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묵상연구/요한복음묵상

독생자의 영광 (요한복음묵상5)

김삼 2008. 2. 29. 08:56

                 예수님이 일시 영광 가운데 변화하신 곳으로 추정되는 타보르 산.
                 나자렡 가까이에 있다.

그분의 영광을 보니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봤더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고 은총과 진리가 가득했다." (요복 1:14b. 사역)

한 가지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 사도 요한은 여기 14절에서 1인칭 복수 대명사 '우리'를 씁니다. 한 절 건너 16절에도 나오지요.
여기서 '우리'는 미묘한 대명사입니다. 14a(전반절)에서는 성육신한 임마누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고 했으니 하나님이 세상에 내려 오셨다는 의미에서 '우리'에는 온 인류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소 광역적인 '우리'입니다. 물론 믿는 사람들도 내포되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 영광을 봤더니"라 했는데 '우리'는 누구일까요? 예. 믿는 사람들에 더 가깝습니다. 세상은 그 분을 알지 못했기에(1:10b) 그분의 영광도 알아 보지 못했다고 해야지요.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 후반절의 '우리'는 사도 요한을 포함한 거듭난 사람들, 예수 크리스토를 믿고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특히 예수 크리스토를 직접 본 증인들인 사도/성경기자들을 뜻합니다.

본 절에서부터 나타나는 '영광'(그리스어 '돟ㅋ사')이라는 낱말도 본 1장에서 사도 요한이 내 놓은 중요한 키워드의 하나입니다. 1장에선 이 14절에만 나오지요. 그러다가 나중 2:11과 연결고리를 이룹니다. 거기도 '영광'이란 말을 썼지요.

예수님은 하늘에서 성삼위일체의 한 신격으로서, 동시에 성자님으로서 큰 영광을 누리셨지만 땅에서도 성자님으로서의 영광-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드러 내셨습니다. 영광에 대해서는 아래서 다시 다루렵니다.

독생자

요한이 성자님에 대하여 쓰는 독특한 용어가 '독생자'(the only begotten Son, '모노게네스') 입니다. 본 절에서도 18b에 다시 같은 개념이 되풀이 되지만..(우리가 주일학교 때 부터 외던) 저 유명한 3:16, 그리고 이어진 18절에도 나옵니다. 또 같은 저자의 서신인 요한서신서A(=요일) 4:9에도 나오지요.

'모노스'(홀로/단독/외딴)+게네스(태어남)의 합성어인 '모노게네스'의 용례를 보면, 거의 다 성자님 이외의 일반인들에게 외아들/외딸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 중에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짜크도 포함돼 있지요. 사실 아브라함의 씨로 태어난 소생은 많았습니다. 일찍이 첩 하가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짜크의 이복 형) 이슈마엘 말고도 훗날 아내 사라가 죽고 나서 후처 케투라에게서 최소 아들만 여섯을 낳아 모두 풍족한 재물을 주어 다 동방으로 보냈지요(창 25:1~4).
모르지요 - 혹 그 후손들 가운데서 나중 예수님 탄생 때 동방에서 온 현인들도 있었는지.

그런데 하나님은 오직 아브라함/사라의 소생 이짜크를 아브라함의 외아들로 여기셨습니다(창 21:12, 갈라티아 4:30).
이 이짜크는 strikingly(!) 예수님의 그림자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제물로 바쳐질 뻔 한 데다 하나님이 제물과 다름 없이 받으셨고 그 자리가 모리아 산, 즉 훗날의 성전터가 되지요. 아브라함은 야웨 이레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몸소 준비하시리라고 예언했고 하나님은 과연 아브라함의 제사를 위한 수양을 미리 마련해 놓으실 뿐더러 어린양 예수 크리스토를 장차 예루살렘 부근 골고타에서 세상 죄를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예비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외아들이란 말은 하나님께 너무나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며..그만큼 사랑하셨다는 뜻이고 그렇게 소중한 존재를 인간을 위해 아낌 없이 주셨다는 말입니다(요복 3:16 참조).

