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사들을 누립시다!

코린토A서 12장 8-11절에 나타난 성령님의 아홉 은사들(이하 9은사)은 오순절날 지상에 온전히 강림하셔서 교회시대/신약시대/성령시대/복음시대/은혜시대를 여신 성령님께서 교회를 무장시키시려고 내리신 초자연적 도구입니다.
다름 아닌 아버지 하나님의 영, 성자 예수 크리스토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거듭난 사람들 속에 늘 임재해 계실 뿐더러 눈에 보이지 않는 참 교회인 거듭난 사람들의 공동체 위에 권능과 영감, 슬기를 부어 주시고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행하도록,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 잃은 양들을 구원하고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성도 개인의 삶과 경건, 공동체 사역에 은사는 반드시-절대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 은사들에 관해 그동안 많은 오해와 심지어 억측이 있어 왔지만, 성경은 직/간접적인 확실한 해설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에 관해 애매하거나 막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온갖 억측이 가능할 만큼 성령님께서는 흐리멍덩하시지도, 어슬프시지도 않습니다. 신자들이 깨닫지 못할 만큼 은밀하고도 신비롭게 감추시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 분명히 깨닫게 해 주시는 길이 오픈돼 있습니다.
그런데도 구구한 딴 설명과 해설 시도가 있는 이유는 체험보다는 선입견과 이론에 근거한 해석에 의존하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신자들의 기본적인 토대인 가장 간단 명료한 구원에 관해서조차 이단적 견해 등 여러 구구한 해석이 있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님의 감동과 영감으로 듣고 읽고 음미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경 자체와 그 저자이신 성령님의 도움과 슬기와 힘으로 풀이돼야 마땅합니다. 그러기 전 신학의 잣대로 이리저리 조리해선 안 될 대상이라는 말입니다.[저는 신학무용론자는 아닙니다.]
오늘날 이 원리를 무시하다 못해 적대하는 신자/리더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고 서글픈 맘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9 은사들 중 각종 방언들과 방언 통역을 제외한 나머지 7 은사들이 이미 구약시대 때 나타났던 초자연적 요소들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대언자/사제(제사장)/왕/판관(=사사)/장로/지도자/성막-성전음악인들 등 특정 직능자들에게 다양한 성령님의 초자연적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들에게서는 예언 등 다양한 요소들이 공통적으로 구현됩니다. 예컨대 모두가 예언을 했고 권능이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교회라는 공동체, 크리스토의 몸을 세우고 섬기기 위해, 성령님의 뜻에 따라 모든 신자들에게 개인마다 달리 9 은사들 중 필요한 것들을 분여(나눠 부여)해 주십니다. 사람마다 받을 바 은사가 많게 또는 조금씩,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아홉 가지 중 일부 또는 전부가 서로 공통된 경우도 드물지만 없진 않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꼭 전제돼야 할, 혼동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령의 9 은사에 나타난 '각종 방언 말하기'는 모든 신자가 할 수 있는 방언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선 주님이 오순절을 얼마 앞두고 예언하셨고 오순절에 모든 성도가 시작했던 '새 방언'과 파울이 계시로 받은 9은사 중'각종 방언들'은 서로 이름부터가 다릅니다. 파울 자신, 코린토A 12, 14장의 방언 계시를 보면 서로 다른 성격과 기능의 두 가지 방언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비밀스런 영교에 쓰이는 기도와 찬양으로서의 개인적/상향적/대신적(對神的) 방언과(코린토A 14:2,4,15), 공동체를 위한 대언적/하향적/대인적 성격의 방언으로 또렷이 구분됩니다(코A 12:10, 14:27,28)
서로 섞일 수 없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도 온갖 신학적, 이론적 설명을 갖다 붙이며 혼동시키는 경우가 흔하지요.
