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도자기의 이면(裏面) (뉴하우스)
그 날은 아침부터 들뜬 기분과 흥분을 가누기 어려웠다. 좀처럼 올 것 같지 않던 기회가 드디어 내게도 찾아 온 것이다. 네 아줌마 부대의 일원으로 내가 살던 독일의 옆 나라인 폴란드를 방문하는 날.
서로들 여권 지참을 확인한 뒤, 독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바바리아를 일찌감치 떠났다. 통독 후 아직 재건이 채 안 된 예전 동독의 황폐한 모습, 도로포장 상태 역시 현저히 달라 보이는 길을 지나면서, 뒷 좌석에서 별 생각 없이 아줌마들의 수다에 귀를 기울였다.
렌트카를 교대로 운전하며 한참을 달린 뒤에야 우리 일행은 국경에 도착했다. 지참한 여권을 검색 받고 나서 발을 딛은 곳은 출입이 통제된 땅. 보이지는 않으나 우리를 가로막고 서 있는 경계선을 허락 없인 건널 수 없다는 사실에 구속감을 느꼈다. 유럽 국가들 대다수를 여권 없이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데 익숙해진 탓이려니 했다. 그리고는 처음 보는 삭막한 검문소와 주변, 경비병들의 우중충한 군복과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딱딱한 매너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이 폴란드 여행은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렵사리 만난 기회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미국에서는 열 배 이상 고가로 팔리는 그 유명하다는 폴란드 도자기(Polish Pottery)를 본 고장에서 헐값에 구입할 수 있는 이 절호의 찬스에 부풀고 들뜬 마음을 비집고, 전혀 예기치 못한 모종의 우울함이 경고라도 하듯 슬며시 파고 든다.
신나게 달리는 차 안에서마저도 아줌마들의 수다도 귀에서 먼 듯, 창밖으로 눈이 간다. 이번 여행의 목적이자 내가 그렇게 원하던 도자기 그릇 샤핑의 즐거움 대신,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황막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땅의 모습에 정신이 산만해지고 가슴이 저려 온다.
과연 얼마의 세월을 되돌려야 내가 본 이곳의 모습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나치와 공산권 치하에서 너무 오래 바깥 세상과 절연됐던 탓인지, 문명의 이기라곤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특히 수도 바르샤바와는 멀찍이 떨어진 도시여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하여튼 일부러 찾아 올 이유라곤 별로 없는, 오지 중에서도 오지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명품 도자기 샤핑이라는 유일한 목적 아래 미국인들의 출입이 잦은 곳이어서 이러구러 나도 그 대열에 끼게 됐다.
이윽고 도자기의 본 고장이라는 볼레스와베츠(Bolesławiec, 독일어명 '분츨라우') 타운에 도착했다. 주변의 보브르 강, 크위사 강에서 나오는 흰 찰흙 덕분에 자그마치 7세기부터 도자기를 만들고 17세기엔 이미 명물이 된 도시란다. 그런데도 아마 공산 치하에서는 거의 전혀 빛을 못 본 거 같다.
폴란드를 대표하는 볼레스와베츠 도자기는 내추럴한 물감을 손으로 일일이 칠하여 구워 내며, 실용적이고 튼실하기 이를 데 없으면서도 화려한 색상과 디자인이 처음에는 부담스러워도, 점점 빨려 들어가게 되는 매력이 있어, 특히 미국인과 독일인들 사이에는 유난히 인기가 높다.
여기저기 띄엄띄엄 상점들이 서 있는 동네에 들어서기까지 삭막한 도로 주변의 암울함은 전혀 예상치 못한 채 찾아 온 손님이라도, 주차를 하자마자 뭔가 하나라도 얻어 내려고 달려 드는 아이들은 예상하곤 한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주로,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 한다는 콜라와 먹을 것을 준비해 건넨다. 하지만 우리 일행이 이 도자기 타운을 방문했을 즈음에는, 아이들이 조직화되어 보이고 훨씬 약은 수법을 터득했는지 적어도 20살은 됐음직한 청년이 아주 어린 소년들을 몰고 다니며 돈을 요구한다.
