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묵상연구/시편

[시 19:14] 고백/선언으로 사는 삶

김삼 2009. 11. 15. 09:24





내 입의 말들과
내 마음의 묵상이
님께 늘 받아 들여질 만 하기를 (빕니다),
오 주/야웨님, 나의 힘, 나의 구속자님!
(시편 19:14 사역)



크리스천은 고백으로 살아 갑니다.
세상 사람들도 나름의 고백을 한다고는 하나..훨씬 낮은 차원의 고백들이지요. 
연인이나 거짓말 탐지기, 웹 댓글 등 사람들 앞에서 하는 고백이 고작입니다.

반면 신자들의 고백은 하나님과 영적 존재들 앞에서..그리고 사람 앞에서 합니다.
성경에는 고백하다에 해당하는 원어로 구약 히브리어의 '야다', '토다'..신약의 '호몰로기아' 등이 있습니다만..
구약의 '야다'는 단순히, 말하다는 뜻도 있지요.

흔히 고백..하면, 우선 숨은 비밀 또는 잘못과 죄악, 실상과 진실을 드러내어 알리고 실토하고 시인함을 가리키곤 하지요.
하나님 앞에서도 하며 가끔은 사람끼리도 합니다.
'자백'/'자복' 등으로도 불리며 잘못과 죄악의 경우, 회개(뉘우침+고침/바꿈)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다빋 왕의 회개시인 시편 제51편은 대표적인 고백 시이지요.

우리는 주님 앞에 거의 날마다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을 경배한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을 찬양한다고, 그 분의 이름을 높인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긍정적인 속을 털어놓습니다.

이와 함께..우리의 잘못과 비밀도 고백합니다.
우리의 부정적인 면모를 아뢰는 부분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남을 위한 도움기도나 우리 자신을 위한 간구를 하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 내게 거리낌-부정적인 요소가 없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 대한 불신의 죄, 방금 전까지 저지른 생각과 말과 행동의 온갖 범죄/죄악, 실수와 실족과 잘못, 허물과 과오, 특히 남에게 상처 입힌 사실 등을 돌아보고 그 분께 아뢰며 뉘우치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그 분의 긍휼/온정에 의지하여 용서를 빌고 어린양의 피로써 성결케 해 달라고 빌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 그 분을 힘입어 생각과 언행을 고치고 바꾸는 것이지요.    

또한 예수님을 처음 믿는 사람들도 지난 날 주님을 거부하고 믿지 않았던 자신의 죄를 뉘우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백은 죄의 자복 뿐만 아닙니다.
한 차원 더 높이, 믿음의 고백도 있습니다.

흔히들 신앙고백 하면, 각 교파나 교단 등이 제정한 신앙고백이나 신조를 연상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면, 전통 신/구교 교파에서 하는 소위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이라고도 칭합니다. 이것은 'Credo'(나 믿노라)로 시작되는 천주교 전통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런가 하면,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벨짘 신앙고백..고대의 니케아 신조/신경(信經) 등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진심을 담아 하기보다는 입에 발려, 습관과 타성에 젖어 하기가 쉽지요.


저는 여기서, 그런 전통적인 교리적 고백보다는 성경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음으로 고백하는 행위를 주로 다루렵니다.

성경 말씀에는 우리가 자신의 입과 입술로 고백할 수 있는 말씀이 매우 많습니다.

고백은 빈 말이나 헛소리가 아니라면, 매우 중대한 파워와 연결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입술과 혀의 힘이지요. 입술과 혀는, 비록 몸으로 하지만 정신/혼과 영에 연계되는 긍정적/부정적인 양면의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심지어 별 대수롭지 않은 말도 '씨'가 되어 먹히는 수도 있답니다.

그래서 고백은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엔 혀와 입술의 파워에 관한 중요한 구절이 수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입술의 열매를 먹고 사는 존재로 묘사합니다(잠언 12:14, 18:20,21. 참고: 이사야 57:19, ).
사람의 삶과 죽음이 혀의 권세에 달려 있다고 잠언 기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복을 받고 못 받고도 우리의 입술에 달린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 말씀들이 그걸 입증합니다 .
 

