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그리고 마음 (뉴하우스)

뉴하우스의 돌보며 걸으며
서로 주고 받는 문화와 정서도 무척 다양한 시대에 산다.
여러 사람의 생일, 각종 기념일, 어머니 날, 아버지 날, 그리고 크리스마스 날 등 그 밖의 여러 다른 명절에 가족이 서로를 챙기고 특별한 날을 기억하여 같이 좋은 시간을 갖는 행사는 어쩌다 보면 그 날이 그 날일 수 있는 생동감 없는 덤덤한 삶에 좋은 활력소가 된다. 서로의 마음이 전달되고 그날의 주인공을 기쁘게 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아이도 커 가고 이런 특별한 날들이 점차 의미를 잃어 가기 시작한다. 워낙 이런 특별한 날들을 잘 챙기지 못하는 나는 혹시 깜빡할 경우를 대비해 평소에 섭섭하지 않게 해야 진짜 잊어 버려도 좀 용서가 되지 싶어 적어도 마음만은 "평소에 잘 하자"고 먹어 본다.
하지만, 세상 일이 언제 내 마음 먹은 대로 움직여지던가?
나의 이런 생각과 삶의 방식이 언제 이심전심이 되란 법이 있던가?
'깜빡'할 수도 없게 요란한 광고와 때마다 적절한 상품들의 진열을 보며 "아~ 또 그 날이구나" 하며 어느 정도의 의무감이 마음 한 자락을 잡아 끌기도 한다. 나의 평소 이런저런 노력 외에 또 그 날은 성의를 표현해야 하는 날로 이미 인식돼 있음을 잘 아는 까닭이다. 모양새라도 갖추어야 하는 형식이라는 것의 대단한 파워를 무시 못한다.
다행히도 “Every day is Mother’s Day”, “Every day is Father’s Day”, “Every Day is my Birthday.”라는 억지스러운 표현들이 우리 가족에겐 요긴하게 쓰이는 말들이다. 물론 어쩌다 카드며 선물을 챙기지 못한 경우에 챙기지 못한 식구가 미안하지 않게 하려는 저의지만, 매일 매일의 삶에서 각자 나름의 존재가 귀히 여김을 받는다고 자부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역시 형식과 의무감에 매이지 않고 시시때때로 마음이 동해 주고 받을 때 진정한 의미의 나눔이 되고 그곳엔 감사와 기쁨이 있게 마련이다. 내게도 대부분 다 잊혀 가지만 기억에 남아 아직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선물이 있다. 아마도 베푼 이에게는 돌려 주고 싶어도 돌려 줄 수 없는 친절과 사랑이라 유독 기억에 남나 보다.
정호네 가정은 조그마한 캔디 가게를 운영한다. 주일만 되면 종이봉지에 각양각색의 거미(gummy, 말랑말랑하고 쫄깃쫄깃한) 벌레 캔디를 중등부 교사인 내 손에 들려 주는 정호. 노랗고 빨갛고 파란 색의 지렁이 거미 캔디의 부드러우면서 쫄깃한 맛에 매료된 나는 무척이나 이 아이 앞에서 좋아 한 기억이 난다. 결국 정호는 내가 좋아하고 또 은근히 기대까지 하던 거미 캔디를 지극정성으로 매 주 갖다 주었다.
어린 나이의 소년이지만 정호는 가게에 손님이 있건 없건 성미를 조절 못 하는 아빠가 엄마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막아 내던 아이다. 어리지만 동심이 비켜 가 그만 자신도 모르게 확 커 버린 그 아이의 맘 속에 있을 법한 상처와 불안감은 보이지 않는다. 이미 상처가 난 마음을 되돌려 놓을 수도 없고 대신 채워 줄 수 없는 아픈 가슴을 베푸는 것으로 채우는지 도무지 자기 아픔을 내 놓지 않는다.
대신 그가 내미는 흰 종이봉지에 담긴 파랗고 빨갛고 노란 캔디로 나는 그의 마음을 읽는다. 거미 캔디의 본고장인 독일에서 살면서 가지가지 모양과 색깔의 캔디를 보며 오래 전 정호가 주일이면 손에 들려 주던 캔디가 주는 감회가 크다.
정호야… 그동안 내게도 수없이 많은 이웃이 있었단다. 오며 가며 여기저기서 하나님이 나의 삶 가운데로 보내신 사람들 말야. 나의 친절과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나의 이웃들. 네가 내 손에 들려 주던 오색찬란한 캔디가 나의 이웃을 위한 변신을 거듭해 또 다른 친절과 사랑이 되어 흘러가더구나.
