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민의 식탁 (Neuhaus)
이사와 적응.
적응하면 또 이사.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사는 우리 가족에겐 ‘적응’은 옵션이 아니다.
컴퓨터에 내장된 소프트웨어처럼 내가 가는 새로운 곳마다 거의 본능적으로 작동한다. 처음부터 기능이 최상급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많이 업그레이드 된 것만은 사실이다.
새로운 곳에 대한 궁금증과 흥분, 그리고 꿈꾸는 시기를 매번 잠시나마 거쳐 가긴 한다. 그러나 현실은 항상 먼저 해야 할 일의 순서를 어김없이 보여준다. 나는 짐을 받고 풀 준비가 안 되었어도, 이삿짐은 들이닥친다. 바로바로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는 것도 나의 몫이다. 직업의 특성상, 우리는 빨리 주변을 파악하고 이미 살고 있는 사람 속에 동화되고 묻혀야 한다. 더는 새 얼굴이 아닐 때 비로소 우리는 편해지기 때문이다.
미국 전역이 찜통이 되어도 이 지역은 선선하다. 햇빛 찬란한 날보다는 흐린 날이, 자욱하게 낀 안개가 바다를 삼키는 날이 더 많다. 완전히 걷히지 않은 안개는 어정쩡 나무와 하늘 사이에 걸려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날에는, 나도 잠시 머무는 관광객처럼 감상과 낭만에 젖어 머뭇거리기도 하련만, 나는 무시하고 만다. 이제 나는 이곳 주민이다. 이른 아침 운전하는 남편과 아들의 안전 운전에 신경을 쓰고 안개가 그린 명화는 덤덤하게 바라본다.
삼면이 바다고 지척이라 발이라도 담글 줄 알았다. 하지만 차가운 물의 온도 때문에 바라만 봐야 한단다. 식구들 아침 먹여 보내고 나면 벽난로를 켜고 집 안의 싸늘한 공기와 차가운 내 손을 녹인다. 이 한여름에.
물을 좋아하는 남편은 극심한 기온의 차이가 없는 이곳이 좋은가 보다. 처음으로 서핑을 한 아들은 캘리포니아 매력에 푹 빠진다. 내가 겪어본 타 주민 보다는 보편적으로 좀 더 느긋하고 여유 있어 보이는 이곳 주민. 좀 더 친절하고 차선 양보도 잘 하는 이들 때문에 성질 나는 일의 건수도 훨씬 적어서일까, 나 역시 함께 느긋해진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 좋아할 만한 요소를 발견하고 새로운 환경에 동화하고 적응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에 초 스피드로 갈등 없이 자동으로 스위치를 켜듯 적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사람이고 만남이다. 유유상종하게 마련인 인간의 기질을 거슬러야 하는 상황은 항상 어렵다. 적응도 더디다. 이질감이 크면 아무도 밀어내는 사람 없어도 저절로 용수철 튕기듯 어딘가로 튕겨버리고 만다. 좀 더 참고 시간을 두고 인내하다 보면 나와 맞는 구석이 있는 사람을 만나는 엄청난 축복은 가끔 있다. 이 확률과 우연이 아닌 인연에 기대를 거는 적응은 더디다. 조바심을 낼 일은 아니다. 어차피 시간이 걸리는 일이기에.
지금까지 여느 직무와는 달리 새 임지에서 채플을 담당하게 된 남편 덕에 채플 식구들과의 어울림은 나의 선택 여지가 없는 일의 연장이자 자연히 남편을 후원하고 돕는 일이 되었다.
캘리포니아 주. 놀 것 볼 것 할 것 많은 자유스러운 곳. 진보 사상이 최첨단을 걷는 곳. 주일 아침 신교 예배를 드리는 채플은 텅텅 빈 것은 아닌지. 처음 예배하러 가던 날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은 놀랄 준비를 한다.
놀랄 준비를 한 덕택인지, 일단 상상 외로 제법 가득 찬 채플을 보니 나의 반응 게이지가 폭발적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대신, 얼마 안 있어 예배에 참석한 연령층이 대부분 노인임을 깨닫는 순간 잠시 모든 생각과 감정이 멈추는 것 같다.
가끔 나도 모르는 나의 고정관념이 불쑥 나를 놀라게 한다. 젊은이들이 황금 같은 주말에 바다로 들로 놀러다니는 동안, 고령의 은퇴한 군인과 이들의 남은 가족들이 이 채플을 몇 십 년째 묵묵히 지키는 이 현상. 너무 당연한 모습인데,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추정하고 있었는지.
아니다. 내 속의 ‘적응 소프트웨어’가 버걱거리는 현상이다. 이들 노인과의 첫 만남부터 내가 느끼는 이질감과 좁혀질 거 같지 않은 거리감에 잠시 당황하는 것이다.
캐주얼한 대신 정장 차림. 허물 없이 대하기보다는 깍듯이 예의를 차리는 이들 노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일까. 아니면 철저히 내 관점과 입장에서만 보고 반응하기에 생기는 모난 시각의 소산물일까.
