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독자의 지난 칼럼들/뉴하우스의 돌보며걸으며

아름다움과 추악함 (뉴하우스)

김삼 2008. 11. 18. 04:17




뉴하우스의 돌보며 걸으며

개천 밑바닥이 보일 정도로 깨끗해 뵈는 투명한 물도 아니고, 이끼 낀 푸르스름한 물도 아니다.
두 손을 모아 한 웅큼 떠 올리면, 단단하고 매끄러운 돌을 손에 쥔듯 착각하게 만드는 독특한 색깔의 물.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내겐 없다. 비슷하게나마 묘사한다면, 옥으로 만든 모든 것을 연상시키고도 남는다. 여기저기 타운을 가로지르며 흘러 넘칠 듯한 거센 물살의 이 옥색 개울물을 독일 바이에른(바바리아) 알프스 지방에서 처음 만났다.

이 물빛이 이처럼 특이한 까닭을 주민에게 들어본 즉,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오염이 안돼 깨끗하면 할수록 이런 색에 가깝단다. 어떤 이는 개천에 흐르는 이 물은 그냥 마셔도 된다고 장담도 한다. 길로 금방 튀어 나올 듯한 기세의 물살만큼이나 튀는 색깔의 이 옥색 물이 어째 주변 환경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선지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는 이 강렬한 색의 물에 압도 당해 기억조차 남아있지 않다. 

화려하고 신기한 물빛에 매료돼 눈을 떼지 못할 동안, 우리를 태운 버스는 어느새 산 정상인 오버잘츠베르크(Obersalzberg)에 올라 우리를 내려 놓는다. 마주 보이는 또 하나의 산, 운터스베르크(Untersberg)와 서로 어우러져 사방이 장관을 이룬다.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절경의 극치를 내 눈이 누리는 호사와 더불어 가슴도 들뜨기 시작한다. 오랜 도시생활에다 뭐 하나 눈에 걸리는 게 없는 무미건조한 황량한 벌판에서 살던 세월 동안 어딘가에 그냥 파묻혀 버려 덤덤해진 내 가슴 속에 감성이 되살아나 나를 자극한다.

이 진정한 '코닥 모먼트'(Kodak Moment)에 내 영혼마저도 꿈틀거리며 반응한다. 창조주와 피조물, 무한함과 유한함, 눈에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사이에서 내 영혼이 자연스럽게 이 아름답고 웅대한 진풍경을 지으신 하나님을 찾고 갈망한다. 인간의 창작품이 아님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분의 솜씨와 위대하심에 순간적으로 숙연해진다. 육안으로는 안 보이나 믿음의 눈에는 보이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볼 수 있음에 감격하는 순간이다.

이 산 정상에는 창문마다 놓인 아기자기한 꽃 상자들이 눈을 끄는 춤 튀르켄(zum Turken)이라는 그림 같은 펜션 겸 호텔이 자리 잡고 있다. 거기 하루만이라도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 일행 뿐 아니라 모든 관광객은 이 호텔에 머무르면서 발코니에 서서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낭만을 꿈꾸기 보다 잔학무도한 역사의 흔적을 보기 위해 몰려 온다는 게 참 아이로니컬하다.

호텔 춤 튀르켄

물도 오염이 안 되고 공기마저도 신선한 이곳 아름다운 바바리아의 알프스에서 산과 산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는 그 아름다움에 나는 가슴이 탁 틔고 어딘가에 옮겨 담고 싶은 충동과 더불어 내 영혼마저도 민감하게 반응하였는데.

반면 그 어떤 사나이는l 바로 이 장소에서 오래 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인류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망상 속에 있었다 생각하니, 진정한 모순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만물 가운데 분명히 보여, 그 누구도 하나님을 모른다는 핑계를 할 수 없다는 말씀이 그날따라 크게 마음에 와 닿았다. 

그는 오버잘츠부르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터에 자리한 자기 집에서 그가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한 사람인 리햐르트 바그너의 음악에 심취하고 내가 바라본 똑 같은 산들의 절경을 바라보며, 유대인과 소위 그의 눈에 "온당치 못한 부류"를 몰살하고 독일의 "새로운" 모습을 꿈꾸며 “나의 투쟁(Mein Kampf)”의 저술을 계속해 나간다. 