네가 나에게 지극정성으로 갖다 준 그 지렁이 캔디는 죽지를 않나 봐…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그 거미 캔디가 그때만큼 맛있은 적이 없었지. 그리고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것은 모든 여건이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더구나. 네가 너의 아픈 가슴으로도 나를 생각하는 마음 한 켠을 열어 두었듯이 말야.
그래서 나도 내 삶의 한 자락을 열어 놓는단다. 어느 시점에서 맞닿을 새로운 나의 이웃을 위하여…그리고 매번 내 손에 들려주던 거미 캔디가 어떤 친절과 사랑의 표현이 되어야 할지 몰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구해 본단다.
그런가 하면, 나는 베푼 기억이 없는데 내게서 받았다고 해서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예도 없지 않다. 아주 적은 시간을 그냥 같이 있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들어 준 것 밖에는 없는데. 갓난아기 때문에 절절 매는 그녀를 위해 설거지 몇 번 해 준 것 밖에 없는데…
“ 우리 아이랑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놀아 주는지를 가르쳐 주셨잖아요?
남편을 사랑하는 법도 가르쳐 주셨고요.”
독일서 아래 위층에 같이 살던 20대 후반의 젊은 아기엄마 조지가 몇 년 후 내게 하는 말이다. 전혀 생각하지 않은 반응이라 한참을 무슨 말인가 기억을 더듬게 한다.
가끔 그녀의 집에 가면 눈에 띄는 대로 설거지를 도와 주면서 아마도 주거니 받거니 했을 말들이 생각난다. 아직 말 못하는 어린 딸이랑 무엇을 어떻게 하며 시간을 보낼지 모른다는 그녀에게 아이가 다 알아 듣는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책도 읽어 주고 노래도 하고 음악도 들려 주라고 한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가사를 안 도와 주고 자꾸 미룬다는 남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그녀에게 온종일 밖에서 사람들과 시달리며 일하고 집에 들어오는 사람은 어느 정도 태엽을 풀고 에너지를 재충전할 스페이스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들려 준 나름의 내 상식이 그녀가 생각을 약간 바꾸는 계기가 됐나 보다.
거창하게 오묘한 진리라도 내 입에서 나간 듯 조지는 말하지만, 실은 기억을 더듬어야 할 정도로 언제 일어난 일인지도 모르게 오간 부엌에서의 대화일 뿐이었다.
“하긴, 약간의 생각의 변화에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새롭게 보이기도 하고 더는 문제가 되지 않기도 하지…” 하며 혼자 생각하다가 한편으로 조지가 한 말이 경종을 울려주기도 한다. 속에 자리잡은 평소의 생각과 이미 내 것이 돼 버린 삶의 일상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서 밖으로 나와 영향력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마음의 옷깃을 다시 여미게 된다.
또한 신기한 것은 우리는 의도적으로 아니면 할 수 없어서 남을 챙겨 주고 베풀기도 하지만 베푼 자 만이 알게, 크고 넓게 파문을 일으키며 우리에게 되돌아 오는 기쁨에 놀라기도 한다.
19살 난 아들아이가 여름 동안 Youth Service 에서 일한다고 할 때 은근히 마음이 안 놓였다. 평소 아이들을 좋아 하는 기색도 안 보이고 형제 없이 혼자 자란 아이라 어린 아이들 등쌀을 견딜까 싶은 생각이 앞선다. 행여나 얼마 안 지나 딴 직업을 구할 걸 그랬다는 식의 후회라도 나오려나 하는 나의 노파심도 없지 않았다.
“J는 엄마 아빠한테 받은 사랑 아이들한테 많이 배정해 주세요.” 하는 한 마디 말과 함께 지켜 보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아이들이랑 얼마를 같이 지내더니 그가 하는 말들이 날 놀라게 했다.
“엄마, 나는 나중에 결혼하면 빅 패밀리를 갖고 싶어요.”
가뜩이나 항상 동생이 없어 미안한 맘을 갖고 있는 나의 정곡을 찌른다. 자기는 형제가 없어서 아이를 많이 낳고 싶단다. 그리고 딸을 먼저 낳고 싶다는 꼬리표까지 단다.