성경은 어느 모로 보든 성부님이 온 인류를 위해 성자님을 죽게 하시려고 세상에 보내셨다고 밝힙니다(이사야 53:6,10 참조. 코린토B 5:21). 이것을 진보주의 신학자들은 '도살신학'(slaughter-shop theology), '백정신학'(butcher theology) 등등 별별 용어를 써 가며 모독하지만, 예..정말/과연 주님은 도살장에 끌려 가는 양처럼 그렇게 우리를 위해 죽어 가셨지요(이사야 53:7).
바로 그런 주장을 하는 진보주의자들을 위해서도 그분은 도살되셨습니다!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하나뿐인 소중한 아드님을 죽도록 내 버려 두셔야 했던 이 하나님의 심경을 진보주의자들이 조금치라도 알아 준다면!

영광!

성경엔 '영광'이라는 말이 숱하게 나옵니다. 옛말로는 '광영'이라고도 했죠. 언뜻 추상적 개념이기도 하고 오해도 많기에 꼭 다뤄야 할 소재이지요. 사실 성경의 영광은 우리 생각보다는 훨씬 영적, 구체적, 복합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대인 관계 속에서 쓰는 영광(예: 요복 12:43)과는 퍽 다른 개념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히브리어 '카보드'를 비롯, 20 여 용어가 영광의 뜻으로 쓰입니다. 신약에서는 주로 그리스어, '돟ㅋ사'(doxa)로 불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흔히 그 분의 존재/임재/현현과 직결됩니다. 영광은 초자연적으로 비치는 환한 빛과도 연계되지만, 가령 흔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내릴 때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출 16:7). 하나님 임재와 보좌의 영광은 '쉐키나'(shekinah, 영어발음 '쉬카이너')라고도 불리지요.

아담/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직접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에놐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그대로 하늘로 들림 받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따금 하나님을 뵙곤 했습니다. 구약 때 인간들 앞에서 성삼위 하나님을 대리하신 성자님을 뵌 것입니다. 이 점을 본서 기자 요한이 밝히지요(요복 8:53~58). 야콥은 꿈에서 하나님을 뵀고 야뽁 강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기도 했습니다.

구약 광야시대로부터 왕국 초기까지 언약궤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거나 머물러 있었습니다. 모쉐는 특히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직접 율법을 받으면서 하나님과 '대면'했지만 얼굴을 뵐 수는 없었고 영광 앞에서 대화를 한 셈입니다(출 33:9~11, 18~23).

모쉐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뵙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직접 목격했지요(출 24:9,10). 또 온 백성이 시내산의 빽빽한 구름과 엄청난 나팔소리 가운데 직접 강림하신 하나님을 두려움 가운데서 뵙기도 했습니다(출 19:16~20). 이 나팔소리는 예수님의 재림 때도 울리게 됩니다(코린토A 15:51, 테살A 4:16). 

하나님의 영광은 흔히 특별 인사를 고르고 택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실 때 성령님의 기름부음으로 나타납니다. 광야 시대 이후부터 그렇습니다. 지도자/장로/사제/판관/왕들이 그러했습니다. 판관기(사사기)를 보면 천사들을 통해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대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데온/삼손의 부모 등이지요.

다윋 왕은 자기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수시로 느꼈습니다. 가령 대언자/판관 슈무엘에게 차기 왕 후보자로 기름부음 받을 때, 골리앝을 때려 눕힐 때, 에폳을 입거나 사제/대언자를 통해 우림과 툼밈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때가 그랬지요. 그 아들 슐로모 왕은 성전 준공/봉헌식 때 제사를 드리면서 기도하자, 구름이 내려 와 성전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왕들A=왕상 8:10,11).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또 수많은 대언자들이 기름부음과 환상, 신탁 등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거나 느꼈습니다. 슈무엘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각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사야는 비전(환상) 속에서 하늘 성전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밖에도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한 침례 요한까지 하나님의 사람들, 대언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성경은 물론 영예/찬양으로서의 영광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영광은 먼저 인간이 하나님께 돌려야 하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으로 만족해야 할 존재로 비칩니다(요복 7:18, 8:54). 하나님은 영광을 당연히 홀로 받으셔야 할 존재이십니다.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곤 하지요(행전 12:23).

