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이단을 말하는 것은, 늘 가슴 아픈 일화를 동반합니다.]
그가 대답의 첫머리를 연다.
그런데 호오.. 이단을 이야기하면서 가슴이 아프다는 기독교인은 처음이다. 침 튀겨가며 흥분하거나 상대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백안시하거나, 잘 봐 주는 사람이 냉소적인 정도였다. 내 경험으로는 그랬다. 자기나 아니면 되지 뭘 저렇게까지 못 잡아먹어 안달을 할까 싶을 정도로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가끔 있었다. 입가에 거품 물고 덤벼들면 마치 내가 이단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단의 사전적 정의는 '전통이나 권위에 반항하는 주장이나 이론'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단이란 사전적 의미와는 혹 다른 개념인 것일까. 전통이나 권위에 반항 좀 하기로 뭐 그리 유별스럽게 난리를 치는가 말이다. 전통이나 권위에 대한 반항 없이 역사가 쓰여졌을까.
예수도 당대에는 이단아였던 거 아닌가.
[실제로 신학적 오류가 있어서 정당하게 이단으로 판정된 경우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래도, 그러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참 정신은 더 잘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어라? 새롭다?
'이단' 판정을 받았을지라도 기독교의 참 정신은 더 잘 지키며 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네? 기독교의 참 정신이 뭔지야 내 모르지만, 가능한 정황이긴 하다. 흠.. 참 정신은 더 잘 지키며 살 수도 있다..라.
[그 경우, 한 과목 공부는 헷갈려 딴 공부 하고 왔어도 전체 평균 점수는 압도하는 거죠.]
후후, 재미있는 비유다.
이단이라 판정받은 교파의 신도가, 한 과목은 비록 '헷갈려' 이단 공부를 했더라도 전체 평균이나 총점은 정통 기독교인들 보다 높을 수 있다는 거다. 이거 이거, 전체 평균이라는 관점이 적용될 수도 있는 문제였군.
[ 이단은 어디까지나 교리 논쟁에서 그쳐야지 그것이 신앙인 개인의 평가로 연장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일개 평범한 신도가 교단에서 하는 교리 해석에 어떻게 관여할 수가 있담. 교리와 신앙은 구별되어야 하는 거다. 그게 맞겠다, 정말.
[안식교의 문제는, 그들이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정하고 지키고 있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그렇게들 알고 있으나 '이단'이라는 지적의 핵심은, 그들이 그것을 '절대적 문제'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아 그런가.
그들은 그 문제를 절대적 가치로 여기고 있었던가.
[그러한 태도는 율법주의적입니다. 율법주의적 절대적 태도는 이천 년 전 초기 사도인 바울도 강력하게 비난했지요. 지금도 율법주의는 거의 준이단 정도의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요일의 문제를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해 그것을 지키지 않는 다른 교회들을 옳지 않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초점은 바로 그것, 자기들만 옳고 다른 교회들을 그르다고 규정 짓는 태도라는 것이다.
율법주의라..
그는 나와 이야기하는 동안 기독교 특유의 언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기독교인과 이야기 하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그들만의 언어를 흔히 듣게 된다. 내 듣기에 그 언어들은 거의 전문용어에 가깝다.
회개, 구원, 은혜, 은사, 전도, 사탄, 천당, 지옥, 신실, 열심... 보통 사람들은 일상에서 별로 사용하지 않는 어휘들을 기독교인들은 참 많이도 쓴다. 통상 쓰이는 언어도 이상하게 기독교인의 입에서 나오면, 그 순간 특유의 분위기를 띠고는 했다. 비기독교인들은 '열심히'라고 말하는 반면, 그들은 '열심 있는'이라고 말했다. 언어의 쓰임이 독특했다.
그러한 비일반적인 언어들이 비기독교인들에게 얼마나 거부감을 주는지 그들은 모르는 걸까.
자기들만의 언어가 발음되는 순간,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비기독교인들이 이심전심 주고 받는 무언의 거부감을 그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그렇게들 전도에 열을 내면서 왜 말은 그렇게 하는지 궁금했다. 거부감을 주는 언어로 접근해서 어떻게 상대의 마음을 얻겠다는 것일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기독교 특유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주변의 기독교인들로부터 하도 많이 들어, 진정한 의미 한 번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채 거부감이 먼저 생겨버린 말들을 그에게서는 들어보지 못했다.
자신은 순수한 상태의 기독교인이기를 원한다고 그는 말했었다.
'구원' 같은 '성경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술, 담배'를 금기로 여기는 '종교적 행위'로 무장하지 않고, 정직하게 기독교인으로서의 사상과 삶을 실천해 보려 한다고 했다. '성경'이나 '종교'를 빌어오지 않고도 기독교적으로 사고하고 움직일 수 있어야만 그 신앙이 알맹이가 있다는 거였다.