이들이 의지하고 걷는 워커와 곱게 빗어 넘긴 백발이 나와는 상관 없다고 스스로 벽을 쌓는 오만함일까. 혹은 나와 이들을 연결할 만한 공동 관심사가 없으리라고 추정 추측 단정하는 나의 경솔함인지.
노인들의 행동이 굼뜨고 말도 느리고 말에 힘도 없고 발음도 또렷하지 못하다. 아직도 파릇파릇하다고 자부하는 나의 청춘은 잘 보이는데, 이들의 청춘은 다 소모되고 소진되어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거리를 두는 것일까.
실은 이도 저도 아닐 수도 있다.
이들 고령자의 모습은 곧 내게 다가올 나의 모습이다. 후다닥 지나가는 세월과 날아가는 젊음을 잊고 사는 나에게 이들 노인, 그것도 노인의 군집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의 미래와 나이 먹음, 노화를 상기시킨다. 오히려 무의식적으로나마 앞으로 다가올 현실을 부인하면서 생긴, 실제로 존재하기보다는 내가 만들어 낸 인위적이고 공상적인 이질감과 거리감인지도 모른다.
‘노후 준비’라는 말을 요즘에 와서 꽤 흔하게 사용한다. 노인이 되어 수입이 없을 때를 대비해 젊어서부터 저축하고 준비하는 생활 태도는 신중한 삶의 모습이다. 노년에도 사회와 자녀에 의존하기보다는 독립적이고 자급자족하는 삶을 일구어 나가는 삶의 태도라면 진정한 노후 준비는 사회생활 첫발을 내디면서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강하게 불어대는 경제적인 노후 준비의 중요성과 다급함이 실은 우리의 영적 노후준비에도 적용이 필요하고 가능하다.
모세는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노인 모세가 의미하는 지혜로운 마음이 이 땅에서의 물질 관리만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의 날을 계수한다 함은 우리의 삶도 끝이 있음을. 인생 여정의 그 마감 기한이 있음을 알자는 것 아닌가.
아무리 수시로 죽음을 목격하면서 살지만, 죽음이 나만은 비켜가는 것처럼, 영원히 살 것 같이 착각하며 사는 우매함이 우리 속에는 늘 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하나님 앞에 티끌인 인생. 천 년이 지나간 어제와 밤의 한순간인 하나님 앞에 아침에 피어서 저녁에는 시드는 풀 같은 존재. 주의 목전에 낱낱이 드러나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슬픈 존재임을 아는 지혜가 없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하나님께 고백하는 모세의 심정은 왠지 모르게 시급하고 다급해 보인다. 사실 모세도 알고 나도 아는 우리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예배가 끝나고 친교실에서 이 노인 성도들은 자신들의 테이블을 ‘ancient citizen’s table’(옛 시민의 식탁)이라고 나에게 소개한다. 이 분들은 주로 앉을 수 밖에 없다. 무릎도 다리도 죄다 성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여름이라 자녀가 다니러 오면 할머니의 터키와 드레싱을 좋아하는 손자들을 위해 유월과 칠월에 터키를 굽는 할머니 성도가 일찍 집에 가신다. 무릎 수술에 이어 고관절 수술을 위해 기도 부탁하는 할아버지가 지팡이에 의존하여 걷는다. 하지만 나는 내게 건네준 그의 명함을 들여다보면서 한때 젊고 원기 생생하던 그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는 한때 수하에 수만 명의 군인을 지휘하던 고급장교 출신이다.
치매 남편은 집에 두고 혼자 예배보러 오는 독일 액센트가 강한 할머니는 찬양팀으로 선다. 먼저 하늘나라 간 아내가 아직 자기 가슴 속에 있다고 말하는 할아버지는 영생에 관한 설교를 듣고 천국에서 할머니 만날 생각에 들뜨신다.
설교 시간에 아무도 몸을 비비 꼬는 사람 없이 더 듣고 싶어하는 모습을 봤느냐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통찰력과 지각이 뛰어난 80세 할아버지는 아직도 주일 날 봉사를 한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 배우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남편과 내가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이라며 좋아한다. 젊었을 적 한국전 참전과 한국 근무 시절을 상세하게 기억하는 할아버지들의 자랑스러운 군 복무 이야기도 계속된다.
나는 매주 이렇게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들을 알아가고 다가간다.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이질감을 줄이고 거리를 좁히는 방법.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젊은이는 차고 넘치는 에너지 때문에 그들 특유의 변덕 때문에 한 곳에 지긋이 머무르지 않지만, 무덤덤하게 티 나지 않게 자신의 자리를 될 수 있으면 지키는 노인들이 주는 안정감은 마치 어린아이가 언제고 부르고 찾으면 있는 엄마의 자리와도 같다.