배고픈 아이들이라 생각해서 사람들이 준비해 간 샌드위치나 미국산 콜라엔 이미 시큰둥한 표정들이다. 한 때는 콜라캔 하나에 좋아 어쩔 줄 몰랐던 아이들이라는 소문이 더는 진실이 아니었다. 이들이 사는 환경은 퍽 오랜 세월에 비해 변모한 기색이 전혀 없어 보이는 반면, 패를 지어 여기저기 몰려 다니며 구걸인지 협박인지 구별이 안 되는 이들의 행패는 먼저 다녀온 일행이 전해 준 정보와는 현저히 달라, 우리 모두를 당황하게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만도 3시간 이상 걸리고 늘 행동을 같이 해야 하므로, 시간 절약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안 되는 일행이었다. 하지만, 들러야 할 첫 상점이 있는 한적한 장소에서 순식간에 눈 앞에 벌어진 상황에 우리는 언뜻 대책이 서지를 않았다. 어린 소년들을 거느린 청년이 우리 차를 기웃거리며 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미국산 먹거리에 눈이 돌아가는 천진난만한 동심으로 내미는 손은 이미 아니었다. 공포감을 조성해 가며 은근히 협박을 하는 이들의 수법에 아줌마들은 어쩔 바를 몰랐다.
이런 광경을 목도한 순간, 도자기 구매의 꿈은 내겐 깨져 버린 환상에 불과했다. 눈 앞의 상황이 속에 있는 보호본능을 자극해 풀가동하기 시작했다. 일단은, 다른 아줌마들은 샤핑을 보내고 혼자 남아 차를 지키기로 한다. 동행인 윗집 아기엄마는 이도 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그녀마저 떠나 보내고, 나는 마치 맹견 저먼 쉐퍼드(German Shepherd)라도 된 양 눈을 부릅뜨고 팔짱을 낀 채 차 근처에 서서 이들을 주시한다.
이들과는 말도 통하지 않는 사이이건만 서로 충분히 눈치껏 마음을 읽는다. 그들은 샤핑하러 오는 아줌마들의 심리를 아주 잘 아는 것 같았다. 이 먼 길을 와서 차를 지킨답시고 샤핑은 포기한 채 버티고 서 있는 이 도도한 여자가 샤핑의 유혹을 얼마나 억제하는지 두고 보자는 듯 견제하는 눈치다. 과연 언제까지 돈 한 푼 안 주고 견디나면서 신경전을 벌인다.
나는 천성적으로 겁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가끔 이런저런 위기 상황에서는 무모함 내지는 보호본능이 겁 먹을 틈 조차 없이 튀어 나오는 자신을 잘 안다. 그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네 아줌마 일행 중 유일한 동양인인 데다 키도 가장 작고 몸도 가녀린 나다. 말 수도 가장 적은 편이다. 드센 성품과는 거리가 먼, 비교적 조용한 성품이고, 혼자 따로 있는 것을 얼마든지 인조이 하는, 특유의 내성적 성향의 사람이다.
그런 나로서 일행이 예측하지 못한, 용기백배하다 못해 과격해 보이기까지 한 돌발적인 행동에, 방금 떠난 윗집 아기엄마의 표정은 질리기라도 한 듯 했다. "그렇게 겁 없는 너의 모습은 처음 본다.”라고 기막혀 한다.
상황이 이쯤 되다 보니, 어린아이처럼 신나고 들뜬 기분은 사라진 지 오래다. 문화 혜택의 결핍 속에 가난하게 사는 이들의 모습에 가슴 아파 하던 측은지심도 거품처럼 꺼졌다. 배움과 꿈 속에 살아가야 할 나이의 소년들과 이들을 끌고 다니는 청년의 모습에서 희망 대신 절망을 본 내게선 웃음도 엷은 미소도 사라졌다. 누구보다도 때가 덜 묻은 심령이어야 하련만 너무 어린 나이에 벌써 악의 쪽에 서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이와 국적을 불문하고, 물질의 필요 여부를 떠나 악의 본질을 보는 듯 해, 동정 대신 슬픔에 가슴이 멘다.
그 때 무엇 때문에 그리도 강렬하게 반응했고, 무엇을 대적했고, 무엇을 정확히 보호하려고 했는지 나도 잘 모른다. 단지 속에서 꿈틀거리는 모종의 본능에 대한 자연적 순응일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차창 밖으로 본 그들의 열악한 환경을 전제로 속에서 만들어 낸 이 땅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이 큰 오산이자 착각이었음을 시인하고 수용하는, 유일한 나만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물질문명으로 치장됐으나 속에 감추인 인간의 모습에 나는 늘 민감하다. 내가 물질문명의 최첨단 속에 살고 있기에 그렇다. 부자들이 가진 물질의 풍요보다는 그들의 영적 빈곤이 눈에 잘 띈다. 외모가 잘 나고 출중한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도 늘 붙어 다니는 그들의 교만이 잘 보인다.