들어 보니 얘기인 즉 아이들 사이에 무척 인기가 높다는 것이다. 특히 귀여운 어린 여자아이들이 “Mr. J” 하며 따르는 그 맛이 어지간히도 좋은 모양이다.
하루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 날 있었던 일을 얘기한다. 항상 얼굴이 너무 슬퍼 보이는 아홉 살 난 소년의 부모가 이혼하는 과정에 있다는 카운슬러들의 얘기를 듣고는 아이의 슬픈 표정이 이해가 되고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데리고 있는 여덟시간 동안 사랑해 주면 캠프에서 가졌던 좋은 시간을 기억하면서 마음이 덜 힘들지 않겠어요?” 하는 아들아이의 말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보기엔 누가 누구에게 진정 도움이 되고 있는지 혼동스러울 정도로 주는 자와 받는 자의 구분이 없어 보인다. 아들아이는 일하고 보수를 받는 입장이지만 자신이 돌보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마음껏 베풀며 이 아이가 대신 누리는 기쁨과 만족은 그가 받는 페이와는 또 별개의 의미로 다가오나 보다.
주말만 되면 “다시 일하러 갔으면 좋겠어요.” 하며 월요일을 기다리는 모습이 흐뭇하다. 아이들 앞에서 말도 더 조심하게 된다며 나름 노력하는 이 아이의 여름이 값져 보인다. 그가 베풀면서 누리는 기쁨뿐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커 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가 하면 생각하면 마음을 속상하게 하는 선물도 없지 않아 있다.
아주 오래 전 어느 날. 우리 집에 석류 한 상자를 누가 선물로 들고 왔다. 한 상자 가득한 석류를 보며 이걸 어떻게 다 먹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우연히, 이미 장성해 사회인인 그분의 딸에게 석류 한 상자를 아빠가 보내 주셔셔 잘 먹고 있다고 건네는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어이 없고 기막혀 한다.
영문을 모르는 내게 그녀는 말한다.
“내가 석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왜 집에는 안 사 오시는지 몰라요…”
물론 자신이 사 먹을 수도 있겠지만, 남에게 한 상자씩 사 들고 갈 것 같으면 딸인 자기 생각이 어떻게 안 나느냐고 반문하는 것 같았다. 우리한테 갖고 오기 전에 켈리를 위하여 한 두 개라도 빼 놓을 수 있었을 텐데 싶은 맘에 켈리 아빠의 배려가 많이 아쉬웠다.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다. 아니면 나머지 식구도 자신과 같이 남에게 베풀어야 하는 입장에 두고 자신은 나머지 식구의 대표로 생각하느라 진작 먼저 챙겨야 할 식구는 소홀히 한 것 같다.
지금도 빨가스름한 석류만 보면 상처 받은 켈리의 모습이 생각난다.
지나치면 아니함 못 하다고 진작 우선순위 항상 0번인 식구보다는 남을 먼저 챙기는 아빠를 둔 덕에 상처 받는 켈리 가족이 항상 걸린다. 무심코 먹기에는 도무지 목에 넘어가지 않는 선물임이 확실하다.
살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이 줄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 안에 모두 할 수는 없기에 우리는 우선 순위를 매긴다. 제일 먼저 급하고 중요한 것부터 처리하는 습관은 마음에 많은 평안과 여유를 주게 마련이다. 이렇듯 우리의 조그마한 삶이지만 우선순위가 뒤죽박죽된 경우는 혼란과 혼돈 가운데 무질서하고 강박감을 주기도 한다.
진정한 의미의 이웃과 형제를 향한 친절과 사랑은 순서가 바뀐 이런 혼란을 초래하지 않는다.
꼭 내 것 네 것 안 가리고 퍼 주는 질퍽한 사랑의 표현과 친절보다는 언제 어디서든 형식에 매이지 않고 베푸는, 의도가 없이 내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사랑과 친절이면 족하지 않을까?
극히 자그마한 삶의 일부일 망정 누구나 가진 것으로 작게는 따뜻한 말 한 마디, 또는 반가운 미소는 내게 다가오는 모든 이에게 줄 수 있는 친절과 사랑과 관심이다.
특정한 날에 표현되는 선물의 모양만이 친절과 사랑 표현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에 일상의 조그마한 마음 씀씀이에도 고마워 하고 기뻐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면, 이 또한 다른 도화선이 되어 다른 친절을 만들어 내고 받은 사랑은 또 줄 수 밖에 없는 사랑이 되어 흘러 나가지 싶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언 11:25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