그래서인지, 주일마다 보는 이 ‘옛 시민’의 얼굴이 얼마나 반가운 얼굴들인지 아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타 치며 방방 뛰는 젊은이가 인도하는 음악은 따라가기 어렵다는 노인의 푸념에 내가 느끼던 거리감은 조금씩 좁혀든다. 수시로 새로운 요즘 현대 음악을 소개받는 것보다는 이미 아는 찬양을 편안해 하는 이들과 공감하면서 나와 별다르지 않음을 본다. 그러고 보니, 기타보다는 오르간 반주를 좋아하는 노인들과 이질감보다는 동질감을, 빠른 템포 음악을 선호하는 젊은이의 취향을 견디면서 이들 나름의 이질감을 극복하는 노인들과 나는 어느새 동병상련하고 있다.
집에 가서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은 젊은 층과는 달리 이들은 가장 늦게까지 친교실에 남아 담화를 한다. 매 주일 이들과의 만남과 대화 속에서 세월과 더불어 흘러가고 없다고 추정한 이들의 청춘을 보기 시작한다.
수 차례 다시 장만하고 싶었던 낡고 오래된 내 성경책 여기저기에 긁적거린 노트 중. 무관심 속에 잊힌 “aging’에 대한 구절들이 펄떡 페이지에서 튀어 올라와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들 ‘고대시민’과 교제하는 탓일 것이다.
늙는다는 것이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더는 일할 수 없는 나이가 되면서 수입도 줄고 기력도 줄고 병도 든다. 몸도 마음도 연약해지면서 생기는 노인의 불안과 두려움 소외감 외로움은 노인의 삶의 단면이다. 사회 정치적으로는 의료 혜택비가 많이 든다고 “시한부 환자 노인들은 죽을 의무가 있다.”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는 정치인의 발언만 보아도 고령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는 긍정적이지 않다. 너무도 쉽게 ‘쓸모없는’ 연령층으로 간주한다.
어느 시편 기자는”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라는 애원과 기도를 하나님께 한다. 버리고 떠나는 것은 인생들이 하는 짓이 것만, 기력이 예전 같지 않은 노인이 되면 행여나 하나님도 사람처럼 ‘쓸모없어진’ 노인을 버리고 떠나시기라도 하는 듯 불안해하는 것이 노년의 특성인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시편 전체를 읽으면 어떠한 불안과 노년의 특성이 엄습 할지라도 연로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신뢰하기를 멈추지 않음을 본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산 긴 세월 동안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겪게 하셨더라도 다시 살리심을 믿는 시편 어느 노인의 고백.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라는 담대한 믿음의 고백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온 오랜 믿음의 연륜이 없이는 가능한 기도와 고백이 아니다. 늙고 쇠약한 모습과는 달리 이들의 내면은 강하고 확신이 차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며,” 이 땅에서 사모할 이가 하나님밖에 없음”을 어느 노인은 말한다. 허물어져 가는 육신의 장막. 기한이 다한 이 땅의 삶을 넘어 하나님을 의지하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노인의 신앙. 쇠약함과 강인함이,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이 공존한다. 하지만,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의 차이를 알고 가치를 달리 두는 현명하고 성숙한 신앙. 그는 노인이다.
어려서부터 주의 교훈으로 가르침을 받으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온 긴 세월. 이 세월은 자신의 의와 한 일은 다 잊은 듯 추억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은혜만 보인다. 그렇기에 다음 세대에게 자신이 신뢰한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전하기까지 지켜주시길 소원하는 시편 노인의 기도는 생소한 것인가. 자신을 들어내기를 즐기고 이 땅의 것에만 치중하고 나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이 시대 정서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생소하다.
얼마만큼이면 되는지. 충분함과 충족의 선을 과감히 긋지 못하는 현대인은 무조건 많이 더 많이 모으는 것이 부와 성공이며 노후대책이다. 욕심과 탐욕이 성공전략이다. 영적 노후 준비에는 속수무책이고, 사후보장도 없이 가져가지도 못하는 땅의 것에 올인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임을 상기시키는 것은 아닌지. 그 수고와 자랑도 알고 보면 슬픔이고. 영원히 살 것 같지만, 신속히 가버린 세월과 우리를 날라가게 한 세월과 가버린 젊음 앞에서 우리는 어이 없어 하지 않는가.
주님과의 오랜 교제로 확고해진 이만이 감히 소리 낼 수 있는 심장의 고백들. 오랜 세월 동안 다사다난한 삶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하길 멈추지 않았기에 말씀에 의해 다듬어지고 하나님의 손에 단련된 삶에서 감출 길 없이 터져 나오는 영혼의 외침을 듣는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은 이 아름다운 노인. 세월과 더불어 땅에 것에서 마음이 멀어져 간다. 대신 이 세월 동안 같이하신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 믿음. 땅에 것과 영원한 것. 쇠하는 육신과 영의 것을 혼동하지 않고 정확히 분리 정리하여 붙들 것을 붙드는 성숙한 노년의 단계. 나도 이렇게 준비되어 가고 싶다. 나도 영혼에서 소리가 나는 늙은이가 되고 싶어진다.
새로운 곳에서 나의 적응에 잠시 변수를 던진 ‘고대 시민’과의 만남이 한동안 나를 행복하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