그러나 그 흔한 물질문명을 누리지 못하고 철저히 벗겨지고 빈곤한 이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기회와 누리지 못함에 대한 측은한 인상 때문에, 그들 나름, 내부의 정신적 영적 빈곤의 실상을 보지 못햇던 것이다. 자신들을 감출 고상한 그 무엇 하나 없어 보이는 약한 이들에게서, 사람의 악한 본질이 오히려 더 적나라하고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사실 앞에 나는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것도 거리를 헤매고 다니며 염치불구하고 남의 것을 요구하고 빼앗으려는 이들이 아주 어린 아이들이라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다. 물론 이들 뒤에 숨어 조종하는 어른에게 이용 당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여지 없이 드러나고만 내 생각과 판단의 오류에 씁쓸해 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도대체 누구를 불쌍히 여기고 무엇 때문에 측은지심을 가졌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가슴이 그리도 아팠단 말인가? 내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그릇이라는 물질은 쉽게 포기할 수 있는데 저들에게 있지 않은 물질이나 있으면 좋겠다는 그런 집착은 왜 끌어 앉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 내가 불쌍히 여기고 저들에게 있어야 한다고 믿는 물질문명의 혜택을, 나는 나의 그릇보다도 먼저 포기했어야 한다. 그래야 저들의 진정한 빈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저들의 가난을, 물질문명의 결핍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오히려 저들의 영적 빈곤을 보아야 하는 눈을 가리다니 참 어이가 없다. 하나님 앞에 저들의 영혼이, 저들이 소유하지 않는 물질보다도 가치가 없단 말인가. 저들에게서 보이는 인간의 추악성이 물질의 궁핍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지 않나 말이다.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을 아는 방편을 빼앗긴 세대가 남긴 유산인가보다. 주변에서 보는 황폐함이 주는 우울함 못지 않게 이 곳에 사는 사람이 풍겨 내는 악취가 나를 무척 맥 빠지고 우울하게 하는 날이었다.
간혹 집적대며 돈을 요구하는 그 청년에게 무표정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노우!’하는 내 목소리에 나도 모를 힘이 실린다. 그는 내 눈치를 본다. 내 주변을 맴돌며 차 안을 기웃대며 무언의 견제를 한다.
대신, 나는 이들 속에 있는 악의 진상이 나를 넘어서고도 남음을 알기에, 기도는 본능적인 행위다. 내가 잠시 한 눈이라도 팔면 이들이 우리 차를 번쩍 안고 갈 듯 기세를 부리는 동안 얼마나 무언의 실랑이를 벌렸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더는 못 버티고 이들이 슬그머니 없어진 후에나 나는 일행이 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한동안은 어느 물건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사려고 맘 먹은 그릇들이 별로 소중해 보이질 않는다.
우리 일행이 차를 타고 좀 더 번화한 지역에 있는 매장으로 옮겨 가니, 거기는 아예 경비원이 고객들이 주차한 차량들을 지키고 있었다. 비로소 샤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일행은 고객용 손수레 하나 없는 매장에서 무거운 그릇을 박스에 담아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며 샤핑을 해야 했다. 물건도 제대로 진열된 것이 아니라 들쭉날짝이다. 하다 못해 바닥에까지 널려진 그릇이 즐비하다.
사려고 골라 담아 놓은 박스에서 남의 물건인지 모르고 또 골라 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 무질서하고 모든 게 뒤죽박죽인, 혼란스런 상황이니 누구를 탓하겠나. 분명히 일부러 6개를 산 접시를 하나가 모자라는 5개만 내가 소유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너무도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 사람임을 절감하는 날이다.
둘러 둘러 타운을 벗어나는 길목에 있는 마지막 상점에 들르기로 한다. 상점 옆에 붙은 자그마한 주차장엔 경비원이 당연히 없다. 일행 넷 중 둘씩 교대로 상점에 들어가고 나머지 둘은 차 안에 남기로 했다.
뒷 좌석에 앉아서 무심코 바라본 차 거울 속에 거대한 물체가 눈에 띄고, 그 움직임이 수상하다. 농장에서나 쓸 법한 농경기 같은 큰 트랙터가 좁은 주차장에 제대로 주차도 안 한 상태로 대각선으로 길을 향해 서 있다. 비로소 머리를 돌려 뒤를 보니, 어마어마한 높이의 운전석에 앉아 있다가 눈이 마주친 자그마한 남자 노인의 모습이 트랙터와는 무척 대조적이다.