신자 모두가 기본적으로 하게 돼 있는 방언은 9 은사의 기초와 관문, 견인차 내지 자석 역할을 합니다. 이 사실은 행전 2장, 8-11장, 19장 등에 나타난 초기 방언 사건들을 통해 명백히 입증됩니다. 성령침례를 받은 성도들은 반드시 방언부터 했다는 사실이지요. [예언을 하게 된 케이스도 방언을 먼저 하게 된 경우입니다.]
이 점에서 초기 방언 자체는 9 은사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파울 계시에서 자명해집니다.
하나님께 내 영이 비밀을 아뢰면서 성령님의 뜻에 따라 내 몫의 은사를 간구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 원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신학이론에 따라 한사코 그렇지 않다며 다양한 억지 주장을 폅니다만 선입견과 편견에 불과하며.. 별 귀 담아 들을 가치가 없는 주장들이지요.
이제 9 은사를 성격에 따라 3 그룹으로 분류해 봅니다. (이 분류는 절대화/교리화 할 성격은 물론 아닙니다.)
1. 언변 은사 그룹: 각종 방언, 방언통역, 예언
2. 권능 은사 그룹: 신유, 믿음, 능력
3. 계시 은사 그룹: 영들에 대한 분별,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이 은사들은 공동체를 위해 성령님의 뜻에 따라 내려 주시는 초자연적 선물들입니다.
온 몸의 각 부분, 지체들이 제각기 고유한 역할을 감당하듯 우리 각 자는 각 자의 고유한 초자연 은사들이 성령님의 뜻에 의하여 안배되고 배정돼 있어 분여받게 됩니다.
각 신자는 그것을 찾아 내어 활용해야 합니다.
여기서 알아 둘 또 다른 전제가 대두됩니다.
방언의 경우처럼, 9은사 중 방언 통역, 예언, 신유, 믿음, 권능 등도 모든 신도가 할 수 있는 것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파울 계시에 따르면, 분명히 개인기도 즉 자신을 위한 방언 통역(코A 12:10끝,30, 14:5b, 13-15)과 공동체를 위한 방언 통역(14:26-28)이 따로 있습니다.
예언도 마찬가지입니다. 파울은 모든 신자가 예언하기를 바랐고(14:1,24,39) 모든 성도가 비신자들 앞에서 예언으로 교회의 믿음 세우기, 건덕에 기여할 수 있다면서도 따로 대언은사자, 대언자로 택한 사람이 있다(12:10,28,29, 14:29)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유도 모든 신자가 병을 고침 받거나 맑 16:18에 의해 치유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신유은사', 그 사람이 '신유은사자'라곤 할 수 없습니다. 신유은사는 성령님의 뜻에 따라 특별히 고르신 특정인 곧 신유은사자에 한해 내리시는 은사의 하나로, 주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성령께서 이끄시는 때에 나타납니다(12:9끝, 28,30a).
아울러 사도 야코보가 명기한 바, 장로들의 기름부음을 통한 신유의 경우도, 그렇다 해서 곧 장로들을 모두 신유은사자라곤 할 수 없습니다(얔 5:14-16).
믿음도 모든 신자가 지니고 있거나 지닐 수 있는 믿음 외에도 특정인에게 은사로 주어지는 특별하고 강한 믿음이 따로 있습니다. 대단한 큰 믿음이지요. 믿음은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부터 "여인, 그대 믿음이 크오!"라고 칭찬 받는 큰 믿음까지 '싸이즈'가 다양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성령의 은사로서의 믿음이 따로 있습니다. 믿는다고 해서 누구나 다 '믿음은사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권능도 그렇습니다.
맑 16:17-18, 행전 1:8 등 성구에 따르면 신자는 누구나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 개인을 권능은사자(코A 12:10a,28,29)로 성령께서 택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계시은사들(코린토A 12:8, 10가운데,14:26,30 참조)
계시은사들 중 '영들에 대한 분별'(코A 12:10)은 모든 성도가 기본적으로 지닌 영적 판단력, 분별력(코A 2:13-15)과는 다릅니다.