성자 예수님은 인간에게 직접 임하시고 함께 어울리고 함께 사시며 거하시며 보여 주신 하나님의 영광이셨습니다(이사야 40:5). 그분의 임재 자체가 우리에겐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권능의 말씀과 초자연적인 이적을 통해서도 수시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때에 따라 스스로를 계시하기도 하셨지만, 독생자의 영광을 숨기기도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불신과 오해를 앞당기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율법적 유대교적 단죄에 따라 예수님을 수시로 앞당겨 죽이려고 했던 탓이지요.

심지어 예수님의 동생들-야코보/요세/유다/쉬몬까지도 예수님을 의혹하고 때로는 조롱하다가 뒤늦게 주님의 죽음/부활 후에야 구주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요한의 기록(1:10,11)은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성령님의 권능을 통한 이적을 통해 계속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요한은 그런 이적이 행해질 때 영광을 자주 거론합니다. 카나 결혼식 연회 때 주님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때가 그랬습니다(2:11). 주님은 특히 라자로의 부활과 관련, "영광을 보리라"(요복 11:40)고 하셨지요.
그밖에 서신서 기자들도 영광을 퍽 자주 사용합니다만 여기선 일일이 다루지 않으렵니다. 예컨대 사도 파울은 남성은 하나님의 영광, 여성은 남성의 영광이라고 비유합니다. 
주님은 마지막 날 권능과 영광으로 오십니다(맑13:26).

주님은 특히 하늘에서 누리던 영광을 높은 산에서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 주신 적도 있습니다(마태 17:1~8, 뤀 9:28~36). 해보다 밝은 빛 가운데 둘러 싸여 모쉐/엘리야 등 셋이서 함께 하신 모습이었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관해 대화했고..영광에 가득 넘친 모습이었지요!
이 광경을 지켜 본 사람도 3명이었습니다. 바로 본 서의 기자인 사도 요한과 그 형인 사도 야코보 및 페트로였습니다. 이 셋은 서로 가장 친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의 '삼총사'와 같은 핵심 제자들이었지요. 이 사건은 고난/부활 이후까지 극비 사안이었습니다.

페트로/야코보/요한이 목도한 이 사건을 훗날 페트로는 이렇게 술회/증언합니다.

       "(이는)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장엄한 영광의 목소리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그를 나는 기뻐한다' 라고 왔던 때입니다." (페트로B 1:17)

주님의 이 변화(the Transformation)사건은 아마도 현지 나자렡에 가까운 타보르 산에서 일어나지 않았나 추측들을 하지요.
이처럼 복음서 기자들과 제자들은 주님과의 공 사역과 고난, 부활을 통하여 계속 주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은총과 진리

성자님의 영광은 아울러 은총과 진리가 가득했습니다. 이 두 낱말은 요한복음의 또 다른 주요 키워드입니다. 은총과 진리는 하나님의 대표적 속성의 양대 개념이지요. 요한은 본절 1:14뿐 아니라 17절에서도 양대 개념을 병행시키며, 16절에서도 은혜를 강조합니다. 아울러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서엔 진리, 사랑이라는 말이 자주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에만 사랑이 39회, 진리가 19회 나타나지요.
 
여기서 은총(카리스)은 은혜/은덕/총애 등으로 옮길 수 있는 낱말로 실은 구약의 '헤쎄드'(사랑/인자/인애)와 같은 개념입니다. 진리(히브리어 에메트)는 하나님의 참되심/신실성/진실성 등 언약과 말씀에 대한 충실성이 곧 진리입니다. '아멘'과도 같은 개념입니다.

특히 구약 시편과 잠언에서 인자/진리는 병행 개념으로 매우 자주 나타납니다. (시25:10, 26:3, 40:10,11, 57:3,10, 61:7, 69:13, 85:10, 89:14,40, 108:4, 115:1, 117:2, 잠 3:3, 14:22, 16:6, 20:28). 물론 딴 책(권서)에도 나오는 개념입니다만. 구약의 '인자'(loving kindness)는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신약의 다른 책에서도 그렇습니다. 코린토A 13:6, 에페소 4:15, 테살B 2:10, 페트로A 1:22, 요서B 1:1,3, 요서C 1:1. 