이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다카우 강제 수용소에는 춤 튀르켄의 주인인 슈스터 씨가 끌려 왔다. 그의 집을 노크하며 들어선 히틀러의 직속부하, 보어만이 호텔을 팔라고 강요해도 끝끝내 나치군에 저항하다 결국은 이곳 강제 수용소에 감금됐다. 그러나 저항이 한계에 달해 허무하게도 애지중지하던 아름다운 호텔을 이들에게 넘겨져 SS들의 요처로 쓰이게 되고 그들 만행의 본부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나치에 저항한 것 때문에 바바리아 알프스 뿐 아니라 독일의 자존심 역할을 하고 있다. 

호텔 안에는 매표소가 있다. 호텔의 일부라기엔 너무 어울리지 않는 방공호(bunker)에 들어갈 표를 파는 곳이다. 매표원은 바로 슈스터의 손녀딸 잉그리드 샤르펜버그(Ingrid Scharfenberg). 전쟁 직후,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아군의 기습공격으로 폐허화된 호텔을 되찾아 복구하여 지금에 이른다. 당시 돌아와 보니 호텔 땅 아래 어마어마한 땅굴이 파이고 미로의 방공호가 들어섰다. "히틀러의 벙커"라고 불리는 곳이다.



일행이 어둠침침한 긴 타널로 진입하자 그 초입에 보초가 망을 보는 초소와 기관단총을 걸치는 스테이션이 있었다. 그곳을 지나 층계를 내려가고 감옥을 지나니 점점 더 음침해진다. 벽에 탄환 구멍이 여기저기 보이고 히틀러를 치하하는 낙서도 눈에 뜨인다.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했으리라는 것쯤 짐작할 테지만, 미군들이 내려갈긴 듯한 욕지거리도 있다. 관광객에겐 더 허용되지 않는 금지구역까지 다가갔다. 히틀러의 개인 처소가 있다는 곳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방공호는 끝이었다. 

이곳은 사람이 말을 하고 싶게끔 만드는 곳이 아니다. 그 적막함이란...! 걷는 발소리에마저도 신경이 쓰일 정도다. 이곳을 지키며 들락날락하던 이들은 이젠 더 없지만 그들이 저지른 만행에서 뿜어 나던 인간의 죄악성과 악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 하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자기 집 근처 땅 아래 석회암을 파 어마어마한 미로를 만들고 그곳에 숨을 피난처를 만들었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이 방공호도 그를 끝내 보호하지 못했고 그의 영원한 안식처가 돼 주진 못했다. 

인간의 잔인한 죄악성의 흔적이 마음에 걸렸다. 어둠침침 하고 찬 기운이 도는 분위기뿐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악의 잔류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졌다. 책 속에서만 알던 지난날의 사건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내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이 왠지 씁쓸했다. 

서둘러 밖에 나오니 다시 보는 햇살이 반갑다. 잠시나마 나를 우울하게 만든 마음의 어둠도 물러 간 듯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에 다시 한 번 맘과 눈을 빼앗긴다. 

춤 튀르켄에 머물며 차를 마시고 오버잘츠베르크와 운터스베르크의 절경에 심취하여 피서를 즐기던 작곡가 요하네스 브라암스, 로베르트 슈만, 바바리아 왕과 그 자녀, 그리고 프러시아의 공주들이 있었는가 하면 이렇게
파괴하고 살인하며 인종차별 내지는 특정 부류를 이 지구상에서 몰살하는 범죄를 위해 이곳에 머무른 자들도 있었다. 오버잘츠베르크가 그 아름다운 자태를 히틀러와 그를 부하들에게 앗기고 난 후 그 명성을 되찾으려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애를 썼다. 그런 노력의 흔적이 여실해도, 아직 남아있는 거대한 방공호와 악의 흔적이 이곳을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려 주거나 옛 명성은 되찾긴 어려워 보인다.   

