의 실제적 삶과 마음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 직시해 보면 무슨 뜻인지 아실 겁니다. 그 엉망이 되어 버린 삶에 대한 해결책을 자기의 근원이 되시는 신께 구한다는 거죠.]
죄 짓고는 못산다.
옛말 그른 거 없댔으니 그럴 거다. 죄 짓고는 못살 거다.
그래, 굳이 기독교의 계명을 말하지 않더라도 죄 짓고 사는 마음이 오죽하랴, 범죄를 반복한다면 그 삶이 황폐해질 것은 자명하다. 종교 영역만 뜻하는 게 아니라는 말은 쉽게 이해된다.
[신은 자신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가 바로 그 시도입니다. 신 자신이며 완벽한 인간이신 예수를 통해 인간을 구원하려 하신 겁니다.]
인간이 지닌 문제를.. 신이.. 해결하려고 한다..?
인간이, 신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비종교적'으로 가르쳤어요. 생활 자체에서 드러나도록 가르쳤지요, 그리고는 이것을 천국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들었던 얘기다. 그는 아브라함 얘기를 했었다.
특별한 업적도 없이, 그저 사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친구가 되었다는 사람. 예배 드리듯 삶을 살았다는 사람.
[가르침 후, 예수는 십자가에서 희생되는데, 여기에는 3중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이미 예언이 되었지요, 53장에 있습니다.]
로마서 7장, 이사야서 53장, 나는 메모를 한다.
적어놓지 않으면 기억이 되지 않는다. 지금 적어놓지 않으면, 나중에 어디에 있었더라 하면서 모니터를 온통 뒤져야 한다.
메모지, 이게 또 중요하다. 너무 잘 두면 안 된다. 어디 뒀더라, 메모지 찾아 헤매면 곤란하다. 흠.. 이건 모니터에 붙여 놓자.
그런데 이 포스트잇은 정말 볼수록 신통하다. 쓰임새가 참으로 다양하다. 강력 접착제 만들려다 실수로 개발되었다는 포스트잇, 내 인생에도 실수로 대박나는 일 좀 안 생기나.
그가 계속 말한다.
대박의 꿈은 잠시 접고, 그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인다.
세 가지 의미, 예수의 희생이 지녔다는 의미 세 가지.
그의 말에 의하면, 인간의 대표로서 하나님께 보인 '완벽한 순종'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이신 '전폭적인 사랑'과 '죄 및 그 보응에 대한 해결'이 바로 그것이란다.
아담이 실패한 순종, 아담은 하와에게 넘어가 순종에 실패했다. (혹시 여자가 요물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나?)
그리고, 전폭적인 사랑이란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아마 죽는 것으로 끝났어도 저 의미는 퇴색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의 대표라는 점에서는 그의 부활이 결정적 승리가 되지요. 타락으로 인해 내려앉았던 죽음의 그림자가 그의 부활로 걷히는 겁니다.]
인간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인 예수는 부활했다. 그리고 그 부활이 전체 인간에게 승리로 작용한다는 건데.
[인간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은, 인간들이 그의 죽음에 참여하여 타락의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죽음에 참여하는 것을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표현합니다.
'영접'이란 단순하게 맞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의 생명이 내 안에서 살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사상이 지켜지고 그 인격이 내 안에서 자라가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요즈음 상황을 보면 '영접'의 의미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습니다. 걱정이지요.]
이게 무슨 말이냐.. 예수의 생명을 내 안에서 살도록 한다니.
그냥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며 산다고 말하지 않고 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예수의 생명을 내 안에 살게 하는 것은, 믿는 자에게 오시는 성령의 역할입니다.]
오, 금방 나오네.
그런데 또 뭐? 성령의 역할?
[성령의 역할은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경험의 대상이지 노력하여 취득하는 대상이 아니예요.]
이게 또 무슨 말이냐.. 성령이 경험의 대상이라니.
성령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말이다. 듣느니 처음이다. 들어 보지 않았으니 생각을 해 봤을 리 없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뭘 경험한다고? 성령을 경험해? 어떻게?
이걸 믿어야 하나.
그의 말을 굳이 믿지 않고 의심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성실하게 나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안다. 나는 그의 진실함을 믿는다.