우선 부정적인 면을 살펴 보죠.

신약성경 야코보서 3:1-12은 세 치 혀와 입 놀림의 부정적인 면모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잘못 내 뱉는 말은 독과도 같고 무서운 독성을 발합니다. 실로 가히 사람을 죽이는 독이 혀에 있습니다. 요즘 발달한 인터넷 댓글 기능도 실은 말과 같은 효력을 발합니다. 그래서 소위 '악플'-악성 댓글 탓에 괴로워 하다 못해 급기야 자살하는 일도 발생하곤 합니다.
 
그래서 야코보는 말 조심을 해야 한다고 누누히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말로 곧잘 저주도 합니다. 욕지거리도 내뱉습니다.
영어에서 curse와 cuss, swear 등의 낱말은 흔히 욕/저주/맹세 따위에 공용어로 쓰입니다. 이런 말들은 쓰지 않도록 삼가야겠지요.
저주 대신 되도록 축복의 말을 해야 할 터입니다.
내가 함부로 마구 내뱉는 저주는 때때로 악령들이 캐취해서 무서운 독을 발하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때로 성령으로 저주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엘리샤가 자신을 '대머리'라고 악담을 퍼붓는 동네 청년들을 저주했더니 암콤이 나와서 그들을 찢어발긴 일이 한 예입니다. 

저주에는 이런 파워가 발해질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말들은 때때로 우리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맹물에다 먹을 타듯 우리의 삶이 부정적인 언어들로 점점 채워질 때, 어두움이 스미고 악이 틈 타고 독성과 불행으로 번지게 됩니다.
자연히 영적/정신적 더 나아가 육적 건강까지 손상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 맘 속에서 평소 품은 것들이 은연 중 말로 튀어 나올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혹 생각까지는 걷잡지 못한다 해도, 그 생각을 부정적인 말로 구체화하여 내 뱉지 않도록 조심해야 좋습니다.

생각은 지우거나 잊거나 거두기가 비교적 쉽지만, 한 번 내 뱉은 말은 쏟은 물처럼 되담기가 극난합니다.

나의 말이 내 삶과 가정의 쑥과 담즙이 돼선 안되겠지요.

우리는 심지어 가족 등 가까운 사람에게까지 은연 중 부정적인 말을 하는 데 익숙해져 있기가 쉽습니다.
"배 고파 죽겠다", "힘들어 못 살겠다", "골이 빠개질 거 같아", "미치고 환장하겠네", "나가 죽어 자빠져라", "지지리도 못난 놈 같으니..", "저런 얼간이..", "병신 육갑하네", "에라, 이 염병 할.."..

이런 나쁜 말들은 세상에 다 토해 버리고 우리가 쓰지 말도록 합시다.
부정적이고 나쁜 말 한 마디에 영계에서는 우리의 영적 점수가 깎여 버리며, 이것이 쌓이다 보면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말과 혀는 무서운 힘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가 하면..우리는 반대로 입술/혀의 긍정적인 힘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는 이유의 하나는.. 물론 하나님이 들으시지만, 천사가 한 순간 향연처럼 향그릇에 담아 하늘로 올려가면서 믿음의 고백이 실현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의 고백을 중시하셔서 그것이 구현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 삶 속에서 믿음의 고백을 선언화하고, 기도할 때도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내가 믿습니다. 신실하신 주님 말씀 대로!"

이런 외침 같은 선언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저주/선언에 뿌리까지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를 보고 눈에 휘둥그레져 놀라는 제자들에게 산더러 들려져 바다에 던지우라고 선언하고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이뤄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앞을 가로막은 의심의 산, 불신의 산, 두려움의 산, 장해와 훼방의 산, 불경기의 산, 가난의 산, 질병의 산 등 우리 앞과 우리 곁에 겹겹이 둘린 산들을 향해 명령하여 해결과 해소의 바다에 던져져라고 수시로 믿음으로 명령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묻기엔 우리가 달려 가야 할 나그네 여정이 너무나 바쁩니다.
주님 말씀이니 믿고 명령할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입술은 부정/긍정 양면으로 놀라운 위력을 발휘합니다.