그런데 이내 속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 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 보이는 대형 트랙터와, 우리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운전석 위 노인의 눈빛이 왜 나를 불안하게 하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본능적으로 기도하게 할 만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서로 흘금흘금 쳐다 보다, 우리 팀이 교대를 하고 우리 차가 마지막 도자기 상점을 떠날 때는, 그 의문의 트랙터와 노인은 사라지고 없었다.
나의 첫 폴란드 나들이는 이렇게 몇 점 도자기 구매로써 무사히 끝났다. 아마도 이튿날 접한 소식이 아니었더라면 본토까지 가서 싸게 사 온 도자기 그릇 감상에 빠져 그 날 일어난 일은 기억 속에서 쉽게 사라져 갔을 것이다. 이 여행이 나에게 갖다 준 고뇌도 잠시요, 일상으로 되돌아가면서 저절로 잊었으련만, 여행의 여운과 후유증이 그리 쉽게 끝날 것이 아니었다 보다.
영국에서 미니밴을 타고 장장 11시간을 걸려 같은 타운에 샤핑을 온 6명의 미국 아줌마 일행이 샤핑을 마치고 가는 길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른 같은 상점에도 들렀다고 한다. 워낙 작은 상점이라 잠시 들렀다 나온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미니밴과 여섯 아줌마가 하루 종일 샤핑한 그 많은 그릇들과 두고 내린 가방에 있던 돈과 여권을 순식간에 몽땅 털렸단다.
오도 가도 못하는 이들 때문에 결국 영국에서 남편들이 날아와서 겨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하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다.
나도, 같은 날 그 자리에 있었기에 참으로 등골이 서늘한 이야기지만, 나는 그 큰 미니밴을 그렇게 쉽게 무엇으로 끌고 갔을지가 더욱 궁금해졌다. 평소 눈에 익은 큰 견인용 트럭이 존재하는 동네가 아니기에 더 그렇다. 순간적으로, 우리의 차가 작은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들이닥쳤던 트랙터가 떠올랐다. 비록 견인차는 아니더라도 웬만한 차는 충분히 끌고 갈 수 있는 크기와 힘이 있는 기구임에는 틀임이 없다.
내 눈으로 직접 본 건 아니지만, 떨쳐 버릴 수 없던 불안감이 되살아나면서 어떻게 그 미니밴이 그렇게 쉽게 빨리 사라질 수 있었는지 그 광경이 상상의 눈 앞에 펼쳐지면서 퍼즐이 맞아 들어 가는 기분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이들의 대담하고 악랄한 고도의 수법에 경악한다. 역력하게 골이 패인 그 노인의 얼굴은 평생 고달팠을 그의 삶을 짐작하게 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이미 청년 및 어린 졸개들과 한 바탕 벌인 실랑이로 인해 이 노인 역시 나의 측은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도자기 그릇에 대한 나의 애착심은 이미 국경 너머 사라진 지 오래고, 저들이 누리지 못하는 물질 문명에 대한 안타까움도 다 내려 놓았기에, 그 날 오전과는 사뭇 다른 마음 자세로, 우리 일행의 안전과 무사 귀가에 더 신경을 쓸 수 있었다.
아마도 영국서 온 여섯 아줌마는 이와 같은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환경에 익숙한 나머지, 아니면 감히 여기저기서 호시탐탐 관광객의 호주머니와 물건을 노리는 고단수의 수법을, 이런 초라한 동네에서,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감히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지 모른다.
내가 사는 물질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곳이든, 내가 방문한 황폐하기 이를 데 없고 문명의 이기를 찾아보기 어려운 곳이든 악은 여전하고, 빈부 노소를 불문하고 사람은 여전히 악을 행하고, 자유로운 세상이든 억압된 세상이든 가리지 않고 세상은 여전히 악을 뿜어 낸다. 내가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고 가슴 아파해야 할 대상은 오지의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어디를 불문하고 잘 나고 못 나고를 떠나, 예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임을 절감한 나의 여행이었다.
그 후로도 몇 차례의 이사를 잘 견뎌 준 나의 폴란드 도자기들 중 큰 보울이 이번 이사로 박살이 나고 말았다. 조각 난 그 그릇을 보고 있노라니, 처음 우리 집으로 갖고 온 날 내 속에 일어난 번민과 나의 무모했던 행동이 떠올라 잠시 회상해 본 이야기다.