그러나 믿기 싫어서가 아니라, 믿지 않을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건 믿어지지가 않는다.
성령이 경험의 대상이라니, 그에겐 이웃 나라도 아닌 내 나라 이야기인 모양인데 나에겐 먼 나라다. 몇 십 년을 하루같이 새벽기도를 다녔던 어머니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어머니야 나이 많으신 옛날 분이었으니 그런 식으로 말할 줄 몰랐다 치고, 젊은 내 주변 기독교인들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교회 다니라고,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말은 무수히 들었지만 성령을 경험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좌우지간 그는, 성령을 경험했거나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네.
[성령이 무슨, 점쟁이 같은 건 아니예요.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인도자지요.]
후후, 그는 가끔 독심술을 한다.
점쟁이까지야 안 갔지만 어쨌든 성령이라는 말에 움찔 했으니까.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문제가 의외로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성령이 경험의 대상이라면, 경험이 되면 믿고 경험이 안 되면 안 믿으면 되네? 경험하면 믿기 싫어도 믿어질 테고, 경험이 안 되면 그걸 핑계삼아 안 믿으면 되고.
꼬였던 머리가 일순 단순해지는 기분이다.
[길었지요? 지루했나요? 이제야 질문에 답이네요.]
빙긋,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흘린다.
그는 가끔 이런 식으로 잔 재미도 줄 줄 안다.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율법의 원래 목적에 대한 원천적 이해를 토대로 살아갑니다. 율법은 더 이상 그들에게 고발자의 역할도 하지 못하고 속박의 틀도 되지 않아요. 율법이 고발자가 되거나 속박의 틀이 되는 것은 죄의 지배 아래 있던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써 그 죄로부터 벗어났거든요. 구원을 받은 거지요.]
그래서 사망이 죄를 쏜다는 거였던가. 그리하여 죄를 관장하던 율법으로부터도 놓여 나고?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이제 인위적 법칙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사랑의 원리에 따라 성실하게 판단하고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도덕 교과서랑.. 다를 게 없네.
[이것이 바로 믿는 자의 자유입니다.]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할 수 있는 자유? 어차피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살고 있지 않나? 믿지 않는 나도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누군가의 조언을 구하기도 하지만 마지막 결정은 결국 내 몫이다. 다른 이의 조언에 따르더라도, 따르겠다는 결정은 내가 한다. 겨우 이 정도가 '자유'라고?
[실제로 바울은 무엇이든지 잘 믿는 행위의 규정을 만드는 것에 대해 격렬히 반대했습니다. 오늘날, 술이나 담배처럼 진정한 가치와 관련없는 것으로 믿음을 평가하는 것도 사실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또 처음 듣는 말이다. 술이나 담배가 진정한 가치와 관련이 없다는 것은 알겠다. 그렇지만 금주, 금연을 기독교 신앙의 척도로 삼는 것은 이미 거의 보편화되어 있는 걸로 보인다. 술 담배를 끊기 위해 교회에 다녀야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고, 교회에 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술 담배를 한다고 부끄러워 하는 사람도 많다. 진정한 가치와 관련이 없는 거라면 부끄러워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이건 기독교의 또다른 모습이다. 신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나지만, 그래도 새롭다.
이 역시 종교화의 일종인가. 도대체 인간들이 만들어낸다는 종교화의 끝은 어디일까.
[물론 구원받은 사람도 옛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 새 믿음이 희미해져서 옛 습관에 빠지기도 하고 유혹에도 빠집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그것에 굴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달라진 점이지요. 옛 성품의 잠재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의지에 따라 그것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는 겁니다.]
긴 강의였다.
마무리 말을 하면서 그는 그것이 바로 로마서 7장 마지막 절의 의미라고 말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25 후반부, 개역개정)
조금 안심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다 갈등하며 산다는 거다. 마음은 이런데 실제 행동은 저렇게 하는 거다. 나만 그러는 게 아니구나.
위로는 되지만 이건 쉽지 않다. 이 강의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냥 공부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걸리는 것들이 있다. 머리속이 복잡해진다.
수제자 만난 거 같다고?
후우, 깊디 깊은 숨을 내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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