'영들에 대한 분별'은 성령님의 권능에 의해 실제로 영안 곧 영의 눈이 열려 선한 영들과 악한 영들의 모습을 모니터처럼 또렷이 헤아리고 볼 수 있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대언자 엘리샤가 살던 도단 성을 포위한 아람 적군들을 무서워하던 사환의 영안이 열려 그 주위를 둘러싼 하늘 군대를 보게 된 경우와 같습니다(왕들B=왕하 6:15-17). 이 역시 성령님이 택하신 특정 신자를 통해 성령님이 정하시고 역사하시는 시간에 작동합니다. 개인이 자기 뜻대로 욕심대로, 맘대로 할 수 있는 기능이 아닙니다.
반면 성도의 분별력은 어느 때고 맘대로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지식의 말씀'(코A 12:8b)이란, 세상 지식이나 상식, 신학적 지식, 성경지식 등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성령님이 영안을 열어 보여 주시는 영적 정보에 더 가까운 말입니다. 성경공부나 설교를 통해 획득되는 게 아니라, 성령님이 택하신 특정인에게 내리시는 은사의 하나로, 과거/현재의 영역을 알리는 특수 계시의 지식이며 역사와 다름 없이 발생된 실제 사실에 대한 초자연적 깨달음입니다. 이 역시 영의 모니터가 열려 환히 볼 수 있거나 하나의 지식 형태로서 전달됩니다.
지혜의 말씀은 지식의 말씀과 일부의 속성을 공유하며, 계시은사 그룹 중 가장 고차원적인 것으로서 이 역시 영안으로 미래에 일어날 일을 모니터처럼 훤히 내다 보게 되는 계시로서 나타납니다. 가령 사도 파울의 예루샬렘 체포 사건을 미리 내다보고 예언으로 알려 준 아가부스의 경우도 해당하지요(행전 21:10,11. 예언도 곁들여짐). 또 구약대언자 다니엘이 미래를 내다 본 계시나 신약의 사도 요한이 본 요한계시록 내용의 대 부분이 이 은사로써 가능했습니다.
흔히 구/신약 대언자들에게서 영들에 대한 분별,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등이 예언과 함께 동시에 또는 비슷한 때 나타난 경우가 잦습니다.
성도는 사랑 안에서 "더 큰(나은/높은) 은사"를 추구해야 하는데(코A 12:31, 14:1b), 각 은사그룹 가운데 또는 전체적으로 더 나은 차원의 것을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등급이 있는 것은 아니며 낮게 보인다고 해서 깔보거나 무시하거나 간과하거나 경원할 수 없습니다. 방언이 차원이 낮아 보여도 교회엔 매우 긴요한 것입니다. 우리 몸의 어떤 지체도 버리거나 잘라낼 것이 없이 소중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12:14-27 참조).
물론 모든 은사는 성령님의 뜻에 따라서만 내 몫의 것이지, 내가 특정은사를 탐한다고 해서 다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파울은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라고 우리에게 훈계합니다(12:1, 31, 14:1).
우리는 기본적으로 방언을 하려고 흠모하고 애쓰는 게 마땅합니다.
아울러 통역도, 예언도 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거기에다 내 몫으로 주어진 다른, 더 좋은 은사들도 사모하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초기교회 신자들처럼 방언으로부터 방언통역, 예언으로 발전적, 전진적으로 은사를 누리면서 동시에 공동체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여해야 바람직합니다.
이런 필수적인 방언과 은사를 우리가 간과하고 무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성령님이 맺게 하시는 우리 영의 아홉 열매의 하나이며 아울러 가장 높은 차원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것을 구하고 찾아 누리되 사랑 안에서 해야 합니다.
다름 아닌 성령님 자신께서 우리가 이런 선물들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우리 공동체가 이런 선물로 차고 넘쳐 풍요롭기를 바라십니다.
성령님의 이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되길~!
방언과 방언통역, 예언과 다양한 은사를 누리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티엘티 형제 자매들이기를 기도하며 간곡히 희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