이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악명 높은 다카우 강제 수용소가 있다. 슈스터는 춤 튀르켄을 나치에게 뺏기고 풀려나지만, 수도 없는 무고한 유대인 시민과 저항하던 시민들은 철조망이 쳐진 수용소 안에서 갖은 고문과 매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다 숨져 갔다. 슈스터도 아마 앞뒤 좌우 옆에서 죽어 나가는 이들을 보며 여기저기 널려있는 시체를 볼 때 애지중지하던 호텔을 안 넘겨 줄 수 없었으리라. 자유와 권한을 상실한 지 오래임을 깨달아 그도 포기한다. 

이곳 기숙사엔 남자 어른이 다리를 펴고 눕기에는 짧고 비좁아 보이는 이층 침대가 늘어 서 있다. 화장실 안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변기의 모습은 굴욕감을 준다. 목욕하라고 불러 들인 후 물 대신 독가스를 퍼 넣었던 방은 어둑컴컴하다. 바닥과 천장의 콘크리트가 차갑게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천장에 눈이 간다. 지금이라도 눈에 안 보이고 냄새도 안 나는 독가스가 스며나올 것 같아 조바심 친다. 말로만 듣던 크리미토리움(화장터)도 버젓이 남아 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과오를 저지르지 않게 상기시키려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이라지만, 그냥 곧장 돌아 나오고 싶은 곳이다. 기념관 벽을 장식한 사진들은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일으킨다. 인간이 이렇게 악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죽은 영혼이 저지를 수 있는 죄의 사악함이 섬뜩하다.

독일에 가장 먼저 세워졌다는 이곳은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죽어간 곳. 코리 텐 붐의 이야기와 그간 읽고 들은 대학살(Holocaust)의 이야기가 어디론가 잊힌 채 잠재해 있다가 기억의 분수대 위로 뿜어져 나온다. '신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의 장면도 뇌리에 스쳐 간다. 차라리 영화였더라면…, 차라리 픽션이라면…  

돌아 나오는 발걸음도 무겁고 식욕도 돌지 않는다. 담 위의 철조망과 높은 초소가 왜 그렇게 낯 익은지… 아마도 영화와 사진에서 보던 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면서 경악하는 반응인가 보다. 

"그래도 슈스터 씨는 행운아다"란 생각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가진 재산 뿐 아니라 가족도 생명도 다 포기해야 했던 것에 비하면 그는 춤 투르켄만 포기하면 됐으니 그럴 수밖에. 그의 저항이 헛되지 않아 그의 호텔은 아직도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을 알리는 역할을 한 몫 하니 다행이다.

버스에 몸을 싣고 하산하는 길에 다시 만나는 옥색 물을 보며 또 한번 생각에 잠긴다. 물의 근원인 알프스 산에 가까워 여느 계곡이나 개천에 흐르는 물과 달리 오염이 덜 되었나 보다. 옥색에 가까운 이 파르스름한 물색이 원래 순수한 물의 색이라면, 세상 것과 죄로 오염되지 않은 사람의 모습은 어떤 색을 발할까? 잠시 궁금해진다.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으로 내 마음이 세속적인 데 오염되지 않게 지킬 것인가 라는 생각이 나를 재촉한다.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내 속에 자리를 펴고 눕기 전에
욕심이 잉태하여 자라기 전에
내 생각과 가치관, 나의 행동거지가 세상에 속한 이와 별다름 없어 그리스도의 향기와 색이 없는 빈 껍데기임을
세상에 속한 이들이 먼저 알아보기 전에
무기력하고 무미건조한 삶이 되기 전에

말씀이 생동력 있어 내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내 심령 골수를 쪼개는 능력 있는 말씀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절실하다. 

바바리아의 알프스도 아름답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더 아름답다. 이런 사람의 색깔 또한 세상의 언어가 묘사하지 못한다. 이름도 없는 색이지만 누가 봐도 아름다운 색이다. 보고 또 보고 싶고 기억하고 싶은 색깔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사람의 아름다운 색깔을 상상해 보며 그날 받은 충격에서 헤어나려 애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