구약인들은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들을 곧 경건한 사람으로 해석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들을 하지요. 은총은 기쁨과도 같은 어원이며 카리스마로 불리는 '은사'와도 역시 같은 계열의 단어입니다.

은총은 우선적으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친절과 혜택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좋은 것은 다 담긴 말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사랑/헤쎄드 개념은 단지 윤리적 미덕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모든 좋은 것을 포함한 것입니다!

이 헤쎄드가 바로 신약의 아가페 개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헤쎄드/아가페의 총 결정체요 완성입니다(요3:16, 요서A 4:16).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몸소 땅에 오시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지내며 사시며 돌보시다가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주시고 되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그분의 영을 보내시어 온갖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것보다 더 큰 사랑의 표현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토록 사랑을 그리워 하면서도 단지 얄팍한 심리적 사랑, 또는 윤리적 미덕으로만 사랑을 국한시켜 비교학적으로 평가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크리스토를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 입니다.
또 믿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부분으로 오는 권능과 은사, 복과 형통, 번영과 건강, 치유 등을 단지 선입견과 편견 상 기분에 거슬린다고 하여 고사하고 거부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의 치유의 은총보다는 의약과 의술의 힘을, 하나님의 복과 번영보다는 자신의 자산/노력/재능/슬기 등을 의존하는 것을 더 '당당'하고 덜 치사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져가지요. 하나님 신세를 덜 지겠다는 생각..사실은 교만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오늘날 신자들 가운데 "내가 당당히 벌어 떳떳이 헌금하면 되지, 뭐하러 구태여 복을 받겠다고 십일조를 내냐? 복이야 주시면 받고 안 주셔도.." 식의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감은 서글픈 현상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사람은 걸인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구걸하면서 살아 가는 존재라고 묘사했지요.

아무튼, 우리 주님은 사람이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은총과 진리가 넘치는 분이십니다.

진리는 구약의 에메트 즉 하나님의 참되심과 신실성, 성실에 바탕을 둔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약속지킴이들 이상으로 언약과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창 9:12,17. 신명기 29:12, 예레미아애가 3:23 참조).

오늘날 성경 그대로의 진리를 믿지 않고 받아 들이지 않는 수많은 타협자들이 교계 안에도 날로 늘어 가지만, 성경은 통째 그대로가 진리이기에 구약-옛 언약과 신약-새 언약으로 불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이 폐해졌다고 해서 옛 언약을 무효화하고 안 믿는 성향이 있는데 주님은 구약을 폐하러 오신 게 아니라 완전히 성취하러 오셨고 성취하셨습니다(마태 5:17 ). 

율법이 폐해졌다며 율법을 무시하거나 정반대로 율법을 복음보다 높이는 기현상들이 종교계, 기독교권 안에 꾸준히 존속되고 있지요. 그런데 율법을 살펴 보면 사실 본래는 구구절절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살아 갈 길이 없기에 율법이 주어진 것이지요.

십일조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부담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그 배후에 있는 바, 인간을 복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심경을 몰라섭니다(말라키 3:10).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초기인 에덴 동산 때부터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더욱 더 인간이 언약을 지키나 안 지키나를 지켜 보시고 감찰 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십일조는 복의 언약입니다. 그것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우리의 기쁜 의지와 믿음에 달린 것입니다.

단,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존속됩니다.
율법이 폐해졌다고 해서 십계명이 폐해졌습니까? 모든 사람이 십계명을 안 지키고 산다면 지구상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십계명이 전혀 안 지켜져도 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엄청난 윤리적/인위적 재난이 올 것입니다! 단적으로 매일 남의 남편이나 아내를 뺏고 뺏기는 현상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율법은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이요 진리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진리를 넘치게 지니고 오셨고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대리자로 지금 교회 즉 우리-거듭난 신자들에게 와 계신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