율법주의라는 말은 그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기독교적 언어였다. 그 말을 쓰지 않을 방법이 달리 없었나 보다.
율법주의란 게 뭐 별 거겠는가 율법을 잘 지키려는 거겠지.
그런데 너무나도 지나치게 잘 지키려 애를 쓰다 부작용이 생겼나 보다. 그러니 율법주의라는 말이 나왔지.
율법주의라는 말은, 기독교에 대한 조예가 전혀 없는 내가 듣기에도 긍정적 어감은 아니다.
아니 참 잠깐, 그렇지만 기독교는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종교잖아, 그 정도는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유명한 영화 몇 편만 보면 알 수 있다. 율법이 새겨진 돌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
그 율법이 율법주의라는 말로 오히려 경계를 당하다니?
[하나님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율법도 그래서 주셨지요. 잘 지켜서 잘 살라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율법이 지나치게 엄격해져서 사람들의 삶을 구속하게 됩니다.]
푸하핫, 인간이 그렇지, 인간들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인간은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는 가히 천재적이다. 단순하고 간단한 걸 그냥 못 둔다. 이렇게 저렇게 비틀어 '어쩐지 우아하고 세련되고 교양 있어 보이게' 만들어 버린다.
율법을 실천하는 데에도 그러한 천재성이 작용했나 보다. 그리하여 율법이 율법에 머물지 않고 '주의'로 발전한 거다.
율법이 '주의'가 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이 꼬이고 왜곡되고 덧입혀졌을까.
간단히 이해해 보자면, 잘 지켜 행복하게 잘 살라고 준 율법이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되어 사람들을 구속했고, 그 꼴을 보다 못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시어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끔 해주셨단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율법에 매달려 콩이야 팥이야 하는 일들이, 과거로부터 이제까지 죽 있어 왔나 보다.
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콩이네 팥이네 하면서 교파가 나뉘었을 거고 서리태네 흑태네 하면서 또 갈려 나갔을 거고 그 와중에 이단이네 아니네 시비가 붙었을 거고 어쨌든 결국 '이단'이 생겨 났을 거고, 아니 봐도 비디오, 뻔한 과정이다.
근데 이거, 첫 강의부터 진도 너무 많이 나가는 거 아닌가?
아무튼, 실제 전통적 안식일은 토요일이 맞고, 일요일은 초기 유대교인이자 기독교인이었던 사람들에 의해 주일로 지켜지던 것이, 시간이 감에 따라 안식일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라 한다.
서기 1세기, 예수의 부활을 막 경험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미 많은 수가 유대교인이었다. 그들은 유대교 율법에 의해 안식일을 지켰고, 새로운 복음인 메시아를 예배하기 위해 또한 주일까지 지켰던 거다.
그러니까 '주일'과 '안식일'은 애초에 그 개념이 달랐다는 얘기다.
'주일'은 '주님의 날', '안식일'은 '안식하는 날'.
'주일'은 예수가 부활한 날이고, '안식일'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 쉬셨던 날이다.
사회가 변함에 따라 안식일의 의미는 추상화되었고, 사람들의 편의에 따라 안식일이 주일에 편승한 점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안식일이 토요일이건 일요일이건 그것을 '절대적' 문제로 삼을 일은 아니라는 거다.
[구원이나 삶의 문제에 있어서 안식교는 이단이 아닙니다.]
그렇구나, '일부' 교리의 문제구나. 이건 개인의 선택 문제라 하기도 곤란해 보인다.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할 때, 각 교파를 미리 찾아다니면서 그 차이점이나 교리적 내용들을 먼저 다 알아보고 결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말이다. 옆집 오빠가 좋아서 따라 갔더니 장로교더라, 선배 언니가 하도 졸라 못 이기는 척 함께 가 주었더니 침례교더라, 어쩌다 보게 된 목회자의 인상이 무지 마음에 들어 찾아 갔더니 감리교더라, 보통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거 아니던가.
모르고 간다면 안식일교라고 뭐가 다를까.
이단 시비가 있다는 걸 알게 될 무렵이면 이미 '교리' 공부 진도는 나갈 만큼 나간 다음일 텐데.
각설하고, 이단에 관한 그의 접근은 맘에 든다.
내가 겪은 기독교인들은 대개 납득할 만한 근거없이 그냥 싸잡아 비난을 하곤 했는데 그는 근거를 갖고 논리적으로 문제를 설명해 주었다. 감정이 개입될 필요가 없었다.
보통, 논리가 부족할 때 감정의 신세를 지는 법이다.
흠.. 이건, 입맛에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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