왜 그럴까요?
도대체 이 짧은 세 치 혀와 이 반 쪽씩 아래 위로 나 있는 입술이 뭐기에? 태초에 천지를 말씀/로고스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우리에게 말의 권능이 주어져 있기 떄문이죠.
사람 외에는 세상의 어떤 동물도 그런 말발의 권능이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이 말의 힘을 저주와 욕설, 주문 외기, 그리고 헛된 잡담에 다 써 버리고 맙니다. 
말씀과 성령님으로써 거듭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이 우리 속에서 새롭게 되어 성결하고 권능 있는 언어생활로 긍정적 열매를 먹고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혀와 입술을 길들여야 합니다.
야코보는 마치 조정타 하나로 큰 배를 조정하듯, 우리가 혀와 입술을 길들일 수 있다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혀와 입술을 제어하고 훈련시킬 필요가 있으며 가능합니다.

그러려면 늘 부정적인 말 대신, 긍정적인 고백/선언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술의 열매로 자신의 삶을 배 불리며 살아가기 떄문이죠.

그러므로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의 입술을 순화하고 승화시키고 성화되어 긍정적인 고백과 선언을 합시다.
성경에 있는 수많은 좋은 약속들과..신앙 선진/선배들의 수많은 기도들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그분의 말씀에 책임을 지시고 보증/보장해 주시기 때문이죠. 

    하나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기뻐합니다. 주님을 기뻐함이 제 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가 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주/야웨님은 나의 목자, 나 아무런 부족함도 없네!
    주님은 야웨 라파, 내 모든 병을 고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나의 구원과 나의 반석, 나의 산성, 내 방패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랴!
    나의 하나님이 크리스토 예수님 안에서 그 영광 속의 풍요에 따라 내/그대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
    내 안에 계신 분이 세상이 있는 자보다 크시다!
    나는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머물며 내가 흉악한 자를 이겼다!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마다 세상을 이긴다!


이런 고백은 곧 대명사를 대입하여 나 자신은 물론 상대방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님, 님의 영이 잘 되듯 님의 모든 일이 잘 되고 강건하기를!
 
아무튼 우리가 할 수 있는 긍정적인 고백은 너무나 많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고백은 사특한 어둠의 세력인 악령들에 대한 담대한 선언과 명령으로도 활용됩니다.

    내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이 악한 증세야, 내게서 떠나라!
    의심과 불신의 구름은 내게서 걷혀라! 어서 사라져라!
    이 더러운 악령아! 이 자매에게서 썩 나오너라, 예수 이름으로!

이렇게 말하노라면, 한 쪽에서는.."그게 그거 아니냐? 형통 복음이 아니냐..번영신학이다..긍정철학 같다..귀신론이다..도깨비방망이 식이다..",

이렇게 의혹의 눈초리를 하거나 빈정댈지 모릅니다.

그러기엔 너무나 갈 길이 멀고 바쁩니다.
믿음만으로 살기에도 너무 벅찬 세상을 불신과 의심으로 살아간다면 더 힘들 것은 뻔한 노릇입니다.

그럼 도대체 성경에서 뭘, 어떻게 믿자는 겁니까?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대로 안 믿겠다면, 무엇을 어떻게 따라서 믿자는 건가요?

그냥..나의 영이 달랑 구원만 받고 천국 가는 게 성경의 전부인가요?

믿음 없이 하는 모든 것이 죄요, 믿음 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길이 없습니다.
무엇이 믿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고백/실천하는 게 믿음이지요!


티엘티 성도들은..
날마다 말씀대로
예수 이름으로
믿음으로 긍정적인 고백과 선언을 하면서
그 복된 열매를 먹고 누리며
승리 생활 하기를~!

아멘

김삼의 글은 외래어를 원음에 더 가깝게 표기하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이해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